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승철원우] 학회장 선배 2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051323/9e8461c9761bb3139c1d613fe9645edb.gif)
강제성 섞인 무언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엠티에 참여하게 된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엠티비를 걷는 과대에게 세종대왕이 그려진 녹색 종이 여섯 장을 내밀었다. 부너봉 육 만원, 오케이. 쉴 틈 없이 돈을 세는 과대를 보며 손에 돈냄새가 진동을 하겠다며 순영이가 킬킬거렸다. 다음 강의 과목이 뭐냐며 묻는 친구에게 조용히 유체역학 책을 들어 보였다. 부너봉! 나를 찾는 목소리에 바보처럼 에, 하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어느샌가 들어오신 교수님께서 출석체크를 하고 계셨고, 허공만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서야 그걸 알아채고 안 하느니만 못 한 대답으로 나의 존재를 알렸다. 멍청이, 부너봉. 고개를 힘차게 젓곤 정신 차리자는 의미에서 뺨을 두어 번 가볍게 쳤다. 혹시나 부끄러운 이 모습을 네가 봤을까 싶어서 괜히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인 건지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동시에 왠지 모르게 풀이 죽는 순간, 뒷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는 건, 여전히 네가 날 쥐고 흔들기에 충분하다는 증거였다. 순간 헉- 하고 들이마신 공기에는 너의 숨도 섞여 있을까. 그래서 이토록 날 숨 막히게 하는 걸까. 너와 같은 공간에 있는 이 시간이 내겐 지옥과 다름없었다.
권순영은 까불지 말고 빨리 자리에 앉고 전부 집중, 이라며 인사말로는 살짝 어긋나는 듯한 말로 시선을 모은 학회장 선배가 꽤나 인자한 미소를 짓곤 입을 열었다. 우리 엠티 가는 거 장 봐야 되잖아, 라는 말에 일 학년 모두 입에 꿀이라도 문 듯 일제히 벙어리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며 호탕하게 웃은 (약간 과장을 하자면 선배가 손으로 내리치는 교탁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선배가 딱 여섯 명만 뽑겠다며 왼손과 오른손 엄지를 펴서 내보였다.
"아아-, 다섯 명만 뽑으면 돼. 나도 당연히 같이 가는 거고, 일단 권순영은 무조건 당첨."
"헐, 형! 그게 뭐예요. 나 안 가."
"엔드라이브 풀기 전에 조용히 해, 새끼야."
뭣 모르고 철 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재미 삼아 찍은 영상을 가지고 아직도 시덥잖게 협박이나 하는 게 아주 학회장이 아니라 깡패라며 학회장 선배를 대놓고 흉 보던 권순영은, 선배의 째림을 받고 입이 대빨 나왔다. 자원한 사람은 밥을 사주겠다는 말에 고민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거수했고, 마지막 한 명의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선배는 큰 혜택이라도 준다는 듯이 권순영을 불렀다. 인마, 네가 한 명 골라. 장 잘 볼 거 같은 애로 골라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순영은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쥔 것 같은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표정을 띈 채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너봉, 당첨!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개구쟁이 마냥 웃으며 들이미는 얼굴이 꼴 보기가 싫어서 옆으로 힘껏 밀어버렸다. 너봉쓰 힘내라, 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던져주는 동기들에게 뭐라 대꾸할 힘도 없었다. 권순영, 이 죄악 덩어리!
수요일 강의 다 끝나고 일 층 카페 앞에서 보자는 선배의 말에 권순영의 소매만 붙잡은 채 시선을 땅에 고정시켰다. 아직은 학기 초라서 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나눠봤던 동기들이 많이 없었을 뿐더러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던 나는 남자 동기라고는 여지껏 과대와 권순영, 전원우랑만 말을 텄었다. 선배는 언제 오신대, 라는 내 물음에 입술을 쭉 내밀고 한껏 얼굴을 찌푸린 권순영이 형은 수업 좀 늦게 끝나는 거 같은데, 라며 툴툴거렸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을까. 누군가 전원우를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질기게 시선이 얽혔다. 이번에는 먼저 눈을 돌려 피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그 지독하게도 슬픈 사실이 치명적인 독을 묻힌 듯한 커다란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기라도 하는 듯이 아팠다. 어디를 가냐는 동기의 물음에 살풋 웃으며 과사무실, 이라 대답한 너가 이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아, 꿈인가. 그래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데도 막상 내 두 다리로 울렁거리는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건가 보다. 큰 소매가 덮어 가려버린 네 손의 온기가 오늘따라 유독 더욱 그리웠다.
