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스타
W.별모양곰돌이
1.
“신선한 유기농 야채로 만든 주스. 당신을 위해 투자하세요.”
15초 광고를 통틀어 호원이 말 하는 건 단 두 문장뿐. 컷이 많아질수록 감독을 비롯한 스텝들의 표정은 굳어지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어색할까. 역시 벼락스타의 한계점에 이미지로만 먹고사는 전형적인 스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지랄 맞고 싸가지 없고 연예인 자부심으로 뭉친 이호원이라지만 광고주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상품가치는 찾기 어려우니까. 할 일 없어 놀던 백수 이호원이 얼굴 하나 믿고 바로 천만관객 영화에 캐스팅. 국민오빠 소리 들으면서 벼락스타가 된 것도 고작 3개월. 대한민국은 ‘이호원 신드롬’으로 덮이고 있었고 그럴수록 이호원의 콧대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만 갔다.
“자- 마지막 딱 한 번만 더 하고 끝냅시다.”
감독의 말에 지쳤던 스텝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이제 곧 끝이다. 이 지긋지긋한 광고촬영은 끝이다. 잘나신 이호원님께서 여자들하고 새벽까지 노느라 숙취에 마사지를 받고 오시느라 다들 2시간을 대기했다. 쉽게 화를 낼 수도 없는 게 이호원의 뒤에는 ‘규 엔터테인먼트’가 있지 않은가. 아시아무대를 휘어잡는 최고의 기획사이자 영화제작사. 감독은 옆에 있던 조연출에게 귓속말을 한다.
“어쩔 수 없다. 성우써. 저 새끼는 입을 열면 안 돼.”
감독의 말에 조연출은 공감 이백 퍼센트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호원은 지친 표정으로 하품을 쩍- 하더니 물을 벌컥 들이켰다. 숙취가 참 오래 간다. 빨리 촬영 끝내고 집 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지만 자그마치 이 광고가 10억짜리다. 10억.
그런 호원을 멀찍이서 보던 우현은 울리는 핸드폰을 보았다. 성규에게 온 전화다. 잠시 촬영장을 빠져 나와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성규의 전화를 받았다.
-촬영은?
“곧 끝이야. 이번에도 성우 쓸 것 같아.”
-하... 이호원 또 스캔들이야. 하이터치신문사에서 뭐 보낸 줄 알아?
“... 뭐. 어제 클럽에서 논 거? 그거 찍었데?”
-그것도 섹. 스. 파. 티.
어금니를 꽉 깨문 성규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우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국민오빠의 섹스파티라니. 호원 덕분에 기사 막느라 여러 가지로 애 쓴 성규였다. 하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다. 이호원이 바뀔 수 없을 테니 생활을 컨트롤 해야지. 성규의 말을 들은 우현은 하마터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 정말? 아니, 그걸 이호원이 할 것 같아? 저 성질에 순순히?”
-이호원한테 전해. 안 하면 계약 해지에 피해보상하고 스캔들 터뜨린다고. 지금까지 막았던 섹스파티, 유재은, 김민슬, 한영예, 손비야, 스캔들 다 터뜨린다고!
“알겠어... 그 말 그대로 전한다.”
-그대로 전해. 수고.
“예예-”
성규의 전화를 끊고 촬영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니 촬영이 끝난 모양. 스텝들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느릿느릿 스텝들이 자기한테 인사를 하건 말건 하품이나 하고 있는 이호원이 있었다. 촬영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우현을 본 호원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며 우현에게 간다.
“형, 빨리 집. 나 너무 졸려.”
“너 큰 일 났다..”
“뭐, 또 스캔들? 한 두 번이야? 성규형이 알아서 잘 하겠지.”
“알아서 잘 했지. 그리고 넌 알아서 말 잘 들어야 하고.”
“아 머리 아파. 내일 말 해.”
호원은 듣기 싫다는 듯 옆에 있는 코디에게 자신의 겉옷을 뺏듯이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코디가 호원의 뒤를 쫓아가며,
“저, 저기... 그거 협찬이라 벗어주셔야 하는 데...”
“협찬? 어디.”
“제이 앤젤이요...”
“별 좋은 데도 아니구만. 어차피 이거 광고 나가면 주스든 옷이든 신발이든 다 완판이거든? 그 때 되면 알아서 거기서 머리 숙이고 나한테 올 테니 이 정도는 내가 입고 가도 돼.”
