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12
w.규닝
12. 애초에 짧았던 것
"성규씨, 이제 좀 학원이 편해졌나봐요."
점심 직후, 사무실에 눌러앉아 별책부록 수량을 일일이 체크하던 중에 들은 말이었다. 네? 고개를 번쩍 들며 답하자 테스트 용지를 대량으로 인쇄중이던 박 선생님이 그렇지 않냐며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해왔다. 무슨 뜻이에요? 박 선생님은 인쇄되고 있는 종이를 몇 부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요새 성규씨 표정이 많이 풀어졌길래. 나는 눈이 빠져라 번갈아 보며 작은 칸에 체크하고있던 빨간펜을 멀찍이 떨어트려놓았다.
"표정요?"
"전보다는 경계가 덜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전에는 출근해서 커피 마실거냐고 물어봐도 그냥 뚱하게만 앉아있었잖아. 요새는 제법 대답도 편하게 하는 것 같고."
"그건…제가 커피를 안 마시니까."
"그거랑은 다른 말이지."
박 선생님이 몸을 돌려 뭘 모른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커피 좋아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성규씨 표정 자체가 무뚝뚝했었단말이야. 전에는."
"……."
"물론 지금은 덜해."
말 나온 김에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박 선생님은 이도 저도 아닌 심심한 마무리로 다시금 쉽게 등을 돌렸다. 박 선생님이 커피스틱을 꺼내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빠르게 체크해내려가던 비고란은 그 밑으로 휑하게 비워져있었다.
빨간 펜을 소리나게 툭툭 쳤다. 박 선생님이 가볍게 흥얼거리며 종이컵을 꺼내는 소리가 부산스러웠다. 종이 어딘가에다가 하릴없는 펜 끝을 꾹 눌러보다가 말했다. 박 선생님.
"몇 잔 타세요?"
"응? 커피?"
"네."
"원장선생님이랑 윤 강사님이랑 내꺼. 왜?"
그 말에 화이트보드 위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저도 한 잔 타주세요."
"성규씨도 마시려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박 선생님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안 먹는 사람 입맛엔 쓸텐데. 그다지 걱정스러워보이지도 않는 목소리가 내게 충고했다. 거기가 대고 '제가 먹으려는 거 아니니까요.' 하고 대답할 수도 없고. 그저 잠시 쉬었던 오른손을 놀려 비고란에 하나 둘 씩 체크량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은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는 와중에도 아까의 대홧거리를 다시 화두에 올렸다. 성규씨는 지금 모습이 훨씬 좋다느니, 앞으로는 카페 말고 술자리라도 가져보는 게 어떻냐느니 물어오는 박 선생님의 말에 고장난 장난감처럼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아, 밖에 진짜 덥다. 오는 길에 탈진하는 줄 알았어."
기척도 없이 열린 문으로 남우현이 불쑥 들어왔다. 안녕하세요,하는 말 대신 중고딩스러운 투정으로 사무실에 입장한 남우현은 냉장고 앞에 서서 먼저 인사를 건네는 박 선생님에게 붕붕 뜬 목소리로 인사했다. 형은 오늘도 일찍 왔네. 다시 시작한지 몇분 되지도 않은 일거리에서 손을 떼고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남우현의 고개는 빠르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박 선생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밝은 인사 대신 해사하게도 웃어보였다. 남우현은 내게 별다른 인사 없이 자연스럽게 옆자리 의자를 빼 차지하고 앉았다.
"오늘 진짜 덥죠. 날씨가 갈수록 더워져."
"응. 가방이나 내려놔요."
아. 남우현은 짧은 탄식과 함께 매고 있던 백팩을 다른 의자에 내려놓았다. 타이밍좋게도 박 선생님은 내 앞에 커피잔을 내려두었다. 성규씨는 뜨거운 거 싫어할까봐 아이스로 탔어요. 그 말에 살짝 내다 본 머그컵에는 얼음이 두어개 동동 떠 있었다. 잘 됐네. 아직까지 헥헥거리며 손부채질을 하고있는 남우현을 힐끔이다가 다시 머그컵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마시면 마침 시원할테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 선생님의 지루한 대화는 끊이지를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전보다는 더 좋아요. 김성규씨가."
"뭐?"
