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만들어주신 금손그대를 모두 사랑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첫화 초록글 자축하면서 출발!
인생그래프 꼭짓점 제 2화 |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명수가 성규 옆 침대에 풀썩 누우며 몸을 뭉그적거렸다. 세 달 동안 혼자 잘 땐 방안이 썰렁했는데 명수가 다시 돌아오자 방안에 훈훈한 훈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누가 집 나가서 개고생하랬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옆집은 암흑에 싸여있었다.
"어. 근데 또 새로 이사 올 꺼야. 아까 만났거든."
침대에 누운 성규가 눈을 감고 미동도 않자 몇 번 헛소리를 해대던 명수도 이내 불을 끄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안 골던 코까지 도로롱 도로롱 골아대면서 잔다. 코 고는 소리에 잠에서 깬 성규가 입을 헤 벌리고 눈은 반쯤 뜨고 있는 명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짜식, 몇 달 고생했다고 얼굴 반쪽이 됐네…. 그나저나 쟤까지 집에 있으면 생활비 장난아니게 들 텐데…."
얼른 백수탈출을 해야될 것 같은 촉박함에 뒤숭숭한 마음으로 한참을 뒤척이던 성규가 푸른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2.
성열아,오늘 컨디션 어때? 우현이 초밥의 고추냉이만 살살 긁어내고 있는 성열에게 묻자 천천히 고개를 올려 우현과 눈을 맞춘 성열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눈까지 마주쳐주다니. 오늘은 정말 컨디션이 괜찮나 보다. 싱긋 웃으며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어준 우현이 다시 밥을 먹으려던 순간 성열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래.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우현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고 조용히 미소 지은 순재도 다시 초밥을 집어들었다. "근데 집이 너무 넓은 거 아닌가…. 두 사람이 살기엔 너무…." 우현의 말에 성열이 자신의 옆에 앉은 순재를 빤히 쳐다봤다. '걱정 좀 그만해' 소리는 안 났지만,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휴우, 알았어. 밥 먹자. 그리고 우현이 너 자꾸 맞선 자리 도망가고 그러지 마. 그럴 때마다 나한테 전화하셔서 너 어딨냐고 물어보시는데 나 무지 곤란해." 일식집에서 나온 우현이 얼른 차를 빼 오자 자연스럽게 성열이 조수석, 그리고 순재가 뒷좌석에 앉았다. "마트 들렸다 가자." 신호등 앞에서 마트 쪽으로 차를 돌렸다. 일요일 점심시간대라 그런지 마트 주차장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도우미직원이 올라가라는 손짓만 하길래 손짓을 다라 계속 올라오다보니 결국 꼭대기 층까지 와버렸다. "사람 진짜 많네." 성열이 순재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 여기. 순재가 얼른 가방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건네자 동전을 받아든 성열이 어디론가 익숙하게 향했다. "성열이 어디가?"
명수가 살짝 내려간 선글라스를 다시 추켜올리며 투덜댔다.성규가 '선글라스를 쓸꺼면 거기에 맞춰서 입던가'하고 비웃자 유리창앞에 멈춰서서 잠시 자신의 패션을 재점검했다.파란색 아디다스 츄리닝 세트에 낡아빠진 뉴발 슬리퍼.그리고 선글라스. "내추럴해보이지않아?" 나름 괜찮구먼.명수가 혼자만 들릴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시장순이가 갑자기 쌩뚱맞게 왠 마트?" 카트를 밀어야 눈치 안 보고 시식을 하지.봉신씨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전을 받아 카트 뽑는 곳으로 향했다. "……." 카트를 뽑는 곳에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남자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동전넣고 뽑기까지 얼마 안 걸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도통 비킬 생각을 않는다.철컹철컹. 뭐가 잘 안 되는지 카트 손잡이를 흔들어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 바로 옆에 직원이 서있는데도 계속 손만 더듬더듬거리는 모습이 답답했던 명수가 고개를 스윽 들이밀었다. "뭐가 잘 안 되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이 없길래 고개를 올려 남자와 시선을 맞추자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뭐하는 거지? 명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다시 뒤로 빼고 직원을 불렀다. 뒤늦게 다가온 직원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 들었던 드라이버로 박혀있던 카트키를 홱 잡아뽑았다. "카트 중에 카트 키가 찌그러진게 몇 개 있어서요.죄송합니다." 직원이 카트를 뽑아주자 카트 손잡이를 얼른 쥔 남자가 명수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스르륵 카트를 밀며 사라졌다.순재와 우현이 있는 곳으로 향한 성열이 카트를 멈추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시 멀쩡한 얼굴색으로 돌아온 성열이 순재와 우현의 물음에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먼저 카트를 끌고 매장안으로 들어갔다.
