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과 사死의 경계란?
원형으로 보자면, 둘 다 그대로다. 생은 살아있고, 사는 죽었다. 그러나 정반대인 두 개의 경계선에 발을 딛은 인물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단순한 이론으로 보자면 식물인간이 있다. 몸은 살았지만 정신은 죽어 있다. 또 다른 단순한 생각으로는 잠을 자는 것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잠은 모든 세포를 잠재우는 시간, 섬뜩하게 말하자면 죽음의 전 단계라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경우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육체는 살아 있고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죽어있는 것과도 다름없는 상태인 무언가의 피해자들.
찬열은 그 말 그대로 생과 사의 경계선에 자리잡아 있었다.
이미 정신은 완전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한번도 제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 끝난 편이었다.
동생이 수술을 받았다. 여자가 준 돈으로 집을 팔지 않고도 아버지를 쫓아보냈다. 오피스텔도 팔지 않아도 되었다. 명예적인 부분에서는 손실이 있었다. 스포츠 신문에 기사가 떴다. 슈즈 기업 대표 유선희, 모델 박찬열와 재혼. 꼭 여덟 번째 남편었던 찬열은 자신에 관해 양산된 각종 루머들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신비주의 이미지던 찬열의 이미지는 돈 많은 이혼녀와 재혼한 남자 꽃뱀이 되어있었다. 각종 찌라시들은 박찬열이 이미지 관리하더니 영악하다며 기사를 내어놓곤 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얼마되지 않아 곧 쉬쉬하며 묻혀버렸다. 그리고.
똑바로 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흰 타이를 어색하게 매만지는 찬열을 쏘아보는 여자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제 박찬열의 인생은?
당연하지만, 완전히 없는 셈이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있다고 했다. 김종인, 생소한 세 글자를 찬열이 속내로 읊었다. 종인, 종인, 종인. 나이는 열일곱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생소했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결혼이라는 멍에도, 제 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도 마냥 찬열에게는 무거운 짐덩이지만. 여자가 보지 않는 새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곧 다시 눈을 뜨자,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교복 차림의 학생 하나가 보였다. 자신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180은 거뜬히 넘어보이는 남자아이는 찬열과 여자의 앞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잔뜩 날이 서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직 긴장감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찬열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 교복은 갈아입고 오라고 했잖니.
" 딱히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어요. "
- 인사하렴, 네 새아버지가 될 사람이다.
무심해보이는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종인과 찬열의 두 눈이 잠시간 마주쳤다. 피부는 검고,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종인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건조한 두 눈이 찬열의 얼굴을 서서히 훑자, 찬열은 마치 저 자신이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고등학생, 그것도 열일곱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히도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나 더욱 이상했던 점은.
" 안녕, 종인아. "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잘 부탁해.
그 건조한 두 눈이, 제게 싫기는 커녕 다분히도 달가웠다는 점이었다.
찬열은 웃음지었지만, 저가 잡은 종인의 손이 힘있게 제 손을 같이 잡아오는 촉감에 잠깐 움찔했다. 종인의 손가락이 약지의 결혼반지를 잠시간 매만졌다. 이상하게도 그 단순한 촉감이, 눈에 띄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쁘지가 않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조금 달라진 젊은 맹수의 두 눈이 있다. 여전히 건조하지만, 보다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젊음의 향기와 은근한 풋기는,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온건해보이지만, 저를 금방이라도 씹어삼킬 듯한 눈초리.
아아,
숨이 막힌다.
찬열은 그렇게 자신의 의붓아들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는 불상사를 겪고야 말았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비로소 죽음에 빠져들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느꼈던 유일한 생동감이었다.
[카이/찬열] 악의 꽃 外-2
찬열은 그 이후의 이년 동안 종인을 친자식처럼 바라보려 노력했다. 아니, 실은 아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요구했던 강제적인 섹스와 간간히 이뤄지는 협박에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종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거의 같이 동거하다시피 하며 지냈다. 해외 출장으로 자주 자리를 비우는 아내 때문이었다. 난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실은 처음 같이 살게 되었을 때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 못했다. 열일곱의 종인은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고 그것을 묵묵히 참아냈던 제가 걱정의 빛을 띄우면 싸늘하게 대응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찬열은 종인이 자신에게 그럴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항상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는 종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찬열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종인은 그 다음날 아침에서야 돌아왔다.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 찬열이 가까이 다가가다 담배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바지에 묻어있는 담뱃재를 보자 걱정스러워져 종인아, 하고 불렀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 담배 피웠어? "
" 무슨 상관이에요. "
" 그래도 종인아, 이렇게 집에 안 들어오면…. "
" 아, 됐어요. 들어가요. "
돌아서는 종인의 볼에 싸움을 한 듯 멍이 들어있었다.
찬열이 그것을 보고 서둘러 서랍에 있는 약상자를 챙겼다. 들고 종인의 방에 들어가자, 냉혹한 눈초리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할 거 같아서.. "
" 필요 없다고. "
" 종인아. "
" 당신이 나한테 뭐라도 돼? "
뭔데 씨발 나한테 지랄인데.
그 한 마디가, 찬열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찬열은 들고 있던 약상자를 실수로 놓쳐버렸다. 약들이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미, 미안해. 종인아. 내가 화나게 한 줄도 모르고. 애써 웃으려 했지만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을 참으려 애썼지만 결국에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안해, 종인아. 아무 것도 아니라서 미안해.
" 미안해, 미안해. 종인아. "
흑 하고 터진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나왔다. 우는 저를 보는 종인은 멍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찬열은 종인의 기분이 더 이상 상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탓에 등을 돌렸지만, 뜻밖에 먼저 자신의 팔을 잡아챈 쪽은 종인이었다. 눈물젖은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 미안해요. "
그렇게 상처받을 줄은 몰랐어요.
