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스입니다
한달 지났나요? (안지났나요?)
어쩜 글을 한달에 한편씩 내놓을 수 있는지, 이게 무슨 원피스도 아니고
토지같은 대하 드라마가 될 기세에요
스스로 뉘우치겠습니다.
빠릿하게 온다던 약속을 매번 어기고만 있으니,
쌍시옷 넣어 욕하셔도 딱히 대꾸할 수가 없네요(오열)
원래 어제 들고 오려고 했었는데, 컴퓨터 앞에서 글쓰다가 잠들었지 뭐에요(핑계)
대신 그래서 인질로!
민윤기를! 달달한 민윤기를 데려왔는데!
(미늉기를 고소함미다아)
이제 지민이 찌통은 진짜 잠깐 넣어 두려구요
지민이 덕에 윤기 빙의글이라는 존재성이, 그 뿌리가 흔들릴 뻔 했어요
(진짜로 제목 옆에 박지민 이름도 넣어야 하나 고민했던 건 함정)
오늘 민윤기는 보다 빵빵하게 심장을 주무릅니다
흉부외과 의사처럼 말이죠.
밤새 줄곧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 멎은 아침이었다. 우산을 쓰기엔 애매한 빗방울들이 공기 중에 가루처럼 흩어졌다. 이미 눅눅하게 가라앉은 머리끝을 죽죽 잡아당기다 입술을 깨물었다. 여태 아무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옆에서 걷던 정호석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뭐야. 너와 적막은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그리고 내 기분을 달랜답시고 내 앞으로 제 주머니에서 꺼낸 구겨진 풍선껌을 건넸다. 말없이 풍선껌을 받아 들고 껍질을 벗겨 입으로 집어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단물은 구린 기분을 그나마 낫게 해주었다.
“야, 근데 존나 박지민 사기꾼이지 않냐?”
“……….”
“아니 내가 그 자식을 얼마나 보살폈냐? 자전거로 데리러가, 또 데려다줘. 여자 친구한테도 안 해줬던 짓을 해줬는데. 전화로 딸랑 자기 먼저 간다고― 완전 어이없어.”
으르렁거리는 정호석은 박지민에게 잔뜩 서운한 상태였다.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끌고 박지민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박지민에게서 버스타고 먼저 가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타고 있는 사람 없이 정호석의 손에 끌려가던 자전거에 괜히 눈이 머물렀다. 덜덜덜 돌아가고 있는 자전거 바퀴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나는 귓바퀴를 매만졌고, 괜히 혼자서 짜증을 부리다 자전거 앞바퀴를 걷어찬 정호석은 바퀴살 사이에 발이 끼어 아프다고 또 징징댔다.
교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등교하는 학생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살짝 본 정호석도 그 대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교문 앞에 서있는 선도부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교정 안으로 들어서는 정호석은 어딘지 모르게 신나보였다. 끌고 왔던 자전거를 자전거 보관소에 매어두고 오겠다며 손을 붕붕 흔드는 정호석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사람이 많은 학교 건물 입구 앞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서로 마주보고 선 민윤기와 박지민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무슨 조합이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도 모르게 몰래 그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걸음을 멈췄다. 떨어진 거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둘은 분명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화하게 웃는 얼굴의 민윤기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박지민의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뭐야. 둘이 만나서 할 이야기가 뭐가 있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학교에서 보자던 민윤기의 마지막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좀 전에 주고받은 문자였다. 뭐라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짧게 알았다고 보냈었던 문자. 혹시 언제 답장이 올지 몰라서 줄곧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딱히 답장 같은 건 오지 않았다. 그게 불과 오 분 전이었다. 그럼 두 사람은 만나서 오 분째 저렇게 마주보고 서있었다는 소리인가. 가까이 가서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마음도 생기지가 않았다.