박 선생님의 말에 놀란 듯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우현 쪽이었다.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부채질을 하던 손을 뚝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박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잖아. 성규씨 요새 훨씬 밝아졌다니까.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밀린 일처리 부탁하는것도 안 불편하고 좋아요. 사실 굳이 부탁같은 거 안 해도 성규씨는 남의 일 잘 도와줘서 좋긴 하지만."
"도와드리고 싶어서 하는건데요 뭘."
그러거나 말거나, 둘 쪽에서 시선을 거둬 다시 수량을 체크하는 종이로 눈을 고정했다. 잠시동안 입을 다물었던 남우현은 잠시 후에서야 아아,하는 리액션을 취했다.
"그런 뜻이었어? 난 또."
남우현은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걸며 웃었다.
"근데 형은 그걸 이제 알았어? 미미씨 원래 밝아."
"……."
"표정만 안 웃고 있을 뿐이지."
나는 진작 알았는데. 남우현은 어딘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 대목에서는, 감정없이 펜을 놀리다가 자칫 오른손을 삐끗할 뻔 한 것을 겨우 고쳐 잡았다. 그랬던가. 박 선생님은 별 관심없는 말투로 남우현의 유세를 받아주고 있었다. 남우현은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고, 박 선생님이 인쇄했던 테스트용지를 품에 안아드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박 선생님이 문고리를 잡아 열며 간단한 인사를 남겼다. 먼저 수업 들어가볼게요. 둘 다 수업 화이팅. 어쩐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가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남우현은 문고리를 붙잡았다. 이윽고 달칵,소리가 나자 녀석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성가신 시선이 녀석에게 닫기도 전에 남우현은 턱을 괴어오며 내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했다.
"왜 이런 일은 항상 미미씨 혼자 해요?"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어. 예상대로 별 영양가없는 질문으로 하던 일을 방해하려는 심산이었나보다. 나는 싱겁게 고개를 돌렸고, 남우현은 괜히 입을 비죽였다. 이런 거 혼자하면 힘들텐데. 나한테라도 좀 넘겨줘요. 남우현은 택도없는 소리로 내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녀석을 내 시야에서 완벽히 차단하기 위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요. 혼자 하는 게 더 안 복잡하고 나아."
"그러니까 자꾸 일거리가 미미씨한테 가는 거 아냐."
"됐고. 어젠 집에 어떻게 들어갔어요."
이마를 짚어 기댄 머리를 녀석의 반대쪽으로 조금 더 틀었다. 남우현은 무언가 더 툴툴대려다가 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네? 집? 뻔히 들었으면서, 남우현은 쓸데없이 내 질문을 번복해 되물었다. 네. 집. 더없이 딱 잘라 대답하자 남우현은 단순하게도 대답을 뱉었다.
"버스 타고 들어갔는데요."
"끊겼었다면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휙 들어 녀석에게로 돌렸다. 남우현은 내 반응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빛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네?하며 엉뚱하게 묻는 목소리에 민망함이 담겨 묻어났다. 잠시 후에는 내 똑바른 시선에 어물쩡한 대답이 떨어졌다.
"안…끊겼었어요."
"거짓말이었어요?"
기가 찬 표정으로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우현은 내 말에 맞다,아니다 하는 대답마저 떨어지지 않는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은 말로 뱉는 대답 대신에 은근슬쩍 내 시선을 회피하려고만 들고 있었다. 그 눈을 몇초간 노려보다가, 내 쪽에서도 고개를 돌렸다. 부러 소리나게 파일철을 펄럭이며 넘겼다.
"뭘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거라 믿어요."
남우현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턱을 괴었다. 나는 끝마치지도 않은 서류 파일철을 괜히 소리나게 넘겼다가 다시 되돌리며 뒤적였다. 어쩐지 당한 기분에 황당함이 지워지질 않았다. 내가 어제 씻고 나와서 시계만 해도 몇 번을 쳐다봤는데.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푸념이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꼭지에 끼워두었던 펜 뚜껑을 서투르게 뽑으려던 타이밍에 남우현의 입이 열렸다. 아. 뭘 바랬던 것 까지는 아니고.
"전 여자친구는 막차 끊겼다니까… 집에 들어오라고."
"……."
