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13
w.규닝
13. 같은 마음이 갖는 위험성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도, 애매하게 부유하고 있던 관계라는 연결고리에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게 확실했다. 실제로 그것은ㅡ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의식중에 감지한 단 하나의 매개체만으로도 터닝포인트를 찍고는 했으니까. 무엇이든간에 솔직하게 부딪히지 않았던 내게 그것은 빈번하게 일어나던 일들 중 하나였다. 나는 무엇에든지 느렸고, 쳐졌고 남들보다 훨씬 더뎠다.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나는 분명, 나의 그런 성격을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워서 그랬다. 솔직하게 드러낼수록 내 자신에게 민망해져오는 그런 기분이 지독히도 싫어서. 그래서 남들이 자격지심이라고 칭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게 맞았다. 나에게 불리한 것 같은 감정은 외면해보고도 싶었고, 나 자신을 속여서라도 회피해보고 싶었으니까. 자격지심이 맞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어렴풋이 알고있었던 감정을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그런 나에게 무언가는 뒤에서 채찍질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감당할 수 없이 서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모르는 게 아니었으며,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솔직하지 못한 나를 질책하는것도 같았다. 나는 여태껏 전부 다, 정확히는 알지 못했어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안 싫어해."
"……."
"니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많이, 너 싫어하는 거 아니야."
얼떨결에 밀어붙여진 탓에,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던 남우현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꽤 둔탁한 것이 부딪혔는지 탁,하는 소음에 어색한 공기가 트였다. 남우현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눈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형편없이 떨어트리고 있는 눈물은 남우현은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 그나마도 맺혔던 것들이 다시 또 떨어질 것 같아 흔들리지 않으려 뜬 눈에 힘을 주었다.
"어제도 안 싫어했고, 그저께도 안 싫어했어. 니가 나한테 다짜고짜 입 맞췄을 때에도 안 싫었고, 호프집 앞까지 데리러 와줬던 그 날도 안 싫었어. 이렇게 말하면 입 아프니까 딱 잘라 말하자면,"
"……."
"애초에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던거야. 쪽팔려서 말하기 싫었던거지, 남들한테 하는것보다 나한테 훨씬 더 잘해주는 사람을…"
"……."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이 대목에서는, 자존심을 세워봤자 독해보일것만같아 목소리를 죽였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해오는 주제에 이제까지 챙겨왔던 자존심을 내세우면 그건 또 그것대로 추해보일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은 작아진 목소리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내기였던 것 같으니까, 좋아하기는 싫었던거지. 남우현은 그제서야 당황하느라 조금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끝이 딱 맞닿은 녀석과 나의 신발이 눈 앞에 어룽졌다. 모든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녀석의 신발이 선명해졌다. 남우현은 조금 몸을 틀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
"좋아한다고 말해. 나 이런거에서는 참을성 없다고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남우현은 얼이 빠졌던 표정과 달리 단호함이 실린 어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선명하게 트였던 시야가 다시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의 신발의 윤곽이 딛고 선 땅과 함께 섞여들어갔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런거에는 참을성 없다고 했던 녀석의 말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니가 언제 그런말을 했는데. 성격상 억울한 건 그렇게 따져 묻고 싶어 입을 떼려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원하는 말을 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을 한참동안 다물고만 있자 남우현은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작정하고 내리고 있던 눈이 마주쳤다.
"말 안해요? 나 간봐요?"
"…아니."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해놓고, 좋아한다는 말은 안 해주는 게 무슨 심보야. 그게 간 보는거지 뭐예요. 남은 이렇게까지 애타게 만들어놓고 듣고 싶은 말은 안 해주고."
"……."
"바짝바짝 속만 태워놓고 입은 다물고있는데 내 이성은 지금 멀쩡한 거 같아요?"
잠시 꺼졌던 심장박동에 불이 오른 것을 느꼈다. 아까처럼 차오르는 민망함에, 대충 알아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러니까 안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안 싫어한단 말 듣고 싶은 거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좋아한단 말인데."