그때 민윤기가 웃는 얼굴로 박지민에게 뭔가를 건넸다. 파란 우산이었다. 우산과 민윤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박지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박지민이 뭐라고 하자, 민윤기는 더욱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둘의 대화가 궁금했다. 그래서 겨우 뗀 발을 한걸음 앞으로 내딛은 찰나, 자전거를 묶어놓고 온 정호석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야. 박지민이랑 민윤기 아냐? 둘이 왜 저러고 있대?”
“글쎄.”
“박지민 저 새끼 먼저 간다더니, 민윤기 만나려고 그랬나.”
“……….”
민윤기와 대화를 나누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던 박지민은 고개를 우리 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것 같은 얼굴의 박지민은 들고 있던 우산을 등 뒤로 재빨리 숨겼다. 저 우산이 뭐길래 저렇게 놀라면서 숨기는 거지. 박지민이 뒤로 숨긴 손이 궁금했지만 미처 의심을 하기도 전에 내 이름을 부르는 민윤기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드는 민윤기를 경악스런 얼굴로 보던 정호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옮아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민윤기가 너한테 인사하는 거지?”
“아마도….”
“뭐야? 둘이 정분났어?”
“…몰라.”
정호석의 물음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서 빨리 자리를 피했다. 민윤기와 박지민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민윤기는 잽싸게 내 옆으로 붙어왔다. 찰나에 마주친 박지민의 눈에 한기가 서려있었다. 반면에 나를 바라보는 민윤기의 눈은 꿀이 떨어질 듯 사르르한 모습이었다.
“학교 일찍 왔네?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응. 정호석이 일찍 데리러왔거든.”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어?”
“귀까지 빨간데?”
정호석의 말에 달아오른 얼굴이 심심치 않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양 볼을 감싸 쥐었더니 민윤기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 지금 진짜 햄스터 같아.’ 라며 웃었다. 아침부터 심장이 요동질을 쳤다. ‘어제 도서관에서 헤어지고 나서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그러다 민윤기의 말 한마디 내 어깨를 끌어안는 행동 하나에 덜컹거리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잠깐 잊을 뻔 했었다. 민윤기가 내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이 두근거림이 비단 나의 감정 뿐만은 아니라는 걸 까맣게도 잊고 있었다. 너무 오랜 짝사랑이라 그러는지는 몰라도, 내 옆에 선 민윤기가 이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어깨에 올라온 민윤기의 손이 뜨거웠다. 닿는 어깨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뜨거운 민윤기의 손이 이상한지, 화끈거림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틀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민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지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늘 언제나 단정히 잘생긴 민윤기의 옆얼굴을 보며 텁텁한 입맛을 다셨다.
“윤기야. 지민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뭐?”
“둘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아, 그거?”
그러다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민윤기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내가 빌린 게 있어서 돌려줬어.’ 라고 대답했다. 올려다본 민윤기는 진짜라는 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잘못된 일도 아닌데, 민윤기의 두 눈을 보고 있으니 괜히 내가 그를 나무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자 들러붙어오는 민윤기의 물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그냥. 두 사람 같이 있는 거 지난번 농구 시합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아서.”
“아, 그런가?”
“두 사람 정말 중학교 때 얼굴만 알던 사이였어?”
“……….”
민윤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민윤기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보기위해 나도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엔 등교를 하는 수많은 학생들만 있을 뿐이었다. 민윤기는 자상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거 같은데.’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대답이랍시고 늘어놓았다. 정말이지 하나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민윤기를 잡았더니 알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손에서 흘러나가고, 뒤늦게 그것을 붙잡아 보려고 해도 내 손을 잡은 민윤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내가 오르고 있던 것이 첩첩산중이었다.
Love Like Sugar
W. 독스
09
올라갔던 장마전선의 후퇴와 함께 태풍이 찾아온다고 했다. 늦은 오전부터 쉴 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덥고 습한데, 무슨 놈의 태풍이야. 투덜거리는 내 말소리에 옆에 있던 정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겨울에는 하루 빨리 여름이 오게 해달라고 극성이더니.”
