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단 걸 알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때 만난 동아리 선배였다. 동아리 부장이었던 선배는 모두한테 친절했지만, 그 땐 나한테만 특별한 줄로만 알았다. 고백은 하지 않았다. 그냥 언제부턴가 날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 날 슬슬 피하고. 기분탓이겠지 하고 지내다가, 축제 준비로 모두 바쁜 와중에 동아리실에 나와 선배 둘만 있었을 때가 있었다.
'선배, 저기 이거 말이에요..'
'어? 아, 잠깐만.'
'..왜요?'
'오, 오지마.'
잔뜩 겁먹은 얼굴로 오지말라고 하는데, 어린 마음에 그 얼굴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 상황을 어떻게 넘겼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방에 쳐박혀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무서워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내가 너무 두려워서. 그렇게 내 첫사랑은 끝났다.
아직 어둑어둑한걸 보니 새벽인가 보다. 새벽에 깬건 오랜만이다. 매번 새벽 늦게 잠들어서 오후쯤에 깨어나었으니까. 어젠 창섭이 형을 기다리다 먼저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깼냐?"
"아, 형."
"나 이제 나간다."
"이렇게 일찍?"
"나도 집에 가서 옷갈아입고 회사가야지."
"어젠...어떻게 됐어?"
"음..글쎄다."
"뭐야, 형!"
아무런 말도 안해주고 그대로 나가버린 창섭이 형. 자기가 해결해준다 그래놓고선..빼꼼 베란다로 나가보니 아직 새벽이라 거리엔 아무도 없다. 창섭이 형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헝, 오늘도 올거야?!"
대답은 안하고 손만 흔든다. 들어가라는 손짓에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제법 아침 날씨가 쌀쌀하다.
***
8시다. 베란다 문턱에 쭈그려앉아 꽃집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왔다왔다.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더니 안에 넣어두었던 화분들을 문 앞으로 꺼내놓는다. 덮어놓은 천들을 걷어내고 흐트러진 잎들을 정리한다. 그제야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의 먼지를 툴툴 털며 나온다. 참 잘생겼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친 느낌이다. 에이, 내가 보일리가 없는데.
'오, 오지마.'
겁쟁이같아. 초라하고, 볼품없어. 그러니까 그냥 보고만 있을게요. 적정한 선은 여기까지다.
***
"퀘퀘한 냄새. 너 혹시 나 아침에 나간 이후로 계속 집에만 쳐박혀 있었냐?"
"왔어?"
"어우, 집에 홀애비 냄새가 진동을 하네."
"냄새나?"
이불을 끌어안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는데, 우리집이라 그런가 별 냄새 안나는데?
"원래 자기 냄새는 못맡아."
"나도 냄새나?"
"좀 씻고 살아라. 너 씻지도 않았지?"
하도 구박해대길래 결국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래도 창섭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왤케 힘이 없데. 괜히 미안해지게."
창섭은 사실 오늘 일훈을 꽃집으로 데려가 둘을 가둬두려고 했었다. 뭐 둘만 있다보면 그 구렁이 같은 놈이 어떻게든 잡아먹겠지 했다. 근데 그러기엔 지금 병아리 상태가 좀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저리 힘이 없는지. 게다가 알게모르게 페로몬같은 것도 푹푹 풍긴다. 나 오기 전에 울었나? 창섭은 자기가 생각한것 보다 일훈의 감정이 더 진지한 것 같아 자신의 행동이 조금 섣불렀나 생각이 들었다.
"형, 뭐해?"
"자, 여기 앉아봐."
"왜?"
"내가 어제 너의 그 초코우유와 얘기를 해본 결과."
"형, 잠깐만..나, 나 그냥 그만둘래."
"어?"
"나 그냥 이대로 있을래. 여기까지가 딱 적정선인 거 같아."
창섭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병아리가 이렇게 나오면 안돼지.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좋아 죽겠단 얼굴로 설레하던 정일훈은 어디가고, 갑자기 어두침침한 상태가 되었느냔 말이다.
"그럼 난 그냥 갈래."
"…."
"평생 여기서 홀애비 냄새나 풀풀 풍기면서, 어? 너 혼자 살아!"
"난 이제 더 못하겠어."
창섭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꽃집에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그 초코우유가 알아서 이리저리 구워삶아먹을텐데! 왜 지혼자 지레 겁먹고 꼬리말고 숨어있냔 말이야. 이젠 나도 몰라. 도와주려고 발벗고 나선거지. 이런 우중충한 과거 청산해주려고 나선게 아니라고.
"야! 정일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눈가가 뻘건게 이대로 구렁이한테 던져만 주면 완벽할텐데.
"육성재가 너 좋다해도 넌 육성재랑 안만날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아오, 내가 답답해서 그냥. 야, 지금 당장 만나러 가."
"아, 싫어. 싫어!"
"그럼 내가 여기로 불러? 니가 갈래, 내가 부를까. 니가 정해."
"안 만날래.."
"됐어, 부를거야."
핸드폰을 뺏으려는 일훈을 밀치고 창섭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일훈이 다리를 붙잡았다. 창섭은 깜짝 놀라 다리에 매달린 일훈을 떼어내려고 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펑펑 울어버리는 일훈때문에 창섭은 혼란스러웠다. 얘, 왜이러는 거야?
"일훈아, 일훈아. 정신차려. 너 왜그래?"
"안..안만날래애..형, 나 안 만날래.."
"그래,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너 왜 울고 그래."
***
곤히 잠든 일훈의 머리를 정돈해주던 창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창섭은 성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난데."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제 올건데요?]
"그게….좀 곤란하게 됐어."
[네?]
"그냥..아, 그냥 오늘은 좀 때가 아닌것 같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일훈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창섭은 베란다 문턱에 놓인 머그컵을 발견하고 쏟을까 싶어 컵을 치우려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컵을 주우려고 쭈구려 앉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앞쪽을 바라보자 한눈에 보이는 꽃집에 온 몸에 기운이 탁 풀리듯 주저앉아버렸다. 마침 꽃집에서 성재가 나와 걱정되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이 미련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