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교육과 조련남 박지민
: 디스 민즈 워 (This means War) -初반전
※ 지민이 분량 & 고구마 주의
야, 체육관 가자.
체육관? 체육관은 갑자기 왜.
체력장 준비.
아아. 이지은의 말에 금새 고개를 끄덕이고는 며칠동안 쳐박아두고 있던 체육복을 꺼내려 사물함을 열었다. 가야죠, 네. 암요. 한동안 안 꺼냈는지 저 구석에 있는 체육복을 끙끙대며 꺼내자 우수수 사물함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졌다. 워후, 오늘 집에 들고 가서 빨아야겠다. 괜히 옷을 코에 묻고 킁킁대다 옆에 곧 떨어질듯이 사물함 안에서 뒹굴대던 페브리즈를 꺼내 찍찍 뿌려댔다. 그, 그래도 내가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맞는데…. 한숨을 푹 내쉬는데 옆에서 저도 같이 체육복을 꺼내던 이지은이 빌려달라며 쫄래쫄래 걸어오길래 손에 쥐고 있던 브리즈를 넘기고는 탈의실로 향했다. 살, 쪘나…. 분명 학기 초에는 이렇게 안 쪼였던 것 같은데.
너 오늘따라 좀 포동포동하다. 부었네. 아까 잤냐?
이지은의 말에 체육복을 껴입다 말고 거울을 보자, 땡땡 부어오른 얼굴이 보였다. 씨부랄. 이게 사람이여 거지여? 공강 시간에 자는 게 아니었는데. 절망스러운 마음에 양 손에 얼굴을 묻자 머리를 질끈 묶은 이지은이 내 등을 철썩 철썩 때리더니 힘내라 하고는 탈의실을 나갔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저게. 쾅 닫힌 문을 노려보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주머니 구석에 자리하던 머리끈을 꺼냈다. 운동하면 붓기 빠지겠지. 어느새 허리까지 긴 머리를 한 묶음으로 틀어올리고서는 앞에 있는 거울을 애써 모른척 하며 탈의실을 나섰다. 체육관을 들어서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기들이 많이 보였다. 간지 몇 분도 채 안 돼서 저기서 자리 차지하고 수다 떠는 이지은 빼고는 다들 땀을 뻘뻘 흘려대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야, 제발 이지은 좀 데리고 가라. 시끄러워 죽겠다.
냅둬. 입 털겠다는데 뭐.
존나 도움이 안 돼요 저건.
런닝머신을 뛰다가 내려오며 툴툴대는 김태형을 밀어내곤 내가 그 자리 위에 올라갔다. 아, 내가 그 자리에서 하려고 했는데! 저 멀리서 툴툴대는 이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헬스장은 스피드와 눈치가 생명이여. 이지은의 욕에도 불구하고 아까 챙겨온 이어폰을 꾸역꾸역 꼽고는 노래를 재생시켰다. 이거, 지민이가 추천해준 노래…. 고새 해벌레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운동 부족인가. 힘들어 죽겄네. 집에서 피둥피둥 놀기만 했더니 몇 분 뛰지 않았는데 숨이 가빠졌다. 나 존나 돼지인가.
2시간만 열심히 하고 가자던 이지은은 1시간 50분이 지나기가 무섭게 자전거를 타고 있던 내 옆으로 달려 와서는 이제 가자며 찡찡거렸고, 애써 무시하고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던 나는 이지은의 힘에 못 이겨 한 쪽 팔이 잡힌채로 질질 체육관에서 끌려 나갔다. 입으로 운동을 해 뽀송뽀송한 이지은과는 다르게 오랜만에 열심히 운동을 한 나는 이마에서부터 땀이 질질 흐르는 상태였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꺼내 어영부영 땀을 닦는데, 나를 끌고 가던 이지은이 우뚝 멈춰섰다. 뭐야, 왜 그러냐. 땀을 닦으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저 앞에 백팩을 매고는 양 가방끈을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지민이가 보였다. 헐, 10귀. 심지어 노란 가방이야. 병아리네, 씨부랄. 코, 코피….