"주스도 갖다주고, 거실에 이불도 갖다 주고. 아, 물론 다른 건 없었어요. 그냥 되돌아오라는 말도 해주고, 집 비밀번호도 나한테 알려줬었는데. 그게 갑자기 생각났어서."
남우현은 이따금씩 내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꼽아갔다. 그밖에도 녀석이 나열한 것들은 많았다. 남우현의 입에서 줄줄이 터져나오는 '전 여자친구와의 늦은 밤 스토리'는 셀 것도 어찌나 많은지, 다섯 손가락이 부족해 접혔던 손가락이 차례대로 펴져 올라갔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이게 뭐하자는 건지 싶어 있는대로 표정을 구기고 녀석을 쏘아보았다. 남우현은 그제서야 제 입을 딱 멈추고 내 표정을 살폈다.
"남우현씨."
"어?"
"무슨 가산점을 얻자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에요?"
필터링 없이 뱉어진 내 질문에 남우현은 잠시 당황한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단박에 엇나간 내 목소리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내 표정만을 바라보던 남우현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당황하기도 잠시, 뿌듯함에 차 올라간 입꼬리에 내 기분은 점점 더 다운되어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우현은 눈치없이 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 가산점 얻을 생각은 없었는데. 미미씨 설마 지금까지 나한테 점수같은거 매기고 있었어요?"
"아니요?"
절대 아니라는 뉘앙스를 가득 담아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런류의 빈정거림을 곧이곧대로 직역해 듣는 건 세상천지에 남우현밖에 없을거라는 생각에 저절로 입이 절반쯤 벌어졌다. 녀석의 물음에 질색하는 나는 이미 놈의 입장에서는 안중에도 없었나보다. 남우현의 신난 입은 그만 둘 줄을 모르고 질문들을 쏟아냈다. 언제부터 매겼는데요?
"나 지금 몇점인데? 몇점이 통과인데?"
거친 동작으로 넘기고 있던 파일철 위로 제 손을 얹은 남우현이 급기야는 내 고개가 제 쪽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이도저도못하게 넘기는 것을 막은 손등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기가막힌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니라는데도 자꾸 디테일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남우현의 머리를 저만치 밀어뜨렸다.
"빵점이요. 빵점. 한참 멀었거든요?"
"빵점?"
"네. 완전 빵점."
내 말에 제 이마를 감싸쥐며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또다시 줄줄이 투정어린 말들이 터져나오기 전에 입막음을 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도 내 생각에는, 아까같은 그런 말만 안 하면."
"……."
"천천히 쌓이기는 할 걸요."
그러니까 말조심 좀 해요. 첫인상부터 남우현씨는 말조심을 못해서 말아먹었던거잖아. 내 타박에 남우현은 멀뚱히 뜨고 있던 눈을 있는대로 접으며 웃었다. 남우현이 파일철 위로 올려두었던 손을 걷어갔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새로운 비고란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조금 있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는 과하다싶을정도로 빤히 내 옆모습을 보고 있는 남우현의 시선을 느껴 부담스러워졌다. 일부러 녀석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머그컵을 툭 건드렸다. 이거 먹어요. 남우현은 내 말에 얼른 머그컵을 손에 쥐었다. 미미씨껀데 내가 먹어요? 녀석의 물음에 귀찮은 기색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먹어보려고 했던 건데, 아무래도 입맛에 안 맞아서. 남우현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모금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고도 자꾸만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왜 자꾸 웃어요?"
"내가요?"
"그럼 아니에요? 아까부터 부담스럽게 자꾸 웃고있잖아. 나 보면서."
"아. 티 나?"
능청스러운 녀석의 말에 말문이 막혀 녀석이 하는 짓을 보고만 있자, 남우현은 머그컵을 쥐며 웃었다.
"원했던 반응이 나와서 좋아서 웃는거에요."
"원했던 반응?"
재차 묻는 내 말에 남우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딘가 허탈해지려는 기분에 힘이 빠진 팔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게 무슨 뜻인데. 남우현은 내 말에 웃고있던 입꼬리를 슬쩍 내렸다.
"원했던 반응이라는 게 따로 있었나봐요. 어디까지 계산해놨는데. 어떤 반응 끌어내려고 나랑 대화하는건데요?"
이번에는 남우현쪽에서 손이 멈추었다.