인생그래프꼭짓점
"방이 총 다섯개. 큰 방 두 개랑 중간짜리 하나, 작은 방 두 개.내가 중간 쓸테니까 큰 방 두 개는 순재랑 성열이가 써. 나머지 작은 방 두 개는 다용도실이나 옷방으로 쓰자." 새로 이사온 전원주택 마당에 있는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은 우현과 성열,순재. 우현이 어디선가 얻어온 주택 평면도를 나무테이블위에 촥 펼치더니 방을 정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앉아있는 벤치 옆으로는 이삿짐센터직원들이 부지런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근데 문제가…있어." '그게…'한동안 뜸을 들이던 우현이 이삿짐 직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옮기고 있는 피아노로 시선을 옮겼다. 우현의 시선을 따라 순재와 성열도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아…." 다락방? 우현이 되묻자 순재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열은 별말없이 턱을 괴고 열심히 집안으로 들어가는 이삿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락방 내부는 넓어서 상관없는데 문에 끼지않으려나." '그럼 피아노는 다락방에 놓자'하고 평면도를 접은 우현이 기지개를 켰다. 저기엔 뭘 해야 좋을까? 순재가 마당 한 편에 있는 흙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채소키울까?" 꽃? 우현이 되묻자 순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흙밭으로 향했다. "흙이 촉촉해. 꽃집에서 사와서 심으면 잘 자랄 것 같아." 쭈그려앉아 흙을 매만지던 순재가 손을 털고 일어나 성열에게 다가갔다. "성열아. 저길 꽃밭으로 만들거야. 보이지? 흙도 좋아서 잘 자랄 것 같아." 성열이 턱을 괸 상태로 흙밭에 시선을 옮겼다. "저 꽃밭은 성열이 담당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은 안 해도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용케 읽은 순재가 성열의 앞머리를 매만져주며 말을 이었다. "우현이는 바빠서 잘 못 돌봐줄 것 같고… 나는 키우고 그러는거 잘 몰라서 내가 키우면 다 썩을지도 몰라." 무언갈 생각하던 성열이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머,이거 반짝거리는것좀봐. 봐도봐도 예쁘지않니?" 못 말려, 정말. "어? 옆집 이삿짐왔나봐." 명수가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쓰더니 이삿짐 트럭 바퀴를 발로 툭툭 찼다. "근데 옆집사람들 대충 어때? 여자야?" 히이! 그렇게 나이가 많아? 명수가 기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규가 명수를 휙 째려봤다. "미안. 계속 얘기해." 봉신 씨는 집안으로 들어갔고 성규와 명수는 나란히 평상에 앉았다. "넌 어떡할거야?" 이젠 형이 말해보지. 명수가 죠스바 막대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물었다. "이 나이에 알바는 그렇고 다시 직장구해서 일해야지." 명수가 투덜대며 집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에 대고 성규가 소리쳤다. "알바비는 나눠써야하는거알지!"
