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집.(어쩌다 보니 연말 특집.)
- [방탄소년단/지민] 거북뎐 -
w. 그루잠.
1. 귀신 나오는 연못.
엘리아스 왕궁- 라테일 BGM
"공주님, 공주님. 어디 계시어요! 이번에 들키면 저 정말 모가지입니다. 제발 돌아오세요 공주님!"
공주가 사라진 지 이 각. 공주를 보필하는 나인 한 명과 같이 뛰어다닌다. 풀잎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인은 체격에 비해 체력이 좋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호위무사인 나보다 더 열심히 달린다. 가냘픈 몸집을 가진 풀잎은 치마를 끌어 쥐고 나와 함께 궁 안 복도를 쏘다닌다. 복잡한 미로식 내부에서의 숨바꼭질은 길을 알더라도 언제나 힘들다. 복도와 기둥 구조와 모양이 모두 똑같이 생겨 그림자마저 구분을 하기가 어렵다. 어디를 간들 그녀가 갈 곳은 거북궁 안 한정이지만 공주가 없다면 내가 모르는 차질이란 게 아주 심각하다 들었다. 이런 숨바꼭질의 당혹함은 일을 벌인 공주의 소유가 아니라 공주를 보필하는 자가 짊어진다. 이렇게 넓은 궁 내에서 어찌 찾나. 하지만 잃어버리지 않았다. 눈치를 챘으나 나인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의미 없는 소란스런 숨바꼭질 중, 옷자락 안에선 적국의 자객으로 공주가 변을 당할 경우를 대비한 붉은 칼이 흔들린다.
아까 전, 뛰다 멈춰 힘들어 하며 멈춰서선 고개를 젖혔는데 운 좋게 눈이 마주쳤다. 유유히 앉아있던 공주는 잠깐 당황한 눈치였다. 풀잎은 보지 못했는지 공주를 애타게 부르며 더 나아가 다른 복도의 모퉁이를 기웃거렸다. 숨어있던 곳은 미로식 복도 마루 위 천장 구조물 하나. 어떻게 기둥을 타고 올라갔는지 모르나 재주를 부렸는지 편안히 올라 앉아있었다. 공주는 침착하게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보며 곧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쉬이-. 바람 소리를 내는 공주를 본 나는 바로 고개를 내렸다. 아무 것도 못 본 듯 복도 끝에 시선 처릴 하여 그 자리에 멈췄다.
"마마. 이러시면 폐하께서 큰 경을 치십니다. 어서 제자리로 가시지요."
흘려 말한 말이 공주의 마음을 바꾸진 않겠지만 의무적으로 뱉었다. 그리고 나인 뒤를 따라 점점 발을 빨리 딛으며 자리를 떴다. 눈썹 휘날리게 달리는 나인의 뒤에 근접하여 쓴 웃음을 짓는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기름칠 나무 바닥에 미끄러질 듯 와당탕 뛰어다니는 두 명에 궁녀들이 자동으로 가장자리 벽으로 붙으며 충돌을 피했다. 또 또 놓쳤구나 라는 눈빛을 보내며. 풀잎은 몸을 잘 절제하지 못해 복도의 방향이 꺾이는 부분에서 몸으로 박치기를 했다. 황제의 귀에 다시 공주가 숨었다는 소리가 들어간다면 풀잎의 목숨이 위험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고통도 무릅쓰고 달리다 마지막 건물과의 마찰에 풀잎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녀에게 뛰어가 풀잎의 저고리 소매를 걷으니 팔에 새까만 멍이 물든 게 보기만 해도 뼈가 시렸다. 웅성거리는 궁녀들 무리가 눈에 띄었다.
"어서 어의를 불러와주시겠습니까."
멀찌감찌 멀어져 지켜보는 궁녀들이 출구로 향하는 복도 길로 바삐 나갔다. 벽에 기댄 풀잎이 색색 숨을 가쁘게 쉬는데 불안한 호흡이 멈추지 않았다. 더욱 아픈 곳이 있는지 몸 곳곳을 탐색하다 버선에 박혀있는 나무껍질을 만졌다. 풀잎의 버선에서 피가 번진다. 마루바닥을 잘못 밟았구나. 어의는 올 기미도 안 보이고. 손 대면 더 상처가 커질까 방치하여 풀잎의 안색만 살폈다. 풀잎은 고개를 저었다.
"적호님…. 저 대신 공주님 좀 찾아주세요."
이 와중에 공주를 찾는 풀잎의 부탁.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풀잎의 지친 눈이 나를 따라 올라갔다. 풀잎을 내려다보며 공주가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 멀리왔다 싶어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공주님은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을 해. 못이라도 밟았더라면 결코 무사하지 못 했을 거야."
그리고 공주님은 아까 내가 늦던 구간 쪽 천장에 계셨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난 풀잎은 박힌 나무껍질을 거침없이 뽑아냈다. 피가 튀었다. 급히 온 길을 뒤돌아서 뛰어가는 풀잎이 작아보였다. 복도에 뿌려진 피가 나무에 스며들었다. 뒤늦게 온 어의와 궁녀들. 그들의 행동이 느림에 호통을 치지 않았다. 풀잎을 위해 온 사람들을 허무하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나만 잘못한 일이다.
"…죄송합니다."
수근대는 그들은 나를 흘끔 보곤 순식간에 자리를 파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곳엔 내 위치란 거슬리는 냄새와 같다. 한 곳에 오랫동안 악취가 계속 되면 사람들은 맡아지지 않는 듯이 스쳐 지나간다. 나의 존재가 녹에 닿은 처음, 그 당시는 국제적인 눈엣가시 못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이 지났다. 더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내가 없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만큼 난 필요 없다. 이젠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고 싶지 않으니 됐다. 어느새 아무도 눈치 주지 않고 혼자 남겨진 시간. 거북궁의 어느 복도에 홀로 남겨져 사람없는 복도를 유유자적 걸었다.
나는 녹의 공주의 호위무사. 조국이자 적국의 왕의 어린 핏덩이었던 나는 팔려왔다. 녹의 나라로. 서로를 집어삼킬려고 했던 전쟁에 패한 홍의 나라. 붉은 나라들 중 제일 힘이 센 나라인 홍의 나라가 패하자 모든 붉은 나라의 깃발이 녹색으로 바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홍의 나라가 삼켜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는 인질로 나를 팔아서 얻은 수치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공주란 가격에 팔려간 인질이다. 다시는 평화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함께 보내진 포대기 안 아기. 그 아기는 누군가의 칼을 안고 있었다. 붉은 장도. 나를 안고 보내주지 않으려는 한 소년이 화를 내며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했었다. 결국 빼앗긴 포대기에 소년은 자신의 큰 칼을 아무 것도 모르는 생명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 이름은 정국이다! 네 오라버니! 기억해 雪零 설령아, 꼭 널 데리러 가겠어!"
녹의 나라 국경선에 나를 실은 붉은 꽃가마의 바퀴가 닿자 비난 세례가 쏟아졌다. 돌이 던져지고 부서진 가마 안으로 하나가 들어왔다. 그것이 내 이마를 내리쳤고 흉터가 남았다. 이마 오른쪽에 명예잃은 공주를 낙인시키는 흉터가 보기 싫었다.
녹의 나라 사람들은 나를 홍의 나라의 불길한 씨앗이라며 붉은 여우라고 불렀다. 이름이 없었던 나는 '적호'라고 불리게 된 계기. 지독하게 훈련받아 공주의 미천한 호위무사가 되었다. 여자이기를 강제로 포기하게 된 나는 녹의 나라 기술로 자궁을 들어냈다. 그래서 거추장거리는 일 없이 나는 칼만 잡을 수 있게 됐다. 몸 곳곳에는 여자일 수 없게 만든 고문의 흔적들이 허다했다. 그리고 불과 쇠가 녹아 만들어진 낙인들이 가슴살을 태웠다. 심장부근에는 綠(푸를 녹)자가 가득히.
공주의 아비이자 녹의 왕인 남자는 홍의 나라에서 출생된 내 살가죽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녹을 위해 모든 걸 바치도록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내 전부는 공주를 지키는 일이 되버리는. 그런 바라지도 않은 일이 내 손에 녹아붙어 녹을 지키도록 했다.
근래에 공주가 자신의 위치를 도피하는 일이 더 빈번하게 늘어났다. 곧 황제의 뒤를 이어 황녀가 될 여자는 그녀는 패배한 홍의 나라의 공주와 다르다. 내 나이 이십 이 세, 그녀도 스무 둘. 녹의 나라에 딱 한 번 눈이 내리는 날, 그녀는 왕위 계승식이 치룬다고 들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녹의 황제로 잠시 휴전을 누렸으나 녹의 공주가 뒤를 잇는다면 내 조국, 홍의 나라와 또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고 한다. 녹의 나라의 공주가 완벽히 홍의 나라의 불빛을 꺼트리고 녹색이 온 나라를 덮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릴 적에도 보지 못한 불꽃을 다시 볼 수 없다.
그녀는 태어남과 동시에 홍의 나라에게 버거움이 되었다. 오랫동안 신성시 여겨졌던 녹의 나라의 보물, '거북궁'은 몇 백 년를 걸쳐, 세상에 난 내 주인의 거처가 되었다. 그녀가 태어남으로써 나는 할 일이 생겼다. 덕분에 녹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줄었다. 공주가 자라며 거북궁을 나가는 일도 줄었고. 내가 하는 일이 공주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게 주된 것. 어릴 때부터 녹의 사람들에게 빌어먹을 짓만 당하다 이건 약과였다. 차라리 내게 무관심을 던져줘서 감사히 묵묵히 받아낸다. 공주가 아무리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다. 경거망동, 호들갑 따위 내겐 사치다. 혹시나 감이 안 좋으면 모를까, 붉은 칼날을 빛낼 일은 거의 없었다.
큰 사건 없이 지내면서 무료함을 지니고 주체를 잃었다. 내가 누구고 뭘 위해 살아가는지 차차 호위무사라는 글자가 머리 속에서 옅어졌다.
나는 정말 홍의 나라의 불길한 씨앗인가, 아니면 녹의 나라 공주를 지키는 호위무사인가. 나는 홍의 나라의 부흥을 들었지만 녹의 승리를 바라는지 홍의 승리를 바라는지 아리까리하다. 나는 뭘 위해서 살아가는 걸까.
공주가 살아가는 시간만큼 죽어가는 내게 어느날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옛날 공주를 위해 호위무사로 키워지던 나. 13살에 잃어버린 공주를 찾으러 다녔다. 풀잎이 아닌 -그 때 공주를 맡았던- 한 나인이 뛰어다니다 부딪힌 벽. 나는 몰래 '禁池'란 문구를 발견했다. 그녀는 끼익, 나무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못들었는지 어물쩡 일어나 뜀발질을 했다. 한 발짝 물러서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원위치시켰다. 주위를 둘러보자 복도를 다니는 궁녀들이 너무 많아 단독 행동은 물렀다. 문 뒤로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죽였다.
그 이후로 공주 뒤를 그림자처럼 붙고 칼을 쥐느라 문을 잊은 나는 공주가 빈 시간을 쥐어줄 때마다 기억을 되살려 걸어간다. 그리고 풀잎이 공주를 찾아가고 나 홀로 남은 시간. 지금 나는 걸어간다.
'禁池'이라고 새겨진 비밀스러운 문으로 향하는 복도로.