“아, 하지만... 그건...”
코디의 말에 호원이 인상을 팍 쓰며 우현에게 눈치를 준다. 우현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코디에게 자신의 명함을 줬다. 우현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자 만족한 호원이 유유히 밖으로 나갔고 우현은 그런 호원의 뒷모습을 보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안절부절 못 하는 코디에게 명함을 쥐어주며 우현은 디자이너에게 연락을 하라고 이야기 하며 촬영장 밖으로 빠르게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호원이 벌써 벤에 타고 있었다. 우현이 운전석에 올라타니 호원의 불만이 터진다.
“아- 맛도 없는 야채 주스나 마시면서 내가 이런 데서 이런 취급 받아야겠어, 형?”
“너 심야라디오 해야 돼. 12시부터 2시.”
“... 뭐라굽쇼?”
“안 하면 너 계약 해지와 함께 스캔들 터뜨린다고 하셨다. 규님께서.”
“똥 싸는 소리 한다.”
호원은 바로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수화음이 끝나고 성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규는 다짜고짜 호원에게 명령했다.
-라디오 안 하면 넌 끝이다.
“내가 돈 벌어준 걸로 먹고 사는 양반이 이러면 안 되지.”
-이 바닥에서 나 안 무서워하는 건 너 뿐이야. 정말. 매장 시켜줘?
“...”
다른 때와 달리 정말 무섭게 말 하는 성규의 말에 호원은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진짜 매장 될 것 같다. 그냥 적당히 평생 놀 만큼 돈 벌고 사라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날로 높아져가는 인기와 상상치도 못 한 자신의 몸값에 호원은 쉽게 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 했다. 스캔들이 터져도 막아주는 성규가 있었고 팬들의 인기와 함께 벌어들이는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호원이 대답이 없으니 성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호원같은 놈은 강하게 나가야 조용하니까.
-너 심야라디오 수입.
“그, 그래. 수입. 라디오 수입 얼마야?”
-이호원 몸값 덕에 많이 받는데... 그거 다 기증할거야.
“무, 뭐?”
-너 거품인기야. 금방 꺼진다고. 너 이미지 만드는 거니까 닥치고 하라는 데로 해.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노동 착취거든!”
-안 그러면 계약 해지하고 스캔들 터뜨리던가.
“씨... 알았어!”
괜히 성질내면서 전화를 끊은 호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진한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에서는 레이저가 막 나온다. 거울을 통해 호원의 표정을 본 우현이 슬며시 웃었다. 언젠간 저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 김성규 성질에 많이 봐 준 것인데도 불구하고 호원은 성규를 씹기에 바빴다.
“김성규가 뭐래?”
“몰라! 똥 싸는 소리만 하고 있어.”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로 중얼중얼 성규를 씹는다.
“너만 몰라. 이 바닥에서 김성규가 어떤 사람인지.”
“알 바 없어. 지가 캐스팅 했으면 책임을 끝까지 져야지. 아~~짜증나. 차라리 발연기라고 욕 들어 먹으면서 드라마 찍는 게 낫지. 그 시간에 라디오를 하라고? 그거 녹음해서 하면 안 되나?”
“안 돼. 김성규가 그걸 봐 줄 놈이냐. 너 예전에 톱스타 김동현 알지?”
“김동현? 아- 그 드라마 찍다가 좀 문제 있었던 사람?”
“그거 김성규 작품이야. 김동현 매장시킨 거.”
“... 진짜?”
호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다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현은 호원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이미진 스폰서 사건, ‘아프로디테’ 드라마 무산, 등등... 큰 사건 사고는 거의 다 김성규 작품이야.”
“우리 회사도 아니잖아. 그게 가능 해?”
“응. 가능한 게 김성규라고.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까불어.”
“... 알았어.”
불만이 가득한 호원이 다시 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여전히 심야라디오는 싫은 듯 짜증이 섞여 있다. 집에 도착한 호원이 차에서 내리자 사생들이 저 멀리서 우르르 몰려왔다. 몇은 뒤에 숨어있고 몇은 호원에게 다가오더니 카메라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성규 때문에 짜증이 났던 터라 호원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어졌고 재빨리 우현이 그런 팬들을 막으며 호원을 집으로 들여보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호원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이고... 톱스타께서 왜 이래?”
“짜증나 저것들.”
“씻고 쉬어라. 아, 그리고 내일은 바로 라디오 회의 들어간다.”