그 소리에 괜히 내가 할 말이 없어져서 헛기침만 크흠― 하고 했다. 사람이 간사 했던 게 어디 한두 번 일인가. 입술을 쭉 내밀어 불만을 표했더니 정호석이 웃는 얼굴로 내 입술을 때렸다. ‘어디 닭똥집 같은 입술을 내밀고. 흉하게.’ 그리고 덧붙이는 말에 욱 해서 기어이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나서야 속이 좀 시원해졌다.
꽤 열심히 준비했던 수학 시험은 개 주기 좋게 죽을 쒔다. 시험을 잘 봤느냐 묻던 민윤기의 문자에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답한 나는 지그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민윤기가 내게 수줍은 고백을 해오던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가슴이 말랑말랑해 지는 것이, 여간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민윤기는 어떨까. 나처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설레어 할까. 상상해보면 또 아무도 모르는, 둘만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생겼다는 사실과 이제 엄연히 민윤기가 내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현실이 온몸으로 느껴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런 나를 보며 정호석은 여름감기 걸린 개처럼 왜 그리 떨어대느냐 타박했지만 상관없었다. 나만 좋으면 된 거니까.
“담임한테 들은 말인데, 어쩌면 우리 진짜 방학 꽤 빨라 질 수도 있어.”
“헐, 진짜? 왜?”
“태풍 올라오잖아. 심하면 또 휴교할 게 뻔한데, 그럴 거면 애초에 방학 더 앞당기자고 몇몇 선생님들이 건의 하셨나봐.”
“대박인데?”
“그치.”
정호석의 말에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앞자리에서 대놓고 엎드려 자고 있던 박지민도 몸을 들어 올리며 우리 쪽을 쳐다봤다. ‘뭘 봐, 인마.’ 정호석의 시비조에도 박지민은 자기가 묻고 싶은 것만 묻겠다는 듯 ‘방금 한 말 진심?’ 이라며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싶어 우리 대화를 엿듣지 말라는 정호석의 성질엔 또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다시 책상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심드렁한 얼굴이었지만 깁스 밖으로 나온 발가락이 꼼지락 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방학을 한다는데 좋아하지 않을 학생이 있긴 할까.
“근데 오늘 종례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거야. 담인 안 오나.”
“그러네, 늦네. 내가 교무실 한 번 가볼게.”
여기저기 종례가 늦어진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오자 정호석은 책상위로 반쯤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교무실에 가보겠다면서 앞문으로 나갔다. 정호석이 나간 문을 아무 생각 없이 주시하다 손에 들린 핸드폰의 진동에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안 끝났어?]
민윤기에게서 온 문자였다. 살포시 걸친 미소와 함께 답장을 보냈다. ‘응, 아직. 너는?’ 빠르게 보낸 답장에 보다 더 빠르게 되돌아올 문자를 기다렸다. 속으로 십초를 세기가 무섭게 역시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벌써 끝났지. 너 기다리고 있어.]
이런 가슴 간지러운 대화를 나눠 본적이 살아생전에 있었던가. 씰룩대는 입 꼬리를 애써 누르며 다시 답문을 썼다. ‘나 종례 좀 늦어질 거 같은데. 먼저 가도 돼!’ 가지 않았으면― 하면서 보낸 답장이었지만, 이렇게 말한 이상 먼저 가도 서운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히 그렇게 보냈나 후회를 하던 찰나 교무실에 간 정호석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등장했다.
기다렸던 것에 대해 보상을 받듯 종례는 스피드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정호석에게 들었던 것이 사실인지, 담임은 내일까지만 학교를 나오면 된다고도 말했다. 인사를 끝으로 우르르 한꺼번에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 또한 실내화에서 신으로 갈아 신고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었다. 비 좀 작작 맞고 다니라며 엄마가 넣어 놓았던 우산이었다. 쾌재를 왜치며 나온 건물 밖으로 나온 나와 정호석은 잠깐 멍한 얼굴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우산을 쓴다고 해서 옷이 젖지 않으리란 보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 진짜 미쳤다.”