세상이 물기를 머금은 듯 했다. 나 또한 물은 잔뜩 먹어서 까만 먹구름인 걸까. 그래서 이렇게 발걸음이 무겁고 축 처지는 걸까. 시시한 농담 따먹기를 하며 걷는 무리에 차마 낄 수가 없었다. 뭐가 그리도 재미난 건지 팔까지 휘저으며 이야기를 하는 권순영 덕에 팔은 고사하고 걸을 때마다 달랑거리는 권순영의 가방끈만 꽉 움켜쥔 채 내리막길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너봉이는 원래 그렇게 조용했나. 처음 봤을 때는 잘 웃고 얘기하더만."
갑작스레 타인의 입에서 불려진 내 이름에 놀라 나도 모르게 흠칫 떨자, 힘든 일 시킬까 봐 긴장이라도 한 거냐며 내 어깨를 큰 손이 토닥였다. 오랜만에 느껴본 따뜻함에 녹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번뜩 전원우 생각이 났다. 잔뜩 우울해진 내 표정을 보곤 혹시 자기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사과를 건네는 선배의 모습이 방금 전의 모습과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세상 혼자 사는 듯 편해보이더니 지금은 나한테 쩔쩔매는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그게 아니고 그냥, 이라며 말을 아끼는 내 모습에 선배는 조용히 다가와 이내 내게 어깨동무를 하곤 발걸음을 바삐 했다. 뒤에서 우리를 부르며 뜀박질을 하는 권순영과 어리둥절한 동기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덕분에 먼저 마트에 도착한 우리는 갑작스런 정적에 휩싸였고, 부담스럽게도 나를 빤히 내려다 보는 선배의 눈빛을 굳이 쳐다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기에 손만 꼼지락거렸다. 너봉아, 너 오빠 번호 없지. 고개를 갸우뚱 하니 핸드폰 줘 봐, 라며 손을 척 내민 선배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에헤-, 거 참. 영감님 흉내를 내며 재촉하는 선배의 성화에 못 이겨 핸드폰을 내밀자 잠금을 풀지 못 한 건지 다시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곤 다시 선배에게 건넸다. 우리 같이 장 본 김에 친해지자고, 다른 애들보다 더.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멍해졌다. 기분이 오묘했다. 전원우도 처음에 자기가 먼저 내 핸드폰 가져가서 번호 저장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점점 정신이 들었으나 바로 이어진 말에 또 다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배 말고 오빠라고 불러. 이건 특별히 너한테만 허락하는 거니까, 알겠지.
형, 너무한 거 아냐! 잔소리를 따발총으로 쏘아대는 권순영의 입을 선배가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며 촉새야 조용히 좀 해, 라고 하니 권순영의 볼이 풍선 마냥 부풀었다. 둘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 친해보였다. 편하게 하는 행동만 봐선 친형제라 해도 믿을 정도로 둘은 사소하지만 많은 점이 비슷했다. 두세 명씩 찢어져서 장 보자, 라며 왼쪽부터 서 있는 순서대로 조를 나눠 장을 봐야 할 목록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쥐어주었고 나 또한 그 종이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내 손에 돌아오는 건 선배의 손뿐이었다.
"너봉이는 오빠랑 같이 장 봐야지."
"형, 나는!"
"넌 꺼져, 인마. 저기 지훈이한테나 가서 붙어라."
"치사해 죽겠어, 아주. 내가 최승철 약점 하나만 잡기만 해. 가만 안 둘 거야, 진짜."
"호칭은 어따 팔아 먹었어, 권 촉새."
귀를 후비적거리며 맹한 표정을 지어보인 선배가 카트를 꺼내 온다며 이내 혼자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겼기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선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카트가 근처에 있던 건지 금방 모습을 드러낸 선배를 보고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선배, 저희는 뭐 사야,"
"오빠."
오빠라고 부르랬잖아. 능글 맞은 표정으로 내려다 보는 선배의 모습에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오빠…, 라고 부르자 뭐가 그리도 좋은 지 싱글벙글하며 내 손목을 잡고 카트를 끌었다. 우리는 고기를 사야 합니다. 고기 사러 가자, 고기. 그래서 말인데 너봉이는 무슨 고기 제일 좋아해?
아이구, 신혼 부부인가? 잘 어울리네, 잘 어울려! 시식 코너 이모께서 선배와 내가 단 둘이 장을 보는 모습이 부부처럼 보였던 건지 신혼이냐며 물으셨고, 나는 당황하기 바빴다. 아-, 저기 그런 게 아니, 내 말을 끊고 예, 저희 신혼 맞습니다. 이모-, 집들이 할 거니까 고기 좀 맛있는 부위로 많이 주세요, 라며 여유롭게 대처했다. 진짜 권순영 같았어요, 방금. 선배에게 저 말을 하자 마자 선배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며 어딜 봐서 잘생긴 내가 못생긴 권순영을 닮았단 거야,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웃음이 터진 나는 뭐예요 그게, 라며 나도 모르게 선배를 가볍게 주먹으로 툭- 쳤다.
