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무리 추악하다 해도, 삶은 정처없이 흐른다. 욕망의 덫은 쉽게 내면을 파고들고, 그 내면 안에 든 수많은 아귀들이 수면 아래서 번들거린다. 욕구를 이기지 못한 인간이란 짐승의 결말은 참혹했다. 무디고 녹이 슨 칼날과 함께 쑤셔들어간 애정이란 징벌은 갈수록 인간을 추악하게 만든다. 그에 따른 심장의 고통과, 폐부를 찌르는 아픔은 늘상 비틀린 애정에 동반되어야 할 징벌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영혼의 안식이 아닌 순간의 달콤함을 영원히 좇는 것이다. 감정이란 것을 가졌다는 존재인 인간의 결말은 늘 그랬다. 그래서 더 잔인한 것이다.
찬열은 벗은 몸인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자 허리 부근부터 온몸에서 아릿하게 아픔이 퍼졌다. 옆에는 누워 있는 종인이 있다. 종인은 아직도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옆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둘은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정사했지만, 찬열은 그토록 갈망하던 존재를 얻었음에도 불안했다. 가졌음에도 가진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이 너무나도 추악해서 그런 걸까? 뜨인 두 눈의 시야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혼돈과 애정에 잠식되어 휘둘리던 찬열은 비로소, 고개를 틀어 잠들어 있는 옆의 어린 연인을 본다.
- 원해, 내가.
당신을. 종인아, 나를 사랑하니? 그르렁대는 사내의 목청이 귓가에 생생했다. 찬열은 팔을 뻗어 그의 곧게 뻗은 등줄기를 쓰다듬어 본다. 내가 온전히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남자, 나만을 온전히 사랑하기에도 너무 아까운 남자…. 너른 등판은 찬열을 안도하게 하면서도 다시 불안하게 만든다. 나를 사랑하니? 나를 사랑하니? 종인아, 정말로 나를 사랑하니? 나는 너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해. 나는 너를 옭아맬 지도 몰라. 잘도 사랑이라는 핑계로 네게 굴레를 씌울 지도 몰라. 네가 내게서 떠난다면, … 나는 죽어버릴 수도 있어.
" … 그래도 사랑해. "
그러니,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온전히 가져. 그래야 내가 너에게로부터 모든 멍에를 내려놓은 채로 안도할 수 있으니까. 조용히 속삭인 찬열이 다시 눈을 감았다.
[카이/찬열] 악의 꽃 外-3
간밤의 폭풍은 행복한 죄악이었다. 멍청한 찬열은 다른 남자와 잘도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를 보고 불안감과 괴로움에 잔뜩 사로잡혀 도망치려 했다. 그러면서도 느껴지는 감정은, 그를 향한 사랑과 미묘한 환희의 감정이었다. 그들이 나가자, 찬열은 따라 나서려 했다. 얼굴을 감쌌다. 종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본다면 그에게로부터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들킬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찬열은 서둘러 종인에게로부터 추악한 저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달음박질쳤지만, 얼마 못 가 따라잡히고야 말았다.
" 왜 도망가는 건데. "
" 놔, 제발. "
마지막 경고야, 나는 너를 더럽힐 거야…. 잡힌 팔이 화끈거렸다. 이조차도 행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종인아. 나는, 너에게 미쳤어. 그저 철저히 미쳐버린 광적인 싸이코에 스토커일 뿐이라고. 부디 너를 위한다면 나를 놓아야 해, 나는 너를 사랑하면서도 네가 없으면 주저없이 자살할 계획을 짜고 있는 하나의 악한 존재일 뿐이야.
" 두렵기라도 해? 이혼당할까봐? "
" 이거 놓으라고…! "
지금도 봐. 놓으라 애원하면서도, 정작 나는 놓지 못하잖아. 속으로 자조하던 찬열이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종인의 팔을 힘껏 뿌려쳤다. 자신에게로부터 건네는 맨 마지막의 반항이었다. 나는 너를 놓아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종인아, 종인아.
번쩍, 종인아! 찬열은 저를 징벌하는 듯이 눈앞에 명멸하는 하얀 빛에 결국에는 도망치지 못하고 말았다. 마주한 종인의 시야에서 까맣게 불꽃이 튀었다. 아아, 너는 어째서 이런 모습마저 아름다운가. 미쳐가는 나를 차마 굴복하지 못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너 자신을 망치는 죄악의 원동력일 테다. 어쩌면 시초는 이 사내의 까만 두 눈에 온전히 파묻히고 싶다는, 본질 그대로의 순수한 애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리도 망친 것이다.