“회의? 거기 내가 가야 돼?”
“바로 라디오 기사 터질 거야. 지금 너 거품인기라고 기사 올라오고 있는 마당에 반박기사마냥 내야지... 김성규만 믿어. 언플로 성공한 황제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겠냐.”
“알았어. 나 쉴래. 불 꺼줘.”
“그래.”
암막커튼을 치고 불을 끄니 온 집안이 캄캄해졌다. 호원이 피우는 담배 끝 붉은 빛만이 그 넓은 집의 유일한 불빛이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재떨이에 비벼 끈 호원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두 눈을 깜박 깜박. 오늘 내가 뭐 했지 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
회의 준비를 끝낸 동우가 기지개를 쭉- 켰다. 낙하산이라고 하는 특채로 라디오 작가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어느덧 1년차. 아직 막내작가를 벗어나지는 못 했지만 타고는 글재주와 번뜩이는 기획력으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고 있었다.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누구나 부러워하는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예전부터 동우는 라디오작가가 꿈이었다. 뭐, 틈틈이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쓰고 있지만. 호원이 앉을 자리를 보던 동우가 한 숨을 살짝 쉬었다. 동우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본 선배가 동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성격은 개차반에 싸가지라도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네?”
“하도 사고를 많이 쳐서 회사 사장이 유배보내는 심정으로 심야라디오 하라고 했다더라.”
“그렇게 싸가지가 없데요? 영화에서는 진짜 좋았는데...”
“다 이미지잖아. 얼굴로 캐스팅 됐다고 하더라.”
괜히 남의 험담에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동우다.
“그리고 이렇게 일찍 준비해 봤자 소용없어.”
“왜요?”
“이호원 기본 지각 한 시간.”
“네?”
“아마 라디오 해도 12시 시간 딱 맞춰 올걸?”
“그러면 안 되죠!”
“안 되는데... 이호원은 그런다고. 초반에 기를 확 죽여. 이번에는 소속사 사장이 많이 지랄하는 것 같으니까 조금만 기를 죽이면 괜찮을 거야.”
선배의 조언에 동우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최고의 인기스타 이호원과 함께 일을 한다는 설렘도 있지만 동시에 부담감도 있는 것도 크다. 타 방송국에서는 호원이 라디오를 한다는 소문에 비상이 걸린 듯 했다. 아무래도 청취율에 차이가 클 테니까. 그런 부담감을 동우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막내작가라지만 동우는 경력이 적을 뿐 능력은 뛰어나 이번 라디오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 아니, 하겠다고 했으며 하루 만에 기획안을 작성 해 제출했다. 라디오 타이틀은 ‘이호원의 따뜻한 밤, 따뜻한 라디오.’. 호원의 이미지와 잘 맞을 것이며 거기다 동우가 원하는 그림이기도 했다. 새벽. 잠들지 못 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녹차와 같은 방송. 그런 라디오를 만들고 싶어 동우는 라디오작가가 되었다.
“선배님.”
“응?”
“저 이거 꼭 성공할거예요. 이호원씨랑 상관없이.”
“그래, 너야 잘 하겠지.”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선배에게 칭찬을 들은 동우가 기분이 좋아져서 또 헤헤- 하고 웃었다. 실없는 웃음이 귀여워 그는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에는 특채라고 해서 어디 고위간부 끈 잡고 온 줄 알았더니만 죽어가는 서울대 대학 방송국을 2년간 이끌어 학내 청취율 30%를 찍은 장본인이라고. 회의실을 나가는 선배에게 꾸벅 인사한 동우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회의 십분 전. 동우는 혹시나 해서 호원의 매니저인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작가 장동우인데요. 지금 오고 계신가요?”
-막 전화 드리려던 참인데... 호원이가 앞에 스케줄 때문에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늦나요?”
-40분 정도...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럼 저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네, 조금 있다가 뵐게요.
역시나 지각인가... 동우는 한숨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 정말 의외로 호원에 대한 소문은 많이 퍼진 모양이었다. 고작 1년차였지만 연예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매일 놀랐다. 이렇게 많은 연예인들이 이미지와 참 다르다는 것. 그리고 한 순간에 사람들의 눈 밖에 나면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동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정말 잘 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동우는 다시 한 번 기획안을 보면서 점검을 했다. 꼼꼼하게 다시 보고 또 보고...