야, 근데 쟤 뭐냐? 왜 박지민이랑 같이 있어.
지민이의 데일리 10귀에 몸을 베베 꼬고 있는데 그런 나를 한심하게 보던 이지은이 지민이의 옆 쪽을 손가락질로 가르켰다. 이지은의 말에 지민이 감상을 미뤄두고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지민이의 옆에는 내가 평소에 아끼던 후배 한 명이 지민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건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평소에 아끼는 후배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소개를 한 터라 지민이와 후배는 약간의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의심이랄까 그런 건 전혀, 절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게. 쟤가 왜 있지. 쟤도 운동하러 왔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이지은이 나를 끌고 지민이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OO야, 운동하고 있었어? 왠지 전화를 안 받더라.
아, 으응. 전공 끝나고 온 거야?
응, 너도 수업 다 끝났으니까 도서실 같이 가려,
선배, 안녕하세요. 지은이와 내가 눈에 보이자 금새 내 옆으로 다가온 지민이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1.5 리터 물병을 들어줬다. 점점 지은이와 후배의 존재는 잊혀져 가고 지민이와 나는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만난 서로를 살피는데, 지민이의 말을 끊은 후배가 대뜸 내 앞으로 와서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얘, 얘가 이렇게 깍듯하던 애가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자 허리를 들어올린 후배는 나를 향해 일명 썩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기분 나쁜 일 있었나.
선배 방금 운동하고 나오신 거면 씻으셔야 겠네요. 그죠?
그럼 지민 오빠랑 저랑 먼저 도서실 가 있을게요. 후배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말해왔다. 옆에 있던 지민이는 후배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내 목에 걸려 있던 수건으로 내 땀을 닦아줬다. 뭐야, 얘 왜 너한테 오빠라고 부르냐.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아니꼽게 후배를 바라보고 있던 지은이는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지민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으억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린 지민이는 내게 기대며 투덜댔다. 아, 왜 때리고 그러냐, 너느은.
아아, 같은 과도 아니구. 선배라고 부르긴 좀 그래서….
그럼 오빠라고 부르긴 좀 안 그러냐?
아니, 그게.
왜 그래, 이지은. 또 쓸데없는 짓한다. 점점 말소리가 커지려는 지은이를 뒤로 밀어내며 후배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 나 씻는 데 오래 걸리니까 둘 먼저 가 있어. 지은이는 나의 말에 고개를 팩하니 돌려 나를 쏘아보였고, 후배는 내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가져온 건지 모르는 이온 음료를 지민이는 가방을 앞으로 메곤 끙끙대며 찾더니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태연히 제 가방을 고쳐 맸다. 기다릴게, 씻고 와. 그 말에 후배는 고개를 번쩍 들고서는 지민이를 쳐다봤다.
도서실 답답하단 말이야. 요 앞 벤치에서 기다리구 있을게.
내 손에 쥐어준 이온 음료를 다시 제가 뺏어 들고 간 지민이가 캔을 따서는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내 손에 쥐어줬다. 힐끔 바라본 후배는 제 품에 있던 전공책을 꼭 끌어 안았고, 눈썹이 추욱 처지는게 꼭 제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뺏겨 시무룩해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괜히 분위기가 싸했고, 나는 애써 상황을 무마시키려 손을 내저었다. 아이, 됐어. 나 씻는 거 오래 걸리는 거 알면서. 먼저 가 있어, 진짜루. 내 옆에서 요지부동인 지민이의 등을 살짝 밀어냈다. 얼떨결에 후배의 옆으로 가게 된 지민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고, 그제서야 후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선배!
아, 으응!
… 너어, 빨리 와.