녀석은 빙글거리며 웃던 표정을 서서히 굳혔다. 남우현은 세게도 쥐고 있던 머그컵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다가 녀석을 쏘아보기를 반복했다. 자기가 정색하기는 뭘 정색해. 금방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둬 파일철만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이 어색해 애먼 시계에 눈을 돌렸다가 수업 시간이 가까워져 온 것을 깨달았다. 일부러 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파일철을 집어들었다. 남우현씨는 누구 갖고 노는 거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 됐고, 대답 필요없으니까 나 먼저 수업 들어가볼게요. 그러나 남우현은 그제서야 내 팔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똑바로 섰던 몸이 비틀거렸다.
"가기 전에 방금 말은 취소하고 가요."
"무슨 말. 취소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
"다 좋은데. 나한테 살갑게 해주지 않는거 그런 거 다 상관없는데 멋대로 오해하는것만큼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나 그거 되게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팔을 잡은 남우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런 반응도 내보여주질 않자 남우현은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녀석이 팔을 끌어당기고 있는 통에, 끌어안고 있었던 파일철을 다른 팔로 옮겨 안으면서 녀석을 쏘아보았다. 남우현은 그저 답답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전에도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한 발 늦었던 거잖아. 남우현은 내게 다시 제 입장에 대한 설명만을 늘어놓았고, 그것이 더 듣기 싫어 녀석의 팔을 힘주어 놓게끔 만들었다. 나는 녀석의 손이 다시 찾아들기 전에 문고리를 잡았다.
"그 쪽이 어떤 의도로 말했건 나는 상관 없어요. 중요한 건 내 해석이니까."
이번에는 남우현의 표정이 기가막히다는 듯이 변해갔다. 녀석이 허탈하게 서 있기 시작할 때 쯤, 나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그 뒤로는 별다른 인사 없이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내 등 뒤로는 마지막으로 봤던 녀석의 표정만큼 허탈한 침묵만이 남겨졌다. 정리되지 않은 투박한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슬금슬금 차오르는 짜증에 그 때부터 아마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물론, 답답함의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남우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문제였다.
답답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물론,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자꾸만 삐뚤게 행동하고싶은 것은ㅡ 그 뒤로도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지만 그나마 나온 결론도 내 자존심에 대해 비참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편하게 생각해버린 것에 대한 못된 이기심. 내키는대로 엇나가도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해주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될 거라는 알량한 자만심. 그렇게 이상한 심리싸움으로 사무실을 벗어나고 난 뒤에도, 머릿속을 온통 뒤덮는 뒤늦은 후회 때문에 컨디션은 영, 제로 그 자체였다.
* * * * *
아무래도 같은 학원 안에서 근무를 하고있는지라, 녀석을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두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결국에는 내 '괜한 짜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뒤에 보게 되는 남우현의 얼굴은 그야말로 불편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수업 중간, 새 보드마카를 가지러 사무실 재고상자에 들르려 할 때에도 남우현과 눈이 마주쳤고, 사무실에 울리는 전화를 받으러 갈 때에도ㅡ 원장 선생님을 찾는 학부모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후 복도를 지나가는 와중에도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때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내 쪽이었으나 평소와는 또 달랐던 게,
이번에는 남우현도 나를 굳이 불러세우지 않았다. 녀석도 나처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굳은 시선을 거둬내기에 바빴으니까. 분명 두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 점수는 몇점이냐며 시덥잖은 장난을 걸어오던 녀석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쩌다가 단 둘이 복도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걸으며 가까워졌을때도 녀석은 빠르게 내 옆을 지나쳤다. 희재 형. 수업은? 남우현은 나보다, 내 등 뒤에서 코너를 돌아 오던 박 선생님에게 말을 붙였었다.
"짜증나. 진짜."
정확히는 뭣때문에 짜증이 오른건지는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에 도무지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아 잔뜩 날이 서 있는 마당에ㅡ 다시한 번 찬물을 끼얹은 건 오후 여섯시 즈음, 사무실에서 있었던 남우현의 행동이었다. 아마 그 때가, 오늘의 끝에서야 덜컥 불을 질러버리게끔 만든 우리의 두번째 전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방금 뭐한거에요?"
"내가 뭘요."
"나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지은이 머리 쓰다듬고 있었잖아요."