“똑. 똑. 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책상 위에 앉아 기획안을 보던 동우가 화들짝 놀라 밖을 보니 명수가 문에 기대고 있었다. 저런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 하나도 화보마냥 후광이 넘쳤다.
“명수야!”
책상 밑으로 폴짝 내려간 동우가 명수의 앞으로 쪼르르 갔다. 아역시절부터 차근차근 커 온 명수. 아이러니하게도 신비주의 컨셉이 강한 명수는 동우의 엄친아. 말 그대로 엄마 친구의 아들이다. 명수라는 이름이 얼굴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L’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비주의 엘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야?”
“나 곧 드라마 찍을 것 같아서 회의 왔어.”
“우와... 너 영화 얼마 전에 끝났다며.”
“좋은 작품이라 놓치기 싫거든. 이번엔 단독주연이다~”
귀엽게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자랑스럽게 웃은 명수를 보며 동우는 명수에게 기획안을 보여줬다. 기획안을 받아 쭉 보던 명수가 한 숨을 쉬었다.
“이호원이랑 하는 거야?”
“응! 명수랑 같은 소속사지?”
“형 고생 좀 하겠다.”
“제발 용기 좀 줘... 다들 나보고 고생할 것 같다고만 하네.”
“용기보다는 각오를 하는 게 더 좋을 거야, 형.”
동우는 좋은 소리 한 번 안 해주는 명수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곧 있으면 회의 시작이야. 너 드라마 촬영 하면 방송국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네?”
“응.”
“이번엔 좀 쉬어. 드라마 한 번 하면 역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알았어. 그럼 갈게.”
명수의 뒷모습을 보며 동우는 뭔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화려해 보이는 명수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워낙 내성적인 성격에 낯을 가려서 역할을 맡으면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 때문에 자신과 맡은 캐릭터의 괴리감에 괴로워하기도 했었고. 요즘에는 많이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는 명수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명수는 연기 참 잘 하는 어린 배우. 기대 되는 배우. 라는 수직어가 붙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회의 시간이 뒤로 미뤄지고 거기다 호원의 지각으로 회의는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진행이 되었다. 동우는 맞은편에 앉은 호원을 향해 최대한 밝게 웃었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한 쪽 눈썹만 위로 꿈틀 올렸다 내린 호원이 건성으로 인사한다. 호원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일단 참기로 한다. 기획안을 받은 호원이 건성으로 읽더니 내팽겨 치듯 책상에 기획안을 놓는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동우입니다. 이번 라디오 기획을 맡았습니다.”
“막내작가죠?”
호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동우가 당황한 듯 대답을 하지 못 하고 어버버- 하고 있었다. 그런 동우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웃음을 친 호원이 다리를 다른 방향으로 꼰다.
“막내작가라면서요... 그런데 물 하나 안 가져다 놓고.”
“... 네?”
“막내면 막내답게 하셔야죠.”
호원의 말투에 동우의 표정에 안 좋게 굳어졌다. 옆에서는 동우에게 빨리 물을 사 오라고 눈치를 줬지만 동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히 물을 사러 나갈 줄 알았던 동우가 안 가고 버티고 있자 호원은 다시 한 번 동우에게 물을 사 오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그러니까 호원씨 말은 내가 막내작가니까 물을 사 오라는 건가요?”
“그렇죠, 그게 막내가 할 일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 하는 호원의 꼴을 보자니 동우의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선배가 동우의 어깨를 치며 물을 사 오라고 했지만 동우는 여전히 꼼짝 없이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호원씨는 물을 사 오는 게 막내가 할 일이라고 하셨죠, 분명히?”
“네.”
“여기서 막내는 내가 아니라 호원씨에요. 그러니까 호원씨가 우리들이 마실 물을 사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 뭐요?”
“못 들었어요? 막내가 할 일이 물을 사 오는 거라면 호원씨가 막내니까 사오라고요.”
동우의 논리적인 말에 호원의 말문이 막혔다. 엄청나게 무거운 공기가 회의실 안에 돌고 있었고 동우의 선배가 다시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어보려고 했지만 호원이 자리에서 박찬 후였다.
“사 오죠. 작. 가. 님.”
호원이 회의실을 나갔다. 동우를 나무라는 선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이호원에게 초반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를 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뒤 호원이 돌아왔고 호원의 손에는 다섯 개의 물통이 있었다. 그것도... 1.5리터짜리 다섯.
