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빛에 인상을 잔뜩 쓰며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얀 천장과 불빛. 소독약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의무반인가 싶다. 살짝 고개를 들어 내 몸을 보니 뭐야, 상의는 어디다 버린 거야.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하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보니 넓따란 방 구석에 혼자 청승맞게 책을 읽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박 경, 뭐하냐."
"일어났네? 3일만이다."
어울리지 않게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박경. 나를 보고 히죽 웃으며 책을 탁 덮고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다짜고짜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머리를 빙빙 돌린다.
"뭐 하는 거야!"
"컬테로한테 공격당한 거 맞냐, 너?"
"공격당해서 기절까지 한 거 아니야, 멍청아."
박경은 손을 떼고 '그러냐'하고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아까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니 상태가 너무너무 좋단 말이다. 활동복이 걸레짝이 된 걸 보니 절대 컬테로가 널 봐준 것 같진 않고."
"활동복? 그거 어딨었어?"
"니 옆에 있던데? 아주 넝마가 되가지고 그냥 버렸어. 그냥 아주 갈기갈기 찢어졌던데? 이민혁이 그거 사진만 딸랑 보내가지고 난 니 병신된 줄 알았는데 웬걸, 존나 멀쩡하네."
"멀쩡하긴 무슨...이 아니네. 나 진짜 왜 이렇게 멀쩡해?"
분명 머리를 맞았고 팔 쪽도 찢어졌고, 여러모로 온 몸이 아팠던 기억은 있는데 지금 내 눈이 보고 있는 내 몸은 지나치게 깨끗하다. 상처 하나 없는 팔을 만지작거리다가 '근데 내 옷은 어딨냐'하고 묻자 박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말이, 버렸댄다.
"뭐? 왜 버려, 그걸?"
"찢어지고 늘어나고 피 잔뜩 묻었는데 그걸 가만히 갖고 있냐, 재수없게? 그 옷에 묻은 피 검사해보니까 니 피던데, 넌 몸에 상처 하나 없지, 옷은 아주 걸레짝인데 니 몸은 아주 멀쩡하시고 말이야. 꺼림칙해서 그냥 버렸어."
옷은 찢어지고 피가 묻어있는데 내 몸은 멀쩡하다? 아, 그러고보니 나 X지역에서 헬멧 벗고 맨 얼굴로 숨 쉬고 있었는데도 살아 있네? 박경도 그 생각을 한 건지 손가락을 튕기며 책에서 눈 한 번 떼지 않고 입만 움직인다.
"니가 X지역에서 발견됐는데 그냥 평상복 입고 있었다며. 근데 왜 몸에 불순물질이 하나도 검출이 안 돼? 진짜 신기하네."
"야, 나도 몰랐는데 나 어지간히 건강한가보다."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녀석의 눈이 움직여 날 바라본다. 근데 눈빛이, 아주 한심하단 눈빛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짜고짜 책으로 내 머리를 후려팬다.
"아! 야, 뭔데!"
"건강은 개뿔, 뭐가 있으니까 니가 살아있는 거겠지. 이태일 박사가 너 일어나는대로 정신 멀쩡하면 보내랬는데, 아무리 봐도 멀쩡하니까 빨리 가 봐."
"이태일이 날 왜?"
"니 옆에 있던 남자애 때문일걸?"
아, 나 머리 진짜 나쁜가. 왜 이렇게 뒤늦게 생각나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 뭐지?
"왔냐?"
"아, 박사님. 흡연 금진데요."
"몰라, 몰라. 알아서 되겠지. 지들이 뭔데 참견이야."
휠체어에 앉아 담배를 물고 킬킬거리는 이태일을 보며 몰래 혀를 차다가 이내 다시 표정을 굳히고 "왜 부르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히죽 웃는 이태일.
"니 옆에 있던 그 애, 어디서 찾았어?"
"제가 찾은 거 아니에요."
역시 그 애 얘긴가, 툴툴대며 내게 손짓하는 이태일에게 가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이태일의 담배 연기가 얼굴을 덮었지만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그대로 갔다. 이태일은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담배를 매달고 웃음을 터뜨렸다.
"뭔진 몰라도 인간은 아닌 것 같더라."
"왜요."
"혈액 성분 검사 결과가 엄청 웃겨. 혈액의 90%이상이 불순물질이야."
"불순 물질이라고요?"
"그래. 나머지 10%는 아직 뭔지 모르겠어. 액체라서 일단 피를 뽑아서 250ml정도 보관해두기는 했는데 뭔지를 알아야지."
이태일이 머리를 긁으며 짧아진 담배를 내게 건넸고 나는 조용히 담배를 휠체어 바퀴에 지져서 껐다. 복도 끝의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 분명히 그 때 그 녀석이다. 바닥 한 구석에 웅크려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드는데 그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없는 얼굴에 박혀 있는 찢어진 까만 눈이 꽤 색스럽다.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건지, 이태일은 보지도 않고 나만 빤히 바라본다.
"내가 대충 생각해 봤는데,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설령 인간이라고 해도 일반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떤 능력이요?"
"가설이긴 하지만, 신빙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X구역에서 아무런 장치 없이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었고 신체에 불순 물질이 지나치게 많이 쌓여 있는데도 무사한 걸 보아서는 정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이태일은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귀여워 보이는 인상으로 눈웃음을 쳤다.
"너만 알고 있어."
도대체 이 양반은 속을 모르겠다니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휠체어에서 떨어져 유리벽으로 다가갔다.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태일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얜 이름 뭐에요."
"앙?"
때마침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던 이태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아, 이름. 우지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박사님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귀아프다며 인상을 쓰고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내게 던지는 이태일이다. 깜짝 놀라 발로 담배를 지져끄고 이태일을 노려보는데 이태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우지호'라고 부른 녀석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지어준 이름이야. 예전부터 우지호란 이름 있는 친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엥, 그래서 저 녀석이 박사님 친구세요?"
"돌았냐?"
또 막 꺼내던 담배를 던지는 이태일. 아, 진짜 아깝지도 않아요? 하고 내가 묻자 그제야 담뱃갑을 주머니로 쑤셔넣는 이태일이다. 이태일은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쳐서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달싹이며 우지호란 녀석에 대해 분석한 듯한 내용을 읽어댔다.
"혈액에 불순물질 90% 이상. 진짜 드럽게 웃기네, 저 새끼."
이태일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마구 들썩이는 어깨가 그가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저 녀석은 연구하면 무진장 재밌을 것 같거든. 나 지금 진짜 설레 죽겠다."
우지호를 바라보는 이태일의 눈이 보기 드물게 생기 넘치는데 그 모습이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다가 '뭘 봐'라는 말과 함께 들려온 욕설에 고개를 돌려 유리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우지호는 온통 하얀색인 빈 방 구석에 웅크려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무릎에 파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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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주말에 쓰려고 했는데
주말에 급 사정이 생겨서
지금이라도 급히 쳐싸지르고 갑니다ㅠㅠㅠ급 써서 글이 똥글이네요 아뷔벡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