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연애
01
연애말고 결혼
"너 진짜 왜그래?"
얼마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앞머리가 자꾸만 내려오는 것을 짜증스럽게 쓸어올렸다. 그 앞머리 만큼이나 짜증나게 구는 민윤기는 가만히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대체 내 말을 듣고는 있는건지 참고 참던 화가 결국 터져나왔다. 아무리, 아무리 오랜 기간 만나서 편하다 해도 나는 얘가 이럴 때 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민윤기는 이기적이어도 너무 이기적이다.
"너.. 너 내가 만만하지? 헤어졌다가도 다시 찾아와서 만나달라하면 매번 만나주니까 내가 우습지 이젠?"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너 진짜 재수밥탱이야, 알아?"
도끼눈을 부릅뜨며 테이블을 탕탕치니 그제서야 민윤기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꽉 쥔 내 주먹을 노려본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화가 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집에서 나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어나서 나가려는 내 손목을 붙잡는 민윤기다.
"놔라."
"앉아."
"놓으라고 했어."
"앉으라고 했어."
그렇게 말하면 쫄 줄 아나보지? 손에 힘을 빡 줘서 민윤기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민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더 빠르게 집 밖으로 나왔다. 도어락이 다시 잠기기도 전에 빠르게 문을 열어재끼는 소리가 났고 나는 빠르게 엘레베이터에 탔지만, 민윤기에 의해 엘레베이터 문을 닫을 수 없었다.
"내려."
"싫다고 했잖아, 나 집에 갈거야."
"왜 또 어리광부려, 나 작업할 때 주위에 신경 못 쓰는거 알잖아."
"넌 그게 문제야..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나도 일할 때는 그러니까. 근데 내가 그걸 바란거같아? 너 나랑 일이년 만났어?"
"내려봐."
이번엔 아까와 다르게 부드럽게 내 손목을 쥔 민윤기가 엘레베이터 밖으로 나를 끌어냈다. 그 앞에서 또 떽떽데려는 나를 끌고 집으로 다시 들어온 민윤기가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더 말해보라는 듯이 쳐다본다. 이렇게 싸우는것도 이젠 지겹다 지겨워.
"이렇게 나 병풍처럼 놓을거면 부르지를 마, 나처럼."
"...."
"처음에는 너 그런 성격이 좋아서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젠 아니야. 내가 눈이 삐었었나봐~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었지. 너 그럴 때마다 아주 재수 밥탱이에 머리통에 꿀밤을 아주 백만대 놓고 싶어, 알아? 아냐고?!"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넌 맨날 미안해, 어?"
"너가 늘 받아주니까 그래서, 응? 너가 옆에 있어야 가사가 잘 써진단 말야."
"...아주 입만 살았지? 어? 진짜 너 재수없어 민윤기.."
계속해서 궁시렁대는 나를 끌어안은 민윤기가 등을 토닥토닥 해준다. 흥분해서 벌렁벌렁 뛰던 심장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민윤기는 어쩌면 ㅇㅇㅇ 사육사 자격증을 따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오늘도 이렇게 져주는거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져주는거라는데 억울해 죽겠다 진짜.
"다했다."
노트북을 닫은 민윤기가 기지개를 쭉 편 뒤 바닥에 누워있는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똑같이 옆으로 누웠다. 테이블 안에 다리만 넣어논 채로 마주보고 있는 우리 모습이 너무 웃겨서 비식비식 웃었다. 내 코를 톡 친 민윤기가 뭐 좀 먹자는데 아직 화가 덜 풀려서 자꾸만 빠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입도 꾹 다물고 있었다.
"안 먹을거야?"
"..."
"그럼 나 혼자 먹어야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짜장면이나 시켜먹어야지."
"..."
"요즘엔 하나만 시켜도 배달 잘 해줘서 좋아."
"짬뽕."
"뭐라고?"
"짬뽕 시켜줘."
킥킥 웃던 민윤기가 전화기를 들어 음식을 주문했다. 아니, 아침부터 밥도 못먹고 여기와서 이 궁상 떨고 앉아있었는데 배가 안고프겠냐고. 민윤기 진짜 싫다. 아오 얄미워.