언제부턴가 시간만 나면 이 앞으로 서성이게 되었다. 소문을 듣고 나서 더욱 더 그런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거북궁에 궁녀들 사이에서 감도는 소문은 벽을 두드리면 안이 텅 빈 소리가 난다는 괴담이다. 쑥덕이던 소리는 내가 지나가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물, 혹은 귀신이 연못에 빠뜨린다고 하는 괴담 하나와 그 영물이 죽으면 녹의 나라가 망한다는 말를 끝으로.
벽처럼 위장된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열진 못한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긴장하는 설렘이 가득 심장을 채워서. 정교하게 궁의 벽처럼 위장된 하나의 문 한 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밀다가 마는게 전부. 禁池라는 한자의 뜻은 모른다. 글자가 아닌 칼을 배워서. 사람들이 위험하다고만 떠드는 곳을 내가 찾게 되었다. 혹하는 소원수령이란 말에 다짜고짜 찾아온 나는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소원을 이뤄준다면, 어느 걸 말할까.
홍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 나를 망하게 만든 홍의 나라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 녹의 나라의 멸망? 고생하며 살아온 나를 모든 나라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는 것? 아니, 모든 게 싫으니 날 아프지 않게 죽여달라는 것?
소원을 정하지 못했다.
"더러운 손이 어디에 닿는 것이냐!"
머뭇거리다 갑자기 멀리서 들린 공주의 찢어지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문을 열어버렸다. 도둑이 제 발 저려 놀랐나. 열린 문 안으로 한 정원이 보였다. 누가 보고 궁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봐 얼른 문턱을 넘고 문을 닫았다. 손목에 맥박이 빠르게 뛰는게 느껴졌다. 허억, 헉. 열지 못했던 禁池의 문을 기여코 열었다. 부드러운 자갈이 깔린 정원. 거북궁 안에 숨겨진 정원. 그안에 연못 하나가 적당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공주의 방만한 정원의 주위는 돌로 꿰찼다. 모래자갈이 깔린 연못 가장자리는 작은 돌로. 내가 들어옴 동시에 연못의 영롱한 물이 일렁였다. 귀신의 연못, 혹은 영물의 연못. 어둡지도 않고 해질녘 이후 깔리는 남색 어둠을 정원이 머금었다. 연못의 물이 산호색으로 빛나며 어둠을 밝히는 듯 하늘빛이 주위의 돌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달콤한 소리에 매료된 나는 조금씩 발걸음을 이뤘다. 부드러운 모래 소리가 신발 밑으로 갈렸다. 안개가 옅게 깔린 연못에 가까이 다가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어, 어…? 거, 거북이?"
자라 크기의 거북이가 얕은 물로 올라와 상온에 고개를 내밀었다. 오목조목 표정을 찡그리는 거북이. 그리고 말을 했다. …말을 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들어왔나?"
"아…."
"소원을 이뤄준다는 그딴 거 없다. 난 그 누구랑도 대화하지 않아. 어리석은 짓 말고 돌아가."
거두절미하고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대화를 끊었다. 나를 외면하고 고개를 담구는 거북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 앞에 진실에 충실한다. 적대감을 보이는 거북이. 소원을 이뤄주는 영물이 거북이? 하지만 소원을 이뤄주지 않는다는데 소문은 소문인가. 갑자기 거북이가 사라지려고 해 더듬거리며 말을 급히 뱉었다. 이대로 가기엔 내 설렘이 아무짝도 쓸모 없어지고 아쉬웠다. 무슨 정신머리로 뱉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될 듯한 느낌에 붙잡았다.
"저, 저기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가라니까."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물 밖으로 고개를 빼낸 거북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문으로 가득찬 호박색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바동거리는 초록색 다리에 눈길이 갔다가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아, 거북님이 알고 있는 모든 것.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왜."
"솔직히 말하면, 소원만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당신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거북이…?"
정적. 말을 막힘없이 툭툭 뱉던 거북이는 입을 떼려다 말다, 느리게 뻐끔거렸다. 혹시 너 제정신이니? 어이는 물론 없어 그저 당혹스러운 얼굴. 입을 뻥긋거리다 꾹 다물었다. 어느새 연못에 빠질듯 가까이 몸을 기운 나는 거북이와 대면을 하고 있다. 낮춘 눈높이래도 내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봤다. 오래된 달리기로 땀에 적셔진 앞머리에 이마가 조금 들어났다. 한 쪽 무릎 꿇고 거북이와 눈을 맞추고 있자 거북이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러자 거북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 앞에 흑장미같이 오묘한 색의 도포가 보였다.
차가운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연못에 내린 뿌연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긴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차가운 손. 이어서 볼에 닿는 것이 턱으로 사르르 내려갔다.
주황색 머리의 남자. 흑장미색 얇은 도포를 입은 남자가 내 고개를 들어올리고 눈을 맞췄다. 내려다보는 자의 눈이 갈색이었다. 멍청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 뻥긋거렸던 입술을 열었다.
"흉터다."
꿈인가 생시인가. 놀라운 감촉에 그 손 위로 내 손을 얹자 냉기가 손바닥에 퍼졌다. 거북이는 파충류다. 피가 찬. 내 열기가 거북이에게 전해졌는지. 거북이는 자신도 충동적 행동이었는가 내 살에서 슬며시 손을 거두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온기다라고 중얼거리는 거북이는 뒷걸음쳤다. 파리한 안색. 출렁이는 연못. 물기가 남은 볼에 남자의 흔적이…. 이마의 흉터를 만진 손이 실제인지 확인하려 손을 뻗자 그 하얀 손에 녹색 껍질이 덮이더니 그는 거북이로 변했다. 아직 경계심은 여전한지 사람의 모습을 감췄다. 눈알을 굴리던 거북이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한듯 내뱉었다. 얼토당토 말에 씨도 없으며 갑자기 얘기를 하자는 것도 어이없지만, 나야 할 건 없으니까.
"밤에 날 찾아와. 공주가 잠자는 시각에."
살랑이는 물결을 타고 연못 안으로 몸을 숨긴 거북이. 아까 그 남자는 거북이. 녹의 나라의 영물인 그 남자에게도 나와 같이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마의 흉터를 손으로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낯선 이의 손이 닿은 흉터는 없어졌다.
2. 각인.
이누야샤 ost- 시대를 초월한 마음
드륵, 득. 금지禁池 문 안 정원을 처음 다녀온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거북궁 맨 안쪽에 있는 공주의 방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 열린 창문. 누군가 공주의 방으로 잠입했다. 낯선 숨소리에 낌새를 챘다. 붉은 장도의 칼날을 달빛에 반짝이며 꺼낸다. 넓은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 공주 곁에 붉은 도복을 입은 남자. 단도를 들고 목에 대었다. 조용히 뒷덜미에 칼을 가져다대자 공주의 목을 베려는 행동을 멈췄다. 녹의 사람들 모두 달가워하지 않는 방문자. 홍의 나라의 사람이다.
"문안 인사를 섬뜩하게 하는군요. 내일 아침에 정식으로 공주님을 뵙지 말입니다."
"설령님. 전 녹의 공주를 보러온 것이 아닙니다."
"뉘신데 남의 없는 이름을 부릅니까."
단도를 침대보 위에 올려둔 남자는 항복의 의사표시를 했다. 깨지 않은 공주는 잠자리를 뒤척였다. 그는 품에서 접힌 흰 편지를 꺼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휙 뺏어들고 구겨쥐었다. 칼날을 세워 남자를 창문으로 몰았다. 달빛은 여전히 검은 구름에 얽매이지 않고 거북궁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공주를 죽일 목적은 아니었는지 남자가 쥐었던 칼은 무뎌있었다. 한자로 쓰여진 편지는 내가 읽을 수 없었다. 나지막히 들리는 남자의 저음에 목 뒤로 베이기 직전까지 날을 밀어붙혔다.
"세자께서 공주님에게 보내신 올빼미입니다. 雪零 설령님을 곧 찾으러 올 것이라는 전달을 하러 왔습니다."
"누가 설령입니까. 누가 공주이며 누가 홍의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들이 버린 사람 여기서 녹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나는 적호입니다. 버림받은 불꽃의 씨앗일 뿐."
"공주님. 정국대군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날이 오면 한 번만이라도 알현해주시지요."
"공주는 이미 죽은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만. 칼을 피하지 않을거라면 이대로 베어버리겠습니다."
칼을 피해 재빠르게 창문틀로 올라선 남자는 하관을 가린 붉은 수건을 내렸다. 익숙한 목소리라 좀 더 독한 말을 내지 못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답게 그는 나와 인연이 있었다. 녹의 나라로 끌려간 핏덩이를 22년간 꾸준히 찾아온 남자, 김남준. 내 오라버니라는 작자의 하수인이라고 했다. 둥근 얼굴형에 두터운 입술. 달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어둡지만 알 수 있었다.
"설령님. 어제 황제 폐하께서 이승을 뜨셨습니다. 폐하께서 공주님에 대한 근심을 끝으로 말입니다."
남준은 아픈 곳을 찔렀다. 나의 아비가 천국의 낙원으로 돌아갔다. 아비 슬하에서 어리광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그의 손 한 번 잡지 못했는데. 내 황제 폐하는 팔려간 딸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셨나. 그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였는 듯 뛰어내렸다. 허무하게 허공을 벤 칼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손에 쥐어진건 얼굴도 보지못한 혈연의 편지.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한다. 소매안으로 넣은 편지는 읽혀지지 않았다. 칼은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녹색의 땅에 다다른 남준이 창가로 얼굴을 내민 나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거두고 창문에서 멀어졌다.
"저… 적호님?"
옷자락이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풀잎에 화들짝 뒤를 돌아봤다. 초주검이 된 마냥 얼굴색이 어두우십니다. 내게 발 빠르게 다가와 식은땀을 닦아주는 풀잎의 손을 잡았다. 흉터가 아문 곳을 스친 느낌. 민감한 곳. 얼굴이 굳어 도움의 손길을 내쳤다. 항상 공주님 침대 바로 옆 바닥에서 자던 풀잎이 보이지 않았던 걸 눈치채지 못 했다.
"공주님 주무신다. 어서자."
"이런 늦은 시각에 어찌 달빛을 쬐시고 서계신 겁니까?"
"남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하라 했지. 혹사 당하는 네 몸 생각해. 얼른 나아야 될 거 아니냐. 내일은 더 힘들 거야. 아까 공주님께서 손길을 거부하시는 소릴 들었다."
듣고 계셨군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는 풀잎이 아파보였다. 어물쩡 풀잎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공주의 침대 밑에 앉아 잠을 청하려다 옷깃이 잡혔다. 풀잎의 강단 있는 손. 이게 뭐냐는 듯 돌아보자 어두운 풀잎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다 봤습니다."
"무엇을."
"홍의 남자와 대화하던 적호님을요. 자지 않고 적호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일어나는 입술. 침묵을 가졌다. 홍의 남자라…. 녹의 나라에선 붉은 것이 금지되었다. 하물며 홍의 남자라니 반역 비스무리 몰아가도 나는 어쩔 수 없다. 풀잎의 한 마디에 달렸다. 내 생사가.
"고해. 살아도 산 몸이 아니니 상관없다."
"적호님…."
"날이 밝으면 감옥에 넣어. 고작 여우 한 마리로 조용한 새벽이 뒤집어지는 꼴 보기 싫거든."