“어.”
넋을 놓고 내리는 비를 보다 정호석은 번쩍 뭔가가 생각 난 듯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시발, 자전거!’ 밖에 묶어 놓았던 자전거가 비를 맞고 있을 게 생각이 났던 듯, 다급하게 빗속으로 달려가던 정호석은 내일 보자며 손을 대충 흔들어주고 정신없이 가버렸다.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가버린 정호석이 당황스러워서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헛웃음만 픽픽 웃어댔다. 정호석도 갔으니 이제 슬슬 집에 가볼까 싶었지만, 우산을 쓴다고 해도 빗속을 뚫고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면 성난 빗줄기가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현관 앞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혹시 민윤기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비가 조금 멎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칠 비가 아닌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목을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 틈에 한눈에 띄는 민윤기는 보이지가 없었다. 먼저 가라고 그래서 진짜 먼저 가버렸나. 내심 서운해서 내색은 못하고 입을 삐죽였고, 어김없이 오늘 하굣길은 혼자 하게 생겼구나―라는 생각에 한숨이 픽 흘러나왔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낯설면서도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그곳엔 내 옆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와서 서는 박지민이 있었다. ‘네가 어쩐 일이야?’ 묻는 내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막힘없이 내 어깨에 팔을 걸친 박지민은 ‘비 많이 오네.’ 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호석이랑 같이 가야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아침에 네가 정호석 까서 그러는 거 아냐. 정호석은 자전거 비 맞는다고 먼저 뛰어 가버렸는데. 너 그 다리로 괜찮겠어?”
“어차피 내일 깁스 푸는 날이니까 젖어도 상관없어.”
“내일 깁스 풀어?”
“응. 시간 진짜 빠르지. 사실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이거 때문에 제대로 못 걸어서 불편해 죽겠다.”
내 어깨를 짚고서 삐딱하게 서있는 박지민의 다리는 그렇지 않아도 불편해보였다. 누구보다 날렵했던 애가 저런 뭉툭한 걸 다리에 매달고서 뒤뚱뒤뚱 걷고 있으니 과연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기도 했다. 초록색 깁스 위엔 나와 정호석이 그려놓은 낙서들이 점점 지워져 가고 있었다. 박지민과 내가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게 얼마만이지―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 상황이 너무 반가워서 울컥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아무래도 친한 친구와 멀어지는 일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무거운 것이라서.
“좋다.”
“뭐가.”
“그냥 너랑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맨날 하는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뭐가 좋냐.”
“요즘엔 맨날 못했거든? 네가 나한테 살갑게 안 굴어서?”
“멍청아. 나는 늘 너한테 살가웠거든. 바보 아냐.”
이런 투닥거림도 오랜만이었다. 박지민도 의미 모를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내리는 비는 잦아들 줄 모르고, 우리도 집에 가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때, 박지민은 물에 젖은 노곤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내가 데……. 아, 아니다.”
“어?”
“나는 먼저 가야 할 거 같아. 조심해서 들어가라.”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나한테 아쉽지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고 우산을 펼쳐 빗속으로 스며드는 박지민이 어쩐지 아쉬웠다. 난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점점 멀어지는 박지민의 등이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파란 우산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낯선 기분이었다.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은 기분. 꼭 내가 박지민의 등을 보고 있을 때 드는 기분.
