누아르(noir)
w 려안
: 검은. 음산한. 어두운.
증오는 검다.
증오는 강하다.
증오는 누아르의 원동력이다.
작년 봄, 나는 너를 처음 보았다.
밖은 한참 꽃이 피고 사람이 붐비는 시기에 나는 방안에 혼자 있었다. 원래 형들 보다 부지런히 일거리를 찾아 하는 편이라 집에는 붙어있을 겨를이 거의 없는 나인데, 그 날은 팔이 다치는 바람에 하루종일 혼자 누워만 있었다. 잠을 자는 것도 질리는 무렵 거의 사용하지 않던 핸드폰이 울렸다. 호석이형이다. 나는 다치지않은 왼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 정국아, 호석이형인데
" 네 말씀하세요 "
- 진짜 미안한데, 형 방에서 뭐 좀 갖다줄 수 있어?
뭔데요? 나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사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나는 일을 나갈 때 빼고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아르 조직원들과 놀러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참 답답하던 참인데 잘됐다고 생각하며 구석에 처박혀있는 회색 후드를 뒤집어 쓰고 집을 나섰다. 봄 바람이 불어오자 간만에 느껴지는 여유에 기분이 묘해졌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출입 통제를 거의 안한다는 호석이형의 말에 나는 여전히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일반 경찰들과 형사들이 붐비는 복도를 저벅저벅 걸었다. 혹시 오다가 떨어트린 건 없는지 들고왔던 서류뭉치를 살피는데 그때 누군가와 부딪히며 들고있던 종이들이 그대로 바닥에 날렸다. 다행히 세게 부딪히지 않은 건지 몸이 조금 뒤로 밀리는 것이 다였지만 멀쩡한 나와 달리 부딪힌 사람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 괜찮.. "
괜찮냐고 물으며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곳이 경찰서라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얼굴이 보이지않게 고개를 푹 숙였다.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떨어진 거..중요한거 아니에요? 그녀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똑부러지면서도 예쁜 미성이었다. 내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흘러내리는 생머리를 쓸어넘기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 종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그렇게 이뻐보이던지, 나는 그녀를 도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 저기.. "
" ... "
어느새 정리가 끝난 그녀가 양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벙찐 나에게 내밀어보였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내가 급하게 서류를 받아들었고 다시 고개를 푹 숙여 후드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감사합니다.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는 예쁜 웃음 소리로 답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그녀도 어색하게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곧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호석이형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 정국...어, 선배 여기서 뭐해요? "
" 아..또 정신없이 가다가 이 분이랑 부딪혀버렸지 뭐야.. "
" 내가 앞 잘보고 다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여튼 못 살아.. "
둘은 꽤나 친해보였고 그런 둘의 모습을 보자 얼마전 누아르의 뒤를 조사하는 여형사가 있다는 윤기형의 말이 떠올랐다. 윤기형이 말한 형사가 이 여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호석이형에게 급하게 서류를 떠넘기고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등 뒤에서 고맙다는 호석이형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런 호석이형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호석이형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싶다. 또 보고싶다.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았다. 그녀를 처음 본 그 날 이후, 나는 거의 일주일 내내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야했다. 수시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거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우리의 뒤를 캐는 형사라면 나중에 대면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결국 내 걸음은 엄한 곳으로 향했다.
" 괜찮다니까? 나 이래뵈도 형사야 "
" 형사이기 전에 여자겠죠. 데려다 줄게요. "
" 으휴, 정호석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경찰서 주위를 서성이다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벼락으로 몸을 숨기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호석이형과 함께였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둘은 행복해보였다. 호석이형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말에 아쉬운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던 호석이형이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 선배..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미안해서 어쩌죠 "
" 내가 괜찮다고 몇번이나 말했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어서 가봐 "
" 진짜 조심히 가야돼요. 알겠죠? "
" 애 취급 한다 또. 바로 코 앞인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얼른 가봐! "
호석이형이 그녀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그녀를 뒤따라갔다. 저번에 나와 부딪혔을 때도 그랬지만, 그녀는 꽤나 덜렁거리는 성격 같았다. 높은 힐을 신은 그녀는 몇번이고 넘어질 고비를 넘겼고 그럴 때 마다 나는 움찔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것을 애써 참았다. 그렇게 십분 정도 걸었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을 때 그녀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탓에 급하게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 ... "
그녀는 누군가 따라온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한참을 뜸들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곧 그녀는 새로 지어진 듯 깔끔한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갔다.