지민이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 얼굴에 환하게 걸린 미소를 보고 그제서야 안심을 했는지 지민이는 뒤돌아섰고, 그런 지민이를 한참동안이나 빤히 바라보던 후배도 덩달아 방향을 틀어, 지민이와 함께 체육관 건물을 나섰다. 어휴, 븅신. 옆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지은이는 내 목에 걸려 있던 수건을 가져가 머리 위에 푹 덮어씌우며 먼저 자리를 떴고, 덕분에 복도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저 멀리 나란히 걸어가는 지민이와 후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분홍색 셔츠에 하얀색 치마다. 지민이가 전에 입이 닳도록 말하던 자기 이상형. 분홍색 셔츠에 하얀색 치마 입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이상형이랬는데. 그래서 학기 초 때 한동안은 하얀색 치마만 주구장창 사입었던 기억이 났다. 탈의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슬쩍 본 거울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있는 내가 비춰졌다. … 아씨, 괜히 비교되게.
**
무슨 허구한날 맨날 술자리야.
야 좀 조용히 말해라. 걸렸다간 뒤져.
입 터는 건 나보다 니 전문일 걸.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를 열심히 씹고 있던 이지은이 과자를 한움큼 집어들더니 김태형에게 막무가내로 던졌다. 이게 바로 니 강냉이다, 씨발. 한동안 학생부 일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던 김태형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왔고, 움직일 힘도 없었는지 날아오는 과자를 온 몸 다바쳐 맞이했다. 바보들의 향연도 아니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돌리자 복학생 선배의 얼굴이 눈에 띄여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민이와 사귄다는 사실을 들킨 그 이후로 선배는 눈만 마주치면 날 달달 볶지 못해 안달이 났고, 나는 피해다니기 급급했다. 간간히 마주치는 고학번 선배들은 날 보면 복학생을 조심하라며 언질을 줬다. 선배를 떠올리자 답답한 마음에 앞에 있던 맥주 한 잔을 목으로 꿀꺽꿀꺽 넘겼다. 역시 첫 잔은 원샷. 내가 마시는 양을 보던 김태형이 기겁을 하고는 내 손에 들린 맥주잔을 뺏어갔다.
야, 너 오늘 술 마시지 마라. 요즘 컨디션도 안 좋은 게.
조금 남은 맥주를 제 입에 털어넣은 김태형이 다시 의자에 널부러져 앉았고, 이지은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뭔 일로 술까지 마셔줘. 존나 소름 돋네, 이것들. 팔을 감싸안은 이지은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기는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며 오버를 떨고서는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우리 테이블에는 김태형과 나와 몇몇의 동기들만 남았다. 맘 같아서는 나도 시끄러운 자리 쪽으로 옮겨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복학생과 마주칠까 봐 몸을 사렸다. 그런 나를 배려하는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태형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몇몇 동기들도 테이블이 조용해서 불편했는지 하나 둘씩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심심한데.
야, 너 자냐.
잔다.
자는데 말을 어떻게 하냐.
건들지 마라. 진심 잠 들기 직전이다, 나. 김태형의 말에 혀를 쯧쯧 차고서는 다시 잔을 들었다.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마셔야지. 저번에 아끼던 후배와 지민이가 함께 있는 걸 본 뒤로 계속 드는 느낌은 찝찝함이었다. 분명히 나는 질투 같은 거, 의심 같은 거 안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히 진상 찌질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수, 술이나 마시자. 반만큼 채워져 있던 잔에 맥주를 더 들이붓고는 손에 들어 쥐는데, 잠 들었다고 생각했던 김태형이 눈을 번쩍 뜨더니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진짜 그거 마시면 나 박지민한테 죽는다.