"……."
"그럼 하나씩 물어봐? 키스는 왜 했어요?"
남우현은 양 고개를 꼭 붙잡았다. 덕분에 후끈거리며 올랐던 열이 남우현의 서늘한 손바닥에 식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우현은 아까처럼 감정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투로 계속해서 말했다. 방금 했잖아. 내가 했던 것처럼 다짜고짜. 마치 이번에는 내 쪽에서 뭐라도 캐내고 말거라는 듯한 단호한 말투가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나는 멀거니 녀석을 쳐다보다가 양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남우현씨가 나한테…잘해주니까."
"응. 잘해주니까."
"남들보다 좀 더 잘해주니까, 나도 남들보다 좀 더 다르게 대해주고 싶어서 한 거에요. 다른사람들하고 다르게 좀 더 좋아하고 있다는 거 알려주려고…."
"……."
"지금까지 다섯번 빚진 것도 있잖아요."
그러자 남우현의 입꼬리가 조금은 올라갔다. 나는 괜한 시선을 녀석의 뒷쪽 벽으로 비켰다.
"방금 한 번…갚은거예요."
아직까지 변치 않은 생각은, 내가 받는 감정은 그게 무엇이든간에 조금이라도 빚지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나를 이만큼 좋아해주면 나도 그만큼 좋아해줘야 어떤 명제는 성립하는 법이니까. 그게 이토록 말도 안되게 거짓말같은 감정에 있어서의 일이라도 이것만큼은 치사하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돌려주고 싶으니까 한 짓이었다. 그러면 좀 알아주길 바랬어서. 나는 녀석이 붙잡은 뺨 위로 손을 얹었다가 이마를 짚어 눈을 가렸다. 아까부터 빤한 시선이 자꾸만 얼굴에 와 닿는 게 어색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남우현은 내 팔목을 가볍게 잡아 내렸다.
"내가 저번에도 말 한 적 있는데. 뭘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 이자까지 받는 거 완전 싫어한다고."
"응. 그랬어요."
"근데 나는 미미씨가 나 좋아해주길 바라고 먼저 좋아했던거니까 이자 줘요."
손이 내려진 탓에, 억지로 마주한 남우현의 눈은 기분좋게도 웃고 있었다.
"다섯번보다 훨씬 많이 줘요."
"……."
"이자는 원래 불어나."
그쯤 되면 거의 이판사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 입을 맞췄다. 휘어지게 웃고 있던 남우현의 눈도 그제서야 천천히 감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때도 조금 울었다. 남우현의 서늘한 손이 뒷통수를 끌어안았다. 머리를 찡하게 울리는 전율이 감은 눈을 충혈시키는 둣, 눈시울을 화끈거리게끔 만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녀석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뒷통수를 감싸안던 녀석의 손이 위로 올라와 뒷 머리칼을 헤집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남우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민끝에 벌린 입을 훑고 지나가던 입술이 가까운 거리에서 떼어졌다. 그와 동시에 살짝 뜬 눈이 마찬가지로 반쯤 뜬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남우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눈을 접어 웃었다.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은 못 들었어도. 이게 대답이라고 생각할…"
"좋아해."
남우현의 웃고 있던 눈꼬리가 조금 굳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나는 아까까지 닿아있던 입술에 다시 내 입술을 부딪혔다. 남우현의 뒷통수가 순간적으로 벽에 닿았다. 한껏 밀어붙여진 남우현의 눈이 잠시후에는 다시 감겼다. 이번에는 좀 더 깊게 고개를 튼 남우현이 힘을 주어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러가다 홱 방향을 튼 몸이 우리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조금은 아프게 뒷통수가 벽에 닿았다. 잠시 멈칫한 내게 남우현은 아까의 나처럼 멈추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고개를 좀 더 아래쪽으로 내린 남우현은 달래듯이 입을 맞춰왔다. 목덜미를 당겨 안았던 손이 머리 옆의 벽을 짚었다. 남우현은 한참 후에서야 입을 떼었다. 코끝이 스칠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녀석이 소리내 웃었다.
