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w.규닝
번외. 사실은 좋은 사람
공중에서 달랑거리는 신발코가 자꾸만 우현의 다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어깨 옆으로 비스듬히 걸쳤던 우산살이 기울어진 고개 때문에 흘러내려가자 우현의 걸음이 멈췄다. 제자리에 멈춰서 두어번을 고쳐 업자 엉망으로 걸쳐져 있던 성규의 고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결국에는 우현의 목덜미 바로 옆에 안착한 머리에서 자꾸만 더운 숨이 뱉어졌다. 우현은 단번에 뻣뻣해진 목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우산 손잡이를 뒤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 덕에 성규의 마른 등 위로 판판한 우산이 드리워졌다. 우현은 그제서야 멈췄던 걸음을 다시 뗐다.
"아씨, 더럽게…"
"……."
"…안무겁네. 하긴 뭘 먹고 다녀야 무겁든지 말든지 하지."
우현이 자꾸만 제 시야 안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는 발을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것보다는 무거울 것 같아서 긴장 아닌 긴장을 했었는데 무겁기는 커녕, 생각보다 훨씬 더 가벼운데다가 정처없는 손이 자꾸만 목을 감싸안아와서 오히려 죽을맛이었다. 우현은 뒷덜미에 기대어진 뺨과 제 어깨 위로 얹어진 나른한 팔에 바짝바짝 목울대에 전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반복했다. 자꾸만 뒤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준 탓에 부슬부슬하게 젖은 앞머리가 눈썹까지 내려왔다. 성규를 들쳐업었던 왼손이 앞머리를 정리하다가 다시 그 다리를 받쳐들기에 바빴다.
"아, 씨발 어지러워…."
"그렇게 진탕 마셔댔는데 안 어지러운 게 이상한거지."
"말아."
"응."
"천천히 달려."
중간중간 끊겨오는 잠긴 목소리가 명령했다. 우현은 잠깐 멈춰섰다가 흘러내리려는 몸을 다시 고쳐 업었다. 그와 동시에 크게 흔들린 머리가 다시 앓는소리를 내며 칭얼거렸다.
"내가 탄 말은 요금도 올라가나?"
"무슨소리래."
"나 돈 없어서…돈 못 내는데."
취했을 때 성규가 하는 소리의 90퍼는 헛소리니까 무슨 소릴 들어도 신경쓰지 마세요. 우현은 몇분 전 성규를 제게 넘겨주고 일러받았던 동우의 당부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기운없이 축 늘어졌던 발이 조금 세게 우현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자연스레 인상을 그은 우현이 입모양으로 욕을 뱉었다. 헛소리도 헛소리지만, 그 전에 걷어차여서 죽을 것 같은데. 우현이 자꾸만 어깨 위에 여러번 받히는 이마가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끔 걸음을 늦추었다.
귓가에 새근거리며 와닿는 숨소리 외엔 거의 음소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상하게 조용한 새벽 거리를 걷는 발걸음이 갈수록 느려졌다. 삼십분 정도 전, 답답함에 상기된 목소리가 질책하듯이 뱉어낸 말이 자꾸만 귀에 걸려 여지껏 우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성규의 달랑거리는 발이 우현의 허벅지께를 자꾸만 걷어차고 있었지만 체감상으로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것만 같았다. 우현이 환청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도보 위로 고정하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았다. 내기라는 말에 급하게 뱉어냈던 변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 그에 성규는 과녁의 정중앙에 시위를 당겼었다.
기억에 없는 게 더 나빠. 그 말에 우현은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싸매고 그 앞에 주저앉았었다.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했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게 더 나쁜 일이었으니까. 우현은 아무리 헤집어봐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괴로워 시쳇말로 딱 죽을맛이었다. 그러나 감히 짐작해보건대, 어쩌다 지나가듯 던졌던 말장난을 들켜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언젠가 그런 말장난을 꺼냈었다는것도 기억나질 않지만 그게 아니면 이런 말이 나올 이유가 없었기에. 우현은 억울해 미칠지경인 가슴에 바람이 통하지 않아 십여분 동안이나 성규의 옆자리에서 꿈쩍할 수가 없었다.
우현은 정류장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칠 리가 만무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쭉 내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더운 머리를 식히고 있을 즈음에는 야속한 팔이 다시금 우현의 목을 꼭 껴안았다. 결국은, 계속해서 걷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성규의 자세가 틀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어느 가게의 널찍한 간판 아래로 옮겨갔다.
