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탈리안을 위한 진혼곡
야광별
W. 뿌라스
[미안한데 나 갑자기 친척들이랑 어디 좀 가게돼서 저녁에 데이트 못할 것 같아.] - 쑤녕♥ 18:54
[응 알았어! 잘 놀다와!] - 17:55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묵은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들어 부쩍 권순영과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은 권순영과 내가 사귄지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다.
고등학생때나 챙겼지 대학생이 되어선 유치하다며 잘 챙기지 않는 22일도 챙겨준 권순영이고, 50일에도 집 앞에 찾아와 내 몸통만한 곰인형을 안겨주고 간 권순영인데 그 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그래. 100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만 봐도 연애 초기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아주 조금씩의 변화가 우리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 문자를 보내기는 했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기껏 한 화장을 신경질적으로 지우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권순영의 얼굴을 그렸다.
벌써 못 만난지 3주쯤 되었나.
뒤척거리니 부스럭거리는 옷이 신경쓰였지만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고.. 그냥 누워있다가 잠들면 잠드는거고... 무기력한 자세로 멍하니 천장을 보니, 어둑한 방 안 천장의 반짝반짝 빛나는 야광별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게 언제부터 있었더라..
우리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처음 하는 연애에 설레는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날이 많았다.
권순영은 당시 대학 운동부 훈련이 바빠서 문자를 잠깐 하다가 11시쯤이면 골아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비록 답장이 없는 문자라도 권순영에게 보내고 나서 혼자 느끼는 간질간질함이 좋아서 항상 혼잣말 하듯 새벽에 문자를 보냈었다.
[쑤녕이 자? 답장 또 끊겼다 ㅋㅋㅋ 핸드폰 깔고 자는거 아니지?] - 23:05
[여주는 안자는데~ 에베베베] - 23:06
[오늘도 훈련 수고했어! 토닥토닥 :)] - 23:06
[따랑행♥ 뽀뽀쪽!] -23:07
그러면 항상 다음 날 아침 문자를 확인하고 전화해선 "뭐야... 귀엽게 진짜..." 하며 웃는 순영이의 잠이 덜깬 목소리가 좋았다.
[권순영 자?] - 23:34
[나 잠이 안와] - 23:34
[하늘에 별이 없다...] - 23:36
[깜깜해. 빛이 없어.] - 23:37
교수님한테 깨지고 엉엉 울며 순영이에게 전화하며 하소연했던 어느 날, 순영이는 잠자코 듣다가 간간히 그래, 여주야 힘들지, 하고 위로의 몇 마디를 건네 왔다. 그 짧은 한마디가 너무 따뜻해서 안심했다. 순영이에게만은 모든걸 털어놔도 되겠다고.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해도 끊기지 않는 전화. 휴대폰을 꼭 쥔 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탈진할 것처럼 울다가 순영이보다 일찍 잠들었었다. 아마 8시쯤.
어울리지 않게 일찍 잔 탓이었는지 얼마 뒤에 깨어나 몽롱한 정신으로 시계를 보는데, 이미 순영이가 잠들었을 11시 반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문 밖을 봤는데, 깜깜했다. 별 하나 없이. 그 까만 하늘이 내가 얼마나 어두운 미래를 가진 존재인지 깨닫게 했다.
운동부에서 나름 잘 나가는 순영이,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구한 날 교수님께 혼나는 21살 철부지.
훈련하느라 바쁜 순영이를 붙잡고 위로해 달라 징징거리던 몇 시간전의 내가 부끄러워졌었다.
그리고 울컥하는 감정에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순영이에게 연달아 문자를 보냈었지. 하늘에, 별이 없다고. 내 미래에도, 별이 없다고.
내 인생에도, 별이 없는 것 같아 순영아.
그치 답이 없지- 항상 당연하게 여겼던게 그때는 왜 그리 섭섭했는지...
조용한 휴대폰을 책상 위로 집어던지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혼자는 외로웠다. 그 날, 나는 혼자였다.
평소보다 깊게 잠들었던 나는 또다시 새벽에 잠이 깼었다. 간만의 단잠을 방해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3시,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두운데 희미한 불빛이 방안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뭐지?- 하고 눈을 제대로 떴을 때,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온 천장 가득한 야광별.
순영이가 다녀갔다.
그 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 뭐해... 지금은 혼잔데...."
자조 섞인 내 혼잣말에 스스로 놀라서 입을 때렸다.
남자친구가 친척 좀 만나겠다는데, 내가 뭘 간섭하는거야- 하면서.
내가 모르는 순영이는,
내가 아닌 친척들과 함께있는 순영이.
