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단편/조각 만화 고르기
이준혁 몬스타엑스 강동원 김남길 성찬 엑소
전체글ll조회 793l 1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퍽하는 타격음, 혹은 파열음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끝없이 울리는 계집애들의 비명소리에 온 학교는 난리가 났다. 구급차를 부르고 급하게 달려온 학년부장 선생님이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을 통제해 교실로 집어 넣었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끌려다니던 한 아이는 기어코 선생님들의 손을 뿌리치고 모든 소동의 원인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손바닥이 질척질척하게 젖어가고 교복 바지의 무릎 언저리가 붉게 물들었다. 아이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한때는 정말 잘생겼던 자신의 연인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에 모래가 박혀 오돌토돌하다. 아이는 천천히 모래조각을 떼어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민호야, 아프겠다.


바닥을 온통 적신 핏물을 손으로 그러모으며 아이는, 기범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프지, 아플거야. 금방 아프지 않게 해줄게… 왜, 이게 안들어가지? 빨간 피를 모아 민호의 터져버린 배에 붓는다. 그러나 이미 넝마가 된 장기는 그대로 널부러져 달라질 줄을 몰랐다. 기범은 거칠게 제 어깨를 잡아 밀치는 손길에 휙 뒤로 넘어졌다. 피범벅이 된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피가 어디서 나왔더라. 기범은 눈 앞을 전부 잡아먹은 붉은 형상을 다시한번 보았다. 아, 너구나. 제 머리를 쓰다듬던 듬직한 손이 기괴하게 비틀려있다. 커다란 눈이, 오똑한 코가, 날카로운 턱이, 작은 얼굴이, 전부 박살이 나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다. 기범은 제 모든것이 마치 그의 모양새처럼 박살이 남을 느꼈다. 천천히 다가온 실감이라는 것이,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민호야, 네가 죽은건지, 내가 죽은건지 잘 모르겠어… 까무룩, 다가오는 어둠에 기범은 눈을 감아버렸다.






와 의 거리
                                                    w.앵





01

종현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쏟는 기범의 등을 토닥였다. 또 그 꿈이니,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작은 몸을 덜덜 떨며 민호야, 민호야, 하고 중얼댄다. 종현은 한숨을 내쉬고 그런 기범을 진정시키기 위해 품 안에 끌어안았다. 저를 마주안으며 민호의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종현은 굳이 자신이 민호가 아님을 일깨워주지 않았다. 얽혀들어오는 몸을 가만히 안고 그 등을 쓸어내린다. 날카롭게 드러난 날개뼈가 안쓰러워 괜히 몇번 더 쓸어주었다.


"민호야, 많이 아팠지… 아팠을거야…"


한참을 그렇게 민호의 이름을 부르던 기범은 결국 제 풀에 지쳐 도로 잠에 빠졌다. 종현은 잠든 기범을 몇번 더 토닥여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다섯시, 지금 다시 잠들어봤자 금방 일어나야 하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는 그냥 좀 이르지만 기상하기로 결정하고 기지개를 폈다. 기범의 눈물에 젖은 티셔츠가 축축하게 제 어깨를 감아와 얼른 벗어버리고 새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색색대며 잠에빠진 기범의 얼굴을 슬쩍 본 종현은 이불로 대충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 방을 나왔다. 일교시 수업 전에 연습이 잡힌 날이라 금방 학교에 가야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종현은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푸석하다. 그는 얼른 수도꼭지를 열고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조금 정신이 드는 듯 했다. 간신히 도로 재운 기범이 결국 또 잠에서 깨어났는지 바깥에서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종현은 칫솔에 치약을 쭉 짜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멎은 발소리에 이어 베란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종현은 재빨리 칫솔을 내려놓고 욕실을 박차고 나갔다.


"김기범!"


난간을 잡은 기범의 손을 거세게 떼어낸다. 꼭 이전에 그랬던 것 처럼 뒤로 밀쳐진 기범이 초점없는 눈으로 종현을 응시한다. 종현은 재빨리 베란다 문을 잠그고 기범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여전히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이리저리 배회한다. 종현은 그 안에 다시 민호의 잔상이 맺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범의 어깨를 쥐었다. 세게 몸을 흔들자 기범이 화들짝 놀라 쿨럭, 하고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종현은 그의 등을 쳐주며 급하게 나오느라 살짝 문에 찧은 왼쪽 발을 다른 쪽 발로 쓱쓱 문댔다. 남이 보면 경악을 할 만한 광경이지만 종현은 이미 모든것에 익숙했다. 민호의 꿈을 꾸고 민호의 죽음을 떠올릴때마다 자살 시도를 하는 기범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참으로 얄궂은 익숙함이다. 종현은 의문을 담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기범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종현을, 기범은 항상 그랬듯이 믿지 않았다.