박지민이 너 술 마시는 거 죽어서라도 말리랬어. 진동이 계속 울리는 제 핸드폰을 들어 흔들어 보인 김태형이 내 손에 있던 잔을 제가 대신 내려놨다. 아쉽다…. 앞에 곱게 놓인 맥주를 보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가 이렇게 술 땡기는 날은 또 드물거든. 힐끔 김태형을 보자 신경질이 잔뜩 난 몸짓으로 핸드폰을 옆자리에 던지듯 놓는 게 보였다. 눈치 보고 잘 때 마셔야지. 눈동자가 돌아가는 걸 눈치챈 김태형이 야이씨 하고 팔을 홱 들다가 말고는 주머니에서 꿈틀대며 무언갈 꺼내서는 나에게 건넸다. 자, 포도 스티컨가 뭔가. 너 요즘 기분 안 좋아 보인다고 박지민이 주라더라. 내 손등에 턱하니 붙여진 포도 스티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꿀꿀했던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포도 스티커지.
오, 태형이랑 OO 여기 있었냐.
아, 선배 안녕하세요.
앉아, 앉아.
OO가, 너 요즘 걔 시다바리 해준다며. 우리 테이블에 몸을 구겨 앉은 한 선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우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고, 나는 대답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나의 등을 위로한답시고 퍽퍽 두드린 선배가 내 앞에 놓인 맥주잔을 손수 들어 내 손에 쥐어줬다. 한동안 고생했는데 한 잔 해야지. 선배는 넉살 좋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워후, 나이스. 물 만난 고기마냥 맥주잔을 들어올린 나를 보고는 고개를 내저은 김태형도 선배의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고, 세 개의 잔은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옳지. OO 쭉쭉 잘 마신다.
막힘없이 쭉 들이키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선배는 어느샌가 다른 시끄러운 테이블을 찾아 떠났고, 그 뒤로도 선배들은 돌아가며 나에게 위로주를 건넸다. 처음 몇 잔 정도는 꿀꿀한 기분을 식히기에 좋았는데 점점 쌓이고 쌓이자 더이상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속이 더부룩해졌다. 힐끗 핸드폰 액정에 비춰보자, 벌개진 눈이 보였다. … 맛 갔네, 나. 그런 나를 짜증난다는듯이 쳐다본 김태형이 한숨을 쉬었다. 야, 복 날아가 새끼야. 태평한 나의 말에 욱한 김태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 OOO 아니야.
아, 안녕하세요 선배….
오랜만이네. 나 피해 다니기 바쁘더니.
옘병할. 그렇게 피해 다니고 피해 다녔던 복학생과 드디어 얼굴을 마주했다.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로 우리 테이블에 느긋하게 걸어오는 선배 옆에 누군가가 쫄래쫄래 따라 붙는 게 보였다. 뭐야, 쟤. 쟤가 왜 저 선배 옆에 붙어있어. 당황한 김태형이 속삭이듯 말했고, 나도 어벙벙한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알면 이러고 있을 리가. 분명 내 눈에 보이는 건 며칠 전에 지민이 옆에서 마주친 후배였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올 때부터 아끼고 아꼈던 후배. 후배는 쭈뼛쭈뼛 우리 테이블로 와 김태형의 옆 자리에 앉은 선배를 따라 내 옆자리에 앉았고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내가 있잖아. 사람이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어쩔. 어쩌라고. 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근데 뭐, 내가 그냥 용서해주려고. 계속 이렇게 있으면 너도 불편할 거고, 나도 불편할 거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는 선배를 보니 가짢아서 속이 턱 막혔다. 저 새끼 저게 뭐라는 거야? 힐끔 김태형을 보니 저쪽도 욕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억지로 막고있는 것 같아 보였다. 사람 열 받게 하는데는 선수다, 진짜. 뻔히 선배를 바라보자 어느새에 소주 한 병을 가져온 선배가 내 빈 잔에 소주를 3분의 2만큼 따랐다. 저렇게 말하니까 작아 보이지? 무려 맥주잔이다, 맥주잔. 소주를 맥주잔에다 3분의 2를 따랐다, 미친놈이.