"어, 너봉아. 너 방금 나 툭 친 거 맞지."
"아, 죄송해요. 그러려고 그런 게 아,"
"나 좀 편해진 거야, 이제?"
정말 그 짧은 새에 선배가 편해진 건가. 신입생 환영회 때 테이블을 돌아 준 선배 덕분에 통성명 하면서 딱 한 번 인사했던 게 선배랑 대화했던 전부인데 낯을 가리는 나로서는 이렇게 빨리 웃고 내가 먼저 장난 친다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누구보다도 내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이거 원우가 보면 놀라겠, …아, 또 우울해졌다. 바보 부너봉.
어, 저기 학회장 형 아니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순영이 신나게 뛰어와서는 나와 선배의 사이에 서더니 어깨동무를 하곤, 우리를 자기 조가 있던 곳으로 데려갔다. 야, 너봉아. 내가 글쎄 얘네랑 얘기를 해봤는데,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권순영이 시끄러웠던 건지 상당히 많이 아담한 남자 동기 한 명이 카트에 넣던 상추를 다시 빼서 권순영의 입을 때렸다.
"지훈이, 나이스 샷."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내미는 선배에,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맞부딪힌 동기가 나를 보더니 뻘쭘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얘가 부너봉 너랑 친해지고 싶대."
권순영의 말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한 손을 들고 살짝 흔들며 안녕, 이라 하는 모습에 나도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마트에서 때 아닌 통성명을 하는 게 상당히 웃긴 모양이었는 지 선배와 권순영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옆에 멀대 같이 서 있던 다른 남자 동기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김민규, 너는 인사 안 하냐, 라는 권순영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원래 아는 사이야, 라 답해버렸고 그에 다른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 했다는 듯 눈이 동그래졌다. 김민규는 전원우의 오랜 친구였다. 가장 친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런 오래된 친구. 전원우가 없는 곳에서도 전원우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나는 잡히지도 않는 무지개를 쫓는 것처럼 흔적에 목 매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매정하게 날 버린 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척이나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약속했던 대로 장을 다 본 우리는 식당으로 갔다. 선배의 지갑을 털어버리겠다고 신이 난 권순영과 이석민을 보자니 괜히 내가 선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너무 많은 양의 짐이었기에 학교로 배달 서비스를 시킨 동기 둘이 늦게 들어왔고, 설마 여기서 아직도 통성명 안 한 사람이 있냐는 선배의 말에 눈만 도록도록 굴리며 눈치를 봤다. 너봉아, 너 아직도 통성명 안 한 애 있지. 선배가 딱 걸렸단 듯이 내 뒷덜미를 덥썩 잡고 아프지 않게 흔들었다. 마트에 이어 식당에서 또 통성명을 했고, 그렇게 나는 친구를 더 사귈 수가 있었다. 친해지자는 의미에서 번호 교환도 하고, 고기를 먹는데 술이 빠질 수 있겠냐며 소주 또한 몇 잔 들이켰다. 부승관은 소주를 더 마셔야 성에 차겠다며 병에 숟가락을 꽂은 채 음을 넣어 노래를 불러댔지만, 내일 바로 엠티를 가는데 술은 무슨 술이냐며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은 선배 덕에 풀이 죽어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치는 손길에 돌아보니 김민규가 입모양으로 나와, 라며 문을 가리켰다.
"추운데 불러내서 미안."
"왜 부른 건데."
말이 곱게 나가지 못 했다. 김민규 말대로 추운 날씨도 한 몫 했고, 술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기분도 한 몫 했고, 무엇보다 김민규는 전원우의 친구였으니까. 헛기침을 뱉더니 원우 많이 밉냐, 라는 질문을 하는데 내가 도대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 건데, 넌.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것도 제 풀에 지쳐 먼저 이별을 고한 사람을 어떻게 안 미워할 수가 있냔 말이다. 이거 원우가 한 얘긴 아니지만 전원우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들었던 생각이고, 너희 잘 사귀었던 거 아니까 얘기해주는 거야, 라는 말을 끝으로 한동안 긴 정적이 이어졌고 점점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축였다.
"전원우, 내가 볼 땐 분명히 후회할 거야."
"....."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원우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아, 이건 너무 희망고문 같으려나.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문을 여는 몸짓에 다급해져 김민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날 전원우 친구로만 보지 마, 너랑도 친구 하고 싶으니까, 라는 말만 하곤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는 김민규 때문에 손이 허공에 멈췄다. 전원우, 네가 나를 또 괴롭힌다. 나는 또 바보처럼 그 괴롭힘을 침묵한 채 당하고만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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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 님, 윤천사 님, 여네 님, 닭키우는순영 님, 일공공사 님, 지유 님, 쌍쌍바 님과 그 외 댓글 남겨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석민이 글로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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