"또?"
"…응."


종현의 대답에 기범은 아래로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꽤나 세게 엉덩이가 바닥에 부딪혔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종현은 고개를 떨군 기범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하얗게 질린 손을 꼭 잡았다. 결국은 아무일도 없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마치 최면을 걸듯 반복되는 목소리에 기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아프지 않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기범은 몸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리고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는다.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종현에게 웃으며 학교 갈 준비 해야지, 하고 말한다. 종현은 곧 욕실로 자취를 감추었다.

기범은 땀 범벅이 된 제 몸을 소파 옆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로 대충 닦아내었다. 여전히 살짝 떨리는 손을 맞잡고 꾹꾹 누르며 안정을 찾은 기범은 자세를 편하게 하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앞에 보이는 얼굴이 있어 금방 다시 눈을 떠야했지만.


"오늘 나 3교시까지 전공 하나만 들으면 수업 끝이야."


어느새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기범의 옆에 앉은 종현이 말했다. 기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에 튄 물을 닦아내었다. 금방 오겠네. 응. 짧은 대화는 또 싱겁게 끝이 난다. 기범은 약간 불편한 느낌에 종현을 두고 홀로 침실로 들어갔다. 항상 이런 일이 있고나면 측은하다는 듯 변하는 시선이 기범은 참을 수 없을만큼 싫었다. 물론 종현은 온전치 못한 자신을 받아준 아주아주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거니까.


"기범아, 나 다녀올게."


몇 분 정도 딴생각을 하고있자 종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범은 어어, 하고 대답했다. 곧 삐리릭 하는 잠금장치가 열리는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도 이어 들려왔다. 기범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다시 덥쳐오는 잔상을 거부하려다, 몰려오는 그리움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번에도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비어버린 옆이 결국 나를 그의 곁으로 끌어당길지도 모르는데… 아아, 그것도 괜찮겠다. 정말, 괜찮은 것 투성이구나…







02

민호는 옥상에 서서 미친듯이 떨고있었다. 아래에서 사색이 되어 저를 올려다보는 기범의 얼굴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누군가가 매직으로 써놓은 호모라는 두 글자가 그의 교복 마이에서 도드라졌다. 끝내 눈물을 터뜨린 민호가 높은 난간위로 기어 올라간다. 뛰어난 운동신경이 엉뚱한데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탁, 난간의 꼭대기에 올라선 민호는 숨을 틀이켰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 전체를 울린다. 민호는 5교시 수업으로 예정되어있던 수학의 담당 선생님이 여전히 바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수업, 들어가셔야죠. 조용히 건넨 말이 듣는이 하나 없이 파스락 공중에서 부서졌다.


최민호!  허튼 생각 하지말고 내려와!


크게 외치는 소리에 민호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허튼 생각. 허튼 생각이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 부근을 괜히 꾹 눌러본 민호는 뜯겨진 제 와이셔츠를 더 넓게 펼쳤다. 까무잡잡한 피부 위에 보기싫게 박힌 흉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칼날로 꼭꼭 눌러 쓴 더러운 호모새끼, 하는 글자들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비겁하게 뒤에서 덮쳐놓고 저를 비아냥대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댓명은 되는 놈들이 몰려와 저 하나를 가지고 놀았다. 일대일로 붙으면 뼈도 못 추릴 새끼들이- 민호는 복받친 감정에 울부짖었다. 실컷 두드려 패놓고 나중에는 떠올리기도 싫은 헛소리를 하며 제 엉덩이를 더듬던 손길을 기억한다. 이어서 벗겨져 내려가던 교복의 감촉도. 전부 기억한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외모덕에 유명세를 탔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백을 받았고,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같은 기념일에는 사물함이 터지도록 많은 선물을 받았다. 2학년이 될 때 까지, 그러한 그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완벽한 그에게도 한가지 흠이 있었다. 아니, 흠이 아니었지만 남들이 그것을 흠이라 생각했다. 그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범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모든것의 시작은 그러했다. 아주 단순하게 예쁜 기범과 친해지고 싶었고, 금방 친해졌고, 그리고 좀 더 발전해서 연인이 되었다. 항상 손을 꼭 잡고 함께 다녔다. 행복에 겨운 날들이 계속됐고 그 행복이 평생을 갈 줄 알았다. 그러나 반 친구가 장난으로 던진 너네 사귀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 날 이후 그의 인생은 백팔십도 변했다. 사물함에 쓰여진 악의적인 말들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선배들이 불러 주먹질을 할때에도, 그 순간만 버티면 금방 괜찮아졌다. 민호는 또래 아이들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시퍼런 멍을 달고서도 항상 기범을 걱정했다. 제 끄덕임으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기범에게 항상 미안했다. 내가 전부 떠안고 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했다.