*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가 조금도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아 결국엔 우산을 펼쳐 들었다. 끝내는 나 혼자 하게 된 하굣길에 신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첨벙 대며 길을 걸었다. 핸드폰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민윤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아니면 내 문자를 아직 못 본걸까. 그냥 문자 말고 카톡을 하자고 그럴 걸 그랬나. 여러 생각이 들면서 혼자 하는 하굣길이 더 외로워졌다. 갑자기 혼자 남아 버린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이 공허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생각 없이 길을 걸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온통 민윤기와 나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이었다. 민윤기가 내게 고백을 하던 순간부터 오늘까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된 일이었지만, 꼭 꿈처럼 느껴져서 현실과 상상이 혼동이 되어 버리는 지경이었다. 민윤기는 여전히 좋았다. 나를 보며 웃어줄 때, 전화로 목소리를 들려줄 때. 걸을 땐 내 어깨를 살며시 감싸는 그 때까지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마찬가지로 나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 힘들만큼 더 좋은 일이었다.
더불어 멀어지던 박지민과의 관계도 이렇게 점점 회복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멀어졌다 느꼈는지는 몰라도, 분명 전과 같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적 없던 박지민이라서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배가 됐었다. 서먹해진 것 같은 관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내게 손을 내밀었던 박지민을 내가 너무 밀어냈었던 건 아닌가. 어쩐지 민윤기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박지민에게 먼저 등을 돌렸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면 들수록 박지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미안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먼저 나를 생각해줬던 박지민과는 평생 친구로 남고 싶다고. 이젠 정말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박지민에게 고맙단 말 정도는 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그건 또 언제가 될까― 복잡한 한숨도 섞여 흘러나왔다.
“외간 남자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기에, 어깨가 이렇게 축 쳐지셨나.”
그러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언제부터 따라 온 건지 모를 민윤기가 내 뒤를 따라 밟으며 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면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걸어?’ 내 옆으로 온 민윤기가 말했다.
“진짜 버릇인가. 너 혼자 걷고 있으면 엄청 깊은 생각에 빠지나봐. 전에도 몇 번 그랬었잖아. 나도 못 보고 지나치고, 고개 푹 숙이고 걸어가고.”
“아, 그런가?”
“뭐야 이 싱거운 반응은.”
“아니 난 정말 그게 버릇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냥, 버릇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무튼 그렇게 걷지 마. 고개 바짝 들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걸어야지. 안 그럼 나는 걱정 할 수밖에 없잖아. 예쁜 내 여자 친구 누가 업어 갈까봐.”
민윤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관계의 정의가 바뀌었다 해도 여전히 설레고 여전히 떨렸다. 민윤기가 내 옆에 서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벅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좀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닌 건지. 제 입으로 닭살 돋는 말을 해놓고 능글맞게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민윤기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 같아서.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나란히 걷던 민윤기는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접고는 자연스럽게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위로 우산을 겹쳐 잡고 ‘내가 들게.’ 라며 우산을 뺏어갔다. 또 다시 빨개지기 시작하는 얼굴과 귀에 황급히 손 부채질을 하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뭐야. 그렇게 얼굴 빨개져서 고개 돌리는 건 너무 귀엽잖아.”
“귀, 귀엽기는!”
“말 더듬어도 귀여워.”
“안 귀여워! 하나도 안 귀여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를 조련하고 있는 것 같은 민윤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바로 집에 갈 거야?’ 묻는 민윤기의 물음에 딱히 계획이 없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고개를 갸웃 하면서 ‘이대로 보내기는 싫은데.’ 라고 중얼거린다.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더 낮게 울리면서, 나는 또 그 모습에 반해 터질 뻔했던 탄성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데이트 하고 들어가면 안 돼?”
“데이트? 무슨 데이트?”
“그냥, 아무데에서나. 너 하고 싶은 거 하자.”
“나 하고 싶은 거 없는데…….”
갑자기 데이트를 하자는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말엔 또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당장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고개를 젓자 민윤기는 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나를 봤다.
“남자친구 생기면 하고 싶었던 거 없어?”
남자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 민윤기의 물음에 잠깐 고민에 빠졌다. 내가 남자친구랑 하고 싶었던 일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민윤기 말고는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아무래도 나는 남자친구라는 그런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단 한 번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같은 걸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민윤기와 한마디라도 섞어보기, 민윤기가 나를 쳐다봐 주는 거. 그런 것만 바랬었으니까.
