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그 순한 김태형한테 소리지른 애래."
수근수근.
"박지민? 걔가 김태형처럼 착한 애한테 화낸 싸이코라던데."
웅성웅성.
"맞아. 맞아. 둘이 중학교때 같은 학교였다던데 박지민이 김태형 욕하고 무시하고 장난 아니었대. 김태형은 착하니까 넘어간거고."
뜬구름 같은 소문은 점점 기정사실화가 돼가고 있었고 현재 반 애들은 물론 그나마 1학년 때 만들었던 친구들마저 나를 피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내가 같이 등교하는 걸 무시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릴 건 없잖아.
그것도 김태형이 먼저 여자친구 얘기도 안해주고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랑만 붙어다녀서 그렇게 된 건데...
등교부터 녹진해진 몸을 책상에 기대듯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에 신경을 집중시키면 더 잘 들려오는 나의 소문들...
혹시나 하는 건데...혹시...혹시나...이게 왕따인 거야? 나 외톨이인 거야?
"박짐니!"
김태형의 목소리다. 지긋지긋해. 한 달 내내 무시를 당하는 걸 알면서도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분명해. 다른 애들한테 무시당한 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와서 인사하는 거다.
감고 있던 눈을 더 꽉 감았다. 무시하자. 무시해. 여기서 또 소리지르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거야.
"박짐니! 같이 등교하자니까 왜 또 혼자 갔어?"
"김태형, 넌 진짜 속도 없다. 너 무시하는 애를 왜 그렇게 챙기냐, 챙기길..."
"아, 왜~ 우리 짐니 착한 애야."
"어휴, 착한 게 누군데...."
저런 틀에 박힌 대화를 듣는 것도 한 달 째.
너네 레파토리는 변할 생각을 안하냐 왜. 귀에 딱지 앉겠다, 와...
그 것 뿐인가, 김태형은 한 달 내내 내 옆에 앉아 수업시간이건, 쉬는 시간이건, 점심시간이건 상관없이 말을 붙여왔다.
월요일 1교시. 무섭기로 소문난 수학쌤의 수업시간인데, 눈치없는 녀석이 또 말을 걸어왔다.
"짐니. 수학책 같이 보자. 나 집에 놓고 왔나봐."
"....."
"같이 보자~ 내가 옆으로 간다."
"뭐...뭐?"
내 대답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김태형은 잽싸게 내 의자 옆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붙였고 수학쌤이 그 기괴한 장면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우린 좁아터진 한 의자에서 엉덩이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너네 뭐하냐?"
눈치라곤 밥말아먹은 김태형이 흐흥 웃으며 '책 같이 보고 있어요!'라고 대답했고 우린 자연스럽게 복도행이 되었다.
수학쌤의 매서운 눈초리에 어떤 변명도 못하고 복도에 나와 축늘어졌다.
수업은 고1 겨울에 예습해 놓은 단원이라서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내 옆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이자식과 같이 남은 수업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공포스러웠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잘됐다는 듯 웃는데 그 표정에 또다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고 있는 기분이 되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나한테...왜 그러는데..."
"응? 뭐가."
"몰라서 물어? 왜 이렇게 내 일거수 일투족에 껴들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냐고."
"괴롭히다니~ 우리 중학교때처럼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건데."
.....난 도통 모르겠다. 저 자식의 속내를. 아마 까맣게 물들어 있을 거라는 감만 온다.
"중학교때처럼 지내자고? 이제 와서?"
"대체 뭐 때문에 거부하는 거야."
멍충이같이 웃고 있는 저 얼굴을 바라보며 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다.
너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보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이 대답은 너무 유치했다.
너가 나랑 같이 하던 하교를 네 멋대로 빼먹어서...이 대답은 더 유치했다.
그럼...
너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나한테 말하지 않아서...이 대답이 좋겠어.
"너...여자..."
그 순간,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대답이 유치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였다. 수학쌤의 수업을 듣지 못한 민망함때문도 아니였다. 다만. 다만.
내 대답을 기다리며 웃고 있는 김태형때문이었다.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끝없이 높아진 콧날,
바다가 깊은 줄 모르고 한없이 드리워진 속눈썹,
점 세 개가 놓인 입술을 따라 내려온 단단한 턱 라인.
왜 이제야 안 걸까.
김태태, 이 자식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내가 녀석의 여자친구 얘기를 듣지 못해 배신감에 휩싸였던게 아니었다. 그 녀석의 새로운 친구들 때문도 아니었다.
난 오로지 김태태가 나만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혼자 해왔던 것이다.
"박짐니?"
그렇게 18살 내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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