그래서 그랬다. 기범을 끌고가려던 패거리들에게 개처럼 달려들었던 것은. 간신히 도망쳐 기범을 집으로 돌려보낸 민호의 뒤를 그들이 밟았다. 세게 얻어마진 뒷통수에 정신을 못차리고 쓰러진 그는, 아무도 없는 공사장 컨테이너 박스 안에 처박혔다. 몇번이고 발길질을 받아내며 그는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번에도 이 시간만 참으면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평범한 폭력과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반항을 할 기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민호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았다. 서럽고 억울해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저를 괴롭히는 악몽에 발버둥을 치던 때 처럼 거칠어진 숨을 자신이 다스릴 수 없게 되었을 쯤, 그는 천천히 떨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허공으로 내딛어진 발이 닿을 곳 없이 잠깐 허공에 머물렀다가,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한다. 아, 기범아. 너에게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 지옥 속에서 네가 내 빛이었노라고, 네가 있어주어서 고마웠다고, 너의 모든 상처는 내가 안고 떠날테니 너는 행복만을 안고 살아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절망의 도가니 속에서 뒤늦게 빼꼼 고개를 내민 기범의 얼굴을, 민호는 끝내 쓰다듬지 못했다. 곱게 뻗었던 그 손이 바닥에 처박혀 으스러졌기에. 






03

깜빡, 기범은 눈을 떴다. 온 얼굴을 적신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텅 빈 집. 홀로 침대위에 앉아있는 자신. 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나봐. 기범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민호야, 네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이제 조금씩 너를 극복하려 하나 봐. 기범은 한없이 착하고 순했던 민호이기에 자신이 저를, 그 과거를 극복해나간다면 분명 반가워했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종현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종현이 돌아올거고, 그럼 이번엔 아무렇지 않게 잠에서 깨었노라고 자랑을 해야겠다.

찌뿌둥한 몸을 풀던 기범은 온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방을 나왔다. 종현이라면 그냥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을텐데, 누구지? 경계하며 인터폰을 확인하지만 모르는 얼굴이다. 기범은 문을 열까말까 망설이다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천천히 현관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남자는 기범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아, 종현선배 과 후배에요. 종현선배가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하셔서."
"뮤지컬?"


네에. 대답하며 문 안으로 들어오는 태민에 기범은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다. 웃으며 고맙습니다, 하는 태민에게 뭐가 고마워, 하고 툭 던진다. 집 안으로 들어가며 태민은 조용히 주변만 둘러볼 뿐 그다지 기범에게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집안을 꽉 채운다.


"저, 기범 형 맞죠? 아, 형이라고 해도 되나…"
"마음대로 해요."
"종현 선배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종현이 형이, 밖에서 내 얘기를 해요? 놀란 듯 묻는 기범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태민이 이어 말했다. 되게 자주 해요. 같이 사는 룸메이튼데 요리도 잘하고 미술전공이라 그림도 잘그리고, 막 노래도 춤도 뛰어나서 우리랑 같이 학교 다닐뻔도 했다고 그랬는데. 칭찬일색이에요. 근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선배가 이해가 가네요. 쏟아지는 말에 왠지 부끄러워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던 기범은 태민을 소파에 앉히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렌지주스 괜찮아요? 마땅한게 없네. 네, 주신다는데 다 좋죠. 


"선배가 하는 얘기 듣다보면, 형이 우리학교 아닌게 아쉬울 정도에요."
"원서 썼는데, 떨어졌어요."


실기날 못갔거든요. 담담한 기범의 목소리에 왠지 미안해진 태민은 조용히 제 앞에 놓여진 유리잔을 들고 오렌지주스만 홀짝였다. 눈치가 빠른 기범은 하하 웃으며 괜찮아요, 했다. 나 지금 다니는 학교에 만족하고 있어요. 사실, 뮤지컬보단 디자인이 더 잘 맞기도 하고…


"그런데, 종현 형은요?"
"잠깐 볼일 있다고 어디로 갔는데, 좀 늦네요."