“한 번도 너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대답했더니 민윤기는 잠깐 벙 찐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 대답이 없는 민윤기가 이상해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나를 빤히 보고서 얼어버린 상태였다. 민윤기가 걸음을 멈추니, 내 걸음도 자연스럽게 따라 멈췄다. 아무도 말이 없는 정적 위로 잔잔하게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 울렸다. 투둑투둑― 빗소리에, 또 나를 바라보는 민윤기의 시선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말이 없던 민윤기는 헛웃음을 피식 터뜨리며 내 머리에 큰 손을 얹었다.
“……그렇게 훅 들어오면 오빠 손 떨려요, 탄소야.”
“어?”
“방금 설레서 심장 멎을 뻔 했다고. 모르는 척 하면서 사람 주무르는 말 은근 잘하네. 사실은 여우 아냐?”
“그런 거 아닌데…….”
“아닌 거 알아. 이거 봐, 이거 봐. 또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보는 것 봐. 나 진짜 미치겠네.”
내 머리를 헝클이던 민윤기는 제가 우산을 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덕분에 우산이 뒤로 젖혀져 비가 쏴하게 머리 위로 쏟아지고 나서야 ‘미안, 미안’ 하며 나를 품에서 떼어내고 우산을 고쳐 잡았다. 머리가 살짝 젖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욱 더 못 보내겠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갈래?”
“…그래.”
잠깐 부딪쳤던 민윤기의 가슴에서 내 것과 마찬가지로 쿵쾅쿵쾅 뛰고 있던 심장을 확인했기 때문에.
*
눈에 보여 들어온 카페는 전에 민윤기와 만났었던 그 카페였다. 익숙한 얼굴인 듯, 점원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새삼 달라진 기분을 느꼈다. 그와의 만남에 수줍어하며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만났던 이곳에 지금 나는 그의 뒤를 따라 함께 앉을 자리를 고르며 들어서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저 민윤기를 좋아하던 열여덟 여고생은 지금 민윤기의 여자 친구로서 당당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내 얼굴을 아는 것 같아 보이는 몇몇 점원들은 나와 민윤기를 번갈아 보며 그에게 뭐라 뭐라 농담을 건넸고, 그에 민윤기는 ‘제 여자 친구 예쁘죠. 이제 여자 친구 됐어요.’ 라며 나를 자랑하듯 말했다. 새삼스럽게 또 좋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의 옆에 서서 수줍은 웃음을 감추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민윤기.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거 마실래?”
“뭐?”
“내가 예전에 만들어 줬었던 거.”
화이트 모카. 나를 닮았다던, 나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던 화이트 모카. 민윤기가 내게 줬었던 가장 첫 번째의 선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윤기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더니 저쪽 가장자리를 가리키며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민윤기의 가방까지 받아 들고서 그가 가리켰던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주방 좀 빌리자던 민윤기를 흔쾌히 승낙한 점원들은 커피머신 앞에서 한걸음 물러나줬다.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인 줄 알라는 카페 매니저의 말에 민윤기는 넉살좋게 웃으며 ‘아이, 형. 저도 여자 친구한테 멋있는 모습 좀 보여주게요.’ 라고 말하며 나를 쳐다봤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민윤기의 검은 눈동자가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웃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원두를 갈아 샷을 내리고, 달달한 향이 나도록 화이트 초코 시럽도 넣고. 이렇게 저렇게 음료를 만들던 민윤기는 나를 확인하듯 간간히 내가 있는 곳을 봤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나와 당연히 눈이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민윤기는 웃어줬다. 내가 처음 보자마자 반해 버렸던 그 잔잔한 미소로. 무심한 듯 다정함이 흐르고 있는 그 미소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 앞에 닥친 이 행복이 과연 내것일까. 오롯하게 내 것일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 옆으로 의구심도 함께 피어올랐지만 그것가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너무 퍽퍽했다. 지금 이 행복을 온전히 즐기기에 그동안의 나는 닭 가슴살 마냥 퍽퍽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만들어서 잘 모르겠네. 자, 맛이 어떤지 봐봐.”
