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자고 했는지. 그냥 구준회 말대로 방 안에만 박혀 있을 걸 그랬나.
타이타닉은 대서양을 순조롭게 항해했고, 갑판 너머로 펼쳐진 바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바닷바람과 특유의 짭짤한 향내도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앞에 두고 남자나 상대하며 정보나 뽑아내야 한다니, 억울할 정도였다. 그냥 진짜 여유롭게 유람하러 온 거면 좋으련만. 막상 정보를 빼러 나오고 보니 내가 왜 그랬나, 후회가 몰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짜증이 나 죽겠는데, 이 사람까지 상대하고 있다니.
“항상 일에만 찌들어 살다가, 이렇게 나오니 좋네요.”
에반스는 내 기분을 파악하지 못한 듯싶었다. 씨벌, 너나 좋겠지, 나는 여기 일하러 온 거야, 병신아. 아니요, 시발 지금 하고 있는 게 일인데요, 좋기는 지랄-이라고 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마음을 조금만 가라앉히고, 옅게 숨을 들이쉰 뒤 그를 마주 보며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게요. 바람도 쐬고, 오랜만에 제대로된 휴가 온 기분이에요.”
뭔가를 건져야만 했다. 만약에 그가 AFT의 일원이라면, 그 역시도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쓸모가 없고, 에둘러 물어보는 것이 나았다. 뭘 물어보지, 무난한 질문이면서도 좁혀나가면 건질 것이 있는 질문,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질문…….
“에반스 씨께서는 혼자 오셨나요? 아니면 가족들이랑?”
“혼자 왔습니다. 결혼은 아직 안 했고요.”
“와, 진짜요? 혼자 여행하시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항상 부모님이나, 오빠랑 다니는데.”
“네. 맞아요. 사실, 이제 타이타닉이 뉴욕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우리 회사에서 6개월간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 준비를 시작해야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놀아보자, 하는 거죠.”
시발, 저 사람이 연막을 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도대체 건질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만 해도 지금 하는 말이 죄다 거짓인데. 휴가 온 기분은 개뿔, 이렇게 좋은 배에 타서 일이나 하고 있으니 기분은 매우 구렸고, 부모님이랑 오빠는 지랄, 항상 혼자 다니기만 했었는데.
에반스는 말을 잠깐 멈추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겼구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담백한 눈동자와 깔끔한 얼굴선이 서양인 특유의 느끼한 외모를 잡아주는 느낌이었다. 새삼 그의 얼굴에 감탄하며 정신을 놓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오빠는 잘 있어요?”
“네, 지금 아버지 사업 때문에, 투자자랑 미팅 중일 거예요, 아마.”
“거짓말.”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던 얼굴을 굳혔다. 거짓말,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빠 없잖아요.”
“네? 어제 같이 뵀잖아요. 다른 분이랑 헷갈린 거 아니에요?”
당황해서는 안 되었다. 갑자기 바뀐 그의 태도에 머리가 아파져 왔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끝까지 시치미를 떼어야 했다. 뛰는 심장을 억지로 참아내며 최대한 호흡을 고르게 유지하며 담담하게 말을 끌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진짜 내가 구준회와 남매인 것처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마냥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다 알고 왔습니다.”
나는 숨을 헉 삼켰다. 아, 계속 시치미 떼어야 하는데.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해, 진정,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보이려 노력하며 애꿎은 남색 원피스의 치맛자락만 움켜쥐었다. 그의 눈을 마주치고, 뭐를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소속 정보요원.”
에반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미친, 이제 좆 됐다. 다 까발려진 건가, 저 새끼한테 총 맞고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옷차림을 훑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재킷을 걸치고 있지 않았고, 걸리는 곳은 바지 주머니였다. 저기 무기를 챙겨둔 것은 아니겠지, 총이라던가, 칼이라던가.
“긴장하지 마세요.”
그가 한 발짝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공격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갑판에는 햇볕을 쬐며 바다를 구경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여기서 총질을 시작한다는 것은 타이타닉을 아비규환으로 만드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미 침몰을 계획 중인 AFT 요원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경고 차원에서 그치지만- 곧 있을 테러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희 수장께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시거든요.
경고, 씨발. 에반스는 AFT가 맞았다. 수장은 아니었다. 수장이 대놓고 나에게 와서 테러에 대해 경고한다며 떠벌릴 일은 없었다. 최대의 테러 단체인 AFT의 수장 정도면 아마도 미국의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지 않을까. 한국의 일개 정보요원에게는 그에 걸맞은 AFT 말단 요원이 경고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었다.