슬슬 노래 맞춰봐야 하는데. 작게 말하는 목소리에 기범은 문득 가슴이 설레여왔다. 노래, 하는구나. 한때 종현과 함께 뮤지컬과에 가기 위해 밤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던 사람. 민호. 내가 노래하고 춤추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던 민호, 나의 민호… 입안이 까끌까글한 느낌이 들어 기범은 주스로 입 안을 채웠다. 새콤달콤한 맛이 안을 돌아다니다 꼴깍 넘어갔다. 민호가 죽고, 두어달 정도 정신을 놓고 지내다가 고3에 올라가선 이를 악물고 실기에만 매달렸다. 미친 사람처럼 목이 다 갈라질때까지 노래했고, 온 몸이 부서질 듯 아파올때까지 춤을 췄다. 


"디자인, 재밌어요?"


기범의 긴 상념을 뚫고 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범은 잠깐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죠, 뭐.


"신기해요. 노래도 춤도 잘하면서 그림도 잘 그리는 게."
"원래 예술은 다 연결되어 있다잖아요. 음악 잘하는 사람이 미술도 잘 하고, 미술 잘 하는 사람이 음악도 잘 하고."
"그래요? 전 그림 정말 못 그리는데."


고등학교때 미술 수행평가에서 F 맞았어요. 고등학교떄요. 원래 고등학교 최저점수는 D잖아요, 근데 난 F였다니까? 태민의 말에 기범이 깔깔대며 웃었다. 아 미치겠다, 진짜. 기범의 웃음섞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범은 아, 종현이 형 왔나봐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민도 기범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걸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온 종현이 과장스럽게 손을 흔들며 잘 있었어? 한다.


"딱 여섯시간 떨어져 있었거든?"
"난 무슨 6년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태민이도 안녕? 오래 기다렸지. 밝게 물어오는 종현에게 아니에요, 기범 형이랑 얘기하느라 시간 금방 갔어요. 태민의 말에 미묘한 표정으로 기범을 슬쩍 바라본 종현이 금방 시선을 돌리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악보 뽑아왔어?"
"네!"


태민이 부스럭대며 제가 들고 온 파일철에서 악보를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는다. 종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을 훑으며 작게 허밍을 한다. 기범은 입을 헤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보다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피하려 걸음을 뗐다. 갑작스레 잡힌 손목만 아니었더라면 그냥 그대로 쭉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기범은 여전히 시선을 악보에 둔 채 저를 꽉 잡은 종현을 내려다 보았다. 뭐야, 툭 던지듯 말하자 그제야 종현이 고개를 들어 기범을 마주본다. 손에 살짝 힘을 줘 기범을 다시 소파로 이끌은 종현이 그의 어깨를 눌러 도로 자리에 앉혔다. 


"여기 있어."


태민이 당황한 듯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 기범은 그냥 순순히 몸에 힘을 풀었다. 네가 꼭 불러줬으면 하는 넘버가 있거든. 종현의 이어진 말에 기범이 숨을 들이켰다.


"싫어."
"네가 좋아하던 곡이야."
"나 이제 노래 안하는 거 알잖아."
"태민이가 수업때 불러야 되는 곡인데, 느낌을 잘 못 따라가서 그래. 너 이거 잘하니까 한번만 도와줘."


한참을 말없이 뾰로통하게 앉아있던 기범이 간절한 태민의 시선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딱 한번만이다. 기범의 답에 태민이 웃으며 고맙습니다, 한다. 이럴려고 데려왔구만? 기범의 물음에 멋쩍은듯 웃은 종현이 악보를 집어들었다. Wicked little town. 종현이 작게 곡의 제목을 읊조렸다.


"헤드윅?"
"나는 토미."


와, 진짜 안어울린다. 차라리 헤드윅을 하지. 기범의 말에 종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보컬 과제가 어울리지 않는 곡 소화하기야. 종현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태민이 볼멘 소리로 제가 헤드윅이에요, 대박이죠. 했다. 이후로 몇마디 더 나누던 그들은 종현이 노래를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입을 닫았다. 종현의 입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온 멜로디는 반주 없이도 충분히 훌륭했다. 원작의 토미보다는 좀 더 절절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아서 기범은 소리없는 탄성을 질렀다. 멋지다. 


