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11
w.규닝
11. 여름. 다른 여름
6월. 초여름에 접어들어 그 해 처음 맞는 폭염과 함께 남우현을 만났을 때 즈음에는ㅡ 쨍쨍한 햇빛이 싫어 모든 것이 불쾌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머리카락이 열에 데워지는 것 같아 싫었고, 밖에 나간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기력을 잃고 고개를 숙이게끔 만들어오는 더위도 싫었다. 학원엘 나가기 위해 들른 버스 정류장의 플라스틱 의자가 뜨거워 땡볕 아래 내내 서 있게 되는 것도, 등에 맨 백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져 열 배는 더 족히 상승하던 불쾌지수하며, 옆 사람과 부딪히게 됐을 때 오르는 짜증같은 것도 전부 싫어 하루하루가 최악이던 그 때, 초여름. 나는 여름이 마법을 부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에게 어쩌면 이렇게까지 불쾌함을 선물할 수 있는지. 그런 잡다한 생각들과 함께 온갖 짜증을 떠안고 도착한 학원에는 바깥 날씨보다 정확히 열 배는 더 짜증나는 사람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나는 녀석이 신은 양말도 싫었고, 손목에 걸린 시계도 싫었다. 아무리 시원한 음료라고 해도 녀석이 내게 주는 것만큼은 진저리가 날만큼 싫어 받아 들기도 싫었고, 내게 건네는 수고하라는 말도. 수업 중간중간 식사 여부를 묻는 녀석의 문자도 싫어 아마 그 때 쯤부터 내게 핸드폰의 전원을 죽여놓는 버릇이 생긴것일지도 모른다. 학원 속에서 그렇게 내 여름은 흘러갔다. 남들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상적인 속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비가 내렸다. 비는 한껏 과열되어 있던 아스팔트의 아지랑이를 잠재웠고 뜨겁게 달궈졌던 건물 벽을 식혀주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는ㅡ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어쩌면 시간은 조금 빨리 흘러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가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건가 싶기도 했다. 그제서야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여름은, 마법을 부리는 게 맞다.
남우현은 다음날 나보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사실은 직감이었다. 잔뜩 비를 맞으며 집에 도착해 잠에 빠졌던 새벽, 몇 시간 후에는 여분으로 챙겨두려던 마스크를 집어들고 한참동안이나 망설였었다. 만약 오늘 남우현이 감기에 걸려서 온다면. 이미 집어들었던 마스크를 베개 위에 판판하게 펴 보기도 했고, 이내 꾸깃꾸깃하게 접어버리기도 했다. 출근시간이 다 가까워져가도록 그것을 섣불리 가방 안에 챙겨 넣지는 못했다. 이것을 챙겨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새벽에 있었던 말도 안되는 일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겨우 지각은 면한 채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건, 기다렸다는 듯이 파티션 위로 쏙 올라오는 남우현의 얼굴이었다.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여분의 마스크를 반사적으로 구겨 쥐었다. 남우현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웃음을 참는 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남우현이 내 감기에 옮아버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부러 느리게 신발을 벗어 현관 앞에서 꾸물거리는 와중에 파악은 이미 끝마쳤으니까.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던 남우현의 목소리가 어제의 나처럼 푹 잠겨있었다.
"남우현씨도 감기야?"
직원 회의를 마악 끝마친 후, 녀석에게 묻는 원장선생님의 질문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확인사살이었다.
회의 내내 입을 틀어막고 마른 기침을 계속 하던 녀석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심한 목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녀석은 회의 중에도 의사 표현을 고갯짓으로만 대신했다. 그에 나는 쥐고 있던 여분의 마스크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남우현은 감기냐고 묻는 원장 선생님의 말에 그저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이 남우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별로 없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열'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렇잖아도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했던 마음에 불이 올랐다. 마치 남우현이 감기에 걸린 원흉이 나라는 것을 알고있는 모두가 나를 죄어오는 것 같은 느낌. 그런걸 아마, 죄책감이라고들 한다.
"어,어제 제가 먹던 커피를…"
"……."
"남우현씨가 먹어서…그런거같아요."
박 선생님이 이마를 짚어주는대로 눈을 꼭 감고있던 남우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선생님은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물었다. 어? 진짜?
"성규씨 커피 안마시잖아."
