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준회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격이잖아, 다칠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는 가볍게 웃고는 객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공허한 복도를 걸으니 임무를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녀의 말마따나, 괜히 내려온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려온 명령을 어쩌겠는가. 준회는 골프가방을 어깨에 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준회는 주머니를 뒤져 무전기 인이어를 귀에 꽂았다. 한빈과의 연락 장치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착각할법한, MP3와 비슷한 디자인의 무전기. 준회는 한빈에게 명령을 받아 그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인이어를 꽂고 주머니 안에서 무전기의 버튼을 누르자,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드넘버 1022, 바벨탑의 주인.
준회는 인이어를 귀에 더 깊게 꽂았다. 쨍한 금속의 느낌과 함께 인이어가 귀를 파고들었고, 한빈의 목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준회는 골프가방을 바닥에 잠깐 내려놓고 인이어에 집중했다. 이제 한빈이 명령을 내려올 차례였다. 하나라도 놓치면 목숨이 위험해지고, 작전을 망치고, 타이타닉이 침몰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날을 세웠다.
-마크 에반스의 객실은 403호다. 객실 구조는 다 알고 있을 테고. 4층의 객실은 401호부터 402호, 403호를 거쳐서 가장 끝 객실인 420호까지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호텔과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타이타닉의 탑승객용 객실은 한 층에 있는 객실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평소 투숙객들이 사용할 때는 그 문을 잠가 객실을 구분 짓지만, 한빈은 그러한 구조를 사용하여 에반스 사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위저드 네메시스가 타이타닉 메인 시스템 접근에 성공했고,
타이타닉은 최신식 배로서 선박 내부의 모든 시설을 메인 시스템에서 조작할 수 있었다. 그 메인 시스템을 뚫는다면 선박의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동혁은 타이타닉의 메인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바벨탑의 설계자’는 타이타닉 내부의 모든 시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었다. 객실의 문을 포함하여.
-미다스의 손은 404호부터 409호에 묵는 투숙객을 모두 카지노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403호에는 에반스가 있었고, 404호부터 409호까지의 객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들어. 404호부터 408호까지는 현관의 보안장치를 작동시켰다. 네가 임무를 수행하는 중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다는 소리다. 404호부터 409호를 잇는 객실 내부의 문들은 죄다 열려 있다. 409호로 들어가 신호를 보내면, 404호와 403호를 잇는 문도 위저드 네메시스가 열어줄 것이다. 항상 닫혀 있던 내부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 에반스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문을 확인할 것이다. 그때, 409호에서, 403호까지 뚫린 통로를 통해 에반스를 사살하라.
한빈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준회는 4층을 눌렀다.
-밀실의 저격수, 듣고 있나.
“코드넘버 0331, 밀실의 저격수. 지령 받았습니다. 4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입니다.”
-주위에 누군가 지나다닌다면 호출 버튼으로 응답하라.
“알겠습니다.”
-409호 현관 비밀번호는 네 코드넘버로 설정해두었다. 들어간 뒤 준비가 완료되면 호출하라.
“라져.”
준회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었다. 이미 객실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 버린 터라 복도는 조용했다. 작전의 시작이구나, 준회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409호 앞에 섰다. 0331, 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작동시켰다.
409호 안쪽에는 철 재질로 된 문이 있었다. 한 객실 내부의 더 작은 방이나, 화장실로 통하는 문은 전부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두 개의 다른 객실을 잇는 문은 철문이었다. 한빈이 말한 대로, 408호로 통하는 철문은 열려있었다. 408호를 들여다보니, 407호로 이어지는 철문이 열려있었다. 그렇게 여러 개의 철문이 열린 채로, 409호의 준회는 404호까지 볼 수 있었다. 404호에서 403호로 이어지는 문은 닫힌 상태였다.
저 너머 에반스가 있겠지, 준회는 골프가방을 내려놓았다. 총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였다. 타이타닉에 탑승하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총기를 관리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다. 소음기도 미리 장착해둔 상태였다. 지퍼를 열고, 저격용 총을 꺼내 들었다. 뺨에 닿는 총은 차가웠다.
이제 한빈을 호출하면 403호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이었고, 에반스가 보일 때 쏘기만 하면 되었다. 준회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톡 튀어나온 호출 버튼이 느껴졌다. 무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쯤 어느 버튼이 있는지, 그쯤은 이미 꿰고 있었다. 그는 호출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재빨리 손을 다시 올려 저격 자세를 잡았다.
방 여러 개를 가로질러, 404호와 403호를 잇는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 준회의 시야에 포착됐다. 그는 숨을 죽이고, 문 너머로 보이는 403호에 총을 겨누었다. 와라, 오기만 해라, 나와라. 준회는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한빈과 준회의 예상과는 달리 에반스는 열린 철문을 확인하러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팔을 내리거나,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준회는 총을 403호에 겨누고, 털끝만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입술이 순간 움찔했다. 인이어를 타고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코드넘버 1022, 바벨탑의 주인.
준회는 한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위저드 네메시스가 403호에 설치해둔 초소형 카메라 판독 결과,
탕.
한빈의 목소리는 총성에 가려졌다. 멀게 보이는 403호에, 검은 권총이 아른거렸다. 탕, 탕, 탕. 권총의 끝에서 다시 불꽃이 일었고, 준회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권총에서 발사된 탄알은 409호까지 미치지 못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준회는 이를 악물었다. 에반스가 눈치를 채고 권총을 몇 발 갈긴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탄알은 준회가 있던 위치까지 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조심하여 나쁠 것은 없었다. 그는 저격용 총 위에 장착한 스코프를 떼어냈다. 문 옆으로 다가가, 스코프를 조심히 내밀고 살폈다. 벽 너머로 얼핏 움직이는 실루엣을 포착했다.