"기범아, 네 Wicked little town도 들려줘."


어느새 노래를 마치고 제게 다른 가사가 쓰여진 악보를 쥐어주는 종현에게 기범은 으응, 하고 대답했다. 막상 해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거의 2년 가량을 노래와 담을 쌓고 지냈던지라 소리를 내는 법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푼 기범은 눈을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는 태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초반에 약간 불안하게 덜리던 목소리는 점점 정리되어 곱게 뻗었다. 가녀린 듯 메탈릭한 목소리가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종현은 미소를 지었다. 봐, 이럴 줄 알았어. 너는 역시 노래할때가 가장 예뻐. 슬쩍 고개를 돌려 태민을 보니 거의 기범에게 홀린 것 같이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그가 빠진것은 그 곡일 것이다. 워낙에 음악에 열정이 대단한 태민인지라 이해할 수 있었다.

잔잔하게 끝난 기범의 노래에 태민이 물개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 형 진짜 대박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감정을 잡고 부르지? 태민의 순진한 물음에 기범은 쓰게 웃었다. 종현은 그 모습에 기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도? 응, 아직도.


"이 넘버는 담담하게 불러야해. 아프고 절망적인 나날들을 뒤로 하고 그저 웃어버리는거야."


네가 잃어버렸지만 이제는 괜찮은, 어쩌면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을 것을 떠올리며 불러. 태민을 향한 기범의 조근조근한 말에 종현은 숨을 죽였다. 그래서 기범아, 너는 너의 날들을 뒤로 하고있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길만으로 알 수 있어 기범은 웃었다. 아프지 않아. 알잖아. 괜찮다니까. 항상 그랬듯이.

태민은 그 이후로 한두시간 정도 더 있다가 돌아갔다. 단 한사람의 방문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해 종현은 만족스러웠다. 종종 데려와야겠어. 그래, 좋은 애 같더라. 아이구, 우리 기범이가 이제 다 컸네. 이제는 사람을 밀어내지도 경계하지도 않는 기범이 대견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정말 이렇게 우리가 아무일 없던 듯 웃는 날이 오기는 하는구나. 종현은 기범의 하얀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기범아."
"응?"
"너, 혹시 내가… 좀, 뭐랄까, 유명해지면 어떨 것 같아?"
"글쎄. 왜?"
"아니, 아니야. 그냥."


유명해지면 좋지. 너 어차피 그러려고 뮤지컬과 간거 아니었어?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되려고. 기범의 대답에 잔뜩 긴장했던 숨을 탁 풀어낸다. 하아, 길게 뱉어낸 숨에 기범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쳐다본다. 종현은 그런 기범의 머리를 그저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자켓 안 주머니에 들어있는 빳빳한 유명 엔터테인먼트 캐스팅 실장의 명함이 유독 가슴께에 닿아온다.


"기범아, 나 잠깐 다시 나갔다올게."
"어디 가?"
"그냥 잠깐. 친구만나러."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 종현을 다시 떠나보낸다. 기범은 왠지모를 한기에 몸을 떨었다. 저렇게 나간 종현이, 어쩐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멀어서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기범은 멍하니 종현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 침실로 들어갔다. 하얀 침대위에 지친 몸을 뉘고 눈을 감는다.






04

나 노래 잘 못하지.
음, 응.
야 진짜 못한다고 그러면 어떡해!
뭐라고 해야할까. 기술적으로 잘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근데 네 목소리를 듣는 사람을 울게 해.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기쁜 노래를 부를땐 정말 마음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고, 네가 슬픈 노래를 부를떈 너무너무 가슴이 저려서 견딜수가 없어.


그리고, 나는 잘 부르는 것 보다 감동있게 부르는 게 훨씬 좋은거라고 생각해. 노래를 잘 하는 보컬은 널렸지만, 목소리로 가슴을 만져줄 수 있는 보컬은 흔치 않거든. 이어진 민호의 말에 기범은 얼굴을 붉혔다. 뭐야, 괜히 어떻게든 좋은 소리 해주려고… 웅얼대는 기범의 입술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민호가 아니야, 하고 기범의 허리를 안는다. 네 목소리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야. 나는 네가 노래하고 춤출 때가 제일 좋아. 너무 빛나서 눈이 부셔. 남들은 오글거려서 견딜 수 없을만한 얘기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한다. 민호다운 말이었다. 기범은 새삼스레 이런 남자가 저를 사랑해준다는 것에 감동해 코끝이 찡해졌다. 