내 말을 끝으로 물기어린 풀잎의 눈에서 또르르 이슬이 내렸다. 울먹이던 풀잎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내 허리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나같은 거 없어도 나라는 잘 돌아갈 거다. 두 나라 모두 아무렇지 않을거야. 나는 풀잎의 등을 쓰다듬기만 했다. 공주님 깨어나실라. 쉬이. 눈물로 세수한 풀잎이 나를 올려다 보며 꺽꺽거렸다.
"적호님 사라지는 거 싫어요. 난 적호님 좋단 말이에요.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불쌍한 적호님 어떡해…. 도와드릴 게 없어서 미안해요."
한참을 '불쌍한 적호님'을 외쳐대는 풀잎. 내 신세를 네가 대신 다 울어주는구나. 밤새도록 울던 풀잎이 쓰러져 공주님 옆으로 데리고 와 재웠다. 푸른 새벽빛이 공주의 방을 채운다. 벌써 날이 새었다. 풀잎은 말하지 못할것이다. 어린 것이 남의 목숨을 쥐고 꺾을 용기조차 없다. 벽에 기대 앉은 나는 눈을 감았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눈물로 적셔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살아 생전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늦게서야 알게 된 아버지의 죽음에 속눈썹이 젖어들어갔다. 이제 저는 남은 여생을 허무하게 보내지 않으렵니다. 딸을 팔아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그냥은 죽지 않겠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생을 마감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늦은 밤, 거북이를 찾아간다. 공주가 잠자는 시각에.
오늘도 편치 않은 숨바꼭질이 시작되었고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 되었다. 풀잎에게 잡혀온 공주는 뾰루퉁한 입을 내밀고 방으로 돌아와 앉았다. 상에 쌓여진 노란 책표지들이 미웠는지 다 엎어버린다. 이제 풀잎이 공주를 붙잡고 놓지 않을 것이다. 홍의 올빼미가 다녀간 이후로 강화된 거북궁 방어 군사들. 나같은 건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질이라는 족쇄를 벗어날 수 없는. 공주와 달리는 숨바꼭질을 하는 도중 복잡한 곳에서 禁池의 문을 보았다. 미로형식으로 짜여진 거북궁 안에 연못이 있다. 사람으로 변하는 거북이가 있는. 호박색 눈동자와 주황색 머리카락이 보고싶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깨끗해보이는지. 맑은 눈이 사람들과 다르다. 거북이를 만나러 갈 시각인 밤을 기다린다. 해가 떠서 녹을 비출 때는 내가 죽어있는 시간.
어두커니 지나가는 궁녀만 구경하고 공주의 방문 앞에 서있다. 동상처럼 있던 중 안에서 공주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공주의 앞에 무릎꿇고 앉았다. 검은색 호위무사 복장 옆 붉은 장도가 빛난다. 검을 힐끔 본 공주는 제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풀잎은 공주의 옆에 앉아 불안한 눈빛으로 날 보고있다.
"어제 어딜 쏘다니다 왔지."
"잠시 한 궁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늦었사옵니다."
거짓말.
"…그래?"
의심의 눈초리. 흔들림 하나 보여주지 않고 눈을 내리고있자 공주는 의심쩍음을 거두었다. 사륵.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베었다.
"어제 밤이 소란스럽더구나."
"홍의 자객이 공주님 잠자리를 시원치 않게 해드렸습니다. 송구합니다."
"미천한 붉은 놈들. 내 목에 흠집을 내다니. 너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던 게야!"
책이 내 얼굴에 정통으로 던져졌다. 맞은 코뼈가 종이에 베여 사선의 금이 났다. 주르륵, 흐르는 피가 코볼을 타고 떨어진다. 툭툭. 옥체에 흠이 난 공주는 씩씩거렸다. 초록빛이 감도는 새까만 검정 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몇 머리가닥을 곱게 땋아 파초선 모양으로 머리 위에 얹었다. 나팔꽃의 보랏빛이 담긴 빛나는 여자의 비단 저고리. 고운 손으로 던진 낡은 책이 나보다 훨씬 고와보였다. 희고 깃털같이 부드러운 손. 반대로 나는 불에 짓겨져 타버린 긴 생머리 머리카락. 숯색깔에 붉은 끼가 돌았다. 붉은 적삼고리 위로 색이 바랜 검은 두루마기. 검붉은 새끼실을 꼬아 허리엔 핏빛을 띄는 장도. 그녀와는 나와 다른 꽃길을 걸으면서 불만이 많았다. 화가 이만치 난 공주의 목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어제 남준이 칼을 데었던 공주의 목에 一자로 붉은 딱지. 내 불찰이었다.
자신의 몸을 날달걀처럼 소중히 여기는 공주는 상처 하나에도 민감했다. 내 얼굴에 상처를 낸 공주는 점차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안절부절 하던 풀잎은 공주의 치마에 주름이 가지 않게 조심히 정리했다. 공주는 많고 많은 나전칠기 수랍장들 중 하나를 열어 내 앞으로 한 연고를 던졌다. 호랑이 연고. 신선들도 얻기 어렵다는 만병통치약을 내게 던졌다. 없던 자존심에 흠집이 났다. 있을 법도 만무하지만 공주는 이렇게 내 위치를 자각시켰다.
"넌 이 나라에 올 때부터 홍의 나라 공주가 아니다. 거북궁의 주인은 나다. 넌 내 호위무사요, 노예. 풀잎과 다름없지. 내 옆을 비우지마라. 피를 보기 역하니 이만 물러나."
둥근 쇠로 된 연고를 꾹 쥐고 일어나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기 전 틈으로 보인 풀잎은 나를 걱정하는 얼굴로 보았다. 雪零祭 설령제-딱 한 번 눈이 내리는 날에 지내는 제사-가 다가올 수록 공주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설령제에 시행되는 식들이 거창했다. 공주의 성인식이자 황제의 자리로 오르는 직위식이 된다고 한다. 그로 파생된 화풀이에 자신도 놀랐겠지. 하지만 녹의 나라는 어린 공주에게 붉은 여우를 억압하길 바랐다. 승리한 녹의 나라가 홍의 자존심을 밟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렇게 모진 대우 받는 거, 한 두 번 아니 잖아. 괜찮아. 이건 새발의 피. 종이에 베인 거 하나라면 괜찮다. 무의식적으로 문 입술이 갈라져 피를 보았다. 닫힌 방문 앞에 서서 연고를 쥔 손바닥 살이 구겨져라 쥐었다. 운명이야.
밤이 되었다. 소동이 끝나고 거북궁의 모든 불이 사그라들었다. 공주가 취침에 들어가 작은 숨소리가 깔렸다. 침대 옆 나뒹구는 풀잎의 잠꼬대 위로 얇은 이불을 덮었다. 곧 겨울이다. 쌀쌀한 날씨. 설령제가 다가온다. 그들이 깊은 잠에 들 때까지 벽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2각이 지난 후 자리를 슬그머니 일어섰다. 곱게 잠든 공주는 등을 돌려 잔다. 풀잎은 무아지경으로 입을 벌려서 자고 있었다. 옷도 못 갈아입고 풀잎에게는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 소리없이 여닫은 방문. 깜깜한 복도.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하여 禁池금지의 문으로 가는 길을 생각해냈다. 미로식 나무복도를 지나 도달한 곳. 삐그덕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앞에 섰다. 긴장과 또 다시 시작된 설렘. 거북이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가. 한 손에 꼭 쥔 연고와 허리에는 붉은 장도. 남은 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안개의 축축한 냄새와 향긋한 풀내. 반딧불이가 반짝이는 정원으로 몸을 넣고 문을 재빠르게 닫았다. 그러자 심장이 갈망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올 줄 알았어."
이리 와서 앉아. 연못 위 정원의 천장 쪽으로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을 쫓는 호박색 눈동자. 연못의 물에 떠있는 거북이의 다리가 느리게 살랑거렸다. 모래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 돌에 이끼가 가득낀 연못 가장자리쪽 돌벽에 기대 앉았다. 하루종일 서있었던 터라 몸이 굳어 힘들었다. 다리 한 쪽을 접고 굳은 허리가 접히는 고통을 삼켰다. 거북이는 그제서야 반딧불이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본다. 껌뻑이는 초록껍질에 호박색 눈이 축축해보였다. 사람을 홀리는 그 두 눈. 보석같았다. 공주의 방, 화장대에 있는 큰 보석 알맹이 같이. 아름답다. 거북이는 어제 흉터를 본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연못에서 기어나온 거북이가 안개를 남기고 사라졌다.
"어디서 또 다쳐온거야."
어제처럼 나타난 그 주홍머리의 남자. 은은한 안개와 함께. 내 콧등에 난 사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이 생생했다. 싸늘함. 손에 든 호랑이 연고가 굴러 연못으로 빠졌다. 한 없이 깊은 연못으로 빠져 둥근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보다 먼저, 지금 허리를 숙이고 살의 틈을 만지는 남자. 흑장미색 도포가 얇다. 검은 도포의 소매를 걷은 남자의 쇄골과 목젖이 보였다. 그리고 상처에 닿는 엄지 손가락. 네 손가락은 말은 채로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남자의 팔을 덥썩 잡았다. 내 흉터를 사라지게 한 장본인. 살이 새로 차는 느낌과 함께 차가운 살을 잡았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그는 주춤거렸다. 놓지 않는 내 손에 뜨뜻한 기운이 팔로 옮아갔다.
"……."
"거북이말고 이대로, 이 모습으로 있어주세요. "
"…왜."
"그건… 그냥…."
그냥이란 건 없어. 네 손 뜨거우니까 놓아. 눈을 피하는 남자는 내가 잡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본다. 인간인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안개가 짙어지려고 하기에 두 손으로 하얀 팔을 잡았다. 상대방의 심장소리가 크게 들리는 게 기분탓이랴. 약한 실랑이를 하는 남자의 몸에 내 온기가 옮겨지는 게 느껴졌다. 인상을 쓴 남자가 계속해서 눈맞춤을 피했다. 그래서 또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했다. 거동이 멈춰지고 나에게 호박색 눈동자를 보여줬다. 단호하게 짧은 말에 멋쩍었다.
"편안해서요."
"…뭐가?"
"이, 이 모습이 이야기하기에 편합니다."
"편안해? 이게?"
"아, 편하지는 않고…."
예뻐요.
굳은 얼굴의 남자는 내 손을 떼어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런가 본데, 나 오천 살 먹었거든. 아…. 어리석은 소리를 내자 유해진 눈동자가 흐릿하게 빛났다. 닿은 내 열기로 서리가 남자의 살에 올라와 얼었다. 얼음 알갱이들을 털어낸 남자는 얼굴이 '눈'색으로 희게 변했다. 하얀 얼굴이 냉기를 머금는다. 그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거북이일 때가 더 편해."
피곤해. 쉬어야겠어. 거북이로 변한 남자는 연못 안으로 몸을 담궜다. 갑자기 무언의 압박으로 날 쫓아보내기에 아무 진전이나 소득없이 정원을 나왔다. 하지만 거북이와 나 사이에 변한 게 느껴졌다. 몇 겹 짙어진 연민의 감정이.
短篇 거북뎐 一장 (完)
二장
3. 느슨해지다.
