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져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삼아 느긋이 걷던 종인이 고개를 들어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유독 구름도 없고, 별도 잘 보이고, 잘 보여 봤자 희미한 노란빛 서너 개 정도였지만 그만큼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 종인은 입을 헤- 벌리곤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위에서 고개를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종인에 세훈이 작은 한숨만 내뱉으며 팔 한쪽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너 그러다 다친다, 난데없이 툭 튀어나와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고 팔을 잡아끈 세훈이 다시 종인의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별은 집에 가서 봐도 충분하니까 앞이나 제대로 봐. 딱딱한 말투에 작게 입술을 툴툴거리다가도 이내 고개를 원위치 시킨 종인이 세훈을 옅게 흘겼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잠만 잔거 알아?”
“알아. 깨우지 그랬어. 너 공부해야 되잖아.”
“네가 안 해도 된다며!”
그걸 들었어? 종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눈을 크게 뜬 세훈이 정리가 잘 되어 반질거리는 머리칼을 흩뜨렸다. 자고 있던 것도 아니었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건 아니라며 재빨리 손사래 친 종인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머쓱해 보이는 종인을 눈치 챈 세훈이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쓸어주며 입술을 움직였다. 부드러워. 너도 부드러워. 지금 쓸어주는 손길이 그렇게도 부드럽다고, 세훈을 닮아서 포근하다고 느낀 종인이 입꼬리를 한껏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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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저 높이 솟아오른 해와는 달리 이제 겨우 눈을 뜬 종인은 엄마의 재촉에 못 이겨 화장실로 향해 차가운 물을 억지로 들이대다시피 해 머리를 감았다. 눈에 튀는 거품에 간단한 세수도 하고 양치까지도 끝마친 종인이 식빵 두어 장을 챙겨 입에 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식빵에 막혀 어눌한 발음으로도 우물거리며 인사한 종인은 시간을 확인하고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별로 늦지도 않았는데. 지금 시간은 7시 50분, 교문이 닫히는 시간은 8시 정각. 종인은 결코 별로 늦은 게 아니었다. 저 혼자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하며 학교로 향하던 종인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걸음을 늦췄다. 푸석푸석해 실처럼 가느다란 모발을 떠올리던 종인이 핸드폰 액정에 뜨는 시간을 가만히 바라봤다.
7시 55분.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걸음을 조금 빨리한 종인이 계속해 떠오르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세훈이 머리 관리해줘야 되는데….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시간이 남았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속상해졌다.
교문은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그 이후론 늦어도 별 상관이 없었으니 종인은 걸음을 다시 느리게 했다. 담임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왁자지껄한 교실을 확인한 종인이 뒷문을 통해 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바로 옆분단 옆자리에 앉은 세훈이 의자를 빼내어 앉는 종인을 천천히 훑었다. 늦었네, 담담한 목소리였다. 평소에도 잠이 많았던 종인이 지각하는 건 밥 먹듯 뻔한 일이라 크게 호들갑 떨 만한 일이 아니긴 했다.
자리에 앉아 1분 남짓 하는 짧은 시간동안 가방을 걸어놓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는 종인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다 쫓는 세훈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정리를 다 끝내고나서야 세훈과 눈을 마주한 종인이 휘어지게 웃었다. 본 수업이 시작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시계의 분침을 확인한 종인이 세훈 가까이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손을 들어 올려 머리 가까이로 가져가는 종인에 눈을 감고 엎드린 세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 것도 없는데 졸려, 너는? 나도. 짧게 대답하며 세훈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집어 올려 만지던 종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제보다 더 얇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마트 들렀다 올걸 그랬나, 이미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머리만 만지작댔다.
그런 종인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건지 눈을 뜬 세훈이 밑으로 내려가 있는 입꼬리에 손을 가져갔다. 세훈을 닮아 얇고도 흰 손가락이 종인의 입술 끝을 밑에서 위로 쓱 들어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냥 봤을 땐 까맣겠구나 했는데, 이렇게 제 손가락을 가져다대니 그 색깔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에 실없는 웃음만 터트렸다. 까만 종인의 얼굴과 하얀 세훈의 손가락,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붉은 색의 입술까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웃음만 터트리던 세훈은 아무 연관성이 없을 것만 같은 세 가지의 색깔을 보며 백설 공주를 떠올렸다. 왜였을까, 갑자기 백설 공주가 생각난 건. 세훈의 손가락을 잡아 내린 종인이 짐짓 화난 척 볼을 크게 부풀려 눈을 세모꼴로 만들어냈다가 결국 저 스스로 웃음이 터져 눈가에 조그만 보조개를 만들어냈다.
“좋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짤막한 단어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이지만 그게 뭘 뜻하고 있는지는 종인도 세훈도 다 알고 있었다.
“…좋아?”
“재밌잖아, 다 좋아.”
어쩐지 망설임이 느껴지는 세훈의 물음에 곧장 대답한 종인이 잡아내려 지금까지 꾹 잡고 있던 손가락을 살살 어루만졌다. 신기해, 하얘서 좋겠다. 별 의미 없는 말들만 써내려가는 종인의 정수리에 손을 얹은 세훈이 보이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나는 너 같은 피부가 좋아.
제 말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종인의 눈가로 손을 옮긴 세훈이 조용히 뇌까렸다. 야하게 생겼잖아, 너처럼. 느지막이 내뱉어진 말에 종인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세훈과 있었던 시간동안 많은 게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렇게 가끔씩 턱턱 내뱉는 발언들은 종인을 당황하게 만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종인의 관자놀이를 쓰다듬던 손이 눈 바로 옆쪽에서 움직였다. 속눈썹을 겉핥기식으로 쓸어낸 손이 이내 눈가를 배회했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어째 뭉근하니 따뜻한 느낌이 올라오는 게 기분 좋아 종인이 그대로 세훈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놓고 기댔다.