찬열은 종인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악을 지르면서도 속내로 자조했다. 종인아, 너는 나를 구원하되 나는 너를 지옥으로 인도할 거야.
" 나한테 오라고 했잖아. "
" 왜 이래, 나한테 도대체 왜…! "
속내에서 끓어오르는 수많은 아귀들이 감추고 있던 찬열의 독니들을 서서히 내비치고 있었다. 아아, 이대로면 참을 수 없다. 그가 나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를 가지고 싶다! 내가, 그에게 온전히 소유당했으면 좋겠다. 번들거리는 찬열의 애욕이 서서히 그 빛을 되찾으며 살아나고 있었다. 종인아. 나는, 네가 나를 철저히 망가뜨렸으면 좋겠어. 두 손목과 발목을 그대로 부러뜨려 놓고, 너만 보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도 행복할 테야, 모든 것이 없어진다 해도 나는 너만 보면 살 수 있는 거야.
" 원해, 내가. "
아아, 하지만 종인아. 결국은 내가 너를 더럽히는 거야. 너를 사랑하기에, 결국에는 너 없이 절대 살지 못할 나니까! 결국 모든 꺼풀을 벗겨낸 찬열의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너만은 나를 절대 떠날 수 없다. 종인이 자신에게로 키스해 온다. 찬열이 눈을 감았다. 나름대로 제 애정에 필사적이었던 찬열은 결국 이 기회를 놓지 못했다. 도주는 어쩌면 최후의 반란이었지만, 결국 종인이 자신을 선택하였으니 어쩔 수 없다. 매사에 순종적인 찬열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절대 우유부단해질 수 없었다.
사랑해, 찬열이 날카로운 독니를 종인의 내면 깊숙히 박아놓았다. 찬열은 낭떠러지 아래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말라가는 꽃이었다. 결국에는 종인이 꺾어버렸기에 다시 그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주인을 찾았으니, 이제 끝없는 애정과 애욕을 막을 존재가 없다.
이내, 찬열은 두 팔을 감아냈다. 자신은 순진하고 어린 종인을 타락시킨 장본인이자, 종래에는 사지로 인도하여 암전이라는 굴레 안으로 함께 수장될 운명이다. 그렇지만, 사랑하잖아?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으므로.
종인아, 나를 떠나지 마. 나를 떠난다면 너는 죽지 않아. 그러지 못할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죽는 건 나야. 종인아, 나를 사랑하니?
찬열이 다시 눈을 떴다. 암전의 굴레 속에서 깨어나자 다시 불안해졌다. 분명히 가졌는데도, 어째서 이리도 불안한 걸까? 잠에서 깰수록 애정이라는 존재는 위태롭기만 하다. 찬열은 종인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종인아, 가지 마. 안 가요.
" 혼자는 싫어. "
" 같이 있을게요. "
그러니까, 엄마와 이혼해요. 나랑 살아. 찬열은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진실을 안다면 순수한 종인의 눈빛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일이다. 찬열은 그런 불상사 따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잃기 바라지 않아. 종인이 키스해왔다. 찬열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다. 어째서, 애정이란 갈구하고 갈구할 수록 이렇게도 목마른 걸까? 자꾸만 불안하고, 두려워진다. 찬열의 얼굴에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부족해, 부족해. 이렇게도 추악한 나는 더한 너의 애정을 원해.
" 좋아해. "
" ……. "
혼자 두지 마, 종인이 저 자신을 끌어안아 온다. 품이 따스하고 좋았지만 찬열은 점점 더 애정에 목말라졌다. 대답해줘, 좋아해. 고개를 저었다. 왜? 부족해. 그것으론 부족해. 나는 어쩌면 중증의 도착증일지도 몰라. 한도 끝까지 나를 몰아붙이고 나서야 만족할 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종인아.
" 사랑한다고 말해줘. "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조금 눈이 커진 종인의 모습을 찬열이 보았다. 종인은 순수하다. 그런 그를 자신이 더럽힌 것이다. 죄책감이 하나 둘 밀려온다. 찬열은 아까보다 두 배로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불안하다. 그러나,
" 사랑해. "
이 순간에도 그의 고백은 그저 달콤하기만 하다. 하여, 애정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미칠대로 미친 찬열은 결국 그에게 키스할 수 밖에 없었다. 찬열은 눈을 감았다. 신마저 자신의 애정에 침투할 수 없게, 그저 이 순간의 애정을 오롯하게 즐길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제가 더럽혔다 굳게 믿고 있던 종인의 비릿한 웃음을, 보지 못했다.