아이유- 비밀
거북이와의 만남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다음 밤에 오라는 거북이의 말에 도망치듯 나왔다. 두 번째는 거북이일때가 더 편하다고 한 거북이는 급격하게 피곤하니 잠에 들겠다하고. 이야기는 오늘부터 거북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설령제가 이레 남았다. 곧 평화가 깨지고 홍의 불꽃이 튀어오를 것이다. 녹의 공주는 그 전에 왕위에 올라 불씨를 완벽하게 덮어야했다. 공주는 어리다. 사실상 그녀의 손에 검이 쥐어지는게 아니고 내가 대신하여 전쟁을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공주의 개니까. 한창 바쁜 시기. 무사들은 다 거북궁을 지키고 나는 공주의 치장에 바쁜 궁녀들에 치여 복도로 쫓겨났다. 투명인간. 있을땐 없는 것 같다가 없으면 왜 없냐고 힘들게 하는 녹의 사람들에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홍의 나라 대군에게서 온 편지는 읽지 못해 없어 품고 다녔다. 할 일을 잃고 떠도는 나는 禁池금지의 문을 열었다. 낮시간에. 엄밀히 말하면… 거북이가 말한 시각을 어겼다.
추워진 정원. 이끼에 눈송이들이 피어났다. 연못에 떠있는 등딱지가 보인다. 거북이는 뒤를 돌았다. 마땅한 안식처를 찾는다며 찾아와버렸다. 정원을 나가려고 하자 소년스러움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내 발을 잡았다.
"왜 지금 왔어."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어. 네게 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막 생각났거든."
머쓱해져 조심스레 그의 옆에 무릎꿇고 앉았다. 밤과 달리 낮에는 정원의 천장이 뚫려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쌩한 공기가 살을 스친다. 금방이라도 눈송이가 떨어질 것만 같은 날씨. 거북궁에 잘 나가지 못해 이런 평화로움은 처음이다. 거북이는 호박색 눈에 흰 구름을 담았다. 마른 기침을 하는 그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나서 세월에 대한 주책부리는 거라 생각하란다.
"녹의 나라가 생기는 그 시초에 나는 살아있었어. 오천 년 전, 세상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지. 녹과 홍. 홍을 따르는 부족 세력은 붉은 계열의 이름으로. 녹의 나라의 공주는 왕위에 오르기 직전, 홍의 나라의 첫 번째 세자인 나와 길을 함께 했어. 그녀의 폐하와 나의 폐하는 앙숙. 절대 섞일 수 없었던 둘. 우리는 휴전식에서 처음 만났어. 그녀를 봤을 때 깨달았지. 아, 눈송이가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이 아닐까. 새하얀 피부, 까만 머리. 하얀 한복 풍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지. 그 이후로 홍의 나라에서 나와 그녀의 뒤를 따랐어. 운명을 거부하고 그 중립에 서길 바랐던 나.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거든. 녹의 공주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지. 만물을 사랑하듯 나를 대하는 것이 부드러웠을 뿐이야. 물어본다면 항상 웃음으로 답했어. 녹에 몸을 담궜던 그 사람은 녹의 편도, 홍의 편도 아니었지. 풀을 기하급수적으로 태우는건 불, 풀이 악한 마음을 먹고 공기를 모두 마시면 죽게되는 건 불. 공주는 녹도 불도 다 덮어버리는 하얀. 새하얀 백의 나라를 꿈꿨어. 세상에 하얀 눈으로 깔리는 거야. 잠잠한 전쟁을 재우는 눈이 가득했어. 나도 그랬지.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의 상상도 사랑했어. 하지만 홍의 나라와 녹의 나라에는 눈 한 송이도 내리지 않았지. 눈이란 건 전설 속 존재였어 그 당시엔. 지금도 그러한가?"
눈 내리기 직전의 구름들을 올려본 거북이는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축축하고 물의 냄새. 그를 따라 바람에 빠르게 후퇴하는 구름들을 눈으로 좇았다.
"설령제가 이레 남았어요. 녹의 나라에 딱 한 번 내립니다."
설령제라. 눈이 내리는 날이구나. 내게 들어야 될 말이 많아. 눈을 껌뻑이는 거북이가 작아보였다. 등껍질에 칼자국이 난 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산호색 연못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어두운 녹색의 긴 머리칼. 자연을 담은듯 아름다웠는데. 녹의 공주는 전쟁에서 불꽃이 사그러가는 걸 보고 고통스러워했어.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녀는 녹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졌지. 승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넘어 서로 창을 던지는 사람들에 자리에 누운 녹의 공주는 시들어갔어. 하얀 그녀가. 곧 홍의 나라가 몰락할 지경까지가자 그녀는 숨을 거두었지. 네게 웃음의 의미를 가르쳐주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 불과 풀이 손을 잡기 위해선 내가 필요했다고 해. 그래서 사랑 받으면서 항상 답을 피했지. 자연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한다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욕심 많고 포기할 방법을 모르는 순수한 여자. 결국 평화가 아닌 불균형 상태에 오자 녹의 공주는 적인 내 가슴에 칼을 박았지. 하지만 녹의 공주는 홍의 군사들에게 삶을 마감했어. 거북궁은, 녹의 첫 번째 공주의 궁이야. 이 곳 연못은 내가 항상 기도를 했던 곳. 다음 생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칼을 맞지 않도록 거북이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쉽게 사랑하지 않게, 피가 쉽사리 끓지 않는 차가운 피로. 나를 죽인 그녀를 미워하지만 여전히 사랑해서, 녹이나 불 둘 중에 하나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나는 내가 항상 빌었던 이 연못의 주인이 되었어. 발길이 금지된 연못에 숨어서 녹을 지키고 있었어. 내가 있는 한, 녹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누군가 내 등딱지를 뚫고 칼을 꽂지 않는 한, 난 죽지 않을거야. 내가 녹이 죽이도록 가만 두지 않을 거고.
"사실 난 잠 자고 있었어. 오천 년의 꿈에서 네가 깨운 셈이야. 아무도 이 곳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소문이 무성해도 이 정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마법을 부렸거든. 다가오지 않게금. 불의 나라가 녹의 나라를 항상 패했을 거야. 녹을 지키는 내가 있기에 큰 승을 이루기엔 어려웠겠지. 누구도 이곳에 대해 깊게 생각치 않았는데 너는 달라.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누군가 문을 덜컹이는 소리를 냈지만. 그게 너인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는 거북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못에서 기어나온 거북이가 내 옆에 앉았다. 연못 수면 위로 그려지는 그의 기억들. 그는 몰려오는 기억에 힘들어 했다. 벅찬 감정. 숨쉬기가 곤란해보이는 거북이가 종결엔 껍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떻게 위로해주어야 할 지 고민을 하다 손을 내밀었다. 찹찹한 껍질을 천천히 쓰담는 멍청한 짓. 그렇게 바람과 해를 느끼다 갑자기 거북이 껍질이 흔들렸다. 요동치는 껍질에서 쏘옥 살을 빼낸 거북이가 갑자기 흥분을 하며 나를 올려다 봤다. 영롱한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맞아, 그랬었지!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백의 나라라는 곳이 있다구요?"
"존재해. 그런데 가질 못해. 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어. 백의 나라를 원하는 내게 신이 말했지.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난 아직도 그 예언을 이해할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녹을 사랑할 거니까."
시무룩해진 거북이의 눈꼬리가 처졌다. 껍질을 쓰다듬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가 처음부터 품은 건 불이 아닌 풀이었다. 녹의 공주. 녹의 공주의 본연의 성질은 풀. 불은 홍의 나라. 난 녹에 살면서 녹에 익숙해지고 녹의 편을 드니까 그 예언의 당사자는 내가 아닐까? 아닐 수도 있지만 생각한 걸 토대로 거북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 예언이 저한테 내려진 게 아닐까요? 전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듣고 연못에 최초로 들어온 사람이잖아요. 신님이 제가 찾아올 거라고 미래를 알고 말하셨다면, 그렇다면 제가 홍의 사람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뤄진단 소리이지 않을까요?"
눈이 커진 거북이가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오천 살 먹은 그가 조금 아기자기한게. 펑소리와 함께 남자가 나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어정쩡하게 자세를 취해서 처음으로 남의 등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이, 이렇게 하는거 맞나? 토닥임이 시작되고 몇 초 이후 어색해진 남자가 거북이로 돌아갔다. 방금 닿인 차가운 살이 거짓말같았다. 거북이는 우울해진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축 내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난 녹의 공주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이미 상처를 받았거든. 등껍질 위에 보여? 녹의 공주가 내게 감긴 흉터야. 사람이 남긴 상처가 너무 커서 믿고 마음에 담긴 힘들어. 내 흉터는 못 없애지만 다른 사람을 치료해줄 수 있어. 네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와줄게."
도와준다고 하는 거북이의 말에 번쩍 생각난 하나. 홍의 올빼미, 남준이 내게 준 정국 대군의 편지. 홍의 문양이 찍힌 편지를 거북이에게 내려줬다. 글자를 모르는게 부끄러워 말을 흘렸다. 저, 편지 좀 읽어주세요. 조그마한 앞다리로 편지지를 뒤적이는 거북이가 입을 벌리고 천천히 올려다본다. 설마하는 얼굴. 거북이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너 한문 읽을 줄 모르는구나."
"아니, 뭐… 누가 뭐랍니까. 그냥 읽어달라구요. 소리내서."
"네가 읽어. 편지에 꿀 발라놨어? 왜 네 손으로 펴서 못 읽어?"
"…도와주신다면서요."
그렇긴 그런데…. 꿍얼거리는 거북이가 붉은 도장이 찍힌 문양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편지지는 검붉은 먹으로 된 한자로 가득 채워져있었다. 흰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너 첩자냐고 물어보는 거북이의 말에 내가 도려 말을 흘렸다.
"평화교섭권과 인질이 교환되었어요. 22년 전에 홍의 나라가 패배했거든요."
"너는 누군데?"
거북이는 홍의 사람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딱 정의해서 말하지. 머뭇거리다 현 위치를 말했다.
"적호입니다. 현재 녹의 공주의 호위무사요."
"아니, 교환되기 전. 진짜 네가 누구냐고. 붉은 여우 말고. 네 진짜 이름."
그 말에 입을 다문 나를 올려다 본 거북이. 눈치도 빠르지, 내가 교환된 사람인 건 어떻게 알고. 내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편지를 읽었다. 끝까지 읽은 거북이는 종이 한 쪽을 발로 구겼다. 멍한 얼굴. 연못으로 던져진 편지가 물에 녹아들었다. 놀라 흐물거리는 종이를 거둘려고 하니 발로 내 손을 눌렀다. 아프지 않게. 처음 받아본 편지가 연못 밑으로 사라졌다. 아연질색된 내 마음이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포기한 기색을 보이자 굳센 표정으로 투명한 연못을 바라보는 거북이.
"네게 가르쳐줄게 많은 것 같다. 無知무지는 네 정신이 뺏겼다는 뜻과 같아."
"……."
"네가 제일 먼저 알아야 될 것.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내 이름은 朴智旻박지민이다."
거북이말고 지민. 거북이라 말고 박지민, 지민 등등 네가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 다만 오천 년 잔 거 빼고는 너보다 나이 한 살 많아. 어쨌거나 난 영물이니 예의는 지켜주도록. 네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찾아와. 밤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만남이 잦을 수록 좋을거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거든. 설령제가 이레남았다고 했나? 그 전에 어쩌면 우리 둘 다 행복할 길을 찾을 지도 몰라. 풀, 불.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 언젠가 편지의 내용을 가르쳐줄게. 그때까지 저 편지는 신경꺼. 다음에 오면 한문을 가르쳐줄게. 어려운 건 아니야. 네가 궁금해할 문자만 가르쳐줄거다. 그리고 너는 내게 네 얘기를 해줘야 해. 지금 갑자기 알고 싶어졌어.
