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14
w.규닝
14. 멀쩡한, 어설픈
당연하게도 아침에는 죽을만큼 속이 쓰렸다.
미처 내리지 못해 반쯤 올라가있는 블라인드 아래로 햇빛이 쏟아지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겼다. 그러다가 이불새로 실눈을 흘겨 올려다 본 시계의 바늘은 오후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고 다시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메슥거려. 목울대에서 울렁이는 토기에 입가를 틀어막다가 침대 밖으로 팔을 뻗었다. 협탁 위에 늘 올려두었던 텀블러가 좀처럼 잡히지 않자 짜증이 올라 이불을 걷어냈지만 오늘따라 유독 텀블러는 놓여져 있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이, 엿같은 상황은 줄줄이 따라온다.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가는 물론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장동우가 바래다 준 게 아닐까 싶다. 정확한 주소를 알고있는 건 그 놈밖에 없을 뿐더러, 인사불성으로 취한 동기를 수고스럽게 집까지 배달해주는 호의를 아무나 베풀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뻐근하게 굳어버린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침대 밑까지 내려두었던 발이 달랑거리며 찬바닥을 쓸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베개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뭐야, 먹통…."
아무리 전원버튼을 길게 눌러도 깜깜하게 꺼진 액정은 살아날 기미가 없어보였다. 그 때 문득 잃어버렸던 퍼즐을 끼워넣은것처럼 어느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휘청거리는 머리를 누군가의 어깨에 기댔을 때 즈음, 발치에 채여 저만치 날아가던 검은색 배터리.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뒷면은 휑하니 비워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버리듯이 던졌다.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잖아도 비워진 머릿속이 더욱 멍해지는 것 같아 이불을 끌어당겨 시야를 가렸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시계 초침소리는 정적을 갈랐다. 째깍이는 소리가 무료하게 흘러가는 토요일 오후를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몸을 일으킨 건 눈을 뜨고 난 뒤로부터 삼십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짜릿하게 허리를 울리는 통증을 이겨내며 바닥을 딛고 선 발에 몸무게를 실었다. 이성이 끊겨버렸던 어제의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마셔댄 것인지, 오후가 훌쩍 넘은 시간까지도 어지럼증은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진짜 미치겠네. 있는대로 진 까치집을 부산스럽게 흩뜨리고 거실로 나갔다. 한창 뜨거운 햇빛이 가죽 소파를 정성스레 데우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ㅡ 십분 후의 일이었을거다.
"진짜."
"……."
"장난해요? 나랑."
아무도 누를 일이 없는 벨이 주말 오후, 느닷없이도 고요한 거실을 울렸다. 나는 한껏 소리를 죽인 티비로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인터폰에 찍힌 것은 마트의 비닐봉지였다. 누군가의 얼굴 대신에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무언가로 잔뜩 채워져 손잡이 부근에 삐죽이 튀어나와있던 파 꼭지와 음료수 뚜껑. 잠시 후에는 있는 힘껏 들이밀어져 있던 봉지가 화면 아래로 내려가고, 잔뜩 심통나 있는 얼굴이 나를 쏘아보았다.
"분명 열한시 쯤에는 전화한다고 했었잖아."
"응."
"하기는 뭘 해, 걸려오는 전화도 안 받으면서. 그것도 다음날 오후까지. 그게 상식적으로 잘한 일이에요?"
잠금장치를 풀기가 무섭게, 오히려 제 쪽에서 먼저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이닥친 남우현은 내키는대로 잔소리를 시작했었다. 그에 나는 나만큼이나 뻗친 녀석의 머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떨어트렸었다. 남우현은 식탁 위로 신경질적으로 풀어놓던 봉지 안의 물건들을 손에 쥔 채 나를 흘겨보았다.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다가 녀석의 눈치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변명은 생각해 뒀어요? 있으면 해 봐. 현관에 들어섰을때부터 지금까지, 잔뜩 삐뚤어진 목소리는 멈출줄을 모르고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티비의 볼륨을 높였다. 아니. 변명 없어. 남우현은 그런 내 대답에 기가 찬다는 듯이 실소를 뱉었다.
"아주 당당하다?"
"안 당당할 건 또 뭐야. 그나저나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는데?"
애초에 잘 보지도 않는 티비의 채널을 쉼 없이 돌리면서 물었다. 남우현은 정리를 하다 말던 봉지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장동우가."
"장동우 번호는 또 어떻게 안거고."
"저번에 호프집에서, 아 내가 이런것까지 설명해야돼?"
"설명해야지."
"……."
"안그럼 스토커니까."
그러다가 채널을 맞춘 곳은 시끄러운 예능 프로였다. 괜히 낯간지러워지는 시간이 싫어 일부러 왁자지껄한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앉아있자 남우현이 나를 쏘아보는 눈빛은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말 돌리는 거 봐. 남우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양파 한 개를 집어들었다.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 생각도 좀 해요."