길었던 연속 수업이 끝나고 난 직후였다. 주어진 쉬는시간은 15분가량이 전부였지만 얼음물이나 들이키며 어지러운 속을 가라앉혀보고자 찾은 사무실에서는 그야말로 짜증이 치미는 광경을 목격해버려 이번에도 멋대로 쏘아붙인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기가 무섭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잘했다며 낯익은 여학생의 머리를 두어번 토닥이는 남우현의 모습이었다. 물론 내 인기척에 얼른 뒤를 돌아다본 여학생은 순수하게 반가운 얼굴로 내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미미쌤 안녕하세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긴 했지만, 또 한번 이상하게 찾아든 냉기류는 여학생이 사무실을 벗어난 이후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급기야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내 쪽이었다. 남우현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번에 사설 모의고사, 잘 봤대서 칭찬해준거에요. 다른 거 아냐."
"저번에 약속,"
"알아. 안 잊었어요."
남우현은 내 말을 미리서부터 잘라내며 덧붙였다. 그래서 말했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남우현은 내게서 먼저 눈을 돌려 컴퓨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못 박힌 듯 섰던 자리에 고개를 숙였다. 남우현이 한숨섞인 목소리로 마우스를 달깍이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힐끔이다가 비어있는 의자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앉았다. 잠시동안 가벼운 침묵이 감돌았다. 남우현씨. 내 말에 녀석이 네,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도, 고3 수험생이랑 대학교 1학년이 사귀면 되게 이상해보이는 거 알죠."
"네. 알아요."
"딱 그거같아서 하는 말이예요."
"……."
"다섯살 차이밖에 안난다지만, 학생이랑 선생님이랑 연애하는 건 별로에요."
나는 테이블 위로 올려 둔 빈 손을 괜스레 매만지며 녀석에게 말했다. 그러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남우현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도 아무 반응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가,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 변화에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우현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김성규씨. 남우현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내이름을 불렀다. 평소처럼 미미씨, 미미씨 하던 것과 전혀 딴판으로 틀어진 목소리로.
"우리가 뭐 잘된 사이라면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야 맞는건데. 그게 아니잖아."
"……."
"지금 하는 건 질투가 아니라 의심이라서. 김성규씨한테 이제 그런 오해 받는 건 좀 그만하고 싶거든요. 그 쪽한테 그런 말 들으면 들을수록 나만 더 불안해지니까."
"……."
"좀…하지마요. 남은 아니라는데 왜 멋대로 그래. 자꾸."
멋대로. 남우현의 입에서 나온 멋대로라는 말이 아까부터 내 속을 찔러오던 자책감과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에 나는, 묘한 기분으로 녀석을 보던 눈을 거둬 입술을 물었다. 나 뿐만 아니라, 녀석 또한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 멋대로, 나 편한대로 행동하고 있었다는것을. 이번에도 내 괜한 짜증이 맞았다. 먼젓번 말싸움과 다를것이 없는 결과에 해결책이 없는 마음은 또다시 있는대로 막혀오고 있었다. 남우현은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먼젓번도, 또 이번에도. 잘못한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우현은 눈빛만으로도 나를 다그쳐오고 있었다. 남우현은 컴퓨터를 놓은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멋대로…인건. 남우현씨도 마찬가지잖아."
"뭐?"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라는듯이, 이전처럼 황당해하는 남우현의 목소리가 당연하게도 되물어왔다. 사실은 너도 마찬가지라고 꺼낸 입은 왜 그랬는지 나조차도 의도를 모를만큼 갑자기 터진말이었지만 이미 자존심에 가득찬 내 목소리는 앞뒤 생각할 겨를없이 하고싶은 말만 그대로 내뱉었다. 객기가 맞았다. 괜한 객기라는 건 알았지만 머리와는 따로 노는 입이 다음말을 뱉기 시작했다. 멋대로인건 내 쪽이 아니었어. 항상…
"너였어. 나를 먼저 좋아한것도. 다짜고짜 먼저 입…맞춘것도."
"……."
"나만 잘못한 거 아니잖아. 분명 너도…섣불렀던거잖아."
스스로도 무슨말을 하고있는지를 몰라 더욱 답답했다. 이게 이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으로 똘똘뭉친 목소리는 끝없이 녀석만을 탓하기에 바빴다. 결국은 자포자기에 접어든 심정으로 마악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잠자코 내 말을 듣고만 있던 남우현은 전보다 한 층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 전부 다 내가 시작한거.