경계가 어느 정도 풀리고 안일한 분위기. 첫만남보다 오는 말이 늘어났다. 단호한 거북이의 새하얀 웃음이 영 익숙치 않다. 거기다 처음으로 웃음을 보여준 거북이에 내가 어색해졌다. 거북이에서 소년의 밝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거북의 모습보다 사람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진정한 그의 모습이. 주홍 머리, 흑장미색 얇은 도포. 그리고 뚜렷한 호박색 눈동자. 잠시 숨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난 나는 禁池금지-이후 박지민이 가르쳐줬다. 금지된 연못이라고-의 문을 열기 전과 다른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설렘이 심장을 간질였다. 가까운 내 편이 생겼다. 순수하기도 하고 꿈꾸는 사람. 숨기는 건 많지만. 나도 그처럼 웃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거북이, 아니 지민…과 인연을 쌓게 될 것 같다.
연못가에 얇은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설령제가 얼마 남지 않은걸 보여주는 얼음이 야속하다. 이 곳에 있으면 붉은 장도를 꺼낼 일이 없어 슬프게도 행복했다. 물집이 잡힌 손바닥에 진물이 터져서.
-같은 시각, 홍의 나라.
"세자 저하. 녹의 나라에 무사히 다녀왔사옵니다."
"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어, 남준.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네. 설령은 잘 있던가?"
"그게…. 아시잖습니까. 망가지신 걸요. 설령 공주께 편지를 드렸으나 읽기 만무합니다. 글자를 모르시니까요."
의자에 앉아 껄껄 웃던 정국은 붉은 끼가 도는 칼을 뽑아 둥근 탁자 위에 쾅 꽂았다. 우지끈 나무가 쩍 갈라져서 나뭇바닥을 구른다. 펄럭인 검은 두루마기의 자락이 마치 검처럼. 만지면 베일 것 같았다. 인자함은 어디가고 정국의 눈에서 광기가 솓구쳤다. 검정 머리카락이 핏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설령이 녹의 나라에서 당한 것들 중 몇몇을 미친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읊었다. 그가 집착하고 사랑하는 누이의 상처를.
"나라간의 법도가 있거늘 패국의 인질에 손댄 것. 갓난 아기가 탄 가마에 돌팔매질을 한 것. 세상을 뜬 어미의 젖 제대로 만져보지 못한 핏덩이를 거꾸로 세워둔 것. 어린 아이를 사육장에 넣어 개들을 풀은 것. 공주에게 칼잡이를 시킨 것. 고운 아이에게 궁녀보다 못한 더러운 옷을 입힌 것. 입 안에 양잿물을 넣어 삼킬 뻔 한 것. 머리카락에 불을 붙혀 태워버린것. 억지로 가슴에 낙인으로 도배한 것. 등에 적호赤狐를 칼로 새긴 것. 그 어린 아이 아래로 미꾸라지들을 넣은 것. 몸 곳곳에 녹綠자를 새겨 먹물로 채운 것. 발톱과 손톱 모두 뽑은 것. 녹의 공주의 발을 핥게 만든 것. 아이를 문맹으로 만든 것. 그 년을 보호한다고 몸으로 칼을 받은 것. …그 아이 성인식에 자궁을 들어내 빈 살을 집은 것. 한 나라의 공주의 인생을 짓밟은 것."
내일 내 눈으로 모두 확인해야겠다. 진실이라면 풀뿌리들을 모조리 다 뽑아버리겠어.
붉은 방. 홍의 나라답게 빨간 것으로 가득찼다. 홍시 색 침대. 붉은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포도즙이 담긴 유리컵. 다만 깨진 유리. 탁자가 반동이가 나는 바람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능력한 홍의 나라의 주인, 폐하. 오늘 내일하다 돌아가셨다. 그럼으로 정국대군은 세자 책봉식을 뛰어넘고 새벽녘에 왕좌를 오른다. 설령 공주를 빼앗기고 이를 갈던 세자는 내일만을 기다려왔다. 패배한 나라로 녹의 발 밑으로 추락한 홍이라,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녹의 나라 공주 앞에 서야 한다. 녹의 왕도 목숨이 실 같다고 한다더군. 공주를 지키는 정국의 누이. 아비가 딸을 빼앗겼으니 찾으러갈 사람은 정국 밖에 없었다. 공주는 나라의 자존심. 그런 설령 공주는 고통에 젖어 갈 길을 잃고 개가 되었다. 그것도 적국의 공주의 개로. 살아 생전에 그 꼴이라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폐하는 설령의 이름을 곱씹다 숨을 훅 들이키셨다. 비참한 최후. 고개 숙여 손 뒤로 칼을 갈던 정국은 이제 짐승의 이빨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설령제가 다가온다. 그쪽에서 먼저 칼을 잡기 전에 선수를 쳐 동맥을 터뜨려주겠다. 전쟁의 폭약은 설령제의 중간에 발화될 예정. 녹의 공주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겠어.
"해가 하늘 중간에 걸리면 바로 출발할 것이다. 지금부터 준비하도록."
홍의 역대 위대한 왕이 될 정국의 명을 받았다. 정국이 어린 아기를 애써 떠올리며 화선지에 그리고 그리던 설령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다. 붉은 소년이 포대기를 빼앗긴 후 녹의 나라으로 거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아기에게 쥐어준 자신의 붉은 칼은 아이에게 칼잡이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라고 준 것이 지금 녹의 공주를 지키고 있으니 정국의 눈에 불이 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22년간 허리를 각도기처럼 굽혔으면 됐다. 피눈물을 삼키면서 홍의 나라를 지켜냈으면 됐다. 이제는 자존심을 되찾을 때다.
정국이 소년일 때부터 지켜본 나는 지금 그의 등이 눈에 띄게 넓어진 걸 알 수 있었다. 22년. 길었다. 나는 검은 망토를 쓰고 망령처럼 설령공주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굽신거리며 녹의 손에 쥐어준 공주에게 보내는 선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것들은 다 녹의 공주의 손아귀에 척척 들어갔다. 세월을 기다렸다. 고문장 밖에서 설령의 위험한 고함을 들으면서도 문고리를 열 수 없었다. 벽의 높은 창문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철봉을 잡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개들의 소리은 덤으로. 어떤 식으로 세뇌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은 자아를 잃었다. 정국의 방을 나가 아랫것들에게 준비를 단단히 시킨다. 오늘 새벽에 올릴 세자 책봉식과 왕위 세습식을 준비하러 길을 나섰다. 방 안에서 들리는 낮은 말소리가 붉은 빛을 띄었다.
"적호라고 했던가. 누가 감히 홍의 귀한 공주에게 불여우란 이름을 붙혀, 망할 것들이."
*
새벽이 끝나갈 때 쯤 돌아간 공주의 방. 곯아떨어진 풀잎이 오늘도 앞치마를 두르고 자고 있었다. 코 고는 소리. 심지어 녹의 공주까지 피곤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앞치마 끈을 풀어 몸 위로 이불을 살포시 덮어줬다. 네가 더 불쌍하다. 공주의 바로 옆에서 네가 고생하니. 입 벌리고 자는 풀잎. 아래에서 불빛이 창가로 올라왔다. 분주한 밖으로 내다보니 군사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자네, 알고 있는가? 내일 홍의 세자가 방문한다지?"
"성격이 포악하다니 조심하도록 하지. 전 홍의 황제와 달리 무시무시하다고 하는데. 아마 거북궁 경비가 강화될 것이네. 놈이 공주님과 거리를 좁히지 않도록 유의할 것이야."
"고럼고럼. 설령제가 코 앞인데 초 칠 수 없지."
창문에 달린 비단을 쳤다. 정국. 내 혈육의 이름. 그가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녹의 공주를 해치기 위해서? 황제 직위 이후 강대국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위해? 머리를 짚고 벽에 기대어 스르르 앉았다. 누워 자는 것도 가능치 않은 내게 복잡한 일이 덮쳐온다. 그를 마주하기 전 거북, 아니 지민을 보아야 한다. 그에게 이야기 해줄 것이 생각났다.
눈을 감고 있으니 풀잎의 갸냘픈 소리가 들렸다.
"적호님."
"소리가 컸나. 미안해. 늦었지?"
"어디에 갔다 오시는 겁니까."
피곤한 눈을 깜빡이는 풀잎이 잠에서 깨어났다. 나긋한 목소리에 미안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멀리 마주하는 풀잎의 눈 밑이 어두웠다. 이리저리 치였겠지. 공주의 성화도 견디고. 그녀도 나와 같은 노예. 손에 굳은 살이 박힌 게 내 고생길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았다. 어찌 위로해줄 방법이 없다. 안타깝게도 나를 넘어서 남을 치유해줄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민이 내게 쓰린 과거를 말해도 해주는 것은 그저 닿지 않은 손길.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눈은 미안함을 담고 있는데 정작 입은 아니었다. 더듬거리던 입이 주저하며 뱉었다. 힘없는 풀잎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미안하실 필요없어요."
"……풀잎아."
"예."
"내가 꿈을 꾸었는데 한 번 들어주겠느냐."
"읊어주세요. 가만히 듣겠습니다."
"나비가 나인건지, 내가 나비인건지. 꿈이 너무 생생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련."
"그러하지요."
입술을 축이던 나는 붉은 칼을 끌어안고 지민과 있었던 일을 두리뭉실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눈만 껌벅이는 풀잎. 진해진 눈 밑이 안쓰러워서 더이상 봐줄 수 없었다. 내가 나를 보살피지 못하고 괴롭히는데 너마저 괴롭힐 수 없었다.
"아니다. 자거라. 내일은 갈 길이 더 머니 조금이라도 더 자도록 해."
"적호님."
"왜 불러."
"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설령님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녹의 나라에선 적호. 이들의 눈에 가시가 되면 언제든지 죽어도 상관 없는 몸이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어딨다고 죄송하다고 해. 내 존재가 미안할 따름이야."
"적호님."
"또 왜 부르니."
"코에 상처가 사라지셨습니다. 호랑이 연고래도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데 말입니다. 흉터까지 사라지셨습니다. 요술을 부리셨습니까?"
풀잎의 말에 손을 대니 매끈한 살이 만져졌다. 지민. 지민의 손길이 닿은 살. 내 삶 한 가운데에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들어와 첨벙거린다. 호박색 눈동자와 꽃잎이 물든 그의 입술이 생각났다. 사람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부끄러운 작은 웃음이 나오자 어! 저 적호님 웃으시는 거 처음봅니다! 소리를 크게 낸 풀잎에 공주가 뒤척였다. 내일 또 혼이 나겠구나. 입을 스스로 막은 풀잎은 잠이 묻어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모든 걸 다 끌어안으려 하지마세요. 적호님께서 어딜 다녀오시는 지는 모르나 도와드리겠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쇤네지만 적호님을 항상 걱정하고 생각한답니다. 공주님께서 적호님 공백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 맘 편히 다녀오세요.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다면 제게 꼭 말해주셔야 합니다."
"풀잎아."
"전 괜찮습니다. 적호님은 너무 아프시잖아요. 저, 풀잎년보다 더 크시지만 건드린다면 으스러질 것만 같습니다."