"뒷말은 안 들은걸로 할게요. 앞에 말이 더 중요해서 뒷말은 안 들려."
"웃기고 있네. 뒷말 멋대로 생략하지 마요."
"왜?"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뺨에 닿는 남우현의 숨이 간지러웠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남우현은 너무하다 싶을정도로 해사하게 웃었다. 스칠듯 말듯한 코 끝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맞닿은 앞머리가 좀 눌려지고, 녀석으로 인해 내 쪽에는 그늘이 졌다.
"미치겠는데, 당장이라도.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어."
"……."
"대답해줘요. 왜 이렇게 예뻐."
그다지 서러운 대목도 아니었는데, 나는 또 다시 왈칵 눈물을 떨어트렸다. 덕분에 다시 흐릿하게 맺어진 남우현의 잔상이 어른거리며 흩어졌다. 그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녀석의 눈은 거의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감겼다.
"내가 진짜 불안해서 또 묻는건데."
"응."
"우리 전보다 달라진 사이 맞지, 이제."
물어보려던 거라면서, 대답도 하지 못하게끔 다시 입을 맞춰오려는 녀석의 고개를 조금 밀어냈다. 남우현은 저의 어깨를 밀어내는 내 손에 잠시 멈칫했다. 나는 자꾸만 시야를 가리던 눈물을 기어코 떨어트렸다.
"낯간지러운 말 진짜 엿같다. 그런 말 내 성격하고 안 맞는 거 알잖아요."
"……."
"그런 말 하지마. 아구창을…날려버릴거야."
하염없이 웃고 있던 남우현은 급기야 고개를 멀찍이 떨어트려 소리내 웃었다. 그 덕분에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불규칙적인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 남우현이 내 어깨를 당겨 안았다.
"저번에는 죽빵 날릴거라더니. 더 쎄졌네."
"장난같지? 장난 아니야."
응. 미미씨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남우현은 바짝 안은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간질거리며 닿은 머리카락에 어깨가 움찔했지만 남우현은 그마저도 꼭 붙들어 감싸안았다. 그 덕에 조금 힘이 빠진 고개를 녀석처럼 그 어깨에 기대며 무너뜨렸다.
달라진 사이가 맞냐는 말에 이렇다할 대답은 돌려주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까지에도 오래 걸렸듯이, 마찬가지로 그렇고 그런 대답을 뱉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힘에 부쳤으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인정하고싶지는 않았다. 아마, 남우현은 이해해주었을거라 생각한다. 녀석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끌어안은 어깨 너머로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대여섯번 되풀이되던 고맙다는 말은 종래에ㅡ내가 했던것처럼 좋아한다는 말로 변해갔다. 그제서야 감았던 눈에 힘이 풀렸다.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내리자 한결 편해져 갈 곳 잃었던 팔을 남우현의 허리에 둘렀다.
여느때보다 확실히 바람이 시원한 날이었다. 목덜미에까지 파고드려는 입술을 멀찍이 밀어내고 나서야 몸을 떨어트린 그 날 오후. 우리는 걸어왔던 방향을 백팔십도 다른 곳으로 트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를 구했다.
* * * * *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남우현은 질투가 많았다.
생각 이상이라는 것이 문제이지만. 나는 내 감정을 쏟아내듯 털어낸 이후부터 거칠 것 없이 시작되는 남우현의 감정표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제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깨닫는 일에서 서투른 게 내 쪽이었다면ㅡ남우현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한없이 서투른 어린아이같았다. 제 말로는 기다려왔던 일이라서, 좋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는데 그것은 변명인 게 분명했다. 여섯살을 윗도는 유치원생들이 발로 그리는 그림보다 훨씬 더 서투른 남우현이 사실은 아직까지 불안한건지, 초조한건지 알 수는 없었다. 녀석은 내게 틈만 나면 입을 맞추었으며, 다른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도 묘한 눈맞춤을 즐기고 있는 듯 했으니까. 한 번은, 수많은 학생들이 지나가는 복도 끝에 서서 스쳐 지나가려는 내 팔을 당겨 볼에 뽀뽀하기를 여러번. 하는 행동마다 온통 아슬아슬했던 날의 끝에서 쏘아붙인적이 있었다. 진짜 돌았어? 왜그래? 남우현은 오히려 입을 비죽이며 대답했다.
