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약사 맞아요? 08
"아, 맞다. 저 불꽃놀이 할 거 가지고 왔는데. 나가서 할래요?"
"뭐 그런 것까지… 그럼 일단 나가요. 김태형! 소리 질러놓고 다시 자는 건 뭐야. 일어나, 불꽃놀이 하자며."
김태형이 불꽃놀이를 하자고 했다. 민윤기도 자신이 챙겨온 것 중에 그게 있었다는 걸 이제야 기억해낸 듯 박수를 한 번 짝 치고 자기는 트렁크에 있는 불꽃놀이 할 것 좀 챙겨오겠다고 했다. 잠깐 문을 열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리곤 지금 약간 쌀쌀하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디건 같은 거라도 걸치고 나오라고 말했다. 어차피 불꽃놀이 하면 좀 따뜻해지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그냥 바로 민윤기를 따라나섰다. 아, 김태형 이 자식도 거의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우리는 김태형 술을 깨우기 위해서 다시 해변까지 차 대신 걸어서 가기로 했다. 김태형은… 잘 따라올지 모르겠다. 발걸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앞서 가는 나와 민윤기 뒤에서 안 넘어지고 잘 오나보다. 아, 근데 정말 조금 쌀쌀하구나. 아씨, 그냥 아까 민윤기 말 좀 듣고 혹시 몰라서 가져온 흰 가디건 가져올걸. 갑자기 후회됐다. 핸드폰을 보니 8시 30분을 조금 넘겼을 때였고 내가 있는 곳이 또 바닷가라서 그런지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쌀쌀했다. 역시 사람은 생각을 잘 하고 살아야해, 짧게 후회했다. 민윤기가 걷다가 내게 먼저 말을 꺼내왔는데, 자기도 불꽃놀이는 처음 해 본단다. 그래서 사용설명서같은 것도 꼼꼼히 읽었다고, 칭찬 좀 해달란다. 어구구, 잘 했네요. 환자에게 지으라는 약은 안 짓고 놀러 온 거 참 잘 했어요. 어느새 민윤기가 편해진 건지 나도 모르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농담도 또 잘 받아쳐준다. 참, 이 사람은 착한 건지, 바보같은 건지 뭔지. 그렇게 우리는 걷고 걸어 아까 정신줄을 놓고 진 다 빼고 놀았었던 해변에 다다랐다. 바닷밤바람을 쐬기 위해서 나온 사람이 몇 보였다.
"워~~? 선~브에~늼~~~!"
김태형이 갑자기 어떤 무리들을 보고 꼬인 발음으로 선배님을 외치며 그 무리들을 향해 뛰어갔다. 김태형의 돌발행동에 놀란 나는 민윤기에게 쟤 좀 잡아오라며 말했지만 민윤기는 가끔 쟤 저러고 놀아요, 하고 간단하게 내 부탁을 거절했다. 김태형은 선배라고 부르는 무리들 틈에 어느새 끼어서 마치 처음부터 한 일행이었던 것처럼 유유히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뭐야, 여기까지 놀러와서 다른 사람들이랑 놀아? 저 사람들이 이 타이밍에 여기 온 것도 신기해 죽겠다. …물론 내가 민윤기랑 단 둘이 얘기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준 것 같아서 은근 고맙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물어볼지도 모르잖아.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민윤기는 폭죽스틱이 묶음으로 담겨져있는 포장을 뜯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다 이내 약간 당황한 기색을 띠더니 라이터를 숙소 선반에다가 놓고 온 것 같다고 실토했다. 나는 아, 그렇게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도 이런 사소한 점에선 실수를 하는구나. 안절부절해하며 가만히 못 있는 민윤기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귀여웠다. 나는 그런 민윤기에게 아직 다 못 뜯은 포장이나 뜯고 있으라고 말하곤 라이터를 빌리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민윤기는 내게 그냥 가지 말라고, 자기가 다시 숙소에 갔다가 얼른 오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얼른 불꽃놀이를 하고 싶었거니와, 어느세월에 또 숙소까지 돌아갔다 오나 싶어서 관두라고 했다. 나는 민윤기의 걱정이 담긴 눈빛을 뒤로하고 라이터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들을 물색했다. 흡연자는 싫지만, 아무래도 담배 피는 사람이 라이터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난 나와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담배를 피고있는 남정네 둘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혹시 라이터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웬 라이터요? 왜요?"