예? 멍청한 반문과 함께 마스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을 굳혔다. 성규씨, 언제부터 커피도 마셨어? 박 선생님 본인 딴에는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이 묻어나는 물음이었다. 내 쪽으로 눈을 돌렸던 남우현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휘어졌다. 그냥…어제는 마셨어요. 몇 초 후에나 떨어진 어물쩡한 대답이었다. 내 말에 남우현이 웃었다.
"정확히 언제? 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
"근데 미미씨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죠. 내가 커피를 마셨었나봐. 그래서 그걸로 옮았나봐요."
남우현은 감기 뿐만 아니라, 자꾸만 웃는 병도 같이 걸려 온 것 같았다. 말이라도 안하면 중간이라도 가지. 오히려 의심만 사게끔 만드는 변명과 함께 남우현의 얼굴에는 그 뒤로도 하루종일 웃음이 걸렸다. 내가 아이스티를 타고 있으면 어느새 뒤로 다가온 남우현은 제 것도 달라는 말과 함께 은근슬쩍 어깨를 부딪혀왔다. 더군다나 그것은 약과였다. 수업에 들어간 다음에도 어쩔 수 없이 복도를 드나드게 되는 상황에서 남우현은 왠만해선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비켜달라는 말을 너댓번은 듣고 나서야 억지로 눈을 맞추게끔 만든 다음에 물러선 남우현은 오늘도 수고하라는 말으로 바짝 약을 올렸다. 그러다가 잠시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말했다.
"나, 웃는 얼굴에 침 뱉을수도 있을 것 같아요."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하염없이 생글거리며 웃던 남우현이 턱을 괴었다.
"나 환자에요. 누구때문에."
"내가 했어요? 내가 했냐고. 그리고 그거랑 웃는 거는 상관없거든요. 그만 좀 웃지?"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해요. 자꾸 나는데."
"뭐가 웃겨서 웃음이 자꾸 나요?"
"미미씨한테 옮았다는 게 좋아서."
나는 그 대목에서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우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지워지질 않았고, 나는 바짝 약이 올라 품에 안고 있었던 참고서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두었다.
"별게 다 좋아. 누누히 말하고 있지만 남우현씨 변태 맞아요."
"어. 맞아요."
나도 몰랐는데, 그런가봐. 남우현은 한껏 잠겨 멋있지도 않은 목소리로 능청스러운 대답을 뱉었다.
"왜냐면 자꾸 어제…."
"그만. 거기서 더 말하면, 진짜."
"……."
"죽빵 날릴거에요."
예상대로 느낌이 좋지 않은 남우현의 뒷말을 댕강 잘랐다. 천연덕스럽게도 뒷말을 이어가려던 남우현은 내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고있는 입꼬리가 내려간 건 아니었다. 녀석은 나의 엄포에 더이상 말을 잇지 않는 것 대신 지겹도록 같은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다. 나는 책꽂이에 끼워 두었던 다른 참고서를 집어들었다.
"웃어도 날릴거에요."
힐끔 쳐다본 남우현은 역시나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기를 잠시, 갑작스럽게 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던 남우현은 어울리지도 않는 분홍색 마스크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았다.
"이거 쓰고 웃으면 미미씨 눈에 안 보이니까 괜찮지?"
죽어도 안 웃겠다는 말은 안 할 생각인가보다. 질린다는 눈으로 녀석을 보았는데, 남우현은 내 반응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녀석의 미열과 꼭 맞는 분홍색 마스크가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마스크는 어디서 나셨대요. 지금은 강의실에 두고 온 여분의 마스크를 떠올리다가 지나가듯 던진 물음이었다. 남우현은 마스크를 쓴 탓에 눌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받은거에요. 지은이한테."
그럼 그렇지. 어쩐지 어울리지도 않는 색상을 골랐다 했어.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아, 그래요. 바꿔 들었던 참고서 위에 다시 한 권을 얹으며 말했다.
"두 개는 필요 없겠네."
남은 수업, 수고해요. 마스크로 가렸지만 아직까지 웃고 있을 게 훤한 남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 말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을 벗어나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미지근하게 식었던 얼굴을 감쌌다.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에 도착해, 가지고 왔던 참고서를 책장에 꽂아놓기도 전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여분의 마스크를 가방 안에 집어 넣는 일이었다.
하긴, 감기의 원흉이 주는 마스크 같은 것은 달갑지도 않을테니 잘된 일인가도 싶었다. 일부러 가방 밑바닥에 마스크를 깔아두고 뻑뻑한 지퍼를 꼭꼭 채워 잠궜다.
* * * * * *
본격적으로 무더위는 시작되고 있었다.