"……."
"자꾸 이러면 나만 좋아하고 있는 거 티나잖아."
당사자는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ㅡ 계속 나만, 대놓고 안달하게 만들고. 남우현의 투덜거림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러다가 힐끗 쳐다본 남우현은 방금 전 들었던 양파를 가만히 내려다보고있었다. 정확히는 양파를 보고있는 건 아니겠지. 아마 허공에 놓여졌을 남우현의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파 팔걸이에 올려두었던 담배갑을 집어드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부러 꺼놓은거니까."
"뭐?"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남우현의 목소리가 엇나가듯 탁 트였다. 절반도 채 남아있지 않던 담뱃개비들 중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남우현씨가 걱정해주길 바라고 끈거야."
"……."
"핸드폰을 꺼서, 내가 아무리 세상하고 단절되어있어도 누군가는 나를 걱정해주고 있을거라는 생각 해봤어."
"……."
"생각해보니까 좋아서. 그래서 껐어."
이러면, 너만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는 마른 담배 끝에 불을 올렸다.
일부러 남우현쪽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라이터를 만남과 동시에 올라오는 연기와 빨갛게 불이 옮은 담배 끝에만 눈을 고정했다. 자꾸만 어깨 끝으로 흘러내리려는 편한 티를 고쳐 올리면서 눕다시피 소파에 발을 올렸다. 부엌 한 켠에서는 아직까지 어떠한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갖고노네. 진짜."
잠시 후에 남우현은 웃어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 남우현을 돌아보았다. 애써 정색을 유지하려고 했던 모양인지, 삐질삐질 올라간 입꼬리가 되려 웃겨 내 쪽에서도 웃음은 터졌다. 물론 남우현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녀석은 당황해 어색한 리액션과 함께 음료수며 양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일어나는 동선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남우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거 안 해도 걱정은 매일 하고 있으니까, 괜히 사람 갖고놀지는 마."
"그래도 이 편이 더 재미있어."
결국에는 남우현쪽에서 먼저 말문이 막혔다. 녀석은 졌다는듯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 꼴을 쳐다보다가 도로 소파에 등을 뒤집어 누웠다. 그런데 뭐하는건데? 다짜고짜 찾아와서. 내 말에 남우현은 들고 있던 양파를 보여주며 당연하다는듯한 말투로 답했다. 해장 필요하잖아. 그 뒤로 녀석은 자꾸만 내게 도마며 칼의 행방을 물었다. 심드렁하게 소파 위에 누워 녀석이 묻는 말에만 또박또박 답을 돌려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요리냐며 하던 잔소리조차 이미 통하지 않을거같아서, 냄비며 조리개의 위치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내가 할게. 말귀도 못알아먹는 게. 내 말에 남우현은 인상을 구기며 나를 저지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투닥거렸던 것 같다. 아, 어차피 내가 먹을 거 내가 하겠다구요. 자꾸만 요리법까지 캐묻는 남우현에게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그랬듯이 막무가내였으니까. 결국에 나는 부엌에서 한 발 비켜나 남우현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봐야만 했다.
*
찌개는, 맛없었다.
물 양을 어처구니없이 많게 맞출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나는 찌개의 맛만큼이나 맹맹한 리액션으로 남우현을 올려다보았다.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식탁 앞에 버티고 섰던 남우현은 어딘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그에 나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숟가락으로 찌개를 저었다.
"내가 할 걸 그랬어."
"맛없어?"
"엄청."
나는 다시 새로운 한숟갈을 입에 물면서 답했다. 남우현의 눈썹이 눈에 띄게 쳐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반찬을 집어들어 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무래도 요리는 더 공부해와야겠다."
"……."
"가산점 얻으려면."
내 말에 남우현은 실소를 터뜨렸다. 가산점? 기가 차단 말투로 되물은 녀석은 내 바로 앞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런 거 이제 필요없잖아. 이미 가졌는데. 나는 남우현의 어이가 없어질만큼 뻔뻔한 대답을 듣고있자니 그렇잖아도 맛없는 찌개의 맛이 뚝 떨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우현도 제가 만든 찌개를 한 숟가락 맛봤다. 녀석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응. 싱겁네. 그것만큼은 인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마저 맛있다며 막무가내로 나왔다면 아마 녀석하고 한판 제대로 벌렸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기죽어있는 남우현의 얼굴을 힐끔이다가 다시 찌개를 떴다. 남우현은 뭔가 측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하고 물으니 남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를 잠시, 속죄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는 웃겨 죽을뻔 했다.
"맛없으면 안먹어도 돼…."
"……."
"우리집 강아지 찌개 잘먹으니까."