"미미씨가 자꾸 희재형만 찾잖아. 하루종일."
"하루종일 박 선생님 찾는 전화만 걸려오는데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러니까 더 뽀뽀해줘야지. 막무가내인 남우현은 다시금 뭐라고 밀어붙일새도 없이 빠르게 입을 맞추고 복도를 지나쳤다. 반사적으로 터져나오는 헛웃음에, 방금까지 녀석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으로 가리고 서 있어봤자 내게 득될 것은 없었다. 잠시 후에는, 복도를 지나려던 학생 하나가 의아한 눈으로 내게 말을 붙이고 나서야 눈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미쌤. 뭐하세요?
또 그런 주제에, 눈치가 없는건지 정신이 나간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학생에게 다정해진 남우현은 몇 번이나 내 심기를 뒤집어놓았다.
"이거 뭐야?"
"남쌤이 이거 미미쌤 드리래요."
계속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그렇지않아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던 불쾌지수에 정점을 찍은 것은 역시나 남우현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도 더워 손부채질로 더위를 삭히고 있을 때 쯤에 내 앞에 나타난 학생은 이제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화두에 올랐던 지은이라는 애였다. 여학생은 내게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학생들의 성화에 힘입어, 아니 사실은 등떠밀려 남우현이 근처의 마트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아이스크림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아까부터 학원이 소란스러워졌다 했더니, 이반 저반 돌아다니며 여분의 아이스크림을 배분하던 여학생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내게 반쪽짜리 쌍쌍바 하나를 내밀었던 것이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턱짓으로 막대를 가리켰다. 이게 뭐야?
"이건 반쪼가리잖아."
"네. 그래도 남쌤이 드리라던데."
"쌍쌍바 안좋아한다고, 줄거면 다른걸로 직접 달라고 전해줘."
이게 누굴 약올리려고 먹다 남은것처럼 생긴 아이스크림을 건네. 성의없는 녀석의 호의에 되는대로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쉼 없이 돌아가는 프린트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여학생은 잠시동안 멀뚱히 서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다른 아이스크림 먹지 말고 이거 드시래요."
"안 먹으니까 도로 갖다줘."
"안 드세요? 그러면 제가 먹구요."
여학생은 내 앞으로 재차 막대를 흔들었다. 그러자 묘하게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었다. 나는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인쇄기에서 홱 고개를 틀었다. 생글거리며 웃고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냥 줘."
그 다음에는 두말할 것 없이 여학생의 손에 들린 막대를 앗아 들었다. 여학생은 안녕히 계세요 하는 말과 함께 촐랑거리며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보니 손에 들린 반쪽짜리 쌍쌍바를 내려다보다가 입에 물었다. 초코맛은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성의없이 반쪽짜리야. 아직도 한참이나 뽑혀져나올 종이들을 바라보다가 옆쪽에 비치된 의자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쌍쌍바 먹고있어?」
이쪽 상황을 훤히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능청스러운 문자가 액정을 메웠다. 나는 아까부터 물고 있던 부분을 한 입 베어먹으면서 손가락을 놀렸다. 짜증나. 그러자 남우현의 답장이 득달같이 돌아왔다.
「왜 짜증나. 나랑 같은 거 먹고있는건데.」
알아. 그래서 먹고있어. 그렇게 퉁명스러운 답장을 돌려준 뒤 좀처럼 짜증이 가라앉지 않아 두번째 메세지창을 열었다. 녀석에게 답장이 돌아오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키패드를 입력했다.
「그런데.. 지은이한테 배달시킨 건 좀 아니었어.」
조금의 간격 끝에 답장이 도착했다.