에반스는 말을 마치고 선박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한빈 오빠에게 이 일을 알려야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클리퍼드 챈스 로펌 소속 기업 변호사라고 주장하는 마크 에반스. AFT의 요원. 곧 있을 테러를 경고함. 한국 국정원 소속 요원이라는 것도 알고 있음.
시발, 모르겠다.
갑자기 김동혁이 보고 싶었다. 구준회를 만난다면 방에 안 있고 뭘 했느냐며 한 소리 들을 것이 분명했고, 한빈 오빠도 지시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며 불호령을 내릴 것이 뻔했다. 지원 오빠는 카지노에 박혀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계속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딜러와 대화하는 것은 위험했다. 더군다나, 오빠는 이미 타이타닉 내부 카지노에서 인기 최고의 딜러가 되어 있었으므로, 더더욱 어려웠다. 동혁이 있는 바에 가서 저녁도 대충 때우고, 뭐라도 좀 마시고, 한탄이나 조금 해야겠다.
김한빈한테 메일 보내 놓았으니, 후에 추가 지시가 내려오겠지. 짜증이 났다. 타이타닉에 타서까지 이렇게 작전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다 잊고, 진짜로 무서울 게 하나 없이 곱게 자란 대기업 CEO의 딸 행세나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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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칵테일 한 잔 주세요, 섹스온더비치.”
나는 바에 앉자마자, 무심한 말투로 내뱉었다. 정말로 상큼한 게 마시고 싶기도 했고, 놀라서 눈썹을 치켜 올리는 동혁이의 표정을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내 목소리를 들은 동혁이는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듯, 이내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아 그런가, 싶었다. 한산한 바에 앉아 있자니 휴가를 온 느낌이었다. 항상 작전 수행 중에 바를 방문했었지, 혼자 자유롭게 바에 온 적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작전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철없는 아가씨가 된 기분을 한껏 느끼고 싶었다.
“섹스온더비치 나왔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식사할만한 건 없나요?”
“좋아하실 만한 거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는 말갛게 웃고는 바 안쪽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동혁이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가.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각종 업무에 투입되었다. 회사로 치면, 인턴과 같은 업무라고 해야 하나. 정식 정보요원 옆에서 보조하며 일을 배우는 격이었다. 삼 년간의 실전 훈련을 받은 후, ‘바벨탑의 설계자’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열다섯 살이 된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뭐, 그래도 그때는 자주 나가지도 않았고, 한 달에 최소 이 주일 정도는 함께 있었다. 열여덟 살이 되어 공식적인 업무가 시작되고, 우리는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손님이 좋아하는 거, 맞으시죠?”
그런데도 김동혁이 내려놓은 접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담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타이타닉 작전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나는 우리 멤버들을 잊고 살았다고 할 만큼 바쁘게 지내왔는데, 동혁이는 어렸을 때의 깨끗한 미소를 그대로 띠고 모든 것을 기억해주었다.
“안 까먹고 있었네.”
바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몇 명도 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김동혁한테 존댓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옛날과 같이, 편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동혁이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뭐 어때, 어차피 저기서는 안 들려.”
“너 무슨 일 있구나.”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김동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여기 오길 잘했네, 진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딱 알고, 저렇게 말해주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뭔데?”
“한빈 오빠가 메일로 알려줄 거야.”
내 입으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다고 말만 해놓고 얘기 안 해주는 것이 조금 말이 안 되기는 했지만, 동혁이랑은 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동혁이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더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괜찮아, 괜찮아, 반복하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따뜻한 그에 눈길에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만 혼자 작전 수행하면서 앓는 거 아니고, 다 같이 하는 일이잖아. 타이타닉 작전이 끝나면, 멤버들과 계속 함께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바벨탑의 설계자’ 멤버들이 있으니, 견딜 수 있겠지. 지금까지도 잘 해왔잖아.
“나랑 계속 얘기해.“
저쪽 편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이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동혁이가 고개를 돌려 그쪽으로 가려는데, 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동혁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잠시만, 하고 바 안쪽에서 다른 바텐더를 불렀다. 그는 다른 손님을 상대하러 사라졌고, 동혁이는 아예 의자를 가져다 내 앞에 앉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계속 말동무 해드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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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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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예요 :)
얼른 써서 12시 되기 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졌네요ㅠㅠㅠㅠ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