대신, 한 잔 쭉 들이켜.
… 네?
이거 한 잔으로 퉁 치자는 거지.
퉁은 개뿔 염병. 진짜 니 목숨을 퉁 쳐버리는 수가 있다.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엎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주위에 과 선배들도 있었고, 어떻게 보면 내가 거짓말한 거는 또 맞는 거니까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내가 염병, 졸업만 해 봐. 주옥같은 대학 생활. 열이 뿜어져 나오는 거를 식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선배가 고갯짓을 했다. 안 마시고 뭐해. 아, 우리 후배는 짠 같은 거 뭐 해줘야 되나? 씩 웃은 선배가 대충 소주를 들이부은 잔을 들어 올렸다.
선배, 얘 아까까지 많이 마셨어요. 그러지 마시고….
김태형의 만류에 선배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저 븅신이 화를 더 돋우는 짓을 하고 앉아있어. 어차피 이럴 거라는 거 예상도 했고, 지금 안 마시면 졸업할 때까지 뭔 지랄을 할지 뻔히 보이기에 모든 걸 놓은 채로 그냥 마시고 죽자 라는 마음에 잔을 들었다. 너 진짜 박지민한테 나 맞아 죽는 꼴 보고 싶냐. 금새 몸을 일으킨 김태형이 내 손에 들린 잔을 들고 가며 나에게 속삭였다. 선배, 짠! 특유의 실실거리는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시킨 김태형이 금방 잔에 있던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저거 내일 나한테 얼마나 찡찡대려고. 그 많던 소주를 금방 넘기는 김태형을 보며 나까지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야, 태형이 OOO 술까지 마셔주고.
느, 네?
둘 사이가 아주 각별한가 보네.
김태형이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빤히 바라보던 선배는 기분 나쁘게 씨익 웃으며 그런 말을 했고, 저 웃음에 지친 나는 대변할 틈도 못 찾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과자를 김태형 쪽으로 쭉 밀었다. … 속 챙겨라 븅신아. 김태형은 제 앞으로 밀어진 과자를 한 손 가득 잡아 입으로 쳐넣었다. 둘이 서로 보는 눈빛도 이상하고 말이야. 능글거리며 말하는 선배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찜찜한 기분에 그 시선을 따라가자 혼자 굳은 표정을 하고 정자세로 앉아서는 나와 김태형을 번갈아 보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후배는 시선을 돌려 복학생과 눈을 맞추더니 신호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신호를 주고 받았다. … 염병. 뭐 있는 거지, 이거. 쎄한 기운이 느껴졌다.
**
요즘 바둑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봐.
허구한날 노래 연습한다고 소리 꽥꽥 질러대니까 그렇지.
아니, 그렇다고 침대 위에 똥을 싸? 어?
나에게 역정을 낸 이지은이 결국에는 전공책을 떨어트렸다. 쓸 데 없는 일에 흥분 좀 하지 말라고 좀. 나의 충고에도 한 귀로 들어 먹고 한 귀로 흘린 이지은이 휴대폰으로 '강아지 교육시키는 법' 을 검색했다. 아니, 들어 쳐먹은 건지 아닌지 조차도 모르겠지만. 휴대폰에 곧 빨려들어갈듯 집중해있는 이지은을 뒤로 하고 앞장 서 강의실 문을 열자 신입생들이 우루루 몰려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 전공 수업이 이래서 싫어. 괜히 군기만 잡아가지고. 쓸 데 없는 인사나 받게 만들고. 대충 손을 흔들고는 구석자리를 찾아 앉자 뒤 따라온 이지은이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야, 나도 스트레스 많이 받나보다. 미간이 찌푸려진 이지은에 걱정이 돼 되물으려는데,
조온나 급똥.