"너 사람 하나 죽이려고 작정했지."
빗물에 젖지 않은 시멘트 계단에 성규를 비스듬히 앉힌 우현이 앞머리를 털어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편하게 벽면으로 기대어놓았던 성규의 머리가 삐끗하며 떨어졌다. 우현이 대답없는 고개를 잡아 다시 벽에 기대게끔 만들었다. 이번에는 불편해 뵈는 성규의 얼굴에 조그맣게 인상이 그어졌다.
"김성규."
"……."
"미미씨."
"응."
그런 성규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던 우현의 입에서, 버릇처럼 불려진 미미씨란 말에 성규의 입술이 열렸다. 대답을 바라고 부른 이름이 아니었기에 우현의 눈도 크게 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번 열린 입은 다음말을 뱉었다. 왜 불러.
"나 왜…불렀어."
이와중에도 발음은 정확하다. 설마 제정신 아냐? 우현의 눈이 성규의 표정 하나하나를 훑기 시작했다. 정신은 말짱히 깼는데 혹시 눈만 감고있는 것일지 몰라 한동안을 기다려보았지만 조용히 감은 눈꺼풀이 떨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잠에서 깬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현이 성규의 눈 앞으로 손바닥을 휘휘 저어보다가 제 무릎 위에 손을 얹고 눈높이를 마주했다.
"미미씨."
"응."
이번에도 멀쩡한 대답은 떨어졌다. 혹여 제정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는 저를 부르는 말에 정확히도 반응하고 있었다. 우현은 여전히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미미씨,하며 몇번이나 말을 붙였다. 그에 성규는 몇번이나 똑같이 대답했다. 왜. 나…왜 자꾸 불러. 우현이 성규의 감은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렇게 취해서…사람 속은 완전히 뒤집어놓고 잘만 자네."
"응."
"남의 진심을 자기 멋대로 오기나 장난같은 걸로 받아왔던 주제에, 잠은 와요?"
"……."
"취하면 만사 오케인줄 알아. 진짜."
우현은 다시 앞으로 떨어지려는 성규의 이마를 받쳐 들었다. 삐끗하지 않게끔 더 편안하게 벽면에 기대어 준 옆머리가 벽에 눌려 일어났다. 우현이 성규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슥슥 정리해주었다. 이번에는 마땅한 대답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잘만 대답하더니. 괜한 부아가 오른 우현의 기분이 괜히 엇나가기 시작했다.
"좋아요?"
"……."
"그렇게 멋대로 잠이나 자버리고. 그러니까 좋아?"
"좋아."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에서 불쑥 좋다는 대답이 뱉어졌다. 우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취했어도 김성규는 김성규네. 꼭 자기같은 대답만 해요."
"좋아."
"뭐가 좋은데요?"
"다 좋아."
성규가 단순히 저의 뒷말만 따라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현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제보니 마냥 엉뚱한 대답만은 하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가 다 좋아요?"
은근히 떨어진 우현의 대답에 힘있게 다물려졌던 성규의 입술이 열렸다.
"이거."
우현의 눈이 휘어졌다.
"이게 뭔데."
"이 냄새."
가만히 무릎 위로 떨어져 있던 성규의 손이 난데없이 제 앞을 짚었다. 별안간의 기척에 깜짝 놀란 우현의 고개가 뒤로 물러나자 우현의 눈 앞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던 성규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우현이 순간적으로 키웠던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다시금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긴 눈을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가져온 우현이 성규의 얼굴을 아래서 들여다봤다.
"나 말하는거예요?"
"그거 좋아."
"…내 냄새?"
"그거."
이번에는 조그맣게 고개까지 끄덕인 성규가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무릎 위로 꾸물거리며 가져갔다. 우현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려는 입가를 애써 내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감당 못할 말만 골라서 하네요. 나 기회 좀 잡아도 돼요?"
"……."
"내 목소리는?"
"좋아."
"내 얼굴은?"
"그것도."
느닷없이 반쯤 눈을 뜬 성규가 제 입가를 양 손으로 쿡 찔렀다. 웃으면 좋아. 디테일한 설명까지 곁들이다가 대책없이 실실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성규를 똑바로 고정시킨 우현의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락스며 매직으로 온통 도배가 된 매끄러운 벽면에 닿은 머리통이 실실거리며 웃는 탓에 자꾸만 움직였지만 우현의 손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우현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좋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는 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만족한 듯 웃었다.