"잘 먹겠습니다!"
"오냐."
내 째림에 민윤기는 젓가락을 똑 쪼개며 짜장면을 비볐다. 매콤한 짬뽕 국물까지 후루룩 들이키고 나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뒤로 드러 누웠다. 먼저 다 먹은 민윤기는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상을 치웠다. 그릇까지 내놓고서는 이 닦자며 누워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귀찮아서 흐물흐물 다시 바닥으로 드러누우려고 하니 번쩍 안아들어 욕실로 가 변기 뚜껑위에 앉혀준다. 삐쩍 말라가지고 힘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어.
"귀찮아~"
"이까지 닦아달라는건 아니지? 나이가 몇갠데"
"나이 얘긴 하지말자~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
"여자랑 남자는 다르지."
"아주 얻어 터지려고..!"
걷어 차려고 다리를 쭉 피니 발을 잽싸게 잡은 민윤기가 바닥으로 내 발을 내던진다. 나이가 몇갠데 어린애 같은 짓을 하냐며 자기 칫솔을 입으로 넣는다. 지는 철든 척하는게 아주 얄미워서 팔을 꼬집어버렸다. 다 닦고 침실로 뛰어가 드러누우니 옆에 앉은 민윤기가 머리를 쓰담쓰담 해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아까 미안, 너라면 이해해주니까.. 그래서 그랬어."
"...."
"미안해 ㅇㅇ야."
"그러지마.."
"...."
"속상하니까.... 으응..?"
대답 대신 이마에 쪽 하고 뽀뽀해주는 민윤기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 * *
"헐.. 진짜!? 와 대박 축하해!!!"
"지지배야, 너도 빨리 해야지!"
"몰라~ 민윤기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쫌만 늦어봐라 너 노산이야 노산"
"미쳤냐! 아직 5년이나 남았어 진짜, 말이라고 못하는게 없어 이 지지배는.."
중학교 동창 승아가 결혼을 한다며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를 눈앞에 흔들여보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 결혼한다는 말이다. 그 반지가 다이아던 큐빅이던 그게 중요한게 아니였다. 지금 남자친구를 만난지 6개월 밖에 안된 승아가 결혼을 한다는거다. 나는! 무려! 민윤기를! 6년이나! 만났는데! 부러워 죽을 것 같은데 아닌 척, 괜찮은 척하느라 애먹었다. 그러니까 나도 결혼을 하긴 해야되는데 말인데. 아니 뭐 딱히 엄청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니까 내 마음도 급해지는거다.
"진짜로 윤기씨가 아무 말도 안해?"
"몰라~ 작년에 내가 먼저 슬쩍 꺼내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였어."
"뭐래? 뭐라는데?"
"음, 왜이렇게 보채냐고.. 내가 너랑 결혼 안하냐구.. 그러는데 내가 뭐라해!"
"그래도 없진 않나보네!"
"말만 그렇지 없어보인다니까!!! 진짜.. 같이 살자는 말도 없고, 프로포즈는 무슨 그냥 지 일하기만 바빠!"
"한참 잘나가니까 그러지.."
맞다, 맞아. 민윤기는 작곡작사가다. 젊은나이에 한참을 배곯아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곡을 썼다.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나와 만나기 시작한 민윤기는 정말 다급해보였다. 그러면서도 연애는 느긋하게 했다. 그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었다. 일에 열정적이면서도 연애에는 느긋하게 몰두할 줄 아는 어린 나이의 민윤기는 그랬다. 그러더니 갑자기 2년 전 한 노래가 빵 뜨면서 아주, 아주아주 많이 바빠졌다. 그렇다고 나에게 소홀해진 건 아니지만 벌 수 있을때 바짝 벌어야한다며 작업실과 집에만 붙어있는 민윤기가 조금은 밉기도 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고, 나도 내 일이 있으니까 이해하려고 해도 섭섭하다. 권태기라면 권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민윤기는 그런다.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오랜 연애에 무뎌질만도 하다고, 그치만 우리가 그 정도에 서로를 놓을 사이가 아니라고, 너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건 상상 해본적도 없다고. 민윤기 말이 맞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 단지 절대적으로 우리 자체만 놓고 보았을때 조금 침체기일 뿐이지 남들이 봤을때는 전혀 문제가 없어보인다.