내 애처로움을 알아주는 건 너뿐이다, 풀잎아. 죄책감이 일렁이며 그간 세월의 파동이 내 뼈에 타 시리게 했다. 남에게 짐을 옮겨준단 것은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움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며칠만 버텨줘. 이레만 버티면 모든게 끝나 있을 거야.
"고마워. 사람 대접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
"저같은 년을 사람 대접해주셨던 분이 설령공주님뿐이니까요."
빙그레 웃은 풀잎의 눈이 감겼다. 끝내 너는 나를 설령공주라고 불렀다. 그녀가 얕은 잠 말고 깊은 잠을 다녀왔으면 좋겠다. 힘들 거야. 나도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어서 다음 날에 만날 지민에게 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풀잎을. 내일 그 주홍 머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흑장미색 얇은 도포와 흰 팔. 날리는 주홍 머리에 하얀 얼굴, 호박색 촉촉한 눈동자. 웃기 전엔 차갑기만 했던 그가 웃으니 입술이 꽃잎색으로 물들었다. 송곳같이 창백한 피. 조금은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그가 내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으로 입꼬리를 어색함 없이 올렸다. 거북이가 내 마음에 발자국내면서 웃음이 한 송이 피었다. 사는 게 죽어가는 것이었던 내겐 큰 변화였다. 붉은 여우에게 웃음이란,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 연못에서 옮아온 어떤 씨앗이 웃음이란 잎을 피었다. 지민과의 만남이 도화선에 당겨진 작은 불씨일까 조금 기대해본다.
4. 지박령.
월하정인
날이 밝자마자 닭이 운다. 허나 수탉이 울자 화살을 쏘아 지붕 아래로 떨어뜨린다. 불길한 징조. 길하지 못한 수탉의 울음을 억제시킨 군사들이 손에 땀을 쥐었다. 날이 시작됨과 동시에 궁녀들이 들어와 공주와 풀잎을 깨웠다. 설령제가 엿새. 엿새 남았다. 거기다 오늘 홍의 나라 왕으로 즉위한 남자가 방문한다 했다. 소국이 대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러 오는 방문. 아직 그때까진 많이 시간이 남았다.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지만. 꼭두새벽부터 북적북적한 공주의 방. 공주의 싫은 소리가 시작되었다. 풀잎의 고생도 시작이고. 나는 이만 나의 존재를 은둔시킨다. 황후가 입을 옷을 가져다 나르는 궁녀들을 피해 공주의 방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니 공주의 방으로 오는 복도에 궁녀들로 가득 찼다. 장식품을 든 손, 분내나는 것을 든 손. 금색 실로 박힌 신이 든 나무 상자를 든 손. 힐끔 쳐다보곤 빈틈을 찾아가며 복잡한 곳을 빠져나왔다. 복잡한 거북궁 지리를 꿰고 있는 나는 뇌리에 박힌 방향을 따라 걸었다. 붉은 장도는 허리에 달려 끄덕거린다.
궁녀들 몇몇이 내 옆을 스치지만 홀린 듯이 점점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여기서 반 바퀴 돌고, 한 칸 더 가서 오른쪽 복도…. 禁池금지가 적혀있는 문은 벽의 방향이 꺾이는 부분에 있다. 역시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벽으로 위장된 문.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열었다. 주홍 머리, 호박색 눈동자, 흑장미색 얇은 도포를 기대하며.
기대는 순식간에 깨진다. 작은 거북이 등딱지가 보였다. 하얀 하늘. 바람이 매정하게 스쳐가는 등딱지. 저 멀리 투명한 연못 앞에 앉아서 물 위로 무얼 그리는 거북이. 작은 발이 슥슥 수묵담채화를 그리듯 움직였다. 하얀 물감이 닿는 면마다 연못에 퍼졌다.
네모난 것들이 땅 위에 서있다. 땅에 닿는 부분이 낡아서 조금 금간 듯. † 모양이 네모난 것들 위로 앉았다. 네모안에 또 작은 네모들이. 사람들이 네모난 것들 앞에 작게 그려져있다. 거북이가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푹 빠져서 연못물을 울렁거렸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긴 의자에 앉아 있다. 헐렁이는 흰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하얀 산으로 달려가 연을 날린다. 녹색과 홍색이 잘 어우려진 연을. 그러더니 하얀 동그라미가 땅으로 내린다. 만지면 뽀드득 거릴 눈이 내린다. 넓은 대지에 다른 네모난 것들이 정렬되어 눈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녹과 홍은 잠잠하게 눈에 녹아들었다. 낮은 산과 작은 마을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항구와 함께.
'내가 말했지?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지민이 어제 내게 말했던 백의 나라. 그가 보았던 백의 나라를 그린다. 그가 상처받을까봐 말하지 못했다. 녹과 홍만 존재하는 이 세계엔 눈의 나라는 없다고. 순수한 소년의 희망을 깨부수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거북이는 내가 온 걸 눈치채고 손을 연못에서 거두었다. 작아보이는 거북이의 모습은 언제나 등딱지에 박힌 흉터가 짠하게 만들었다. 그런 거북이와 네 번째 만남이다. 억지로 말도 안 되는 말을 붙여가며 잡은 인연. 거북이의 옆에 앉아 연못에 그려진 흔들거리는 흰 선들을 본다. 이런 나라가 있다면, 난 두 나라를 버리고 갈 수 있을까. 고개를 느리게 저은 나는 체념했다. 그 전에 이 나라는 없어. 바다와 항구는 전설에서만 내려오는 피사체일 뿐이다. 전쟁이 파다한 두 나라 사이에 평화로운 나라가 있을리 없잖아. 진작에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다리를 감싸고 앉아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거북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말을 잊었다.
"백, 눈의 나라야. 넌 허황된 소리라고 하겠지만 언젠가 가고 말거다."
"전 녹의 나라 사람이라서 홍을 품을 순 없어요."
"예언이 우리 둘 동시에 내려진 거라면 말이 다르지. 둘 중에 한 명만 해도 되지 않을까? 나도 녹의 공주만 사랑하니까."
그런가?
"내가 녹의 공주가 아닌 다른 홍을 품을 순 없지만 방도를 찾을 거야. 네가 날 도와주어야해."
"확실치 않은 것에 마음 쓰고 싶지 않아요."
"설령."
"적호입니다."
"왜 자꾸 너 자신을 피하지? 내가 알아보니, 설령, 이게 네 이름이다. 불여우가 그리도 좋으냐?"
투덜투덜대는 거북이가 고개를 내리저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종이뭉터기와, 먹을 머금은 붓 두 개가 나타났다. 거북이가 앞발로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돌돌 굴러오는 붓. 툴툴거리는 표정으로 발로 굴린 거북이. 그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면 내가 미쳤겠지. 정신을 차리고 종이와 붓을 잡았다. 보통 크기보다 작은 정사각형 종이를 요리조리 돌리던 거북이. "아, 바꿔도 똑같구나"라며 한탄하는 소년같은 목소리. 웃으면 마음 상해할까봐 입술을 꾹 눌렀다. 지민은 먼저 내 이름부터 가르쳐준다면서 미간을 좁히며 입으로 붓을 문다. 종이 면적 반을 올라타 끙끙거리며 雪설을 쓰는 거북이. 딱 종이 크기가 거북이 크기 같았다. 삐뚤빼뚤.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움직이는 거북이가 힘든지 한숨을 뱉었다.
"굳이 거북이인 모습으로 쓰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사람인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
"…예쁜데."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었는지 홱 째려보는 눈. 발음이 새는 말이 앙증맞았다.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그렇게 화를 내면 하나두 무섭지 않다. 고개를 돌린 덕분에 종이에 크게 한 획이 그여졌다. 그걸 본 거북이가 눈이 땡글해졌다. 괜찮아, 괜찮아. 자기 최면을 거는 거북이가 용케 한자를 쓰고 종이에서 물러났다. 잘 썼는데, 거북이의 검은 발자국이 온 데에 묻혀져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작은 발자국이 강아지 발자국처럼 콩콩. 고작 설雪자 하나 썼는데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거북이는 얼굴이 발개져 붓을 던졌다. 부끄러움에 익은 얼굴. 내가 웃음소리를 작게 내니 꾹 입을 닫고 종이를 화끈하게 찢어버린다. 종이 쪼가리들을 연못에 던진다.
"야! 때리쳐."
"거북님, 사실 자라죠? 거북이 치고 너무 작은데."
"아니거든? 거북이 맞거든?! 너, 내가 거북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자라라고 의심하는 것 앞에 덧붙여서 거북이보고 거북이라고 하자, 붓도 던지고 온몸으로 짜증을 내는 거북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분에 차 콩콩 뛰고 씩씩 거리는게 아주 장난감 같았다. 그는 앙증 맞았다. 한참 꾸욱 고민을 하던 거북이는 한숨을 깊게 뱉었다. 후... 진한 안개. 그리고 지민이 흑장미색 얇은 도포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렸다. 주홍 머리가 사르르 바람을 타고 얇게 날린다. 지민은 결국 인간으로 변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모습. 찬찬히 가까이서 보는 지민의 사람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답다. 옆모습에서 보니 분홍이 묻은 입술이 앞으로 조금 뾰루퉁하게 나와있었다. 오랜만에 하려니 잘 안 되네. 하얀 팔에 핏줄을 세우고 붓을 잡은 손. 호박색 눈동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경건한 마음을 다잡고 정성들여 쓰는 지민 옆, 나는 하얀 손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어젠 당신이 얘기해줬으니까 오늘은 제 차례네요."
"그래."
내가 입을 열었을 때부터 집중력이 날아갔는지 부진하는 붓. 느리게 그어지는 먹물에 종이에 살짝씩 틀을 벗어나 번진다. 그럼에도 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눈이 오는 날이었어요. 갓난 아기가 눈을 떴을 땐 어미도 아비도 아닌 한 소년의 얼굴을 봤죠. 해맑게 웃는 소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어요. 그 아기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알았어요. 어미가 세상을 뜬 걸요. 아비는 전쟁 중이었고 곧 전갈이 왔어요. 홍의 완패란 소식이. 녹색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를 둘러쌓았고 소년은 저를 놓지 않으려 울부짖었습니다. 붉은 비단 포대기를 뺏기자 급하게 어른들 사이를 파고 들어 아기의 몸 위로 붉은 장도를 올렸어요. 자신의 이름이 정국이라며 꼭 찾으러 오겠다는 울음소리와 함께 아기는 가마에 태워졌어요. 밖에선 묵직한 돌맹이들이 가마를 치는 소리. 가마 윗부분이 찢어져 들어온 돌맹이가 아기의 머리를 내리쳤어요. 붉은 피가 장도에 흐르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가마. 한 나라의 인질로써 존중받지 못하고 양껏 핍박을 받았네요. 그 돌맹이는 약과였습니다."
"그래서 네 이마에 흉터가 난 것이냐. 그 자들이 네게 몹쓸 짓을 했구나."
묵묵하게 처진 소리가 들리는 지민은 나를 보지 않고 무언갈 그리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쓰다만 雪설자는 어디가고 새 종이에 얇은 곡선이 그여졌다. 끄덕임이 거북이의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빠르게 흩어지는 구름들을 올려다봤다. 살이 얼 것 같은 얼음바람에 상한 검은 머리카락들이 날렸다. 주홍 머리가 흩어지며 지민의 하얀 목이 드러났다. 검은 흑장미색 도포 옷깃. 목선이 고왔다.