"내 성격은?"
"좋아."
"나는?"
"……."
"남우현은."
연신 비죽비죽 올라가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전까지의 질문들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는 말로 장난치듯 웃고있던 목소리가 뚝 끊긴 것은 지독히도 현실적인 대목에서였다. 우현이 더이상 떨어지지 않는 입을 주시했다. 술김에 한껏 가벼워졌던 입이, 아무리 취기에 절어있어도 이번만큼은 같은 대답을 돌려줄 것 같지 않았다. 응? 왜 대답이 없어요. 혹시나싶어 재촉해봐도, 방금전까지 웃고 있던 입은 딱잘라 다물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감겼던 눈꺼풀이 아주 조금 떠졌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은 다시 좋다는 말을 뱉기보다는 아주 진득하게 우현의 얼굴에 흐릿한 눈을 고정했다. 술김에 흐트러진 시야를 바로잡고 싶어하는 듯, 풀린 눈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 웃기면서도 처연해, 듣고 싶던 대답을 듣지 못한 탓에 씁쓸해져있던 우현이 아까의 성규처럼 배시시 웃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마요. 솔직한 대답 들을바에는 안 듣는 게 나을것같아."
"……."
"그래도 앞에 했던 말들 있잖아요. 내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좋고 한 거."
"……."
"그거 내일…기억해줄거예요?"
느리게 떨어진 말의 끝에는 또 그만큼 느린 정적이 따라붙었다.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건지, 있는대로 풀린 눈이 우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조금 감겼다. 성규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대답. 성규가 하는 양을 무작정 지켜보고 있던 우현이 작게 웃었다.
"기억 안해준다고?"
"……."
"하긴, 나같아도 나 밉겠네."
"……."
"그럼 대신 뭐 하나만 부탁할게요. 사과부터 할테니까, 미안하다고 말하면 화 좀 풀어주기."
미안하다는 말은, 미미씨 맨정신일 때 하고싶으니까 지금은 아껴둘거예요. 우현이 눈썹 아래로 드문드문 흘러내리는 성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반쯤 뜨고 있었던 눈꼬리가 아주 조금은 유하게 풀어진 것도 같다. 꼬물거리며 무릎 위로 올라가던 손이 저들끼리 얽혔다. 제 하고싶은 말만 잔뜩 늘어놓은 우현의 입을 멀거니 바라보던 성규가 거의 감고 있던 눈을 시멘트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무릎 위를 배회하고 있던 손이,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잡아내렸다. 우현의 눈이 반사적으로 성규의 얼굴을 향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잔뜩 풀린 눈과는 달리, 똑바른 목소리가 곧바로 뱉어졌다.
거의 기계적으로 좋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던 성규의 입에서 제법 긴 문장이 튀어나오자 우현의 눈도 동그랗게 떠졌다. 사뭇 진지하게 만난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남우현씨 나 좋아하잖아."
"김성규..?"
"나 좋아한다고 하면, 생각해보고 그것도…받아줄거야."
성규가 제 입술 부근을 소매로 훔쳤다.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해."
"……."
"근데 그 전에 미안하다고를 먼저 말해."
성규가 붙잡아내렸던 우현의 손을 어정쩡하게 놓았다. 우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꼭 말해야돼. 미안하다고. 어물거리며 늘어진 말꼬리가 우현의 복잡한 마음을 쿵쿵 찧어놓기 시작했다. 우현의 눈썹이 절로 치켜올라갔다.
뭐라는거야. 엄청난 말을 해놓은 주제에 취했다는 명목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성규는 제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 이번에도 모든 판단은 우현의 몫이었다. 제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방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이었냐고 물을 수 없었으니까. 진짜 뭐라는거야. 김성규. 우현은 꼭 명령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뛰고있는 심장께에 제 손을 얹었다.
"내가 널…"
"……."
"좋아해?"
내가 널 좋아한다고? 어쩌면 본인조차 모르겠는 불분명한 마음을 제멋대로 뱉고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얼굴을 파묻은 성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란스러워져 오는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책임한 그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성규의 머리를 올려보려고 했을 때에는 그 쪽에서 먼저 퍼득이며 머리를 들었다.