남우현이 아프던 날, 지겹도록 나란히 하던 자정 넘는 시간의 퇴근도 막을 내렸다. 고등학생의 기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과 나의 야간 자율 감독도 이제 더는 없는 말이었다. 시간은 빠르다. 오늘도 뜨겁게 달궈진 정류장 의자를 비워두고 옆에 서서 하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시간은 정말 빨라. 특히 장마가 시작되고 그쳤던 그 날 이후로는. 나는 발치에 거슬리던 돌멩이를 버스가 오지 않는 도롯가로 툭 걷어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름의 시간을 조종하는 녀석과 나의 사이에서ㅡ 이렇다할 변화는 없었지만 내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있었다. 늘 말하는거지만, 나는 아직이에요. 제 마음을 신고한 이후부터는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이 제가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오고 있는 남우현에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녀석이 말했던 '내기'는 친한 녀석들과 흔히 하는 일종의 허풍같은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도 몇차례 그 사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있지만 남우현은 내게 제 기억속에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 사건을 입에 올릴때만큼은 남우현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굳어졌다. 그런 말 한 적 없으니까 이제 그만 좀 믿으라며 남우현은 급기야 내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그럴때면 나는 녀석의 팔을 주저없이 걷어냈다. 알았어요. 그건 알겠는데ㅡ
나는. 아직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건지, 아니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기적으로 밀고나오기로 작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우현은 내게 끊임없이 제 감정을 밀어붙이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 '아직'이라는 말이 나중에는 녀석을 받아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는 '아직'이었다. 아직은 내게 남우현은 딱 그만큼의 존재였으니까.
"집 이쪽 방향 아닌 거 다 알아요."
"들켰다."
"그렇게 대놓고 따라오는데, 그걸 모르면 호구 아니에요?"
야간 자율이 끝난 이후 우리의 퇴근은 8시 반으로 또다시 나란했다. 그것은 시간만 조금 앞당겨졌을 뿐, 그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를 꼽자면ㅡ 매일같이 할증 붙은 택시로 귀가하던 퇴근길을, 이제는 지하철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점. 남우현은 오는 길에 구입한 생과일주스의 빨대를 입에 물었다.
"나도 도곡동에 볼 일 있어서 가는거예요. 미미씨가 마침 계속 앞에 걸어가고 있는거고."
"됐으니까 열 발자국 이내로 따라붙지마요."
"너무 멀어요."
"열 다섯발자국."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녀석에게 대꾸해주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남우현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협상을 시작했다.
"아홉발자국."
"열 여섯발자국."
"…열."
"열 일곱."
"얼굴 보려고 가는건데."
"……."
"얼굴도 안 보이겠네."
번화가로 접어든 탓에, 녀석의 목소리는 이미 군중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가만히 멈춰서서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녀석의 푸념을 끝으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더 조르면 더 멀어질거니까 안 할게. 열 일곱이 어디에요.
대신 빨리가지 말기. 같은 속도로 가요. 남우현은 그 뒤로도 쉴새없이 종알거렸다. 물론 그게 내 귀에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정말로 열 일곱걸음 정도를 뒤쳐져 걷는 남우현은 내가 발걸음을 멈추면 따라 멈추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열 일곱걸음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지하철에 들어서서는, 칸의 거의 끝 쪽에 자리를 잡아서 제법 가까이 있게 될 법도 한데 남우현은 정확히 열 일곱걸음을 지켜, 정 반대쪽 끝에 서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씩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이 많은 탓에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고개를 막 든 참인지, 단번에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내 주변을 보던 듯 한 남우현은 한참동안 고개를 빼고 있다가 나와 눈을 맞췄다. 철봉 위쪽을 간신히 잡고 낑낑대던 남우현은 나와 눈이 맞자마자 헤프게도 웃어보였다. 병신. 지 머리 바로 위에 손잡이가 흔들리고 있는줄도 모르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에는 제 머리 위로 달랑거리고 있던 손잡이에 머리를 박은 남우현의 고개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저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아파하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지하철 노선도로 돌렸다.
"길 잃었나."
그러다가 도착한 역 안 플랫폼에서는, 남우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잠시 주춤했다.
이곳과는 아무런 연이 없는 녀석이라는 걸 알았기에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을, 그저 내가 가니까 졸졸 따라오던 녀석이 자취를 감춘 탓에 그래도 5분 정도는 녀석의 행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제 갈길을 가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인파들 속에서 비어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십분 정도가 지난 시각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코빼기는 커녕, 문자 한 통 오지 않는 남우현은 기다려봤자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돌아간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인사도 없이 갈 길을 간 것일수도 있고. 잠잠한 핸드폰 액정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듯 고개를 돌리다가 녀석의 얼굴을 포착한 건.
