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지나 2학년이 된 너는 유난히 내게 잘 했다. 선배 선배 하며 졸랑졸랑 쫓아다니는 것은 당연하고, 가끔 기운이 없거나 내가 아프거나 할 때는 매점에서 얼린 딸기우유니 크림빵이니 하는 것들도 사다 주며 온갖 정성이었다. 그런 나와 너를 보며 동아리 친구들은 닭살이라느니 유난이라느니 말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너는 별 말 없이 웃었지만, 나는 씁쓸한 얼굴을 숨기기 힘들었다. 너는 원체 주변에 잘 하는 성격이니까. 굳이 나에게만 한정된 친절이 아니니까.
원래 동아리방 소파에서 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3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3이 되며 1주일 2시간에서 2주에 1시간으로 줄어든 특별활동 시간, 나는 특별활동 전 시간이 되자마자 동아리방에 달려와 소파에 얼굴을 묻고 누웠다. 아아, 좋다. 갑자기 2시간 더 늘어난 야자시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 찌든 몸이 노곤노곤 풀리기 시작했다. 조쿠나아… 불분명한 발음을 웅얼거리며 한참을 비몽사몽해 있는데 쉬는시간이 끝나도록 부원들이 오지 않는 거다. 이상하네. 올 때가 되었는데. 분명히 내 머리 한 구석에서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수마를 무시하고 몸을 일으켜 부원들을 찾기에는 이미 정신이 너무 아득했다. 나는 그대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한 2,30분이나 잤을까. 나는 입술가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몸을 움찔, 했다. 누군가의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있는 것은 너의 얼굴. 어어, 무슨 일이야? 눈을 반쯤 감은 채 웅얼웅얼 하는 내 말에 너는 아, 그, 잠드셨길래…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제야 몸 위에 덮인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담요를 살짝 잡아 흔들며 물었다.
“네가 한 거야?”
“네…. 저, 그게… 별 뜻 없었어요. 죄송해요.”
담요에 감동받은 내 표정을 눈치 챈 건지- 너는 별 뜻 없었다고 말하고는 바로 동아리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운하다. 그냥 추워보였다거나, 감기 들릴까봐 걱정돼서요, 뭐 이런 말을 해줄 수도 있었잖아. 너를 좋아하게 된 일에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 이럴 때는 정말 속상해. 내가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마다.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냈다. 이게 무슨 궁상이야.
지이잉.
갑자기 울린 진동에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특별활동 4교시가 끝나가는 11시 50분. 나는 쉬는 시간 즈음부터 동아리 회장에게 연달아 온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 변 오늘 사진부 야외로 출사나간다 보라공원으로 와 11:03
-전화는 왜 안받냐 애들 지금 다 나와 있어 11:09
-교실이냐? 11:14
-찬열이가 찾으러 갈거야 11:20
-왜 박찬열도 전화 안받아 너 찬열이 만나기는 했냐 11:30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출사 나간댔지. 너는 날 찾으러 왔던 거구나. 나는 벙찐 기분이 들어 회장의 연락을 띄워놓은 핸드폰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넌 왜 깨우지 않고… 나를 늦게 찾아낸 걸까. 덕분에 잘 자기는 했다만. 잠시 후 종이 치고, 나는 기지개를 켜며 다시 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후로 너는 내게 유난히 살갑게 구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락거리던 동아리방에도 특별활동 시간이 아니고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운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3생활을 이어나갔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복도에서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 지난번에 용기낸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을 때,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피하는 너를 보고는 정말로, 조금 울 뻔했다.
선배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때였다. 3월이었음에도 제법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1-3반 팻말을 낑낑 들고 있던 선배는 한 눈에 봐도 뽀얗고 작은, 병아리 같은 사람이었다. 갓 중학교를 벗어난 내 눈에 처음으로 들어선 사람. 나는 그 후로 급식실에 갈 때에도, 복도에서도 이름도 모르는 그 선배의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선배의 이름과 학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색 마이에 붙은 2학년용 노오란 명찰에는 변백현, 세 글자가 단정하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 후로 나는 창문 밖으로 그 선배가 운동장에 보이면 운동장으로, 복도를 지나갔다는 친구놈의 연락을 받으면 복도로, 동분서주하며 선배를 따라다녔다. 물론 그런 적극적인 노력과는 반대로, 계기가 없어 한 학기가 지나도록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새 학기에 들어서고 난 후 맞은 체육대회, 드디어 선배에게 말을 걸 기회가 생겼다. 평소 축구에 자신이 있던 나를-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반을. 선배가 찍고 있었던 거다. 체육대회 날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걸 보니 아마 방송부인가보네. 진작 알았으면 방송부에 지원해볼걸. 애꿎은 후회를 하며 전반전을 보냈다.