네가 있어줘서 고마워.
그럼 잘해.
야!
하하, 농담이야. 나도. 나도 네가 있어줘서 항상 고마워.


기범은 제 머리를 쓰다듬은 민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 눈을 감았다. 민호의 손은 참 예쁜데다 감촉도 좋다. 대체 민호는 가지지 못한게 뭐지. 얼굴도 이렇게나 잘생긴데다가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착하고, 다정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기범은 예고없이 마주닿은 입술에 화들짝 놀랐다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민호의 속눈썹에 또 감탄을 했다. 속눈썹도 길어. 가볍게 떨어진 입술에서 마찰음이 들렸다. 


딴 생각 하네.
아니야.
그래, 아니야. 내 생각한 거 다 알아.


네 생각. 맞아. 민호야, 나는 너를 알고나서 내 모든 일상을 네 생각으로 보냈어.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지금도 네 생각을 해. 민호야, 보고싶어.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눈을 감고 네 얼굴을 떠올려 봐. 그런데, 네 마지막이 너무 깊게 내 머리에 박혀버려서 자꾸만 못생긴 너만 떠올라. 너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는데. 정말로, 너무 잘생겨서 내가 항상 불안에 떨었었는데. 민호야, 나는 아직 너를 극복하지 못했어. 네가 없는 날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 * *

과거의 밍키, 현재의 쫑키, 미래의 현유가 번갈아가며 나올 예정의 글입니다.
어둡습니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 조금은 간질거릴수도 있을 것 같네요.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

 
독자1
리즌이에요ㅠㅠㅠ으악 처음부터충격...미노야ㅜㅠㅠ민호야ㅜㅜㅠ으흑 얼마나힘들었을까ㅠㅠㅠㅠ기범이도 점차나아가기를바래요 근데 현재의쫑키 미래의현유라면....미래의기범이는...? 해피엔딩이길바랍니다......ㅠㅠㅠㅠㅠㅠ사담이지만 미술하는사람이음악잘하고이렇다는데ㅋㅋㅋㅋ왜저는아닐까욬ㅋㅋㅋㅋ큐ㅠㅠ으악ㅜㅠㅠ저도잘하고싶네요ㅠㅠ기범이처럼ㅠㅠㅠ진기가노래부르는것도보고싶어요!!!! 기범이가 이제는 민호를 조금씩잊으며 다시 새로운 길을 걸었으면좋겠네요...제목이참의미심장하네요.....ㅠㅠㅠㅠ참묘한제목...노래를같이들으면서보면 더 아련해지는ㅜㅠㅠㅠ너무너무잘보고가요!개인적으로 호그와트랑 이소설너무너무기대되요!더운날 잘보내세요!
10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분류
  1 / 3   키보드
필명날짜
이준혁 [이준혁] 내게 비밀 남친이 있다 ss2_0713 1억05.01 21:30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번외편4 콩딱 04.30 18:59
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72 꽁딱 03.21 03:16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5 콩딱 03.10 05:15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54 콩딱 03.06 03:33
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61 꽁딱 03.02 05:08
엑소 꿈의 직장 입사 적응기 1 03.01 16:51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45 콩딱 02.28 04:59
이준혁 [이준혁] 이상형 이준혁과 연애하기 14 찐찐이 02.27 22:09
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53 꽁딱 02.26 04:28
김남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7 걍다좋아 02.25 16:44
김남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9 걍다좋아 02.21 16:19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45 꽁딱 02.01 05:26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33 꽁딱 02.01 01:12
김남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40 걍다좋아 01.30 15:24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2 꽁딱 01.30 03:35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1 꽁딱 01.30 03:34
방탄소년단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그루잠 12.26 14:00
방탄소년단 2023년 묵혀둔 그루잠의 진심4 그루잠 12.18 23:35
샤이니 [샤이니] 내 최애가 결혼상대?182 이바라기 09.21 22:41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2 콩딱 09.19 18:10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26 콩딱 09.16 19:40
지훈 아찌 금방 데리고 올게요5 콩딱 09.12 23:42
방탄소년단 안녕하세요 그루잠입니다9 그루잠 09.07 16:56
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임창균] 유사투표1 꽁딱 09.04 20:26
이동욱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4 하트튜브 08.23 20:46
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채형원] 유사투표2 꽁딱 08.15 06:49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19 콩딱 08.10 05:04
팬픽 인기글 l 안내
1/1 8:58 ~ 1/1 9:00 기준
1 ~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