「ㅠㅠ」
불쌍한 척 하면 다 되는 줄 아나. 나는 녀석의 온 감정을 담고있는 메세지에 답장 버튼을 눌렀다.
반성해.
그리고는 곧바로 전원 버튼을 껐기 때문에 뭐라고 답장이 돌아왔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켰다가 끈 탓에 미지근해진 에어컨과, 사무실 구석에서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고개가 고장난 선풍기 한 대. 아직도 남은 종이를 열을 내며 인쇄중인 프린트기를 옆에 두고 앉아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하게 차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초에 너무 작아 세입거리도 되지 않는 쌍쌍바 반쪽을 앙다물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왠지 같은 곳을 먹고 있을 것 같은 남우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입에 문 아이스크림 막대를 힘주어 빼자 말끔해진 막대 끝이 마음에 들었다.
여름의 시간을 조종하는 녀석과 함께하는 여름은 한창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같이 하는 시간이 하루가 다르게 짧다고 느껴질수록 한결 더 시원해지는 기분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남우현이 나누어 준 막대를 버리지 않고 입에 물었다. 잘근잘근 잇자국이 난 막대를 수업이 끝나고도 씹고 있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을때는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괜찮았다. 멍청이처럼 웃어주는 얼굴이 내 앞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
"니 주위에 땅콩 좋아하는 사람 있어?"
골뱅이 무침을 뒤적거리던 젓가락을 뚝 멈춘 채 장동우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땅콩. 장동우는 내 시큰둥한 대답에 알게 모르게 웃으며 없어?하고 재차 물었다. 나는 그에 실소를 터뜨렸다. 병신. 앞접시에 가져온 골뱅이를 젓가락으로 툭 건드리다가 옆에 놓인 맥주잔을 들이켰다.
장동우 입대 2주일 전. 녀석은 가장 친한 동기들만 쏙쏙 빼서 골라왔다며 여기 뽑인 너희들은 영광인 줄 알라는 말과 함께 개새끼주로 소주병을 깠다. 첫잔부터 거나하게 들이킨 녀석은 오늘따라 멀쩡해 다들 혀를 내두르는 와중에도 나는 혼자 녀석의 잔을 채웠다. 다들 뭘 몰라서 그런거지, 장동우는 원래 술 좀 쎈데. 아까부터 자꾸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친한척을 해대는 동기 한명에게서 은근슬쩍 어깨를 빼면서 소주잔을 부딪혔다.
장동우는 내 앞에 놓인 땅콩접시를 가리켰다.
"진짜 땅콩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 망할놈의 땅콩이 왜?"
뜬금없게도 땅콩의 호불호를 조사하는 녀석에게 의아하게 되물었다. 장동우는 그냥,이라고 답했고 나는 팔자에도 없는 '지인의 땅콩 호 여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남우현이 가끔씩 냉장고 위에다가 견과류를 올려놓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곰곰히 녀석의 행동들을 되짚었다. 첫만남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냉장고 위에 올려놓은 견과류를 까득거리며 씹어먹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던 남우현의 행동. 그런가.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나는 결국엔 머리를 내저었다.
"몰라. 그런 거."
"저번에 너랑 술 마셨을때, 나는 땅콩 싫어하는데 자꾸 내가 땅콩을 좋아할거라며 챙겨가려고 했잖아."
"무슨 병신같은 소리야. 나 땅콩 챙긴 적 없어."
"아냐. 너 챙겼어, 손에."
꼭 챙겨줄거라면서. 장동우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루머를 중얼거리다가 술이나 하자며 잔을 들어올렸다. 나도 녀석을 따라 가득 채워진 잔을 높이 들었다. 왜 저희끼리만 건배냐며 제멋대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제 잔을 들이미는 동기녀석과 얼굴이 바짝 붙었다. 내 일그러진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나사가 몇 개 빠진 동기는 술잔이 부딪히기가 무섭게 제 입으로 술을 털어넣었다. 장동우는 불편하게 구겨진 내 표정을 보다가 특유의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규야, 너 표정 관리좀! 장동우는 늘 그랬듯이 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나는 절반쯤 차 있는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콸 들이부었다.