제 볼을 매만지는 촉감에 눈을 뜨자 자신의 볼가를 쓰다듬고 있던 종인이 보인다. 그 손길이 좋아 그대로 받고만 있었다. 아니, 애초에 쳐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에게 집중된 시선을 떼지 않는데, 종인이 찬열에게 말을 건네온다.
" 형은 백합 같아요. "
그 말에, 찬열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간신히 대답을 내뱉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이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 … 어째서? "
" 그건…. "
종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린 찬열의 안색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무어라 말하려 하기도 전에 찬열이 먼저 그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더 이상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종인아, 이름을 부르자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따스하다. 입맞춰도 되냐는 부탁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술을 맞부딪혔다. 잠시나마 안도감이 일었다. 흔들리는 찬열의 시야를, 더 이상 종인이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rrrrrrrrrrr-
비록, 그조차도 잠시뿐이었지만. 제가 받겠다고 일어서려던 찬열을 만류한 종인이 거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찬열은 종인을 기다렸지만, 통화가 길어지는 듯 하자 결국 일어섰다. 왠지 모르게, 어느 한 구석이 자꾸 불안했다. 대강 옷을 추스린 찬열이 거실로 걸어나왔다.
- 부검을, 할 수 없었다고요.
그 순간 절망감에 잠긴 종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이박혔다. 찬열의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직감적으로 위험이 느껴졌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종인이 곧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옆을 돌아본 종인과 그의 이름을 부른 찬열의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종인아, 나, 종인아. 직감적인 위험에 말을 잇지 못하는 찬열의 어깨를 종인이 단단히 붙들었다. 형, 내 말 잘 들어요.
" 형. "
엄마가 죽었어요. 어깨를 붙든 손이 조금 느슨해지기가 무섭게 경악에 물든 표정을 하고 있던 찬열이 무너져 내렸다. 종인이 서둘러 찬열을 부축했다. 정신 차려요. 저를 끌어안은 다부진 몸의 어깨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 어떡해. 나 어떡해, 종인아. 찬열이 죄책감에 결국에는 처참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어떡해, 어떡해. 울지 말라는 종인의 다독임에도 그저 찬열은 어떡하냐는 말을 되뇌일 뿐이었다. 종인이 위험을 느꼈던 모양인지 급히 찬열에게 키스해왔다. 받아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못한다.
형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요.
종인이 찬열의 여린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찬열이 힘없이 종인에게 기대었다. 아직까지 이어지는 미약한 울음소리에 잠시동안 인상을 찌푸린 종인이 찬열의 젖은 뺨에 손을 뻗었다. 진중하게 눈물을 닦아내는 움직임에도 찬열은 반응이 없었다. 이내 찬열의 두 뺨이 깨끗해지자 종인이 찬열에게 키스했다. 찬열은 눈을 감으며 종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종인의 품에 매달렸다. 의지하고 싶었다. 의지하지 않는다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내의 죽음에 끝없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지금의 키스에 행복을 느끼는 자신을 더 없이 저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사랑에 굴복하는 나는 멍청해. 스스로를 자학하던 찬열은, 또 한번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 키스하던 도중 둥글게 휘어지던 종인의 두 눈을.
찬열은 맨 처음 수사에서 처음으로 범인이라 의심을 받았다. 의심 서린 눈초리에 종인이 표정을 굳히며 찬열은 자신과 있었다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해주었다. 덕분에 용의자로 의심받던 것은 거두어졌다. 처음에는 운전 부주의로 인한 사고로 분류되었지만 곧 상태가 양호하던 동승자의 시신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자 수사는 발칵 뒤집혔다. 앞다투어 소문 많던 커리어 우먼의 죽음과 그 내연남, 그리고 남편인 찬열에 대해서 기사를 뿌려댔다. 당연했지만, 명예는 적잖이 실추되었다. 바람을 피우던 아내에 대항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찬열을 수많은 찌라시 기사에서 조롱거리로 삼았다. 종인과 찬열은 동정을 샀지만, 찬열은 이따금 공인이라는 이유로 이유모를 비난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결국 찬열은 완전하게 피폐해져 철저히 종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혼자서는 집 밖으로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게 된 어리석은 자신을 사랑했던 어린 연인은 기꺼이 자신을 끌어안았고, 찬열의 원인모를 불안감은 지속되었으나 적어도 아주 조금씩은 수그러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종인의 태도가 이상하다. 그래서 다시 악화되었다. 요즘의 종인은 찬열에게 팔을 뻗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선다. 관계를 요청해도 키스를 요청해도 그것을 찬열에게 충실히 이행하지만 이상하게도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팔을 뻗으면 그것을 잡아오지만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급진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와서 원한다, 라고 말해오던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다. 꽃병에 있던 시든 팬지를 뽑아내고 흰 백합으로 그 안을 채우던 찬열의 흐리멍텅해진 두 시야에서 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종인이 떠난다면? 아마 자신은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목숨을 끊어내던가, 끊어내려 자해만을 수 차례씩 시도하는 지옥같은 삶이 될 것이 뻔했다. 누군가가 없이 홀로인 삶은 너무나도 외롭고도 아팠다. 네가 가면 아파, 너무 아파 종인아. 고개를 파묻은 배개가 눈물로 흠뻑 적셔졌다. 연인이 학교를 간 새에, 어리석은 찬열은 하루종일 엉엉 울었다.