하마터면 입 안에 담고있는 밥알을 흘릴뻔한 것을 틀어막으며, 이번만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식탁 아래로 몸을 숙여 웃음을 참는 나를 보다가 남우현은 정말로 심각하게 되물었다. 왜 웃어? 한참 후에서야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내 저녁을 왜 니네집 개새끼가 먹는건데. 남우현은 그런 말로도 제 언짢음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떨떠름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다시금 찌개를 뒤적이다가 웃었다.
"나 원래 입맛 싱거워. 짠것보다 훨씬 더 나아."
"예의상 하는 말이지."
"진짜야. 아마 짰으면 남우현씨 마이너스 됐을걸."
지금은 겨우 본전. 그제서야 남우현은 나를 따라 웃었다. 하여튼 단순하기는. 어쨌든간에 지지리도 맛없는 김치찌개는 앞으로 3일을 식탁 앞에 내놓아도 될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맛없다는 내 말에, 어지간히도 자신감을 상실했던 모양인지 끝까지 버려야겠다며 냄비를 붙잡고 버티는 통에 녀석을 말리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남우현은 내가 했던 말이 아마 예의상의 대답일거라고 생각했던건지, 끈질기게도 내 안색을 살피기에 바빴었다. 버리기만 해. 진짜 죽어. 나는 으름장같지도 않은 으름장을 놓고 거실로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남우현은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다가 찌개 앞에서 발을 뗐다.
남은 반찬을 집어넣고, 설거지를 시작할 때 쯤에는 남우현이 내 입에 물린 담배를 제가 앗아가 물었다. 뭐하는 짓이냐는 듯 쳐다보자 남우현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식후땡 몸에 안 좋아. 담배 좀 끊어. 본인도 나만큼이나 피우고 있는 주제에 잔소리를 늘어놓는 게 좀 얄미워 나는 표정을 구겼다. 그 때부터였을거다. 남우현의 잔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기 시작했던 첫 시작이.
남우현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텅 빈 음료수 페트병을 두어번 흔들며 물었다. 다 먹은 거 왜 안 버리고 넣어놓는건데? 생긴 건 멀쩡하면서, 이렇게까지나 잔소리가 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그 대목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왜 이렇게 상관이냐고 묻자 남우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하는사람 챙겨주고 싶은 건 당연한거지. 무슨 상관이냐니."
"나 안 좋아하면 되겠네."
"그게 할 말이야?"
"진심인데."
나는 배터리가 비어있는 휴대폰 홀드키를 달깍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원조교제 하는사람 세컨드나 해야 돼요? 난 원조교제 안하는 사람 퍼스트 아니면 안 해."
"……."
"자존심 상해서."
물론, 대화의 주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안다.
남우현의 잔소리를 듣고있자니 신경이 엇나가고, 삐뚤게만 생각하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게 겨우 그런 것이었나 싶다. 남우현은 뜬금없게도 틀어진 대화주제에 지금까지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까먹어버렸던 모양이다. 빈 페트병을 흔들다 말고 그 자리에 굳은 남우현은 한동안 멍해진 표정으로 내 쪽을 응시했다. 나는 괜히 몸을 뒤집어 배를 깔고 누우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 대답이라도 어서 떨어지길 바랬는데, 정적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남우현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거 내 얘기야? 원조교제 한다는 사람이?"
"그럼 나겠어?"
그러다가 쳐다본 남우현은 아까처럼 얼빠져있던 표정과는 달리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은 퉁명스럽게 묻자 남우현이 빈 페트병을 소리나게 쓰레기통 안으로 골인하면서 웃었다. 그로부터 30초 후, 남우현의 다음 말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싸움답게 싸워본 것도 같다.
"설마 내 원조교제 상대가 지은이를 말하는거라면 잘못 짚었어요."
"뭐?"
"원조교제가 아니고 근친상간이라고 해야하나? 근데 그건 어감이 더 싫다. 완전 파렴치한같네. 미미씨가 여태껏 했던 말처럼 나는 변태는 맞아도 파렴치한은 아니거든."
"……."
"난 친척동생이랑 결혼할 맘 없는데."
녀석은 지금껏 즐겨왔던 게 맞았다.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당장의 반응은 비추지 못하고 있다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마 진정할 겨를도 없이 소리부터 내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짜 씨발, 내가. 전에없이 터진 내 욕에 남우현도 적지않게 당황했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배터리를 분리하고 연락을 씹었던 술자리에서의 문제보다 두배는 더 심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갖고 놀기는 누가 갖고 놀아. 아까와는 달리 완전히 주객전도 된 상황에 나는 처음으로 남우현을 때렸다. 녀석은 나에게 실컷 얻어맞는 주제에 입가에 실실거리며 건 웃음은 걷어내지 않았다. 낮보다 더 활기찬 저녁은 금방도 찾아왔다.