"자라면서 몸에 늘어나는 낙인 자국들이 옷 안으로 늘어났어요. 홍이 아닌 녹을 외치는 무서운 남자가 제 입에서 녹이란 단어가 나올 때까지 쇠를 녹이고. 멈추지 않는 고문질에 아이는 결국 녹을 입에 담았습니다. 어릴 때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무예를 강요받은 여자아이는 칼을 놓칠 때마다 손에 몽둥이질을 받아야 했죠. 손톱과 발톱을 뽑는 놈들도 보기 힘들었는지 눈을 가리고 뼈를 뽑아댔어요. 등에는 적호라는 칼자국, 몸에는 먹물로 채운 상처로 가득. 綠녹자. 뜨거운 물세례를 받기도 하고 칼을 내던졌을 때는 사육장에 가두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두컴컴한 곳에 가 하나가 아닌 여러가. 저를 향해 달려오는 커다란 개들이 무서워 살기위해 창가에 매달렸어요. 아무리 살려달라 외쳐도 창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보이지 않았어요. 개들이 살을 물어뜯고 숨이 끊기기 직전에 문이 열렸어요. 팔다리가 꺾인 것도 모르고 창가에 매달렸는데. 그 아이, 미친듯이 살려고 발악했어요. 생명력이 질긴 건지, 눈을 뜨니 아이는 살아있었어요. 온 몸 상처가 집혀있었는데 피는 멈추지 않았어요. 도망가지말라고 침대에 묶어놓아 허름한 마굿간에서 눈물만 펑펑 흘렸어요. 왜 그렇게 칼을 강요했는지 몰랐는데 열세 살 쯤 되니 녹의 나라에 한 여자아이를 볼 수 있었어요. 제 주인. 개가 된 저의 주인. 전 녹의 공주를 위해 전 무예를 익힌 셈이죠. 그딴 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쳤다가 잡혔죠. 예상대로 끔찍한 형벌. 물 안에 미꾸라지들을 풀어놓어 발가벗긴 저를 그 안에 던졌어요. 따뜻한 곳이라면 모두 파고드는 미꾸라지들의 느낌. 전 그 때만 생각하면 손이 저려요. 그런 지옥에 던져지고 싶지 않아서 칼을 다시 잡고 호위무사란 족쇄를 찼습니다. 공주가 태어나고 전 거북궁에서 잘 나가지 못했어요. 공주가 바깥공기를 쐴 때에만 녹의 나라를 볼 수 있는 호위무사였으니까요. 앉아서 눈을 감는 밤은 허망하고 서서 공주의 방문을 지키는 낮은 무의미했어요."
지민은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일에 열중했다. 찡그린 표정이 애매하다. 어짜피 누가 내 이야기를 듣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토해지는 중요한 순간이어라. 말을 하다 목이 메여 삼켰다. 지민은 말을 잇지 못하는 내 얼굴을 다시 훔쳐 봤다.
"너 여 기와도 괜찮은거야? 자리 비웠다고 공주한테 손찌검 당하는 거 아냐? 그딴 짓을 또 당하는 거냐고."
"누가 도와주고 있어요. 풀잎이라고, 착한 아이요."
풀잎? 이름이 왜 그래. 입술을 삐죽이는 지민은 내 입술의 윤곽을 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눈을 깜빡이다 연못에 비친 지민의 자태를 흘려보며 말을 연결했다.
"스무살이 될 즈음 거북궁에 공주를 죽이러온 홍의 자객과 혈전을 벌이다 아래에서 피가 떨어졌었어요. 복통에 몸을 가누지못하자 공주의 팔에 상처가 났어요. 그것도 호위무사가 몸을 날려서 막아서 약하게 베인건데.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공주의 방 바닥에 쓰러졌어요. 홍의 자객은 군사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도망가고. 그 날 새벽에 저는 팔이 묶여서 침대에 누워졌어요. 제가 마굿간에서 생활했을 때 빼고 처음 누워본건데."
쓰리게 웃고 붉은 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닿인 천의 느낌이 생생해서 눈물이 고였다.
"양귀비 액을 몸에 투여한 놈들이 정신이 희미해진 제게 칼질을 하더라구요. 처음 생리혈을 낸 제 자궁을 들어냈어요. 그래도 다 느껴졌는데.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 칼로 아기집을 빼내는 느낌. 찢어지고 빈 구멍을 실로 집은 녀석들로 제 안의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공주를 지키기 위해선 전 여인임을 포기하고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했죠. 무관처럼 동상같이 단단히 붉은 칼을 쥔 저는 길을 잃었어요. 한문이요? 몰라요 그런거. 못배워봐서 모르겠어요. 위로하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잘 모르겠어요. 참는 것만 배워서. 칼쓰는 것 밖에 안 배워서. 네, 저 문맹이에요. 멍청하구요, 말하는 방법도 잘 몰라요. 맞으면서 말을 알아듣고 말하게 됐어요. 제 시간은 공주가 살아가는 시간이고, 공주의 시간은 제가 죽어가는 시간. 잔인하죠? 나라가 망하지 않는 대신 홍의 나라는 자존심을 팔았습니다. 그러면서 버린 저를 보러 홍의 왕이 옵니다."
"…홍의 나라 왕?"
"제 오라버니입니다. 소문으로 듣기엔 흉폭하고 잔인하게 변했다고 들었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본 적도 없거든요."
"그렇다면 그 사람, 네 꼴을 보고 분개하여 오늘 당장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
지민은 그림을 다 그렸는지 흰 손으로 종이를 들어올렸다. 모래알이 묻는 붓을 신경쓰지도 않고. 그 손에 들린건 어느 여자의 얼굴이었다. 네 얼굴은 보고 사느냐? 내 얼굴…? 생각을 해보니 난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입술을 안으로 말자 지민이 보여주는 건 한 여인을 그린 그림. 나와 달리 곱게 자란듯한 모양새였다.
"누군데요."
"홍의 공주로 자랐다면 그 때의 네 모습. 맘에 드느냐?"
"되게 다르네요, 저랑은요. 뉘신지… 참 곱습니다."
"녹의 공주가 살아있었을 적 같구나. 입술이 닮았어. 그러고보니 코도 닮았구나. 우유부단한 성격까지."
나에게 녹의 공주를 연관시키는 것 같아 조금 서글퍼졌다. 여전히 그 안에 녹의 공주가 박혔다. 슬픈 표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쥔 초상화가 조금 구겨졌다. 난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데. 홍의 나라로 가면 매장당하겠지. 더럽혀진 공주를 반가워할 나라는 없다. 종이를 지민에게 돌려줬다.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지민을 피해 무릎을 안았다. 얼굴을 묻고 바람과 숨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머리가 가벼워지는 느낌. 고개를 들자 모래자갈 위로 상한 머리카락들이 잘려 떨어졌다. 가까워진 남자와의 거리. 속눈썹 선을 넘을 것 같이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지민의 손이 차가웠다.
"도와줄게. 네가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걸요."
"난 널 도와주다고 했잖아. 그리고 네 오라버니에게 겉이라도 좋은 모습 보여줘야하지 않겠느냐."
연못 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분냄새. 여인네들이나 쓸 법한 것들. 호박색 눈동자를 피해 모래 위로 떨어져 먹을 튀긴 붓을 본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넘기는 차가운 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 닥친다.
"가만히 있어. 알아서 할게."
다가오는 지민의 손을 피해 뒤로 몸을 움직였다. 슬등이 정원의 돌벽에 닿는다. 도망칠 곳도 없다. 고리를 푸는 손이 희다. 능숙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은 손길. 색이 바랜 검은 두루마기를 벗겨 흰 속곳이 드러났다. 남성처럼 입은 속바지. 그 끈들마저도 풀어 상체만 벗겨낸 지민은 눈살을 찌뿌렸다. 가슴을 가린 손. 온 몸에 검은 綠녹자가 가득했다. 심장 위 가슴살 중앙에 살이 파였다. 심장에게도 강요했는지. 얼마나 상처를 내고 딱지를 뜯었길래 살이 파였을까. 남한테 내 상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아픔을 보여준 건 처음이라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다독이는 지민이 바람이 스처가는 맨 어깨를 쓰다듬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지민의 손등에 떨어진다.
"괜찮아. 다 지워줄게."
한 팔을 가슴에서 잡아내 부드럽게 쓸어올리는 추운 손. 낙인의 흔적들이 아문다. 지민의 손이 타는 데마다 깔끔하게 살이 채워졌다. 박힌 먹물들이 지민의 손끝에 맺혀 떨어졌다. 바닥에 서린 이끼 위로 떨어지자 붉은 꽃이 피어난다. 내 아픔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슬피 울었다. 돋아나는 꽃들이 무리를 짓고 지민의 손은 내 몸을 만진다. 보듬어주는 손길이 그리웠다. 누구도 내게 따뜻한 손길하나 주지 않고 앗아가기만 했다. 빼앗기고 목 졸리고. 힘없는 나는 나를 죽이고 싶었다. 사랑해주는 이, 사랑할 이 없이 살아가는 고통이 사무쳐서. 가슴에 파인 글자. 綠녹. 그 위로 차가운 손이 내려와 글자를 거둔다. 마지막 글자까지 사라진다. 하얗고 태어날 적의 몸으로 돌아온 나는 눈물을 쉴 새 없이 닦았다. 윗옷을 입혀주는 지민. 그의 손이 떨어지자 허름한 옷이 하얀 비단 저고리로 바뀐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속바지를 벗기는 지민은 눈을 감았다. 흐느끼는 소리만이 들리는 정원.
다리엔 가득 피멍이 가득했다. 단풍이 든 다리에 검정 낙인들이 빼곡하게 점령. 발 아래서부터 천천히 만지는 지민의 찬 손 아래서 또 다른 살들이 피어났다. 핏물을 머금은 새살이었다. 새하얗게 태어나는 오른쪽 다리가 지민의 허벅지 위에 올려져 만져졌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로 놓치는 곳없이 손길이 닿았다. 바지를 입혀주는 끝에 금실이 박힌 하얀 치마로 변했다. 서러움? 감격스러움? 둘 다 아니. 내 아픔은 나와 거북이의 비밀이 되어서. 흔적이 없어져서 누구에게도 입증할 수 없다는 눈물. 난 또 거짓말을 해야 한다. 난 괜찮다고. 난 행복하다고. 어미를 잃은 아기새처럼 우는 나와 마주보는 지민은 슬픈 눈을 한다. 보석 호박이 박힌 반짝이는 눈동자.
"견뎌야지. 네가 풀잎한테 말했듯, 갈 길은 멀잖아."
내가 풀잎에게 말한 말을 어찌 알았는지. 울음이 멎었다. 다 알고 있었던거지? 거북이, 당신은 다 알고 있었던 거지. 나를 지켜본 거야? 그래서 시큰둥한 반응에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지민은 내 눈물을 닦고 내 입술에 붉은 것을 새끼손가락으로 바른다.
"네가 돌아갔을 때부터 연못에서 보였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네가 뭘 했던지 봤어. 이마의 흉터가 신경쓰였거든. 넌 여인이잖아.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난 영물이야. 이런 것까지 모르면 나야 곤란하지. 곱게 볼에 닿는 분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다 끝났는지 나를 일으켜세운다. 배신감 같기도 한 이 감정이 나쁘진 않았다. 연못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지민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서 내게 보여준다.
"어때, 똑같지 않아? 넌 붉은 것보다 하얀 게 더 잘 어울려. 이 종이의 인물처럼."