“너는 하얀데, 왜 회색늑대야?”
그러고 보니까 준면이형도 되게 하얘. 원래 다 하얀건가봐, 늑대들은. 저의 귓가 바로 옆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시답잖은 헛웃음만 들이킨 세훈이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가 조금 더 하얀 거야, 아주 관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침부터 뭐가 그리도 피곤한지 제게 기대고 앉은 종인의 등을 토닥여 내려간 세훈이 종인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이제 이런 건 반응도 안하지, 아무렇지도 않게 기대어 있는 종인에 요것 봐라? 싶어 세훈이 좀 더 농밀하게 움직였다.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어 귓불을 깨물다 축축한 혀로 핥아 올리면 그때서야 반응하는 종인에 세훈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반응을 보이긴 했는데 영 미지근하다.
우리 종인이, 왜 그럴까. 왜 반응이 없어, 응?
괜히 더 안달 나게 만들고 싶어진 세훈이 등을 토닥여주던 손으로 허리 맡을 지분거리며 파고들었다. 하지마아…, 작은 소리로 말하는 종인의 입을 막고 깊게 파고든 세훈이 옅게 음영진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자꾸만 저를 피하는 게 괘씸해 혀를 옭아매니 당황한 종인의 떨림이 겉으로도 느껴져 그제야 세훈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반응을 해야지. 그치?
동의를 구하듯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세훈의 얼굴을 바라보던 종인이 뭐라 말하려다 이내 포기했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제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아까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종인은 이제 잘 알았다.
“여기 학교야.”
“그게 뭐. 우리 사이 모르는 애들도 있나?”
없을 텐데, 얄밉게 웃는 세훈의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 종인이 맞고서 아파할 세훈을 상상하다 그만뒀다. 반류 사회가 소문이 빠르다는 건 사실이었으니. 원인들에 비해 인원수가 현저히 적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디 하나 일이 터지면 그게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종인이 선조 귀환이라는 사실도, 백현과 찬열이 쉬쉬하며 종인을 노리고 있단 사실도, 세훈과 종인이 이렇고 저런 사이라는 사실도 고작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모두가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세훈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 도리어 할 말이 없어진 종인이 잠자코 세훈의 목부근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힘껏 들이켰다. 이 와중에서도 세훈 특유의 그 체향은 너무도 달큰해서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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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한 쪽에 높이 쌓인 서류들을 보며 진절머리를 낸 준면이 기지개를 쭉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게 이놈의 회사는 이렇게 일을 많이 주는지, 이러단 밤을 새서 일해도 모자라겠다― 싶었다. 머리나 잠깐 식힐 겸 답답하게 조여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 준면이 찌뿌드드한 몸에 허리를 몇 번 두드렸다. 아무리 의자가 푹신거린다고 해도 일정시간 이상을 계속해 앉아있으면 허리에 무리가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제 갓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팀장직을 맡은 사람치고 준면은 꽤 일을 잘하는 편에 속했다. 허당기가 많았지만, 일처리에서만큼은 앞뒤 정확하게 확실해서 회사 내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오히려 잘생겼는데 일까지 잘하고 빈틈도 없으면 기계같이 삭막했을 거라면서 종종 보이는 허당기에서 인간미가 넘쳐난다고까지 했다. 기본적인 머리와 선천적인 두뇌로 인해 일처리는 쉬웠다. 그래, 뭐. 그 정도면 됐지.
진한 향이 물씬 풍겨오는 커피의 향을 음미한 준면이 정작 커피는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책상 한 쪽에 그대로 올려놨다. 커피의 진한 향은 좋아하지만, 커피의 쓴 맛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인스턴트 커피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일회용 종이컵 안쪽에 묻어난 거품을 바라보며 커피를 버린 준면이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으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왼쪽 손에 차여진 시계는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 세훈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아니지. 종인이 공부하는 걸 지켜보거나 잠든 종인을 제 몸에 기대게 만들어 편하게 해주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준면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집에 잘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뭐, 정확히 따지면 세훈의 집이었지, 자신의 집은 아니었으니 딱히 들어가고 말고 할 상황도 없었지만, 그래도 몇날 며칠을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걱정 하나 없어 보이는 세훈에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거의 제가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자식걱정 다 필요 없다는 말이 이런 때 쓰이는 말인가 싶어 준면은 크게 한숨만 내뱉었다. 정작 자신을 더 잘 챙기는 건 종인이었다. 꼬박꼬박 문자까지 해가며 건강을 걱정해주는 종인에 세훈은 버린 지 오래였다. 은혜도 모르는 자식 따윈 필요 없다는 게 그의 모토였다.
세훈의 반려는 누가 될까 심히 걱정했었는데, 이젠 그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선조 귀환이라는 희귀한 존재로 처음 만난 종인은 인성이 좋은 편이었다. 대체 누가 저 철부지 같은 세훈을 데리고 살까 궁금했었는데, 이제는 종인 때문에 철부지가 아닌 팔불출이 되어가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여 어릴 때부터 세훈을 쭉 지켜봐왔던 준면으로선 그저 웃음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마냥 어려보이기만 했던 세훈이 이제는 더 이상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겪으며 괜히 뒤숭숭한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세훈과 종인을 지켜보며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종인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깊은 아이였음이다.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종인의 생각에 다시금 종인이 보냈던 문자들을 확인하며 미소 짓는 준면의 얼굴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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