"근데, 내가 참고있는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
"니가 혼자서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있는거라고는 생각안해?"
참고있는거라고 말해오는 녀석의 말을 들은 직후부터, 나는 녀석이 말한 '해석'에 관한 고찰을 쉴새없이 떠올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 말이, 심지가 짧은 시한폭탄에 급기야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라는 걸 확신한다. 그 때의 남우현은, 아주 정확하게도 헛헛한 무엇인가에 불을 지폈다.
"자기 마음 알아내는데도 미미씨는 해설지가 필요한 것 같아서 내가 도와주고 있던거야. 먼저 좋아했던 것 말고는, 지금까지 전부 다 내멋대로 행동한 건 아니었어."
"……."
"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르겠다면. 그래서 내가 진짜 마지막으로 너한테 힌트를 주자면."
"……."
"나 지금 짝사랑 아니야."
짧게 스파크가 튄 심지 끝에 시작점이 붙었다.
*
8시 반이 겨우 넘는 퇴근길에서, 일부러 녀석보다 먼저 학원 밖에 발을 딛을 때까지도 묘하게 흐트러진 마음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어스름하게 해가 지고 파랗게 뜬 공기가 더웠던 오후의 바람을 식혀주고 있었다. 진짜 답답해. 나는 도망치듯 가방을 챙겨들고 뛰어나온 학원 앞에서 아무래도 용기가 나질 않아 두 다리를 당겨 앉았다.
남우현이 퇴근을 마쳐 바깥으로 나오기까지는 정확히 십여분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인적 없는 옆 길의 계단에 단박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울고싶은 마음이었는데, 아무리 여러번 두드려봐도 얹힌 듯 풀리지 않는 가슴이 답답해 쉽사리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재촉받는 느낌에 대해서 나는 아주 많이 서툴고, 서툴었다. 무릎을 감싸쥔 손을 더욱 꼭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오후때보다 한결 더 시원해진 바람이 뒷머리를 헝클이고 있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건, 녀석이 학원 밖으로 발걸음을 하기 5분 전의 일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로 계단 밑을 딛고 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백팩의 끈을 잡고 건물 위를 쳐다보고 있자니 덜컥 겁이 나 입술을 물었다. 내가 하는 행동으로, 앞으로의 모든 일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가 일어날테니까. 내가 녀석에게 하는 일은, 거창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크기 모를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했으니까. 나는 시원하게 열이 식은 학원 벽 옆으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아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학원 문을 나선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남우현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심지는 애초부터 짧았기 때문에,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던 게 당연했다.
"…방금."
"……."
"뭐했어. 김성규."
다짜고짜 녀석의 팔을 끌어 건물 뒤의 인적 드문 골목으로 녀석을 밀어붙인 후에 들은 말이었다. 남우현은 방금까지 나와 닿아있던 제 입술에 손을 갖다댔다. 시간 제한이 다해버린 건 이미 몇분 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조금 울었다.
"신경쓰이게 하지좀 마. 하루종일 니생각밖에 안났었으니까."
"……."
"오늘만 그랬던 것 같아? 전혀 아니야. 학원에서 일하게 된 그 날부터 쭉 그랬어."
이미 들켜버린 무언가를 못내 감추지 못하기에, 자존심까지 이겨내고 털어놓게 된다는 건.
"나도."
"……."
"나도 몰랐던 거 아니야…."
서럽다. 생각보다 많이. 나는 한 시간 전의 나만큼이나 굳어버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남우현 앞에서 형편없이도 뚝뚝 눈물을 흘려냈다. 급기야는 잇새로 서러운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정면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꺼트렸다.
침침하게 흐려진 공기조차도 서러운 저녁이었다. 지나칠만큼 인적이 없어 내 무너진 자존심이 더욱 돋보여지는 것만 같아 귓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러모로 나에겐 힘든 날이었으며 그것은 길었던 우리 이야기의 종점을 찍고 있었다. 남우현이 얼떨결에 기대어 선 벽면에서 고개를 떼어 자세를 바로했다. 남우현은 볼품없이도 울고있는 나를 기다려주다가, 얼굴에 손을 올린 내 팔을 잡아내렸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민망하고 시원했던 저녁. 우리의 종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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