토…토할 것 같아. 방금까지 진지한 말투로 어려운 말을 했던 것과는 백팔십도 다른 행동거지였다.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은 성규가 바로 앞에 보이는 우현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미묘하게 떨리던 마음이 확 꺼지며 덩달아 급해진 우현의 손이 성규의 팔목을 붙들었다. 김성규?
"토할 것 같아?"
"으. 물 먹을래. 물 줘…."
"미미씨, 잠깐. 입에서 손 떼고."
"토할 것 같,"
"그러니까 손 좀 떼요."
틀어막는다고 막아지는 거 아니니까. 우현은 꿋꿋히도 제 입을 막고있던 성규의 손을 붙잡아내렸다. 헛구역질마저도 일부러 참고 있는 듯 괴로워보이는 눈동자가 힘있게 감겼다 떠지기를 반복했다. 아, 썅!
여기서 기다려요. 늦은 새벽이라 지나가는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우현이 성규에게 당부했다. 건너편의 가까운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 두세개를 단번에 집어 든 우현이 계산도 하기 전에 뚜껑을 따며 발을 굴렀다. 거의 내주다시피 지폐를 내고 나온 우현은 제 당부대로 꼼짝없이 쪼그리고 앉아 땅에 얼굴을 박고 있는 성규의 앞에 달려가 섰다.
"미치겠네, 진짜."
성규와 눈높이를 같게 한 우현이 여지껏 제 입을 꿋꿋히 틀어막고 있는 손을 또다시 붙들었다.
"말도 안 듣는데 예뻐."
"……."
"이런 상황에도 좋아서 어떡해."
우현이 이미 뚜껑을 따낸 여명을 성규의 옆에 놓아두었다. 그러니까 김성규.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인데,
"니가 알려준 게 맞나봐. 진짜로 내가…"
"으. 죽을것같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상을 찌푸린 성규가 자꾸만 꺼지는 고개를 까딱했다. 우현은 한없이 찌푸려져있는 불쌍한 눈썹을 눈으로 훑다가 조금 웃었다.
"좋아하나보네."
*
성규는 갈수록 취기가 오르는 타입인 것 같았다.
처음 동우에게서 넘겨받았을 때에도 이미 인사불성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을 보아 내린 판단이었다. 이제는 거의 제 팔을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 보이는 성규의 눈에 잠이 가득 들어찼다. 결국은 자리를 옮겨 다시 도보를 걷다가 멈춰 선 곳은 성규의 아파트단지 인근에 있는 나무 벤치였다. 거의 들쳐메다시피 업고 와, 쓰러지듯 벤치에 성규를 내려놓은 우현이 가까스로 허리를 펴며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성규는 제 윗옷이 저만치 올라간 것마저도 눈치채지 못하고 벤치 위로 길게 누웠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우현이 곧바로 성규의 윗옷을 정리해 내렸다. 진짜 큰일날 사람이네. 지 옷이 어떻게 돼 있는지도 모르고. 더이상 올라가지 않게끔 단단히 내린 윗옷을 정리해 주는 와중에, 제 허리를 스치는 찬 손에 몸을 비튼 성규가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우현이 엉망으로 얽혀 있는 성규의 앞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하여간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사람이었다.
가이없는 술기운에, 느닷없이 제 모든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던 것도 잠시ㅡ 중요한 질문에는 돌아서듯 회피해버리고, 또다시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솔직하게 남의 감정을 떠벌려놓은 주제에 이상한 기대까지 심어버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정확한 결론을 내릴수도 없게끔 상황을 얼버무리다가 토하고 싶다는 말로 그 헤프닝을 끝냈었다. 우현이 답답해 마지않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진짜 정말로, 진심인데 모르겠다. 아무리 오래 생각해봐도 김성규는 모르겠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바로 김성규를 두고 하는 말일거라고. 우현은 세상 모르고 뻗어있는 성규를 원망스레 흘겼다.
"어쩌라는거야…."
좋아하라는거야, 마라는거야. 우현은 쭉 째진 눈으로 성규를 흘겨다보기도 잠시 저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에 결국은 웃어버렸다. 헤 벌어진 성규의 입가를 손으로 닫아주면서 이번에는 제 쪽에서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우현이 성규의 얼굴 바로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다가 턱을 괴고 앉았다.
"이거 내일 기억 안해준다고 했죠."
"……"
"그건 내가 싫은데. 나 이런거는 확실히 하는 편이라 어물쩡한 대답 말고 확실히 듣고싶어. 나 되게 참을성 없거든. 오늘밤을 나만 기억하는 것도 엄청 싫어해."