"자." 소파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던 성열이 순재가 건네는 앞치마를 받아 군말없이 걸치자 우현도 조용히 앞치마를 맸다. "일단 각자 방은 각자가 정리하고 거실만 성열이랑 너가 해줘. 난 부엌 좀 정리할게." 침대나 옷장같은 가구들은 이미 배치를 끝냈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와 인테리어소품들은 거실에 가득 놓여져있었다. 하루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박스를 열고 하나하나 꺼내던 우현이 액자하나를 들고 멈칫했다. 사진속에는 콩쿠르대회에서 깃털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순재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우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락방에 올려놓을 짐에 액자를 끼워넣었다. 한참 정리를 하는데 부엌에서 순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떡 주문했어?" 마구잡이로 쌓여있던 짐들이 슬슬 제자리를 찾아갔다. 거실이 유난히 크고 천장도 높아 전에 쓰던 가구들로는 집안이 꽉 차질않아 썰렁해보이는 감이 없지않아있었다. "흠….뭐가 부족한걸까,성열아." 성열과 우현이 나란히 서서 거실을 한번 슥 둘러봤다. 아직 TV와 전자제품들이 안 들어와서 그런가? 내일 일끝나고 오는 길에 가구점에 한번 더 들려야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아직 먼지를 닦지않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막상 노발대발할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회사에 출근할 엄두가 안난다. 마음속이 심란해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있는데 성열이 우현의 무릎을 톡톡 쳤다. "어,왜?" 성열이 건넨 신문지를 받아든 우현이 멀뚱히 가만있자 신문지를 소파에 얹은 성열이 그 위에 앉아 우현을 슥 쳐다봤다. 깔고앉으란 뜻이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거실에 드러누워 먼저 화장실에 들어간 명수를 기다리며 tv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대는데 화장실에서 절규에 가까운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저 자식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반말이네. "동생님. 말 좀 예쁘게하면 혀가 잘립니까?" 명수의 손에 들린건 폼클렌징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향이 좋다며 샤워할때마다 온 몸 구석구석을 닦다가 한달전에 몽땅 다 써버린 폼클렌징. 성규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바디 워시인줄알았지." 폼클렌징이 비싸봐야 거기서 거기지, 더럽게 유난떠네. 씩씩거리며 명수가 문을 쾅닫고 들어가자 문에 대고 성규가 주먹을 까보이며 감자를 먹였다. 다시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는데 이번엔 안방에서 마스크팩하고 잠잠히 누워있던 봉신 씨가 후다닥 거실로 달려나왔다. "리모컨줘. 응가하라 1997할시간이야." 내가 있을 곳은 어딘가. 리모컨을 봉신 씨에게 내준 성규가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며칠 전 일자리를 모집하는 사이트에 뜨는 채용공고 팝업창을 보고 얼른 입사지원을 했었다. 근데 보나마나 떨어졌겠지. 서류에 떡하니 '서율대'라고 써있는데 어느 회사에서 받아주겠어. 요즘은 연고대 나온 사람들도 백수라고 하던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괸채 지원 결과창을 클릭하려는데 거실에서 봉신 씨의 호들갑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머! 준희가 윤제 좋아한대! 세상에!" 나보고 어쩌라는건지. 듣는둥 마는둥하며 다시 지원결과창을 클릭하려는데 이번엔 문이 벌컥 열리고 입이 댓발나온 명수가 들어왔다. "거봐. 비누로 씻었더니 피부가 거부하잖아." 뿐만 아니라 녹차는 피부트러블 완화와 진정에 얼마나…. 계속되는 녹차 예찬론을 한 귀로 흘려보내던 성규가 심드렁하게 모니터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모니터를 덥석 붙잡았다. "뭐하냐? 모니터안으로 들어가게?" 모니터로 다가온 명수가 드래그까지 해가며 꼼꼼히 읽었다. "그런 것 같은데?" 팔짝 일어나 침대위로 올라간 성규가 방방 뛰어댔다. 꺅꺅소리를 지르며 뛰어대는 통에 응가하라 1997을 보던 봉신 씨가 인상을 쓰며 들어왔다. "시끄러워! 침대위에서 뭐하는 거야!" 명수가 앉아있는 모니터로 다가간 봉신 씨가 '어머머,정말이네!'하고 박수를 쳤다. "다들 왜 이래. 아직 합격은 아니잖아. 면접봐야지.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거아니야?" 뭐 입지? 뭘 준비해야되지? 성규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난리를 피자 정장부터 세탁소에 맡기라며 기분좋은 잔소리를 한 봉신 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야, 김명수! 폼클렌징? 그깟거 백개는 사줄게! "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성규가 설레는 가슴을 주체 못 하고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인생그래프꼭짓점