"너희는 너~무 비슷해."
"나도 알아!"
"서로 너무 드세! 너네 싸울 때 진짜 무서운거 알아?"
"알아.."
"그래도 6년이나 연애한거 보면 대단해.."
"싸울 때 무서운만큼 좋을 때도 무섭게 좋아하니까.."
"맞아, 눈에서 꿀 떨어지는거 자주 봤지.."
"으아아아 나도 결혼하고 싶다~! 그렇다고 재촉하고 싶지는 않아.. 윤기가 좋을 때 하고 싶어!"
"네네, 그러시겠죠. 그래도 너무 늦어지면 안된다! 너 이거봐 늙는거 봐라 하루 빨리 웨딩사진 찍어야 되지 않겠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승아는 축 쳐진 내 어깨를 토닥여줬고 나는 민윤기를 만날 시간이 다가옴에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려다준다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단다. 차를 끌고 민윤기를 태워 평소에 자주 가는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승아, 결혼한데"
"진짜? 빨리하네?"
"뭘 빨리해, 서른이면 적당한거지."
"아니, 6개월 밖에 안만났다며."
"그러게 서로 좋아 죽나봐 아주.."
조금 서운한 티를 내볼까 싶어 말 끝을 흐리고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하는데도 민윤기는 지 아이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괜히 심술부리고 싶어서 빨간불 앞에 브레이크를 확 밟으니 민윤기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해?"
"...."
"...조심해서 몰아."
식당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민윤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늘 먹던걸 먹고, 늘 가던 카페에가서, 늘 마시던걸 시켰다. 마주보고 앉은 민윤기가 그제서야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괜히 혼자 심술부린것 같고 어린애 같이 군 것 같아서 이제 그만 할까 했는데 또 쓸데없이 오기가 생겨서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언제까지 말 안할거야?"
"너가 말 안걸었잖아."
"...후, ㅇㅇ야."
"...왜."
"내가 너랑 결혼 안해?"
"...."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민윤기 때문에 더 속상했다. 다 알면서, 다 알면서 말이다.
"아주 입이 대빨 나와가지구 나이는 어디로 먹었어."
"하지마.."
"여기 휘핑크림 묻었거든?"
"내가 닦을거야!"
"어린애처럼 굴래 진짜.. 이거 누가 데리고가서 살아, 어? 나밖에 없지."
"말만.."
"야.. 진짜, 나 화낸다?"
"어디 말 좀 해봐."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놓고 팔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민윤기를 노려봤다. 그래 입이 있으면 말해야지. 민윤기 말이나 좀 들어보자고.
"작년인가.. 너가 결혼 얘기 꺼냈을때도 아까처럼 말했잖아, 너랑 결혼 안하냐고."
"어."
"지금 내가 너랑 결혼을 안하는걸로 보여? 자존심 상하는데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직접 말해줘야겠다. 나 제대로 돈 벌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어 ㅇㅇ야. 나 하나 살기도 빠듯해 응? 얼마 안있으면 이제 내 차 하나 마련해. 집도 내가 직접 마련하고 그래야 너 데려가서 살지.. 안그래? 오빠 속상하게 하네."
"...."
"나 너랑 결혼할꺼야, 결혼식장에서 내 옆에 서있을 여자 너 밖에 상상해본적 없어. 다른 사람은 상상도 안돼. 그게 아무리 젊고 예쁜여자라도."
"너 차 없어도 돼, 내 차가 니 차고 내 집이 니 집이지..!"
"진짜 나이 어디로 먹었냐 우리 ㅇㅇ가."
"아 코에 자국생겨!"
"어쨌든 너 나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 못 해."
"작사가라고 말만 번지르르 하지 아주? 다 풀린거 아냐.. 내년 되면 또 보챌거니까!"
"알았어 오빠가 돈 많이많이 벌어서 얼른 납치해갈게."
오늘도 민윤기한테 제대로 발렸다. 운전석도 민윤기한테 뺏긴 채 민윤기네서 잤다. 잠만 잤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