새근새근 터지고 있는 숨이 우현의 코끝에 닿았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서서히 다가가던 고개를 멈춘 우현이 감겨있는 두 눈꺼풀을 내려다봤다.
"못 기다리고 미미씨 재촉할지도 몰라."
"……."
"하루빨리 갖고싶어져서."
분명히 동우가 당부했었다. 성규가 취했을 때 하는 말에 90퍼는 진담이 아니니까 그냥 흘려들으라고. 우현은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하고 있는 동우의 당부를 제 멋대로 지워버렸다. 우현이 술기운에 발갛게 절어있는 입술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90퍼센트가 거짓이라고 해도, 김성규는 방금 전 나한테 10퍼센트의 진심으로 말해줬다고 생각한다. 우현은 애가 닳도록 느리게 이어지던 조용한 목소리를 다시금 상기했다.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해. 명령조였지만 그 한 마디에 놀란 가슴은 덜걱거리며 오래도록 울었었다. 우현이 쉽사리 꺼지지 않는 미소를 입가에 달고 한참동안이나 성규의 앞머리를 가지고 손장난을 일삼았다. 새벽 공기는 딱 적당했다. 성규의 가방 밖으로 삐져나와있던 가디건을 마른 몸 위에 덮어두고 오래도록 자는 얼굴을 훔쳐다보고 있기를 몇 분째, 그 날의 막바지 즈음에는 감겼던 눈이 슬그머니 떠졌다.
천천히 떠진 눈이 바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을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란 기색 없이 잠잠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현의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눈이 마주친 것 치고는 어느 한 쪽 놀란 기색없이 서로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잔바람이 둘 사이의 공간에 파고들고, 콧잔등이 시원하니 말라갈 때 쯤에는 성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땅콩 먹었어?"
술기운에, 혹은 잠결에 절반정도 잠긴 목소리가 또 웃겨 우현이 웃었다.
"응. 먹었어요."
우현의 대답에 알겠다는 듯 깜빡인 눈이 우현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우현이 조금 간격을 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거 나 챙겨주려고 들고 나왔던거예요?"
"응."
"그래서 물어봤던거야? 예전에."
우현이 대답하지 않는 두 눈을 쳐다보다가 눈을 휘어 웃었다.
'남우현씨. 땅콩같은 거 되게 좋아하나봐요.'
'왜요?'
'뭐, 계속 먹고있길래. 먹는 건 좋은데…'
안 들리게 좀 씹어줘요. 시끄러워.
여지없이 짜증스러웠던 얼굴이 연쇄적으로 떠오르고, 곧바로 입을 다물고서는 땅콩을 오물거렸던 제가 생각나 우현의 입가에 웃음기가 끊기질 않았다. 멀뚱멀뚱히 떠진 눈이 다시금 반쯤 감기려고 했을 때, 우현의 입술이 성규의 이마에 짧게 닿고 떨어졌다.
"못참겠으니까 봐줘요. 입술 아니니까."
우현은 아까와는 달리 화들짝 떠진 눈에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을 맞췄다. 어차피 내일이면 기억도 안 해줄거라며. 그러니까 이번것도 모른 척 까먹어줘요.
그에 성규의 입가에도 비실비실 웃음기가 옮았다.
"알았어. 까먹어줄게. 말아."
"응."
"이제 집에 가자."
역시 10퍼센트의 진심이 맞을거라고 확신했다. 우현은 아마 한 번도 제게 거짓을 고한적이 없을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란히 웃었다. 성규의 머리가 기대어진 벤치에 무릎이 부딪히는 마당에 둘의 몸이 잠깐동안 흔들렸다. 우현은 애매하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워 아스팔트 바닥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덕분에 한결 더 편히 마주한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다. 우현은 취기에 달아있는 뺨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노랗게 잠긴 가로등 불빛이 성규의 얼굴 위로 재워졌다. 아마 그 덕이었을까,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성규가 예뻐 보였던 탓이었다.
역시 미친미모라니까.
졸음이 가득 들어찬 눈을 억지로 감게끔 만들며, 우현이 두번째로 그 이마에 입을 맞췄다.
..ㅎㅎ..ㅎ |
나는 이제 창피해..도망 안쓰니만 못하는 번외ㅠㅠ 텍파나 갖고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