토요일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준비할 겨를이 없어 불안하긴 했지만 아침에 봉신 씨가 끓여준 비싼 한우 소고기국 덕분에 속은 든든했다. 말끔한 정장차림에 명수의 도움으로 머리까지 멋지게 세운 성규가 정거장에 도착한 버스에 얼른 올라탔다. 마치 성규를 기다린듯이 딱 한 자리가 비어져있길래 얼른 달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모든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좋아. 이 상태 그대로 면접까지 시원하게 끝내는 거야. 날씨도 좋겠다, 컨디션도 좋겠다. 문제될 거 하나도 없어. 입술을 앙 다문 성규가 서류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전11시. 시간도 넉넉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다음 정류장에서 임산부 한 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힘들게 허리를 받치며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게 위태로워보여 얼른 자리를 양보했다. "여기 앉으세요." 비록 몇 정류장을 더 가야 도착이지만 성규는 뿌듯함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롭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영문도 모르고 실실 웃으며 서있던 성규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동전넣는 통까지 데구르르 굴러갔다. "아악!" 쪽팔림에 얼른 일어난 성규가 발목부터 올라오는 찌릿함에 봉을 붙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도착지까지 두 정거장이나 남았지만 발목이 심상치않게 아픈까닭에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렸다. 약국에서 파스를 사 발목에 뿌린 성규가 한 발 내딛었다가 신음을 하며 비틀거렸다. 버스에서 굴렀을때 발목을 삔 탓이다. 휴…. 왠지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했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하면 안돼. 성규가 이 악물고 일어나 깽깽이 걸음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한동빌딩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1시에 면접이라 12시에 도착해 준비하려고 했는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려고 서둘러 서류가방에서 거울을 꺼냈다. "히익!" 버스에서 넘어졌을때 깨진건지 거울에 쩌적쩌적 금이 가 있었다. 조~온나 불길해!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성규의 목울대가 한번 일렁거렸다. 징크스가 따로 있진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충분히 성규를 불안케하고도 남을 상황이였다. "침착하자,침착. 후우." 택시가 한동빌딩앞에 멈추고 택시비를 계산한 성규가 쩔뚝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제일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전봇대에 놓여진 쓰레기봉투위로 버린 성규가 빌딩 유리창으로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발목이 삐긴 했지만 시간도 안 늦었고 매무새도 완벽해. 긴장하지마. 후우후우." 스스로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고 빌딩안으로 쩔뚝거리며 들어가는 성규. 그 모습 뒤로 서쪽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띵도옹~ 침대위에서 만화책을 읽던 명수가 초인종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모니터없는 인터폰으로 다가가 누구세요,하고 묻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인사드렸던 이순재입니다. 옆집 이사온 사람이요.' 이순재?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람인가. 명수가 비실비실 웃으며 대문을 열어준 뒤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갔다. 대문앞엔 성열과 순재가 나란히 서있었다. 성규와 봉신 씨와는 인사를 나누며 만난 적이 있지만 명수는 처음보는 순재가 먼저 인사를 꾸벅하자 명수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이 사람들이 옆집 이사온 사람들이구나. "안녕하세요.저번에 인사드릴때 못 뵜었던 것 같은데…." 명수가 성열을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지만 성열은 아무런 말없이 땅바닥만 쳐다봤다. "얘가 낯을 좀 심하게 가려서요. 성열아, 인사해야지." 마당 구석에 있던 오래된 나무 상자를 열고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망치와 드라이버를 꺼내 나무 상자 뚜껑을 닫고 대문으로 다가가 조금 투박할 정도로 큰 망치와 드라이버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저기 꽃밭 직접 가꾸신 거에요?" 마당 한 편에 1평 남짓한 공간에 이름모를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모두 성규의 보살핌을 받고 큰 꽃들이다. "우리 형이 키운거에요. 무지 아끼는 꽃밭이라 건드리면 되게 화내요." 순재가 조심스럽게 묻자 명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형 오지랖도 넓고 꽃 키우는 거 좋아해서 괜찮을거에요'하고 답했다. "감사해요. 아, 공구는 쓰고 바로 돌려드릴께요." 대문을 닫고 돌아선 명수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망치 되게 크다, 그치?" 순재가 드라이버를 든 손등으로 성열의 이마를 짚었다. 얼굴색이 성규네 꽃밭에 있던 빨간 꽃과 비슷했다. "열도 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왜 이러지. 성열아, 괜찮아?"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성큼성큼걸어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버린다. "……." 집안으로 들어온 성열이 자신의 볼을 두 손으로 꾸욱 눌러봤다. 뜨거웠다.