남우현은 집에 돌아간 후에, 휴대폰이 되지 않는 나 때문에 곧장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 밤부터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녀석과의 설전으로 기운이 빠져 소파 위에 널브러지듯 누워있다가 베란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나서는 자잘하게 부서지는 비가 베란다 창문에 떨어지는것을 보다가 커튼을 닫았다. 응. 듣고있어.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으면 몇배나 더 많은 말들이 돌아오기에 서둘러 대답했다. 거실에도 형광등을 내렸다.
어두운 거실 위로 깜빡이며 불빛을 쏟아내는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차가운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 무릎을 끌어안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끊임없이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 남우현의 말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잠은 점점 밀려오는데, 볼륨이 낮은 티비 소리하며 혼잣말 비스무리한 남우현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아득해져갔다.
"남우현씨."
-응. 듣고 있어.
마지막 즈음에는, 녀석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텔레비전의 어스름한 미명 앞에서 고개를 깜빡였다.
"앞으로는 그런 장난 하지 마."
-너는 되고, 난 안돼?
이미 기분좋게 웃고있는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응. 안돼."
-…….
"뭔가에 마음쓰는 거, 나는 아직 어색해."
-…….
"그러니까 적응하게 해줘. 불안하게부터 하지 말고."
-…….
"찌개도 열심히, 삼일 내내 챙겨먹고 출근할테니까…."
-응.
"진심부터 보여줘. 천천히라도 좋아."
저희끼리 떠들어대던 예능프로도 어느덧 막을 내리고 있었다. 패널들이 한 줄로 모여 저희들끼리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와중에, 내 딴에는 제법 중요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밀려오는 잠은 눈꺼풀을 감게 만들었다. 투정같은 내 말에 남우현은 또다시 중얼거리며 답을 늘어놓았다. 이미 귀는 멀어져 비록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껏 끌어안았던 무릎 위로 턱을 올려놓았다. 남우현씨. 나는 녀석의 말을 대번에 끊어버리며 그 이름을 덜컥 불렀다. 응. 듣고 있어. 남우현은 아까처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잠에 취하기 직전, 술김이 아님에도 나는 녀석에게 고백했다.
"고마워하고있어."
-…….
"요즘들어 내가 만난…"
-…….
"거짓말같은 사람한테."
아마 그렇게, 여유로운 토요일은 막을 내렸던 것 같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늘 혼자였던 거실 안에서.
* * * * *
여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간은 역시나 빨리 갔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다른 어떤 계절보다 여름의 시간은 빨리 달려간다는 걸 깨달은 나는 하루가 무섭게 지나가는 달력의 칸에 가위표를 쳐가면서 디데이를 응시했다. 나는 별표를 다섯개, 신경질적으로 그려놓은 달력 칸을 바라보다가 괜히 여러번 문질러보기를 반복했다. 고장난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사무실을 채웠다. 지치지도 않는지,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노호혼을 바라보다가 턱을 괴었다. 프린팅 되어있는 웃고 있는 입을 두어번 툭툭 쳤다. 노호혼의 고개는 멈추었던것도 잠시, 또다시 신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나는 노호혼에게서 펜을 떼어 달력으로 가져왔다.
녀석은 일년, 애초에 나는 세달이었다. 별표만 다섯 개, 텅 비어있는 칸에 마저 글씨를 써 넣고 싶어 검은 펜을 뽑아들었다.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왔었던 날이라, 무언가를 새로 적어넣기 위해 마주한 달력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만 느껴져 한참동안을 망설였다.그렇게 컴퓨터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고스란히 쳐 보기도 여러번.
과외 아르바이트.
그러다가 문득, 보는 눈이 많을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마자 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 먹었어?"
웃고있는 얼굴이, 어느새 반토막으로 잘려나간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오전에 그랬던 것보다, 밖은 훨씬 더운 모양이었다. 햇빛에 있는대로 달궈진 남우현의 옷깃이 내게 부딪혔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서 몸을 물렀다가 그 얼굴을 스캔했다. 오늘도 지각한 주제에 남의 식사는 꼭 챙겨 묻는 거 봐. 나는 가벼운 실소와 함께 녀석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고, 남우현은 제 등 뒤로 숨기고 있던 도넛상자를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미미씨 좋아하는 도넛 사왔어. 여름에 만난 마법사는 오늘도 내 식사를 챙겨다주었다. 나는 방금까지 붙잡고 있던 달력을 은근슬쩍 뒤집으며 의자를 돌려 앉았다. 남우현은 도넛상자를 열어 이것은 뭐, 저것은 뭐 하며 기나 긴 설명을 덧붙였다. 귀로는 부산스러운 설명을 흘려듣고, 손으로는 아직까지 검은 펜을 만지작거리면서ㅡ 나는 내 앞에 쭈그려 앉은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가 했던 짓에 반해, 못된 내게 조금은 과하다 싶은 마법이 아닐까란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