"불꽃놀이 해야하는데 불이 없어서요. 금방 쓰고 돌려드릴게요."
"워, 그 쪽 번호 주시면 빌려드릴게요. 어디 살아요?"
난생 처음으로 험상궂게 생긴 한 놈과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한 놈에게 내 번호를 따이게 되는 상황에 닥쳤다. 라이터 빌리러 갔다가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람. 나는 처음 직면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몰랐기에 그저 저 재수없는 두 놈에게 멋쩍은 웃음만 지어줄 뿐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헌팅인가 싶다. 아니, 라이터 빌려달라는데 무슨 내 번호를 달라 하질 않나, 내가 사는 데를 물어보질 않나. 만약 내가 미국에 살면 따라올 거야? 내가 그 두 놈이 내 번호를 달라는 말에 대꾸하지 않자 갑자기 자기들끼리 서로 내 외모에 대해서 평가하고 온갖 날 조롱하자 참았던 화가 슬슬 뻗쳤다. 씨발, 기분 참 엿 같네. 내 몸매가 어떻다느니, 얼굴은 어딜 고쳤을 것 같냐니, 싸가지는 없어보인다느니. 살면서 이런 경험도 다 해 보는구나. 나는 그만하시고 라이터나 빌려주세요, 라고 말하니 크게 웃으면서 싫다며 번호 주기 전까지는 안 빌려준다며 시끄럽게 말했다. 아, 진짜 싫다. 나는 그저 내가 째려볼 수 있는 한 한껏 째려볼 수 밖에 없었다.
"김여주, 나 라이터 찾았으니까 가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어디선가 갑자기 불쑥 나타나선 어제처럼 내 어깨에 한 팔을 걸쳐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그 두 양아치에게서 등 돌려세웠다. 내 이름을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그의 얼굴이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그 순간부턴 표정이 빠르게 굳음과 심각함으로 채워졌다. 나는 놀라기도 많이 놀랐지만 그 미친 타이밍에 나타나서 나를 구해준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뒤돌아 걸어가는 와중에도 뒤에서 수군대는 저 양아치 새끼들의 목소리와 대화가 얼핏 들렸다. 민윤기가 내 남자친구인 줄로 아나보다. 싫었는데, 지금 상황에선 그게 나았다. 아니, 싫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민윤기는 나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갔다.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고 세게 잡은 내 손목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화가 난 듯 보였다. 왜? 왜 대체 화가 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목도 아팠고, 영문도 모르는 채로 이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길로 들어서서 몰랐는데, 우리는 다시 숙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깐, 그럼 불꽃놀이는? 근데 정말 라이터 찾긴 찾은 거야? 민윤기는 숙소 앞 터까지 와서야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많이 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 손목을 이렇게 빨갛게 부을 정도로 잡아도 돼? 그리고 화 내야하는 건 난데 왜 도리어 자기가 화 내는 건데? 내 머릿 속은 나도 모르는 물음표들로 가득 찼다. 의문,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분들이 나를 에워쌌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근데 왜 굳이 갑니까?"
민윤기는 내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짜증난다는 듯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내가 민윤기를 알고 난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과 말투였다. 난 아무 것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전혀 모르겠다. 그냥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떻게 흘러가는지만 알고싶었다. 민윤기가 내게 화를 내는 이유, 그게 제일 궁금했다.
"…저기요, 왜 화를 내요?"
"그럼, 안 내요?"
"그럼 윤기 씨가 제게 화 내는 이유 좀 말해주세요. 저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거든요? 그냥 당황스럽네요."