휴식 시간, 나는 전반전 내내 머릿속에 했던 시뮬레이션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보며 선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 거 아냐,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급한 마음에 뛰다시피 선배가 앉은 벤치로 가는데, 선배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한참 공을 가지고 뛸 때보다 심장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결국 나는 살짝 방향을 틀어 선배 옆의 수돗가에 가버렸다. 바보 같으니. 이러다가는 선배가 졸업해도 말 한 번 못해보겠다. 뜨거워진 얼굴을 찬 물로 식히고 선배가 앉아있는 벤치 쪽을 보니, 다른 사진을 찍으려는지 일어서고 있는 선배가 보였다. 이대로 보내면 안돼. 나는 급하게 선배를 불렀다.
“변백현 선배님이시죠?”
급한 내 말에 선배가 나를 돌아봤다. 나를 알아? 오물오물 말하는 선배의 입모양이 예쁘다. 그런데 실수했다.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름까지 부르며 선배님, 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다행히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선배 주변을 지나가는 선배와 똑같은 하늘색 반티 뒤에 쓰여 있는 등판의 이름이었다.
“그… 반티 등에 이름. 써있어요.”
선배가 아, 하며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전 1학년 박찬열이라고 합니다.”
우물우물 한 내 대답에 선배는 금세 새침한 얼굴로 묻는다. 같은 햇빛 아래 서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뽀얗고,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리고, 남자한테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귀엽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아까 저희 반 축구한 거 사진 찍으신 것 같은데, 혹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선배가 내게 카메라를 주었다. 만질 줄 모른다며 다시 선배의 아기 같은 손에 카메라를 넘기자 선배는 내 쪽으로 다가와 직접 하나하나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사실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까워진 선배의 몸에 괜히 떨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선배는 사진부라고 했다. 그저 동아리일 뿐이지만 선배가 한다고 하니 어쩐지 대단해보였다. 아는 선배들 인맥을 총동원해 사진부 회장형과 안면을 트고, 사진부의 신입생으로 들어간 것은 그 해 겨울. 어찌 보면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었다.
선배는 3학년이 된 후 특히 자주 아팠다.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동아리방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끙끙대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 드러내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선배가 좋아하던 매점 간식들을 사다가 손에 쥐어 주는 것 정도. 아픈 와중에도 해사하게 웃으며 내가 주는 것들을 받아드는 선배의 표정은 마치 모이 받아먹는 아기 참새 같아서, 난 괜히 혼자 실실 웃곤 했다. 그렇게 나와 선배는 친한 선후배사이로 봄을 보냈다.
봄의 끝자락. 본격적인 시험 기간에 들어가기 전 사진부에서는 특별 야외촬영을 나가기로 했다. 사진동아리에 들어온 지 몇 개월이 되었지만 아직 진지하게 카메라를 잡아본 적 없는 나인데, 그래도 선배와 함께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특별활동 시간이 되어도 선배는 만나기로 한 학교 옆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자원해서 선배를 찾으러 학교로 돌아갔다. 제일 처음 가본 곳은 동아리방. 역시, 선배는 동아리방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워있었다. 선배? 조용히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는구나. 또 아픈가.