그 날. 그녀를 따라가는게 아니였다. 그녀의 집을 알게 된 이후 나는 항상 일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제서야 다시 숙소로 걸음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고칠 수 없는 습관 처럼 반복되었다.
외로울 때, 힘이들 때, 허전할 때. 그럴 때 마다 나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중,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자 왠일로 형들이 거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국아! 이리와봐! 나를 부르는 태형이형의 목소리에 방으로 가던 걸음을 옮겨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김여주를 납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표정관리가 되지 않고있었다.
지긋지긋한 조직 생활은 나 하나로도 족했다.
그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은 절대 보고싶지 않았다.
김여주가 행복하길 바랬다.
***
아침 햇살이 거실로 가득 들어왔고 덕분에 나는 부신 눈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오늘도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이른 시간에 기상을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뻐근한 느낌에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그제서야 내가 덮고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교복? 내가 왜 교복을 덮고 있는거지? 내가 덮고있던 교복 마이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살피는데 '전정국'이라고 쓰여있는 명찰이 눈에 띄었다.
" 대체 뭐지..내가 언제 이런 걸.. "
혼자 교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거실을 향해 걸어오는 듯 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곧 하얀 교복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해치고 훤히 가슴팍을 드러낸 전정국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놀란 나는 눈을 질끔 감고 다시 자는 척을 했다. 금세 조용해진 주위를 살피기 위해 살짝 실눈을 뜨자 언제 왔는지 전정국이 나를 무표정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내가 헉 소리를 내며 놀라자 전정국이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 아까 눈 뜬거 다 봤거든 "
그렇게 말하면서 전정국은 빠르게 와이셔츠 단추를 채웠고 곧 나를 덮고있던 교복 마이를 집어들었다. 덕분에 휑하니 드러난 몸을 웅크리며 살며시 그를 올려보았다. 저기..그거 너가 나 덮어준거야? 내가 묻자 전정국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이내 교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전정국이 현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정국! 내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이름을 부르자 전정국은 여전히 묵묵함을 유지한 채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 학교가는거야? 밥도 안먹고가? "
" ...어. "
어. 그게 끝이야? 나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벙쩌있는데 전정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다녀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쾅하고 닫히는 문에 허무한 걸음을 돌렸다. 어린 놈이 반말을 찍찍하지를 않나, 사람을 아주 개무시하네. 빈정이 상한 내가 씩씩거리는데 그때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나는 무작정 주방으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큰 사이즈인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기대를 주던 겉모습과는 달리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결국 구석구석 주방에 있는 모든 음식이란 음식은 모조리 꺼내놓고 요리를 시작했다.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만. 있는 재료로 만들어야 하다보니 정체불명의 찌개가 완성됐다. 좀 더 맛을 내기 위해 불을 강하게 키우고 지글지글 끓이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탄성소리에 몸을 빙그르르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김여주,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언제 온건지 김석진이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말했다. 어...., 김석진의 탄탄한 가슴팍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는 탓에 버벅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놈들은 왜 다들 윗통을 까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 야, 완전 물건이네. 이정도면 누아르 최고 능력인데? "
" 어..? 어..이것 좀.. "
김석진이 헤드락이라도 걸려는 듯 내 목에 긴 팔을 두르더니 이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그런 다음 김석진은 내가 쥐고있던 숟가락을 뺏어 들더니 찌개를 한숟갈 떠먹었다. 와, 진짜 맛있다. 얼마만에 먹는 집 밥이냐. 신이난 김석진과 달리 나는 자꾸 눈이가는 그의 맨살에 민망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기 바빴다. 둘이 뭐해요. 아직 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석진이 내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빼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 맛있는 냄새나는데.. "
김태형이 눈꼬리를 접어 웃더니 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근데, 왜 너까지 윗통을 벗고있냐고.
대체 여기가 누아르 아지트인지 아마존 밀림인지.