정중하게 사과하는 종인의 눈빛에서 완연하게 온건한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내 자신을 끌어안는 팔이 느껴진다. 미안해요, 목소리는 다정하다. 처음 들어보는 종인의 목소리다. 그렇게 찬열의 울음도 조금씩 잦아들어갔고, 둘 사이의 갈등 역시 해소되었다.
여전히 찬열은 종인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찬열의 시야는 종인을 향해 끊임없이 따라붙었다. 가끔 가다 새아버지라고 불러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했지만 그만큼 찬열에게는 고통이었다. 종인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의붓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끔찍한 죄악이었다. 아아, 아아. 몸이 약한 찬열이 앓아누울 때마다 종인은 곁에 있었다. 맨 처음의 뒤틀린 관계와는 정말 정반대로 변해버렸다. 찬열은 종인과 단둘이 있을 적마다 더 없이 행복했다. 이년 간의 유예 기간은 행복하고 달았다. 무언가의 진전이 아니라, 정말 평화롭게 같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찬열은 행복했다. 비록 바로 옆의 종인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을 마음속으로만 수여번 하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찬열은 그 순간이 즐거웠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추억이 쌓이고 쌓여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자신에게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그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기뻤지만 불안해졌다. 어딘가, 알 수 없이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던 와중 자신에게 보내진 것은 다름아닌 섹스 비디오였다. 아내와 다른 남자가 입을 맞추며 뒹굴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찬열로서는 너무나도 다행인 일이었으나 찬열은 그것 하나에 죽을 정도로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종인에게 무언가의 존재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종인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찬열의 숨통을 조이게 만들었다. 유일하게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존재였던 동생은 전화를 걸 때마다 말했다. 그만 형 인생을 찾아. 동생은 수술 뒤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멀찍이 저 자신에게서 도망친 지 오래였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는 동생은 그 말 그대로 영원히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이제 종인이 아니라면 찬열은 정말 홀로다. 혼자는 정말로 죽기보다 싫었다. 종인을 사랑해서, 찬열은 매일 밤마다 오피스텔 안에서 울고는 했다.
하루는, 집에 가겠다는 자신을 만류한 종인이 찬열의 오피스텔에 찾아왔다.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그 온기에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음이 잦아들자 찬열이 커피를 타겠다고 나섰다. 커피를 타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은 종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사랑할 뿐이다. 비록 제 사랑이 추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다.
" …담배 피웠지. "
" 들켰네요. "
어떻게 알았어요.
머그잔을 받아든 종인이 등을 돌린 자신에게 물어온다. 찬열은 제 몫의 커피를 타다 멈칫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종인은 분명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할 것이리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몇 번을 연습했던 덕분인지 담담했다.
" 그냥, 담뱃재가 바지에 묻어 있길래. "
너 담배 필 때마다 바지에 묻혀 오잖아,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야말로 미친 스토커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았어요.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다음 대화와, 자신을 부축하여 침실로 이끄는 종인에게 기대며 찬열은 안도했다. 종인에게서 닿는 촉감이 좋다. 그러나 불안하다.
사랑해, 종인아.
침실로 부축하는 종인을 바라보며 찬열은 마음속으로만 나직히 속삭였다.
나는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을까,
찬열은 도통 제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미 사랑은 너무나도 커졌고, 종인이 없다면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불안감은 커져만 가고, 홀로 남을까봐 겁이 난다. 괴롭고 두렵다. 종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더욱 그랬다. 종인이 자신에게 다정한 면을 보일 수록 더욱 그랬다. 불안한 눈초리는 얼마 전 종인이 폭력 시비로 엮였을 때 이후로 정점에 달했다. 떨리는 두 눈이 종잡을 수 없어진다. 너무 깊이 사랑해 버렸다. 찬열은 맨 마지막에 자신이 홀로 남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마저 종인을 사랑하는 자신이 느껴져서, 여실히 눈물이 났다.
너무 더럽다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아요?
찬열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저를 쳐다보는 종인의 두 눈에는 여전히 온건한 시선이 있다. 그럼에도, 무표정으로 말해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엄마랑도 잤으니까, 나랑도 자요.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관계가 아프고 쓰렸다. 그럼에도 좋았다. 종인이었으니까. 흐느끼는 자신을 냉담하게 바라보다 자신에게로 오라며 일갈한 종인에게, 찬열은 처음으로 제 속을 내보였다.
" 혼자이기는 싫어, 종인아. "
그리고, 그 말을 듣고도 그대로 나가버리는 종인으로 인해 다시 찬열은 울부짖었다.
한참을 울다가 지친 찬열에게 문자 한 통이 전송되었다. 그것을 본 순간, 찬열은 이 순간마저 뛰는 심장을 거역하고 싶었다.
[기다려요-종인]
나는 어째서 너를 사랑했을까, 종인아?
문자 하나로 심장을 좌우하는 이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서 더 괴로워진다. 가슴이 뛰어서 더 괴로워진다. 버릴 수 없어서, 더 괴로워진다. 아니, 찬열은 종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참을 수 없이 미련해서, 종인을 향한 제 죄악이 추하고 야만스러워서. 그럼에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찬열의 삶은 멍청하다.
그럼에도, 이 지독한 애정을 차마 끊어낼 수가 없었다.
사랑해, 종인아.
종인은 제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
추렸는데도 기네요..3편 완결
엉망이라 죄송해요 섬세하게 쓰고 싶었는데..ㅠㅠ 마음대로 잘 안되네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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