음료를 만들어 나온 민윤기는 머그잔을 내 앞으로 내려놓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와 같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민윤기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빨대로 음료를 빨아 들였다. 끌어올려진 음료는 입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향긋한 향기를 풍기며 달짝지근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맛을 음미하던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내 반응에 민윤기는 시름을 덜은 듯,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쉬었다.
“다행이네.”
“맛있어, 진짜.”
“그때 생각난다. 그치?”
“응.”
"그때 너 진짜 예뻤는데. 알아?"
“예쁘긴 무슨. 그렇게 오래 된 일도 아닌데 왜 그래.”
“오래 된 일 아닌 것 같아도, 진짜 오래전인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이렇게 네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앉아있는 것도 신기하고, 내가 못할 것 같았던 말을 한 것도 신기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윤기의 눈이 진지했다. 웃고 있지만 장난 식으로 농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을 빤히 보며 음료를 또 다시 들이켰다. 홀짝홀짝 잘도 마시는 내가 귀여웠는지, 민윤기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박지민이 내 뺨을 꼬집을 땐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묘하게 긴장되는 게 처음 느껴본 기분이었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궁금한 것도 많아요. 뭔데?”
“전에 너 여기서 나한테 무슨 말 하려다가 말았잖아. 나중에 꼭 말해준다고.”
“내가?”
“응. 나랑 가까워지게 되면 말해준다고. 이제 이만하면 가까워진 거 아냐? 말해줘, 뭐였는데?”
자기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민윤기는 마침내 생각이 난 듯 ‘아, 그거.’ 하고 입을 뗐다. 이 카페에 오지 않았더라면 잊어 버렸을 뻔 했던 기억이 떠올라 뿌듯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 그거.’ 하고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민윤기는 뭐가 부끄러운지 머리를 벅벅 긁어대다 아무것도 아닌데― 라며 운을 띄웠다.
“그냥. 너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을걸.”
“나 좋아한다고?”
“그렇게까지 직접적이진 않아도. 뭐, 그냥 더 가까워지게 되면 고백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 그 정도?”
“그럼 너 그때도 나 좋아했었어?”
“당연한 거 아니야? 좋아하니까 자꾸 네 눈앞에 나타나려고 애쓰고 그랬지. 내가 너한테 이렇게 사근사근히 대해줘서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나 사실 여자한테 그렇게 다정다감한 남자 아니야.”
의외의 대답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던 민윤기의 말은 과연 나를 놀래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말이 없어진 나를 흘긋 보다 피식 웃은 그는 ‘뭐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꼭 혼자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처럼.’ 하고 말하다 더 크게 떠진 내 눈에 눈을 느리게 꿈벅이며 ‘뭐야, 진짜야?’ 라고 되물었다.
“진짜 너 혼자 좋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응.”
“에이. 너무 착각이 심한 거 아냐?”
“난…. 네가 너무 나를 밀어내고 가까이도 못 가게하고 그래서. 그냥 학교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너 밀어낸 적도 없었고, 못 오게 했던 적도 없었는데?”
“……철벽 쳤었잖아, 나한테.”
“안쳤었어, 너한테.”
어느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서로 한마디가 지기가 싫은지, 그랬었네, 아니네―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게 웃겨서 내가 먼저 푸흐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민윤기도 상황이 민망했는지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고, 금방 분위기는 녹으면서 대화 주제를 이어갔다.
한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연애 초기 커플이라면 흔히 해봤을 ‘너는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줍게, 또 그리고 당당하게 말을 하는 도중에 뒤에서 들리는 어떤 커플의 대화에 잠깐 귀가 쫑긋 섰다.