“제가 목이 엄~~청 말라서요.”
동우의 맞은편에 앉은 호원이 동우의 눈을 노려보며 1.5리터 물통을 들고 그대로 벌컥거리며 마셨다. 꾸역꾸역 물을 다 비운 호원이 물통을 구겨 바닥에 내팽겨 친다.
“아~ 시원하다. 이제 회의 시작할까요? 작. 가. 님.”
동우는 호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분명히 호원을 비웃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기분이 나빠진 호원이 인상을 구기자 동우가 다시 살짝 웃었다.
“호원씨... 소문과는 다르게 참 귀엽네요.”
“뭐, 뭐?”
“자, 회의 시작하죠.”
**
벤에 올라탄 호원이 마구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야! 조용히 해. 밖에 니 팬들 있다.”
“장동우 그 자식! 아주 나를 우습게 봐?”
“또 왜, 뭐가?”
“뭐? 참 귀엽네요? 막내니까 물을 사 오라고? 똥 싸고 있네!!”
호원의 발작에 우현은 혀를 차며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래도 그 작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더니 호원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모양이었다. 한참을 동우를 씹던 호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설마 자나 싶어서 보니 표정이 좋지 않다. 호원의 말 버릇처럼 꼭 똥 싸는 것 같은...
“아, 형... 잠깐... 나 화장실.”
“화장실? 너 사진 찍혀.”
“아... 아까 장동우 때문에 물을 많이 마셨더니... 아, 화, 화장실! 형!!”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호원! 참아!”
“아 죽을 것 같은 데... 아흐...”
“기다려 저기서 건물 앞에 세울 테니까.”
“아니 커피숍... 커피 사면서 화장실 가게...”
그냥 건물 들어갔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쪽팔리지 않겠냐며 꼭 커피숍에 가야 한다는 호원. 호원의 말에 커피숍 앞에 차를 세운 우현이다. 하지만 호원은 빨리 내리지 않고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너 뭐하냐? 이 와중에?”
“비, 비비...”
“뭐?”
“오늘 노 메이크업이야... 비비랑... 선글라스... 아흣- 화장실...”
“아오, 병신아! 그냥 좀 싸고 와!”
우현의 말을 무시하고 비비를 얼굴에 막 펴바른 호원이 우현을 부른다.
“형, 나 괜찮아? 이상하진 않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 차에서 내린 호원이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괜히 주변을 의식한 호원이 빠르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여유 있는 척 화장실을 찾았다. 주문을 받던 직원이 호원을 힐끔거리며 보더니 옆에 있던 다른 직원과 귓속말을 했다. 그리곤...
“저... 혹시 이호원씨 아니세요?”
“아닙니다. 닮았다는 소리 듣는 거예요. 화장실은...”
다급하게 화장실을 찾던 호원의 옆에 또 다른 여성 셋이 다가왔다.
“저 혹시 이호원씨? 맞죠? 맞죠?”
“아, 아닙니다. 닮은 사람이예요.”
“저기 밖에 벤 있던데? 저 완전 팬이예요!!”
“아, 하하. 하하...”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쌓이고 있던 호원이 밖을 보았다. 매니저란 놈은 자기 소속 배우가 이렇게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오지도 않고 뭐 하는 거야! 호원은 그들을 벗어나려 했지만 길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벤과 커피숍 안의 사람들을 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호원은 아랫입술에 피가 뭉칠 정도로 악물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쌀 것 같다고!
“아- 잠시만요, 잠시만 지나갈게요.”
드디어 호원의 구세주 우현이 나타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고 싶지만 만약 저대로 바지에 실수라도 한다면 그대로 호원의 이미지는 안드로메다로 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현이 사람들을 밀치며 호원을 데리고 재빠르게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호원을 벤에 태우고 벤에 붙는 사람들을 피해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아, 형... 나... 한계...”
“야, 이걸로 해결 해라. 어쩔 수 없다.”
“지, 지금 장난 해? 이게 무슨... 이호원이 이런 물통에... 아악!!! 장동우!!!!!!”
호원은 발악과 함께 급한 데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쪼르르르- 하고 꽤 큰 소리가 들리자 우현은 열심히 웃음을 참았고 호원은 있는 데로 동우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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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길게길게길게 한 번에 올리는데...ㅠ.ㅠ..
요즘에 너무 바빠서 짧게 짧게 올립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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