다녀올게요, 찬열은 최근 들어 자신이 며칠간 앓아눕게 되자 다시 자신에게 원래처럼 다정히 대하는 종인에게 점점 더 매달렸다. 종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나타내다시피 하면서, 종인에게 애처롭게 매달려 왔다. 오늘은 수사 마지막 날이고, 모든 것을 종결짓는 날이다. 갔다 오겠다고 자신에게 말해오는 종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기만 한데, 어째서 이리도 무서운 지 알 수가 없었다.
" 빨리 와, 종인아. "
" 점심 전에 올게요. "
" 정말이지? "
" 그럼요. "
" … 기다릴게. "
혼자 있기 싫어, 나지막히 제 귀에 속삭이는 찬열의 투정에 종인이 웃는다. 곧 자신이 다시 아픈 얼굴을 하자 천천히 다독이는 손길이 다정하다. 겨우 마음을 놓고 가라며 손짓할 수 있었다. 애써 불안한 마음을 숨기면서, 찬열이 제 방으로 걸어갔다. 잠이라도 자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울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두렵기만 한 속내는, 애정과 적절히 뒤섞여서 자신을 아프게 만들었다.
약통을 든 찬열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깊게 서렸다. 맙소사, 로히프놀, 보통은 누군가가 상대를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는 약물이다. 스폰서들이 흔히 가학적인 플레이를 할 때 사용하거나, 싫다는 이를 억지로 그 바닥에 끌어들이도록 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이 이 곳에 놓여져 있단 말인가.
설마, 종인이! 약병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범죄의 일화가 머리에 차례대로 그려졌다. 아아, 찬열은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설마 이럴 리가 없다. 그러나 고개를 흔들면 흔들 수록 손의 약병의 촉감은 단단히 잡힌다. 현실을 부정하는데도 너무나도 지금이 무서웠다. 종인이 이것 때문에 나를 떠나려 한 것일까? 떠난다고 생각하자 더는 두려움에 몸을 가눌 곳이 없어져 찬열은 비참하게 다시 약병을 놓치며 탁자를 짚어야 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종인은, 정말 날 떠날까? 아니, 이미 떠난 걸까? 그러나, 이내 다시 뇌리에 스치는 하나의 질문으로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비워졌다. 한동안 그 질문 하나로 찬열은 제 머릿속을 휘젓는 공황도 겉어낸 채 미친듯이 해답을 찾아야 했다.
- 하지만, 어째서 나는 지금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일까?
그 순간이다. 찬열이 공포에 질린 두 눈으로 어째서 이런 건지, 공포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지만 어째서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인지, 어째서 정신이 이토록 말짱한지에 대해 모든 것이 일치하는 단 하나의 답을 맞춰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어긋난 것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종인을 사랑했던 것도, 철저히 나의 주관으로 우리 둘이 관계를 맺었던 것도, 내가 종인을 더럽혔다는 사실도 전부 다…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것이 아니면 나오는 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종인아. 설마, 너는 본래부터 더럽혀져 있던 거였니.
네가 그런 거야? 고작, 나를 얻기 위해서?
아아, 맙소사. 찬열은 내면에서부터 송두리째 휘몰아치는 폭풍을 더 이상 감당할 길이 없었다. 찬열은 눈앞의 시든 백합을 본다. 형은 백합 같아요, 종인이 말했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더불어, 그때 자신이 왜 알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는지도, 어째서 자신이 그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전부 다, 잔인할 정도로 깊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시든 흰 백합이, 찬열의 눈에서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파국의 수레바퀴가 서서히 굴러간다. 진정한 종말과, 결말을 향해서.