" 잘먹겠습니다! "
음식냄새를 귀신 같이 맡은 누아르 놈들이 하나둘씩 주방으로 모여들었고 나를 포함한 7명이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정호석과 김남준을 제외하고 남은 4명은 모두 윗통을 깐 채로 밥을 먹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않아 시선을 밥그릇에만 박고 밥을 먹는데 김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말했다.
" 야, 너네 옷은 좀 챙겨입고 나오지 "
" 갑자기 무슨 옷 타령이야, 새삼스럽게 "
그런 김남준의 말을 민윤기가 받아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섯 쌍의 눈동자들이 나를 향했다. 내가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을 하며 밥을 먹는데,
" 설마 쟤를 여자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
민윤기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는 아니잖아, 응? 내가 화를 속으로 삼키는데 김태형이 말했다.
" 이렇게 이쁜 남자가 어딨어요 "
" 여기 들어온 이상 남자,여자 따지면 불편해서 못 살아 "
김태형의 장난끼 서린 말에도 민윤기는 칼 같이 방어를 했다. 나한테 악감정 있는게 분명해. 내가 꾸역꾸역 밥을 삼키는데 순간 정호석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색함이 감돌았다. 내가 먼저 눈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데, 정호석이 다 먹지도 않은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저 먼저 출근할게요. "
그렇게 정호석의 축쳐진 듯 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갈 때 쯤,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막 현관문을 열려는 그의 손목을 겨우 낚아챘다. 정호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키가 작은 나를 내려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눈은 평소 그와는 달리 슬픔에 젖어있었다. 호석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곧 정호석의 초점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어 머리를 굴리는데, 정호석이 체구가 작은 나를 덮썩 껴안았다. 당황한 나는 그를 밀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 호..호석아.. "
" ......잠깐만. 이러고 있자. "
독자님들 암호닉 확인하고 가세요~'ㅅ'
오늘진짜 분량 창렬~~(숨는다)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 다음 화는 분량깡패 약속드려요!!ㅎ
사실 내일 올까 했는데, 독자님들이 궁금해하시던 정국이 얘기 들고오려고ㅠ_ㅠ!!
다음 화 부터는 여주의 조직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거 같아요 ㅎㅅㅎ!!
연이/딘시/진리/봄/민슈가/비솔/설렘/윤기모찌/0324/설탕맛/눈부신/넬스/젤라또/꽃비/누아르/맑공/라 현/연애학개론/태태뿡뿡/마끼/숲/명언/민트/권지용/햇살/융기맘/민면/미스터/망공/토순/윤기난다/호석이가스파이/망개/민군주님/준회/회색/젤리/다우니랑꾸기/맹고/핑퐁/꿈/프리/인영/펜잘규/비글태/카페모카/1013/곱창/통밀/윤기야/오골계/침슙/여명/디즈니/보라색양말/흑슙흑슙/엽떡/딸기/복동/꾹이/0901/미로/핫초코/넌내밤/작가님하트/핑슙/네 이 청년/나라세/비빔밥/뷔틀뷔틀/애플덕/8ㅅ8/산들코랄/혀니츄/론/공감/김데일리/꾸꾹이/내마음의별로/인사이드아웃/흑슙/김태태/코나/돈까스/지니/됴종이/꽃잎놀이/초딩입맛/하루/토익/어항/윤민기/판도라/둡우/베네/아카시아/밀짚모자/뽀삐/움파파움파/3시9분/아오네코/꾹꾹이/연두/구구콘/들레/반지/나니꺼/요플레/알매V/손뚱땡이/미니언/물고기/전기장판/혜자/해열제/플레어/장니사탕/글로스/치킨/선블록/김태극/윤/시걸쓰/다이어트중초예민/보솜이/콩알/빠밤/태형워더/솜지/따슙/미자탈출/백설/인생베팅/사자/꽃님/통밀/어썸/슈간데여/두둠칫/뽀로로/화양연화/꼬깔콩/응캬캬/코튼캔디/아기/외로운쿠키/예봄비/요다/디기/슝슝이/암어본씨걸/달달한설탕/골드빈/깨진계란/이인/발콩달콩/효인/대머리독수리/빵야빵야빵야/이사/패패/러블리한 윤기/침침아이삐왔어/소금/무민/당긴윤기/징징이/뿌Yo/헤이호옹/EH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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