참다참다 못해 나도 한 마디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내야하는 쪽은 나인데, 왜 자기가 노발대발 하는 건데? 나도 굳은 표정을 하고선 팔짱을 끼고 물었다. 왜, 대체 왜 화 냈어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민윤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서 있더니 내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에 한 번 눈길을 두더니 마른 세수를 몇 번 하며 말했다. 아뇨, 미안해요. 먼저 화 내서 미안해요. 마른 세수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내가 살면서 처음 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쪽에서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오니 나도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나도 머뭇거리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난 이따가 알려주실거죠? 하고 물었다. 민윤기는 내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민윤기는 숙소에 들어가 그 문제의 라이터를 들고 나왔다. 차를 타고 갈 모양인지, 차키도 가지고 나왔다. 나와 민윤기는 차에 올라타고 각자 안전벨트를 멨다. 서먹서먹했다. 우리 둘을 둘러싼 분위기가 처음 만나고 엘레베이터에서 대화를 나누던 때보다 더 어색해지고 이상해졌다. 나도 민윤기도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까 하다가 그냥 불꽃놀이 할 때나 물어보자, 반 쯤 체념했다. 차를 타고 가니 걸어갈 때보다 훨씬 더 빨리 도착했다. 우리가 그 난리를 치는 사이에 사람도 줄었고 민윤기가 두고 간 폭죽묶음도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와 민윤기는 불꽃스틱을 하나씩 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처음에 깜짝 놀라서 흠칫 몸을 떨었는데 그걸 민윤기가 또 본 모양이다. 풉, 하고 웃었다. 웃음이 참 시도때도 없이 나오네 이 양반. 우리는 최대한 평평해보이는 모래사장을 찾아 앉아서 함께 바닷바람을 쐬고만 있었다. 스틱을 빙빙 돌리면서.
"…저, 지금 물어봐도 되요?"
"그럼요."
"왜 화냈었어요 아까? 저 지금도 몰라요 사실. 윤기 씨가 왜 그랬는지."
"사실 여주 씨한테 화났기 보다 저한테 화 났단 게 더 맞겠네요. 저 계속 여주 씨 예의주시 한 거 몰랐죠? 그냥, 그 새끼들이 어디까지 가나 보다가 여주 씨한테 쌍스러운 말 하는 거 듣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로 갔잖아요 내가. 문득 든 생각인데, 그냥 여주 씨 그런 일 없게 끝까지 막을 걸. 고집 부려서라도 갔다 올 걸. 아니다, 혼자 갔으면 또 그 새 그런 새끼들이 막 치대겠죠? 아무튼 뭐, 그래서 그렇게 화 냈네요. 미안해요, 많이 놀랐겠다. 앞으로 라이터 같은 거라도 잘 챙겨야겠어요. 손목 세게 잡은 것도 미안하구요. 많이 아프죠? 파스 뿌려줄게요."
"…아니, 뭐에요. 뭐 그런 걸로 화 내요? 별 거 아닌데? 물론 저도 짜증났는데,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도 있었어요. 손목은 괜찮아요."
…사실 거짓말이다. 아마 민윤기가 안 도왔으면 못 빠져나왔겠지?
"와아, 그게 별 게 아니에요? 제 기준에선 별 겁니다. 양아치들이 인신공격하는데 별 게 아니라니."
"아, 듣고보니 그러네요. 아, 열 뻗쳐. 아무튼 어… 고마워요. 많이."
민윤기는 고맙다는 내 말에 씩 웃고 공중에 폭죽스틱으로 글씨를 썼다. 아니에요, 라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불꽃, 기대한 것보다 너무 예뻤다. 분위기 있었고,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좋았다. 다만 아까까지 서먹했던 우리 둘 사이가 걱정됐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정도 풀어진 것 같아서 마음이 한 시름 놓였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지금 물어볼까? …너무 뜬금없지는 않을까? 생뚱맞고, 어이없진 않을까? 그래도 듣고는 싶었다. 어, 근데 어떻게 물어보지? 윤기 씨, 나 좋아해요? …아니야. 이거 진짜 오글거려, 이건 아니야. 그럼... 아, 모르겠다. 오늘에서야 느낀건데, 난 모르는 게 참 많다. 무슨 뭐 다 몰라, 진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과부하가 걸린 뇌가 열심히 멍 때리는 와중에 민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주 씨."
"아니 잠시만, 저 먼저 말 할래요. 윤기 씨,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어요?"
"음, 뭐든요. 아마도?"
"저 진짜 어떻게 생각해요?"
……. 얼떨결에 결국, 말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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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화빈입니다! 민약사 글도 독자님들 성원에 힘 입어 8화까지 달려왔네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ㅠㅅㅠ ♥ 드디어 여주가 물어봤네요 우엌!!!!!!! (흥분)
아무튼 이번 화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구 다음 화도 기대 많이 해주세요! ♡ 암호닉은 이제 받지 않을게요 ㅠ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