바로 담요를 찾아서 덮어주고 가까이 가서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열은 나지 않았다. 아픈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나는 눈을 꼬옥 감고 잠든 단정한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잠결에 꼬물거리는 하얀 손가락, 움찔거리는 눈가 하나 하나가 다 예뻐만 보였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선배는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여라아아. 여라아.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나는 아예 의자를 끌어다 소파 옆에 놓고 앉았다. 처음에는 불분명하던 선배의 발음이 점점 정확해지며 단어를 만들어냈다. 찬열아아. 선배는 잠꼬대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선배에게 입 맞춘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선배의 입에서는 선배의 향기가 났다. 선배가 내뱉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선배와 숨을 공유하는 행위는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나는 혀를 내어 선배의 입술 선을 따라 그렸다. 피곤했는지 살짝 거칠어진 입술이 다시 촉촉해지도록 정성들여 쪽쪽 빨고, 핥아냈다. 곧 꽃송이가 피듯 선배의 입술이 벌어졌고, 나는 망설임 없어 선배와 혀를 맞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겨우 정신이 든 내가 얼굴을 떼어내자마자 마주친 것은 아직도 잠에 젖은 촉촉한 선배의 눈이었다. 아까 선배가 잠꼬대를 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깨어있었구나. 언제부터?
“네가 한 거야?”
“네…. 저, 그게… 별 뜻 없었어요. 죄송해요.”
네가 한 거냐는 선배의 말에 나는 더듬거리며 별 뜻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이게 변명이 될까. 갑자기 친한 후배가 키스를 해왔는데. 선배는 그걸 별 뜻 없었다고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나는 그 후로 선배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배와 어설픈 키스를 나눈 봄날 이후, 나는 선배와 예전처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복도에서 선배가 몇 번 아는 척을 해왔지만, 이야기를 하게 되어도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내가 먼저 피했다. 시간이 흘러 학기를 넘기고 선배는 수능을 보았다. 결국 나는 선배의 졸업식 날까지 선배와 말 한마디 섞지 못했다. 선배를 사석에서 다시 본 것은 사진 동아리 3학년 선배들의 송별회 날이었다.
“다 1년 동안 수고했고! 잘들 들어가.”
“네, 선배님들 졸업 축하드립니다!”
“그래. 가끔 학교 놀러올게.”
“에이, 저희가 거기로 가야죠. 술 사주세요 술!”
“미성년자가 술은 무슨…”
“아, 형!”
“……”
“…”
다른 형들과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온 신경은 선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하루종일 표정이 좋지 않은 선배. 평소보다 더더욱 신경 쓰인다. 하지만 신경만 쓸 뿐. 말 한번 걸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몇 명은 집으로, 몇 명은 노래방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선배는 어쩌려나. 선배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집에 가려고 준비 중인 선배가 보였다. 이대로 놓치면 정말 끝이겠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 선배를 잡았다.
“백현 형? 형은 안 가요?
“으,응. 가야지.”
“형, 어디 아파요? 오늘 하루 종일…”
“저기. 나, 갈게.”
어쩐지 울음기가 묻어나는 선배의 목소리에 마음이 저릿했다. 지금 선배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우면 왠지 눈물로 젖은 선배의 눈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돌려 급히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그새 저만치 멀어진 선배를 뛰어가 다시 잡았다.
“선배. 백현 형.”
내 목소리에 선배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잘 할 수 있어. 지르고 보자.
“나 봐요.”
내 말에 선배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예상대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마음이 아팠다. 멋대로 오른손이 나가 엄지손가락으로 선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선배가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선배 좋아해요.”
시커먼 남자 후배가 고백이라. 선배는 얼마나 당황할까. 선배는 내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본다. 네가 날? 좋아한다구?
“네. 친한 형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뭇 진지한 내 표정. 선배가 꼴깍, 침을 삼킨다. 나 이제 곧 차여야 하는데. 선배 마지막으로 볼 각오 하고 하는 고백인데. 이 슬픈 순간에도 선배는 정말 큰일 날 만큼 예뻐서. 상황에 안 어울리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 누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정말, 예뻐.
“자꾸 예뻐보여요. 설레게.”
“…….”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했어요.”
“저…찬열아. 나는…”
“나랑 사귀자.”
마지막 말을 한 후 막무가내로 입술을 밀어붙였다. 반항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순히 품에 안기는 선배의 몸짓이, 감동적이다. 짧게 키스하고 떨어지니 나를 올려다보는 선배.
“…나도.”
“네?”
“나도, 쭉… 좋아했어.”
그 뒤 내 귀에 들린 선배의 목소리는, 너무 행복해서 마치 거짓말 같았다. 그러니까, 선배도 나를 좋아했던 거구나. 잔뜩 상기된 양 볼을 하고 우물우물 말을 하는 선배가 너무 귀여워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선배의 양 팔이 내 목에 둘러졌다. 우리는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긴 키스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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