내가 아는 순영이는,
손에 문방구에서 사온 커플링을 끼워주며 "다음에는 진짜 반지 끼워줄게." 하고 헤헤 웃던 순영이, 22일이라며 22장의 손편지를 써준 순영이, 하나도 못 알아보겠다니까 222일에는 더 또박또박 써주겠다던 순영이, 자기와 꼭 닮지 않았냐며, 앞으로 잠 안오면 문자하지 말고 꼭 안고 자라며 곰인형을 안겨주던 순영이....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의 야광별....
내가 알던 순영아.
나의 별.
어디로 갔어 너.
믿고 싶지 않아서 밀어냈지만, 이렇게 혼자된 어둑한 방에 누워있으려니.. 얼마 전 김민규가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리로 밀려들어왔다.
권순영 걔, 너 질렸다고 말하고 다녀- 무심하게 뱉던 말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녹아 있었다.
순영이가 변하기 시작한 즈음, 아침에 잠에 취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속상할 즈음이었다.
운동부 애들은 다들 걔한테 너랑 언제 헤어지냐고- 야 듣고 있냐- 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에이, 잠깐 그러는 거겠지. 하고 말았지만... 순영이는...
끝 없는 의심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전, 민규로부터 문자가 왔다. 다행이다.
[권순영 어떤 여자애랑 둘이서 룸카페 들어갔다. 아주 깨가 쏟아지던데? 그만 포기해라 김여주. 마음 떠났어 걔] - 밍구 20:32
다행이 아니었다.
이건 재앙이었다. 너라는 별에 의해 살아가는 나에게 내린 재앙.
김민규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언제 어디서 누구랑 권순영 확실해? 걔 친척들이랑 어디 간댔어] - 20:33
[권순영 맞아 항상 입는거 검정색 옷 입고 있었어 스쳐지나듯 봐서 자세힌 모르겠고 직접 물어봐봐] - 밍구 20:33
[(사진)] - 밍구 20:34
[곰ㅏ워] - 20:34
[들어가는거 찍긴 했는데 얼굴은 안보인다] - 밍구 20:35
나에게는 더이상 보여주지 않는 밝은 미소.
손이 벌벌 떨렸지만, 오타가 난무했지만, 일일히 고쳐가며 겨우 순영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순영아 너 지금 친척들이랑 있어?] - 20:37
믿기 싫지만, 답장이 늦는다.
김여주 네가 기다리면 안되잖아- 하고 자고 있지만 않다면 항상 1분 안에 답장을 주겠다던 권순영인데.
손톱을 물어뜯고 한창 초조해 하고 있을 때, 반가운, 아니 어쩌면 영원히 울리지 않길 바란 알람음 소리가 귀에 닿았다.
[어 친척집] - 쑤녕♥ 20:52
[그래? 아니.. 누가 너 시내 근처에서 봤대서] - 20:53
[근처 어디서 봤대] - 쑤녕♥ 20:53
[아니 그건 됐고... 혹시 영상통화돼?] - 20:53
[왜그러냐 너 나 의심해?] - 쑤녕♥ 20:54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 20:54
[내가 걸게 기다리고있어] - 쑤녕♥ 20:57
혹시 순영이의 마음이 상할까봐 걱정하며 말했는데, 역시 화가난 것 같았다. 영상통화는 아무래도 너무 집착하는 여자친구 같잖아.
그래도 순영이가 영상통화까지 하겠다는데, 분명 김민규가 잘못 본 걸거다.
3분 뒤, 벨이 울렸다.
순영이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김여주. 됐어?]
"어... 응! 조용한데 어디야?"
[.....네 목소리 잘 들으려고 화장실로 왔어]
"아 뭐야 진짜...."
[왜. 설레냐?]
"응... 너 너무 오래 못 봤어."
[미안... 나 부르신다. 끊자.]
"응! 빠빠!"
애교섞인 인사에 순영이가 피식 웃고, 핸드폰을 얼굴에서 조금 떨어뜨리곤 한손을 들어 화면에 대고 흔들었다.
전화를 끊기 전, 내가 아는 바로 이 순영이의 모습을 캡쳐했다.
[야 권순영 나랑 영통했어 네가 본 애 권순영 아닌가본데?] - 21:02
[(사진)] - 21:02
[봐봐] - 21:02
[어 진짜네 회색티네] - 밍구 21:03
[그치? 손 봐봐 오늘은 반지도 끼고있어] - 21:03
[그러게 이제 너 잘 챙겨주려나보다] - 밍구 21:03
[야] - 밍구 21:07
[잠시만] - 밍구 21:07
[쟤 옷에 저거 상표 아니야?] - 밍구 21:07
[문자 봐 김여주] - 밍구 21:08
[? 뭐가] - 21:09
생글생글 웃던 입꼬리가 추락했다.
[권순영 미친놈 옷 뒤집어입었잖아 쟤] - 밍구 21:09
혼자는 외롭다. 지금, 나는 혼자다.
별이라고 생각했던 너는, 그냥 야광별이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