준회는 망설이지 않았다. 빠르게 총구를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소음기 덕에 거대한 매트리스에 대고 총을 쏘는 것 같은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
먼 거리에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준회는 벽 너머로 403호를 주시했다. 핏물 위에서 무릎이 꺾인 채 그를 노려보는 에반스와 눈이 마주쳤다. 준회는 다시금 총을 올려 에반스의 이마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손가락에 힘을 주는데,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에반스가 먼저 권총을 들어 마구잡이로 쏘았다. 찢는 듯한 고통이 준회의 팔을 스쳤고,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킷에는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고, 고통은 맹렬했다. 준회는 다급히 숨을 내쉬었다. 아릿해진 시야에는, 에반스가 다시 권총을 겨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안돼.
준회는 팔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명중했다. 이마에서는 피가 찍 하고 흘러나와 바닥을 붉게 적셨다. 에반스는 뒤로 넘어갔고, 준회는 총상을 입은 팔을 움켜쥐었다. 끈끈하고 붉은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을 고르며, 쓰러진 에반스를 응시했다.
몇 번째 살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준회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
“안녕하십니까.”
국정원장과 마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바벨탑의 설계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국정원 소속의 특수 정보요원으로서, 국정원장이 야심 차게 준비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국정원장이 직접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장과 마주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의 비서, 혹은 특별히 고용된 교관이 ‘바벨탑의 설계자’를 지도했다.
“앉아라.”
그런데 그런 국정원장이 준회를 불러냈다. 준회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열한 살, 보통 아이들과 같았다면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 그는 한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인 국정원장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있었다.
“재작년, 팀 리더를 김지원에서 김한빈으로 교체한 기억이 나는가?”
국정원장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공허한 사무실을 가득 메웠고, 그의 손가락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종이가 서로를 긁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 기억합니다.”
“6년 전, ’바벨탑의 설계자’를 기획할 때부터 정해두었던 포지션들이 있다.”
국정원장은 쉴 새 없이 서류철을 들추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 여기 있군. 그는 다섯 권의 파일을 빼내어 준회 앞에 놓았다. 리더. 킬러. 딜러. 해커. 시크릿 에이전트. 궁금증이 솟아올랐지만 준회는 차마 파일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어설프게 눈치만 보던 준회에게 국정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를 제외하고, 가장 큰 일을 하는 포지션이 무엇일 것 같으냐.”
준회는 차곡차곡 쌓인 파일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맨 위의 파일에는 리더라고 적힌 라벨지가 붙어있었다. 준회가 리더 파일을 들어 옆에다 내려놓자, 두 번째 파일이 나타났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일에 붙은 라벨지를 쓸었다. 새로 붙인 듯 빳빳한 라벨지에는 킬러,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킬러. 킬러입니다.”
준회는 어깨를 움츠렸다. 실감은 하고 있었다. 한빈은 이미 리더로 책정이 난 상태였고, 지원은 뛰어난 화술로 인정받고 있었다. 지원이 할 일은 따로 있었고, 여자를 킬러로 쓸 만큼 국가는 멍청하지 않았다. 남은 멤버는 준회와 동혁뿐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동혁이 스스로 C언어를 독학하고, 한 기업의 서버 접근에 성공했다며, 국정원의 직원들은 동혁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댔다. 이제, 남은 멤버는 구준회, 하나뿐이었다.
“코드넘버 0331 구준회. 킬러로서의 포지션을 책정한다.”
열한 살 소년에게 킬러라는 말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예감했던 일이었지만, 국정원장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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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ㅎ...이번 준회의 에반스 사살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더 추가설명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혹시 이해가 잘 안가셨을까 하는 걱정에... 너무 복잡하게 쓰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하네요ㅠㅠㅠㅠㅠ
그림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혹시 본문 내용이 뭔 소린지 잘 모르셨다면 이 그림이 어느정도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요! 준회는 409호로 들어가서 저 열린 문 (빨간색)을 통해 403호에 있는 에반스를 저격한겁니다 (보라색 화살표) 발그림이지만 이해는 되..셨겠죠...? 허허 이런거 없이도 잘 이해되도록 제가 잘 써야하는데ㅜㅜㅜ 죄송스럽네요ㅠ
그리고, 나쁜 소식 한가지.
드디어 개학을 합니다 퍼버버버벙 내일 (금요일) 개학인데....
방학에 왔던 것 만큼 자주 오지는 못하겠죠 아무래도ㅜㅜㅜ... (여담인데, 방학동안 일곱 화를 업데이트 했네요 흑흑 달팽이손인 제가... 이건 혁명입니다)
더군더나 저희 학교가 좀 이상해서 21일 개학인데 9월 20일부터 시험을 본답니다 허허 저 시험 한달 남았어여..... 뚀륵.......
언제 올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연재 텀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타이타닉 완결은 꼭 보고 갈테니 연중 걱정은 마세요 :)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끝끝이 완결짓고 갈겁니다 보기 싫다하셔도!!! 어쩔수없어요!!! 완결낼거예요!!!!!
그럼 앞으로 많이 보고싶을거예요 우리 사랑하는 독자님들ㅠㅠㅠㅠㅠ
자주 오지 못할 못난 작가인데도 항상 반겨주시고 긴 댓글 달아드려서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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