'번거롭게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 빌딩에서 절뚝절뚝 걸어나온 성규가 입구에 서서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풀썩 쭈그리고 앉았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성규와 마찬가지로 면접보러왔던 사람들이 줄줄이 빠져나왔다. 모두들 미리 챙겨온 우산을 가방에서 꺼내 빗줄기를 뚫고 유유히 사라졌다. 나만 우산을 안 갖고 온건가? 성규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집엔 어떻게 돌아가지? 붙은 것처럼 날뛰고 왔는데 떨어졌다는거알면 난 반쯤 죽은 목숨인데. 비도 내리고 발목도 아프고 게다가 면접은 떨어졌고 우산도 없다. 끔찍하게 재수없는 상황이다.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서류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성규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동우야아….흐어엉…. [너 울어? 무슨일이야? 성규야!] 인생은 지긋지긋한 일의 반복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스물여덟살인 지금, 그런 반복쯤은 거뜬히 이겨낼만큼 충분히 성숙해졌다고 믿고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이가 모든 걸 보장해주진 않았다. 나이는, 보험이 아니였다. 그 사실을 알아 더 서럽게 눈물이 난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라는 말을 여태껏 살아오면서 늘 가슴속으로 품어왔었지만 오늘은…유독 다른날보다 더 서럽다. 실패는, 충분히 치명적이다. 그것도 실패를 많이 경험해본 사람에게는 더더욱.
빈 잔에 쪼르르 소주를 채운 성규가 단숨에 소주잔을 비워내더니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빙빙 돌리며 '성규가~ 조아하는~ 랜덤게임~!'하고 외치더니 다시 자리에 철퍽 앉는다. "우주선에서 토끼가 내려와 하는 말! 바니바니 바니바니 당! 근! 당! 근 !!" 혼자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게임하는 성규의 씩씩한 목소리에 가게를 꽉 채운 손님들 모두 킥킥 웃어댔다. "대학나온애가 띨띨한 짓은 혼자 다 하고 있네." 동우가 한숨을 쉬며 옆 자리에 앉아 성규의 머리통을 위로해주듯이 살살 쓰다듬었다. 한쪽 팔을 베고 원형 테이블에 누운 성규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울 듯 말 듯 입술을 우물우물거리더니 또 다시 코를 훌쩍거린다. 두 눈가에 눈물이 금새 그렁그렁 맺혔다. "울지마.뚝 해,뚝! 나이먹고 왜 징징 울고 그래. 인생 쫑났어? 아직 기회 많아. 걱정하지말고 울지도마. 뚝!" 자신의 소매를 쭉 끌어당겨 성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콕콕 눌러 닦아줬다. "기회만 많으면 뭐해애….수확이 없는데…." 소주잔을 들어 깔끔히 잔을 비우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잘익은 고기 한 점을 입안에 집어넣은 동우가 계산서를 힐끗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집은 가. 정신차리고. 오늘 고깃값은 사장인 내가 쏘지." 팔을 휙 휘저어 동우의 머리를 콩 때린 성규가 다시 눈을 감고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안되겠다싶어 축 늘어진 성규를 일으켜세웠다. "나 잠깐 얘 좀 처리하고 올테니까 카운터 좀 보고 있어." 신발장 앞 의자에 성규를 앉혀놓고 가게 주차장에 있는 신형 아반떼를 끌고 온 동우가 의자에 앉아있는 성규를 일으켜 조수석에 태우려 하자 동우의 손을 홱 쳐낸다. "왜 이래. 이거 놔. 걸을 수 있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몇 걸음 걷던 성규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시큰거리는게 꽤 오래갈 것 같아 걱정이다. "이씨…. 파스…." 서류가방에 굴러다니던 파스통을 꺼내, 몇 번 딸깡딸깡 흔든 뒤 발목에 대고 뿌리자 힘없는 바람만 쉭쉭 나왔다. 금방 가라앉을 줄 알고 작은 걸 샀더니만…. "여기 약국어딨지….약국…." 조수석에 성규를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해준 뒤 옷에 묻은 빗방울 털어내고 차에 올라탔다. 아반떼가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약국으로 향했다. 난 너가 부럽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창밖만 보던 성규의 말에 능숙하게 운전을 하던 동우가 물었다. "뭐가." 성규의 술주정 비슷한 푸념을 한 귀로 흘린 동우가 지갑을 들고 나가려고 하자 성규가 인상을 팍쓰며 동우의 팔을 잡아 다시 운전석에 끌어앉혔다. "나도 돈 있거든~ 내가 사올테니깐 끅, 니가 앉아있어. 새키….꺼억. 시트에 토하면 너도 죽어~" 트림을 거하게 뱉은 성규가 살짝씩 절뚝거리며 횡단보도를 지나 약국안으로 들어갔다. "아줌, 아니구나. 아저씨,파스 하나만 주세요. 왜냐면 제가 발목을 아야아야…." 