종인아, 백합에는 향기가 짙어. 너무 짙어서, 때때로는 이런 가설이 돌지. 밀폐된 공간에 수없는 백합과 함께 있으면, 그 향기로 질식할 수 있다는 일화가 전해져. 서서히 그 향이 공기를 잠식해 내려오면서, 사람의 숨결을 틀어막는 거야. 그런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백합의 향기는 더 없이 짙고 강해. 가장 아름답게 자살하고 싶다면, 그것은 백합과 함께 하라는 말까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야. 근거 없는 가설일 뿐인 그 한 마디가 어째서 오늘날까지 모두에게 신빙성 있게 묘사되는 지는, 나도 알 따름이 없어. 하지만 분명한 점은, 거짓말일 뿐이라는 거야. 백합은 그저 향만 짙을 뿐이야. 다만 향기가 너무 진해서, 오래 그 향을 맡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지.
내가 네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어. 첫 번째는 백합의 꽃말이 순결이라는 사실에서였지. 너는 제대로 알지 의문이지만 실은 나는 굉장히 내가 더럽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만큼 더럽혀졌기 때문에 네가 한 말 한 마디가 너무나도 싫었어. 그만큼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마냥 소름이 끼치고 나 자신이 더러워 보였으니까.
두 번째는 내가 너를 철저히 죄어갈까 두려워서였어. 알다시피 백합은 향이 너무 짙어서, 네 숭고한 사랑이 점점 나로 인해 더럽혀질까 나는 늘 무섭고 두려웠어. 네게 알게 모르게 독니를 박았던 것도, 사랑해달라고 날마다 네게 보챘던 이유도 그래서야. 그러면서도 종래에는 널 믿지 못했기 때문에 늘상 혼자서 눈물을 터트리곤 했지. 그래, 결국 난 늘 혼자라고 생각했어. 너를 얻었다 해도, 너를 더럽혔기 때문에 결국 나는 홀로 남을 거란 괴로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잠식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 나는 기약없는 허상을 보고 있었던 거야, 결국 나는 네가 말한 대로 순전히 도망쳤을 뿐이잖아. 너를 사랑한다 늘상 속삭이면서도 네가 나를 사랑할 지는 믿지 못했어. 결국 이전의 나는, 전부 너에게서 환상을 보고 있던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아챘지. 맞아, 너는 나를 순결하고 고결한 존재로 생각해서 백합이라 일컬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나를 멍청한 백합이라고 생각했고, 실은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어.
하지만, 종인아.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나는 이제서야 너를 믿을 수 있어. 사랑에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내 멍청한 도피였고, 결국 나를 사랑했던 존재는 너였잖아. 어째서 네가 약병을 이 곳에 놓았는지 알겠어. 너는 나를 마지막으로 배려했던 거야. 너를 순수하게만 바라보던 나와 같이, 너도 나를 그저 순수하게만 바라봤던 거야. 이 약병은 아마도 네 사랑의 증표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네 어머니의 스폰서였다는 사실을 뒤로 한 채, 순전히 나만 바라봤다는 증거겠지.
하지만 종인아, 나는 도망치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다르거든. 내가 생각했던 너와 네가 생각하는 네가 너무나도 달랐던 것처럼. 나는 이제서야 알았어.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를 끝없이 묻기만 했던 지난날보다 두려움이 사라진 지금은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종인아. 내 말은, 너 혼자만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야.
찬열은 여유로웠다. 꽃병 안에 꽂혀 있던 시든 흰 백합을 대신해서 꽂아둔 검게 물든 백합을 뒤로 한 채, 찬열은 부엌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곧 종인이 올 시간이다. 가스레인지에서는 찌개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도어락이 울렸다. 그러자 찬열은, 주저없이 약병의 알약들을 싱크대 밑으로 쏟아 부었다. 빈 약병을 찬장 깊숙히 숨긴 뒤, 싱크대 아래에 알약들이 잠겨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 지금은 지극히도 평화롭고도 재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기척이 들려온다. 찬열은 서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종인의 기척을 느끼면서도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지금 상황이 진짜로 여유로운지, 아니라면 여유로운 척을 하는 것인지는 찬열 자신조차도 모를 일이다.
" 다녀왔어요. "
종인이 찬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촉감이 어깨 위로 느껴지자, 찬열은 서서히 느릿하게 몸의 방향을 틀었다.
" 어서 와, 종인아. "
찬열이 미소지었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아주 날씨가 좋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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