"알았어? 형이랑 약속."
플랫폼 안의 편의점 앞이었다. 너댓살은 되어 보이는 웬 꼬맹이를 앞에 세워 둔 남우현은 꼭 그 눈높이에 맞게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게 뭐하는 중인거래. 이 장면만으로는 얼른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가늘게 뜬 눈으로 녀석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남우현은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는 꼬맹이의 손을 끌어다가 저와 손가락을 걸게 했다. 그로부터 또다시 한참. 아이와 꽤 대화를 주고 받던 남우현은 종래에 그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다가 허리를 폈다. 그와 동시에, 제 쪽을 향하고 있던 내 눈과 녀석의 눈이 마주쳤다. 남우현은 조금 놀란 눈치였고 나는 그런 녀석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간 줄 알았는데!"
녀석을 확인하자마자 뒤를 돌아선 내게 남우현이 소리높여 외쳤다. 조그맣게 말해도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나 역시 녀석에게 대꾸해주고 싶었다. 나야말로 그 쪽이 간 줄 알았는데. 플랫폼을 벗어나 2번 출구를 지나게 될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남우현은 또 다시 같은 속도로 내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0분 후의 일이었다.
이미 퇴근을 시작했을 때부터 어둑어둑해져가고 있던 하늘은 이미 완벽하게 깜깜히 꺼져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갈수록 인적이 드문 상가에 들어설때까지도 내 뒤를 좇는 남우현이 집에 돌아가는 길은 그래도 덥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겹도록 내 뒤만 밟던 남우현은 지치지도 않는건지 열 일곱발자국 밖에서 나의 퇴근길을 엄호하고 있었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기 전, 길거리 가판대에서 구입한 음료수였다. 경비실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덤불 옆의 벤치에 그것을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파트 단지의 바로 앞까지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가 적당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 막차 일찍 끊기는데."
등 뒤 저만치 멀리서 나처럼 걸음을 멈추었을 녀석에게 말했다. 조금의 정적 후에 남우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안 들려요!"
아,씨….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 남우현과 같은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열 발자국 앞으로 와!"
예상대로 저만치서 못 박힌 듯 서있던 남우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냐고 두차례를 되묻기도 전에 녀석은 한달음에 열 걸음을 내달려왔다. 전보다는 조금 가까워진 거리에서 멈춘 남우현이 달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나는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음료수에 눈을 고정했다. 아까 전 지나쳤던 벤치에 내가 내려두었던 음료수. 남우현은 내 빤한 시선을 느낀건지 제가 집어 든 음료수를 내게 보이게 흔들었다. 아, 이거. 나 주려던 거잖아. 나는 녀석에게 맞다는 말 대신 지청구를 돌려주었다. 무슨 오리새끼도 아니고. 어떻게 진짜로 나 하나만 졸졸 따라올 수 있어요.
"여기 막차 잘 끊기니까 이제 가요."
"응. 안그래도 갈 생각이었어요. 다 도착한 것 같아서."
"자알한다. 남우현씨 집은 아예 학원에서부터 반대방향이었던걸로 알고 있는데."
"……."
"멍청하게 지극정성인것도 안 좋아요. 나 고지식해서 그런것까지 좋게 봐줄 생각 없어."
남우현은 내 말에도 그저 알게 모르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내 면박에도 남우현은 그저 음료수를 만지작거리며 제자리에 서있었다. 마침 수위 아저씨가 돌아온 것인지, 남우현의 등 뒤로 멀어졌던 경비실에 환한 빛이 켜졌다. 덕분에 녀석이 돌아갈 길목이 훤히 밝혀졌다. 나는 녀석에게 되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남우현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 가요.
"근데 나도 줄 거 있어."
남우현은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해 무언가를 흔들었다. 어두운 곳이라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살피자, 남우현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가 선 자리에 물건을 내려두었다. 남우현이 그것을 콕 집어 두어번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란 말 안해. 대신 나 가면 꼭 가져가요. 주고싶은거니까."
내일 봐요. 남우현은 한 손에 든 음료수를 흔들어보이는 것으로 내게 인사를 마쳤다. 녀석이 뒤를 돌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기까지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남우현의 걸음은 여지껏 그랬던것보다 조금 빨랐다. 원래 걸음이 빠른녀석이고는 했으니까. 결국에는 코너를 돌아 남우현의 뒷통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제서야 걸음을 옮겨 녀석이 섰던 자리까지 천천히 다가갔다.