… 염병할. 욕을 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이지은의 얼굴은 이미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래 가자, 가. 화장실에 혼자 가는 걸 싫어하는 이지은을 위해 따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발걸음을 빨리해 강의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간다. 어유, 제 2의 바둑이 저 년을 어떡할까 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뒤따라 가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이지은의 뒤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소리를 지르자 대답도 없이 화장실 문을 쿵 닫는다. 그래, 싸라 싸. 시원하게 싸라 제발. 큰 거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는 이지은에 며칠 전에 깐 게임이나 해볼까 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내 발 앞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온 구두가 멈춰 서는 게 눈에 보였다.
선배,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 무, 무슨 일 있어?
저, 다름이 아니라.
선배가 저번에 주신다는 족보요. 아니, 족보 말고 뭐든요. 선배가 도와주신다고 했던 것들, 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평소엔 언니, 언니 하고 방긋 웃으며 나를 따라다니던 후배가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는 차갑게 말하는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봐도 딱히 얘한테 잘못한 건 없고. 애초에 잘 마주친 적도 없을 뿐더러. 요새 지민이와 좀 자주 부딪혔다 뿐인데. 구두도 얼마나 높은 걸 신었는지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던 애가 하늘로 쑥 올라있었다. 후배를 살짝 올려다 보며 조심스럽게 왜냐며 묻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후배가 입을 열었다.
다 들었어요, 저.
어? 뭘 다 들었다는 건지….
선배가 태형 선배랑 지민 오빠 사이에서 따지고 재고 하는 거요.
도대체 뭐라는 건지, 얘가.
저번에 과모임 때도 그랬고, 평소에 좀 이상하다 싶었던 것들도 많았어요. 선배는 어떻게 지민 오빠를 놔두고 그럴 수가 있어요? 들었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지민 오빠가 선배좋아했다면서요. 그런 사람 놔두고, 그러고 싶으세요 선배는?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내는 후배에 입을 턱하니 벌린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게 아닌데.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긴데. 벙찐 나를 보던 후배가 내 품에 종이 한 더미를 안겼다. 이거, 저번에 선배가 주신 프린트들이요.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학기 초에 시험을 치려는데, 하나도 감이 안 잡힌다며 울상을 짓던 후배를 위해서 집에서 한참을 찾아서 주었던 유인물이었다.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너무하시네요.
아니, 저기….
저요, 처음에 지민 오빠 보고 혹했어도 선배 생각해서 마음 접었었거든요?
근데, 이젠 안 그럴려구요. 내 앞에서 몸을 홱 돌린 후배가 나지막히 말하더니 발걸음을 뗐다. 아…. 여전히 나는 벙찐 채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고. 이런 말을 들으면 반박을 하고 따지는 게 옳은 건데 막상 면전에 대놓고 그런 말을 들으니 머릿 속이 하얘지고 속에 뭔가 꽉 막힌듯 답답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후배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혼자 억울해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내쉴 뿐이었다. 아, 진짜 OOO 븅신이냐. 후배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내 시야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야, 뭐하냐.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무슨 일 있었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나에게 다가온 이지은이 내 얼굴을 살피고는 물었고, 나는 대충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었어. … 일단은 덮어두자. 나는 그저 그 사건이 물 흐르듯 지나가기를 바랬다. 괜한 소란 피우는 거 보단 나으니까. 조금만 있으면 다 알게 되겠지. 별 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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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 없길 바란 건 나 뿐이었나 보다. 그 후배와 같이 몰려다니던 1학년 여자 신입생들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기 보다는 서로 우르르 몰리며 쑥덕거리기 바빴다. … 역시 있을 때 잘하라고, 차라리 인사 격하게 해줄 때가 좋았구나. 평소에 주변을 신경쓰고 다니지 않았던 나도 후배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언가를 할 때도 괜히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런 내가 걱정이 됐는지 지은이는 항상 어디 갈 때마다 나를 챙겨서 다녔다. 그래도 눈치를 보는 건 똑같았지만. 물론 지민이한테 이 일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분명 제 공부도 제쳐놓고 걱정할 게 뻔하니까. 조금 있으면 나름 고시생인데, 신경쓰고 싶게 하진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남의 눈치를 보며 찌질이 생활을 일주일동안 하고 다시 전공 수업이 돌아왔다. … 아, 진짜 듣기 싫다, 수업. 이지은이 스트레스를 풀자며 데려간 베스킨 라빈스에서 들어가지 않는데도 꾸역꾸역 입에 쳐넣은 아이스크림이 잘못이었는지는 몰라도 아침부터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머리가 띵했다. 정신 상태도 안 좋은데다가 몸 상태도 안 좋으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뭐, 후배가 보기 싫은 게 사실은 컸다.