“고딩 커플인가 봐.”
“교복 입은 것 봐. 진짜 귀엽다.”
“자기야, 우리도 나중에 교복 데이트 할래? 쟤네 보니까 하고 싶다.”
“그래? 너 하고 싶으면 하자.”
그 말소리를 나만 들은 건 아닌지, 민윤기도 잔잔하게 웃으며 ‘우리 귀엽나봐.’ 라고 작게 말했다. 그가 걸친 교복 셔츠를 보면서 참 교복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정하게 생긴 이목구비 때문인지, 하얀 피부 때문인지. 사실 교복 이외의 옷을 입은 걸 보지 못해서, 사복이 더 잘 어울리는지 교복이 잘 어울리는 지 판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윤기야. 나중에 너 교복 아닌 옷 입고 있는 것도 보여줘.”
“갑자기 왜?”
“그냥, 보고 싶어서.”
너무 생뚱맞은 부탁인가 싶었지만,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 반응해줄까. 당황한 지금 표정 같으면 싫다고 거절할 것 같기도 한데. 과연 정말 거절할까. 아직 민윤기의 성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서 그의 행동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민윤기는 볼 한가득 바람을 빵빵하게 집어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다는데 보여줘야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리고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의 이런 행동에 다시 한 번 반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내 부탁을 망설임 없이 들어주는 남자. 그런 남자들이 과연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너는 내가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줄거야?”
“무슨 부탁있어?”
“아니. 지금 당장 있는 건 아닌데, 내가 무슨 부탁이든 해도 들어줄 건지가 궁금해서.”
“음, 아마 너를 놓아달란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주지 않을까? 네가 하는 부탁인데.”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민윤기의 대답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훨씬 많이 좋아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를 보는 내 눈동자는 지진처럼 흔들리고 있을 게 분명했는데, 반면 민윤기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언제쯤이면 그의 고요한 눈동자를 보고서도 그가 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될까. 얼마나 더 보고 또 봐야 알 수 있게 될까. 묘한 승부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를 조금 더 알고 싶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그의 완벽한 여자 친구가 되고 싶었다.
“있잖아, 윤기야. 나는 너를 조금 더 알고 싶어.”
“……….”
“눈만 봐도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연인이 되고 싶어.”
어쩌면 내 욕심이었다. 사람 관계라는 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세상인데, 나는 마치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욕심을 내고 있었다. 처음이기에 내볼 수 있는 욕심이었다. 온전히 그를 다 갖고 싶은 욕심. 오롯하게 그가 내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
“……….”
그런 내 욕심을 과연 그는 알아줄까. 이 욕심을 과연 그가 이해해줄까.
민윤기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한번 노력 해볼게.”
그리고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아닌 말로써, 내 모든 마음과 그를 향한 내 세상을 끌어안아주었다. 처음 맛 본 세상이었다. 그가 내게 보여준 세상은 마치 그가 내게 처음 내밀었던 화이트 모카처럼,
달콤하고 또 달콤한 둘만의 낙원이었다.
글을 쓰는 제게 원동력이 되어 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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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신 없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은
험한 세상 속 내 손 잡아줄
너라는 사람은
* 혹시 암호닉 빠지신 분은 댓글로 저를 때려주세요! 몹시 심하게 쳐주세요!
* 너무 늦어서 전편 내용 까먹으셨다고 칭얼거리면 혼나요. 때릴거에요. 입술로(쪽)
* 저 요즘 외롭나봐요. 제가 쓰는 글인데도 불구하고, 민윤기때문에 너무 설레서 침대위를 데굴데굴 굴렀네요. 민윤기를 고소합니다아-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쪽) 오타나 탈자는 애교로(찡긋) 댓글로 알려주시면 더욱 좋아요
* 암호닉 신청 방법은 따로 없어요. 그냥 던지고 도망가시면 쫓아가서 뽀뽀해드립니다. 지구 끝까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