"이게 뭐야…."
허리를 굽혀 집어 든 것은 아무렇게나 찢어진 종이였다. 무언가가 적혀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보이지 않아 실눈을 뜨고 종이를 눈 앞까지 가져왔다.
고마워요. 어쩐지 지나치게 삐뚤어진 글씨였다. 원체 악필인 녀석이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서투른 글씨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자는거야 이게. 나는 꽤 오랜시간을 그 자리에 서서 녀석의 종이와 의도에 관해 혼자만의 회의를 시작했다. 경비실의 환한 빛을 따라 내가 가야 할 길의 가로등에도 타이밍좋게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나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확인한 것은 남우현이 두고 간 서투른 글씨의 쪽지였다. 가방도 내려두지 않은 채 소파 위에 널브러지듯 앉아 녀석의 종이를 반듯하게 펴 보았다. 꾸깃꾸깃하게 구김이 간 종이를 형광등 아래에 널찍이 비추자 어둠속에서 봤어도 엉망이었던 글씨가 한층 더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자 괜한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못봐주는 악필이라니까. 조금만 더 못썼다가는 하늘로 승천하겠네.
그러다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마 지금쯤은 돌아가고 있는 중이겠지. 역 앞까지에는 닿았으려나. 멍하니 생각해보다가 키패드를 눌렀다.
「두번째 말하는거지만, 존나 악필이세요.」오후 10:17
그리고나서는 잠깐동안 다시 녀석의 쪽지에다가 눈을 돌렸을 때였다. 메신저를 보내기가 무섭게 녀석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한 쪽으로 쪽지를 치워둔 채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내가 쓴 건 아니에요.」오후 10:18
나도 녀석만큼 빠른 속도로 답장을 돌려주었다. 그럼요. 먼젓번처럼 빠른 대답이 곧바로 날아왔다.
「아까 역에서 어떤 꼬맹이를 봤는데」오후 10:18
「엄마한테 과자 사달라고 떼쓰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대신 사줬더니」오후 10:19
「나한테 써 준 선물이에요.」오후 10:19
그걸 왜 나한테 줬는데요. 어쩐지 뒤숭숭해져오는 마음에 조금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연스럽게도 시선은 다시 쪽지로 가 향했다. 그래. 녀석이 아무리 악필이기는 해도 어쩐지 좀 너무한다 싶었어. 이번 답장은 전보다 조금 느렸다. 피곤한 등을 소파 바닥에 대고 누워 거의 찢어질듯한 종이를 형광등 빛에 이리저리 대 보고 있을 때에서야 알림음이 울렸다.
「오늘 노력해준거 알아요. 그게 고마워서 줬어요.」오후 10:23
「내가 미미씨한테 하고싶은 말이니까」오후 10:24
지랄. 녀석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이후에는 몸을 뒤집어 누웠다. 노력은 무슨. 그런거는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의 문제인거지. 그러면서도 답장을 하려는 손가락이 선뜻 움직이지 않아 아무 말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손을 뻗어 가져온 쿠션을 턱 밑에 구겨넣어 머리를 기댔다.
「차 끊겼죠.」오후 10:27
남우현의 간결한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네.」오후 10:28
나는 녀석의 답을 끝으로 액정을 껐다. 그럴 줄 알았어. 시간 계산도 안 하고 무작정 따라올 때부터 알아봤다. 나는 녀석의 쪽지며 휴대폰을 저만치 내팽개쳐두고 몸을 일으켰다.
뭉쳐놓았던 앙금이 뽑혀나간 자리가 훤하다고 생각했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몸을 뉘일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확실히 가벼웠다. 정확히 뭐가 가벼워진건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가볍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고여있던 물을 어딘가로 퍼내버려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게 된 호수처럼. 편하게 입는 티로 갈아입고 나서는 시원한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지금쯤이면 아마 녀석도 나만큼이나 무언가를 덜어냈을까.
소파 끝에 내버려진 쪽지와 휴대폰. 조금만 더 눈을 돌리자 베란다 너머로 캄캄하게 드리워진 하늘이 보였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쫓아오도록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늦은 밤에 나때문에 돌아다니도록 두는 것은 뭔가 미안하니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빚지는 일에 있어서는 질색이고, 또 질색인 것만큼은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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