야, 너 괜찮아 진짜?
괜찮아. 죽진 않겠지.
븅신아, 얼굴 보면 곧 죽겠다.
소리를 지른 이지은이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했고, 기대다 싶이 이지은의 부축을 받으며 손을 잡은 내가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데, 강의실이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 내 일주일 생활의 원인인 후배가 보였다. 아, 마주치기 싫다. 얼굴 보기 싫다. 목소리도 듣기 싫다. 이지은을 끌어당겨 애먼 길을 돌아가려는데, 아까는 기둥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지민이가 후배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 지민이가 왜 저기 있지. 아니, 왜 쟤랑 같이 있지. 아까는 끙끙대며 자기를 끌어 당기던 애가 멈춰선 게 이상했는지 이지은도 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 조합은 뭐냐. 존나 이해 안 가는 조합인데.
지민이와 후배 뒤로 웃으며 따라 걸어오는 복학생도 보였다. 이지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가만히 그 쪽을 바라보는데, 나와 이지은을 발견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오던 후배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자 따라 걸음을 멈춘 지민이와 복학생도 나를 발견했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복학생 선배는 그 길로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지민이와 후배는 다시금 발걸음을 떼곤 우리 쪽으로 걸어왔고, 인사도 없이 나를 바라본 후배는 강의실로 쏙 들어갔다. 야, 쟤 지금 너 째려본 거 맞지. 후배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이지은은 발을 쿵쿵 굴리며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고, 지민이는 굳은 표정으로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지, 지민아 안녕. 오늘 처, 처음 만났네. 그치?
… 너 어디 아파?
어? 내가? 아니, 아플리가. 하나도 안 아파.
내 얼굴만 보고서도 금방 상태를 알아챈 지민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지민이의 굳은 표정이 낯설었다. 아까부터 후배와 나란히 걸어오면서부터 얼굴이 좋지 않았던 지민이는 내 앞에서조차 입을 앙 다물고 표정을 굳힌 채로 나를 대했다. … 왜 저러지. 다 들었나. 진짜 내가 한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콕콕 찔렸고, 혹시나 후배가 말했으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을 했다. 지민이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친 나는 타오르는 목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OO야, 아까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너,
그, 그러니까 그게…. 집.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전공 강의를 앞 두고 일이 있을리가. 말도 안 되는, 믿을 리가 없는 변명을 했다. 뭘 들었다는 건지, 누구한테 들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듣기 싫었고. 나는 천천히 내 얼굴을 감싸쥐려는 지민이를 피한 채로 건물을 뛰쳐나왔다. 무슨 비련의 주인공도 아니고. #OOO 찌질하다 진짜. 괜히 오늘도 하얀 치마를 입고 온 후배가 싫었다. 아까 잠깐이지만 마주친 복학생 선배도 싫었고, 아무 잘못 없지만 내 앞에서 표정을 굳혔던 지민이도 미웠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민이랑 같이 있어온 시간이 얼만데, 고작 후배 한 명이랑 그 몇 초 같이 있었던 걸 봤다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내가 싫었다. 그냥 내가 너무 싫고,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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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과 이어집니다.
본격 완결 앞두고 괴롭히기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