"어쨌든 입대라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유난 좀 떨지 말고 갔다 와."
"요즘은 갔다온 사람의 여유가 제일 싫어."
"그러니까 남들 갈 때 가지 이게 뭐야. 선임으로 같은 과 후배 만나는 사람도 있다니까."
웃으면서 녀석에게 건배를 권하자 장동우의 표정이 보기좋게 구겨졌다. 술맛 떨어지게 그게 뭐야. 장동우는 입술을 댓발 내밀며 억지로 내게 잔을 맞췄다. 한 번 기분이 상한 탓인지 그 뒤로도 장동우의 술잔은 비워지기가 무섭게 다시 채워졌다. 다른 테이블에서부터 건너오는 동기들은 모두 한 번씩 장동우의 목에 팔을 걸며 소주병을 기울였다. 스트레이트로 쭉쭉 달리던 장동우는 급기야 희멀건해진 얼굴색으로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끌려다니다시피 떠돌던 장동우가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었다. 어쩐지 안쓰러워지는 얼굴색에, 나는 녀석의 고개를 끌어 내 어깨에 기대게 해 주었다. 아! 어지럽다! 장동우는 제 귀를 움켜쥐었다가 내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켰다.
"규야! 너 전화 와."
"알아. 내버려둬."
"넌 꼭 술마실 때 오는 전화는 내버려두라더라. 저번에도 그랬잖아."
"원래 술 마실 때 전화 받는 거 싫어."
나는 꼭 저번처럼 뒤집어져 진동하고 있는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장동우가 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원장이야? 이번에도 학원 일찍 퇴근했다며."
"원장 아냐. 씹새끼야."
"또 씹새끼야? 전화 안 받아도 돼?"
"아니. 받아야돼."
나는 장동우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도로 가져왔다.
"아직 덜 큰 놈이라서, 의심이 많아."
전에는 안 받아도 된다며. 쓸데없이 칭얼거리는 장동우의 뭉개지는 발음에 이번에는 그냥 웃고만 말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동하고 있는 휴대폰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신호음이 끊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핸드폰은 다시 울었다. 나는 액정에 뜬 이름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터지는 웃음에 입가를 틀어막았다.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가, 장동우가 지친 머리를 떼어내고 또 다시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먹는 와중에도, 귀찮은 동기들이 어깨를 껴안으며 혼자만 가지고 있는 친분을 과시하고 있는 와중에도 입꼬리에 걸린 미소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나는 뒷면이 뜨거워지도록 달궈진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했다. 흔쾌히 가방 안으로 그것을 집어넣는 순간까지도, 엉망으로 구겨져있을 남우현의 얼굴을 생각해보자니 그게 또 웃겨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규. 오늘 잘 웃네. 전역한지 얼마 되지않은 동기가 웃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내 비워진 잔을 끝없이 채워주었다. 오늘 술도 잘 받나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저번처럼 내 의지와 다르게 푹 꺼진 고개가 누군지도 모르는 동기 어깨에 보기좋게 안착했다. 목소리조차 생소한 동기는 꼭 맞닿은 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야. 규 취했어. 집에 누가 데려다줘? 호들갑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입가에는 자꾸만 웃음이 터지는데, 가방에 넣은 줄로 알았던 배터리가 발길에 채이는 것을 느꼈다. 미처 그것을 주워담을 새도 없이 어깨를 짤짤짤 흔들어대는 손길에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봤지만 이미 호프 안은 뱅뱅 돌고 있었다.
장동우. 군대 잘 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호프집 전등이 여러갈래로 갈라져 흔들리는 와중에도 하고 싶은 말은 뱉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요즘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묘하게 들떠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서될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 갔다왔지 |
롱 휴가! 4박.. 너무 정신없이 놀았더니 어깨 뻐근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