카운터에 발을 얹으려고 낑낑 대는 성규를 차안에서 지켜보던 동우가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려 약국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술을 많이 마셔서…. 얼마에요?" 따뜻한 온기에 졸음이 밀려오는지 성규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가지가지하네. 계산을 마친 동우가 의자에 앉아 덩실덩실 흔들리는 성규의 고개를 두 손으로 잡아 고정시켰다. "잠은 집가서 자." "칠…십오……이십…삼…십이…" 눈을 비비적거린 성규가 다시 한번 종이에 적힌 번호를 확인했다. [475회 당첨 번호 칠, 십오, 이십, 삼십이, 삼십오, 사십. 보너스 번호 삼십구.] 팅팅 부어있던 성규의 눈이 점점 뚜렷해졌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로또 일등이라도 당첨됐어?" 로또 용지가 파르르 떨리기시작했다. 칠 맞췄고 십오 맞췄고 여기까진 그러려니했는데 이십 맞췄고 뒤이어 삼십이, 삼십오에다가 보너스 삼십구까지! 당첨 번호가 로또 용지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눈을 벅벅 비벼보고 몇 번을 확인해도 또렷하게 인쇄된 여섯글자는 꿈이 아니라 분명 생시였다. "흐어어엉엉!!!"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우를 꽉 끌어안았다. 이등 당첨이야, 당첨! 펄쩍펄쩍 뛰기도하고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든 성규가 종이를 가슴에 품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잠깐 이등 당첨금이……. 일,일억 오천?!" 로또 용지의 번호와 당첨번호를 차근차근 확인한 동우가 마찬가지로 펄쩍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이등이네! 야, 근데 왜 울고 그래." 약국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성규가 콧물까지 흘려가며 정말 서럽게 목놓아운다. 여태까지 성규가 마음고생한 걸 훤히 잘 아는 동우의 눈가에도 측은함의 눈물이 고였다. 한참을 끅끅대던 성규가 콧물을 들이마시며 봉신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려던 성규가 다리힘이 풀려 약들이 놓여진 선반을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이거 꿈 아니지? 그치?" 성규가 횡설수설하며 약국을 걸어나왔다.여태까지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어느정도 사그라들어있었지만 강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로또 당첨자 중 칠퍼센트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던데 그 칠퍼센트가 될것만 같아 얼른 가슴부분을 꾹 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란불 깜박거리네. 좀 기다렸다….성규야!!" 싱글벙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의 성규가 동우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하며 로또용지만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순간 하얀 벤츠 한 대가 끼이익 브레이크를 잡으며 성규 바로 앞에서 딱 멈춰섰다. 다행히 치이진 않았지만 으아악!하며 소리를 지른 성규가 물기 가득한 바닥에 벌러덩 넘어졌다. 운전석에서 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호흡을 하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후다닥 달려나왔다. 동우 역시 백설기처럼 하얗게 질려서 성규에게 달려갔다. "성규야! 괜찮아?" 성규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동우와 우현의 부축을 받으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정장과 와이셔츠가 흙탕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손바닥이 쓸려 피가 맺힌 상처에 빗물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문득 자신의 손에 로또 용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내 돈! 내 로또!!" 문득 벤츠 앞 유리 와이퍼에 무언가 하얀 것이 끼어서 좌우로 왔다갔다거리는게 보였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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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메모장으로 쓴 다음 인티 창으로 옮기는 거라
간격이 좀 이상하네요ㅠㅠㅠ
읽으실때 많이 불편하시면 TXT 로 보기! 클릭해주세요!!ㅎㅎㅎㅎㅎ
인생그래프꼭짓점은 주말연재구요
8~10시사이에 연재됩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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