어색한 나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씨익 웃는 지민과 눈 마주치기 부끄러워 눈을 굴렸다. 주홍 머리 남자. 흑장미색 얇은 비단 도포를 입은 남자. 그리고 홀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기 힘겨웠다. 종이처럼 하얀 그가 웃자 분홍으로 변하는 입술을 보아서. 또다. 저번에 본 흰 웃음이 가슴에 박혀 간질거린다. 얼굴을 가까이서 기웃거리는 남자에 고개를 돌려 피하자 입술을 삐죽 내민다. 응답이 나오지 않자 귀로 소년의 엉큼한 목소리가 박혔다.
"예뻐. 내가 사랑했던 녹의 공주보다 훨씬 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남자와 얼굴이 심하게 가까웠다. 장인이 공들여서 만든 호박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담았다. 심장이 아우성치는 소리. 금방이라도 입술이 데일 것만 같아서. 또 심장에 지진을 내는 웃음을 보이는 지민이 내 손을 스치고 종이를 가져갔다. 얼음의 감촉이 손에 남는다.
"농이야. 네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길래. 닮았는데 왜 그러지."
"……."
놀란 가슴인지 떨리는 가슴인지 이 상자 안에 거북이가 기웃거리는 것 같다. 담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결국 거북이가 상자 안으로 발을 내딛었고 나는 담은 것 같다.
"소원을 이뤄줄 순 없어도 내 선에서 널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민을. 아님 처음부터 그 눈동자를 담았을 지도 모른다. 엮고 싶었던 연을 억지스럽게 묶어준 지민이 다행스러웠다. 잡지 못했다면 난 그 누구도 담을 수 없었을 테니. 차가운 손길이래도 좋았다. 거북이의 마음 구석이라도 내가 있었으면. 녹의 공주가 아닌 내가 있었으면. 지민의 손이 따뜻해져 볼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는다.
"조만간 네 년의 더러운 입을 강간해주겠다."
短篇 거북뎐 二장 (完)
三장
5. 녹의 횡포.
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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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도달했을 시각. 해가 지며 정원의 천장이 저절로 닫혔다. 연못에서 불이 비춰진다. 남색 어둠에 산호색 밝음이 번진다. 시간이 다 됐어. 돌아가야지? 지민이 내 등을 밀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禁池금지의 문에 선 나. 선뜻 문을 열 수 없다. 어떤 고통이 또 기다릴지 나는 가늠되지 않는다. 얼마나 괜찮다는 거짓말을 해야하는지. 거짓말 뒤에 숨겨진 진심을 누가 알아줄까. 내가 받은 22년간 고통을 증명할 증거들이 사라져 뭐라 변명할 거리도, 고통을 설명할 근거가 없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 어린 정국, 남준, 풀잎, 내게 고문을 하던 사람들. 그리고 녹의 공주. 눈 앞으로 검은 무리들이 지나가고 몸 아래로 들어오는 것들이 떠오른다. 미꾸라지들. 살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수없이 수모를 당하고도 찰거머리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제 모습을 찾고도 당당하게 나가설 수 없다. 이게 나라고 보여줄 수 없다. 벅찬 감정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훔친다고 손에 묻어나는 것들. 화장을 눈물로 닦는다. 무너져가는 나를 감싼 옷은 색이 바랬던 검은 호위무사 복장으로 돌아온다. 낡아빠진 옷이 멀쩡해진 나를 더 작게 만든다. 옷 안에 가려졌던 허리춤의 붉은 칼이 나타났다. 녹의 공주에게 적호로서 돌아가야 한다. 소리 내지 못 하고 어깨를 들썩이자 눈꽃 같은 손이 쓰담는다.
"이제 홍의 나라 왕을 마주하러 가야 돼요."
"걱정 마."
"흉터가 없으면 정국이 분개하고 그 손에 죽을 거예요. 진심이 매도되고,"
"내가 알아. 네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네가 얼마나 살고 싶어했는지.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깟 흉터란 흔적이 무슨 대수야."
"제가 사라져야, 그래야 녹은 멈출까요?"
"어리석은 소리. 네가 왜 죽어. 네가 왜 사라져. 사라져야 될 미친 짐승들은 따로 있어."
"죽고 싶지 않아요. 칼을 놓고 싶어요. 공주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요."
진정하지 못 하고 눈물을 삼켰다. 말 없이 버텨내야 될 고난이 날 일깨워줬다. 홍의 왕을 만난다면 견딜 수 있는 만큼 견뎌볼게요. 물기로 젖은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문에서 멀어졌다. 뒷걸음치던 주홍 머리. 안개가 생김에 아래로 시야를 내렸다. 거북이. 등딱지에 작은 금이 간 거북이가 미성의 목소리를 내 말했다.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게.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싱긋 웃는 거북이는 정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내 마음을 알고 그런 소릴 한다면 정말 나쁘다. 내가 그 마음 안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게 되잖아. 사실은 녹의 공주를 닮은 내가 신경쓰여서일 텐데. 그래도 당신을 보고 싶어서 살고 싶다. 방해 받지 않고 보고 싶어.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들 앞에선 난 어쩔 수 없이 철인이 되어야했다. 아랫입술의 살을 깨물고 문을 열었다. 이미 공주가 거북궁을 나갔는지 안에 남은 궁녀가 없다. 떼어지지 않는 발은 禁池금지의 밖으로.
*
거북궁 입구 바로 아래 계단. 넓게 펼쳐진 돌로 된 계단을 내려갔다. 녹의 나라의 옥좌에 앉은 공주가 보인다. 금빛의 황후. 녹색의 머리카락를 틀어올린 머리 위엔 왕관이 화려했다. 공주의 앞, 계단 아래. 사신들이 서는 평평한 자리에 선 붉은 끼 도는 머리카락의 남자. 거대한 거북궁 아래에 선 남자는 거북궁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당당히 서있다. 빠르게 공주의 뒤로 간다. 궁녀들 사이에 있던 풀잎이 다가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적호님. 저 분이 홍의 황제랍니다. 정국 대군이요. 어제 새벽에 왕위에 올라 공주님을 뵈러 왔다지 뭡니까. 홍의 나라 쪽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소식은 들었지만 만나자 마자 이렇게 살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불길하다. 저 위험해보이는 눈빛이 내게로 닿았다. 그리고 멀어진다. 저 자는 내가 제 누이라고 생각 못 하겠지. 그럼. 이런 모습이라곤 생각도 못할거다. 입술이 피가 나도록 물고 붉은 검을 쥐었다. 정국이 준 붉은 장도를. 홍시색 눈이 공주에게로 향했다. 제가 찾으러 온 동생은 여기 있는데 찾질 못한다. 주먹을 꽉 쥐고 목에 걸리는 울컥거림을 삼킨다. 혀에 가시가 돋는다. 검은 비단 옷을 입은 정국이 단단히 억누르는 소리로 정적을 깼다.
"공주님께 안부를 여쭌다는 자리이지만 본론을 말함에 부탁을 들어주시오. 설령 공주를 찾으러 왔소."
"이미 인질로 교환되었지 않나? 다시 전쟁을 하자 이건가?"
"그건 그쪽들이 먼저 시작했지. 인질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한 나라에 대한 예의와 법도이거늘, 스물 둘 해가 지나며 어떤 짓을 해왔는지 알아야겠소."
"그래, 네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적호를 데려오라."
아랫 것을 대하듯 말하는 공주에 눈썹을 꿈틀한 정국이 예의를 벗고 본색을 드러낸다. 공주는 뒤로 돌아보며 거북궁을 둘러싼 녹의 군사들에게 명한다. 두터운 갑옷을 입은 군사 두 명이 나를 잡고 그 둘의 사이에 끌고와 꿇어앉혔다. 풀잎의 작은 외침이 들렸으나 이렇게 될 줄 알아서 듣고 흘린다. 정국의 뒤에 있던 남준은 나를 보고 질끈 눈을 감았다. 정국 앞에 무릎 꿇려진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도무지 무서워서 보질 못하겠다. 당장 그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난 두 나라에 편히 있지 못하고 결국 곯아 죽을 사람이다. 가마를 타고 녹의 나라에 들어오던 갓난 아기가 맞았던 돌팔매질을 홍의 나라에서 당하고 싶지 않아. 어디 있던 간에 내 수명을 줄일 게 뻔해. 이미 늦었다. 세월을 되돌릴 수 없잖아. 내 손에 수갑을 채운 군사가 물러나고 정국의 검은 신이 보인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는 정국이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그 홍색 눈과 맞춤을 피했다. 일그러지는 정국의 얼굴 또한 볼 수 없었다. 글썽이는 듯한 목소리가 내 어깨를 흔든다. 흔들리는 몸이 혈육을 찾았다. 그와 마주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내가 들고 있던 붉은 칼을 잡고 놓지 못한다. 자신이 쥐어주었던 녹의 공주를 위해 쓰여진다. 화와 슬픔이 섞여 나오는 처음 나를 부르는 그. 목에서 물기를 없애려고 다분히 노력해도 젖은 목소리가 나온다.
"설령. 설령아. 네가 설령이냐. 정녕 네가 설령이냐."
"적호입니다."
"어떤 빌어먹을 년들이 네게 적호라더냐. 어떤 미천한 것들이 네게 불여우라더냐. 말해보거라. 누가 너를 이렇게 망쳐놨냔 말이다…."
"전 적호입니다."
"그렇지 않다. 넌 새하얀 눈이 내리던 날 태어난 내 하나뿐인 동생이다. 내가 너에게 불여우란 이름을 붙였다고? 네 이름은 설령이다. 불러보아라. 말하지 못했던 네 이름을 불러봐."
"제게 남은 건 없습니다. 가족도, 조국도, 이름도. 언제 저를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긴 말 필요없다. 난 너만 데리고 가면 돼. 그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해. 네가 그걸 입증해야 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어서 말해. 한 마디만 하면 되는거야. 그래야 널 나락에서 꺼내줄 수 있어."
거북이가 보고 싶다. 이렇게 숨 막혀오는 상황 원하지 않아. 말에 대한 타당한 증거도 몸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도 살 수 없기에. 생각보다 멀쩡해보이는 몸에 흐느낌을 멈춘 정국이 내 몸을 수색한다. 얼굴을 붙잡고 상처 하나라도 찾지만 그가 들었던 상처들이 사라져있다. 이마의 흉터까지. 거북이가 없애버려 남은게 없다. 누군가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해줬으면 나았을텐데. 그랬다면 죄책감을 덜 가지고 살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떼를 쓸 것 같았다. 그건 나와 어울리지 않은 짓. 스스로 옷을 벗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다. 남준이 빠르게 달려와 자신의 겉옷으로 내 몸을 감춘다. 이렇지 않으면 정국이 믿지 않을 것 같아. 흰 소복만 남겨둔 채로 살을 드러내자 정국은 눈을 부릅뜬다. 슬픔은 어디 가고 분노만 가득한 그 붉은 눈동자. 남준의 옷에서 팔을 내밀고 투명한 소매를 걷어 보여준다.
"전 괜찮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든 거짓 소문이고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한 뿌리라도 남은 희망에 재를 덮었다. 확인 사살. 잔뜩 화로 몸을 떠는 정국이 손을 들었다. 고개가 돌아감과 함께 귓가를 울린다. 뺨을 맞은 나는 그대로 고개를 고정시키고 먼 곳을 봤다. 위에서 한 눈에 보이는 녹의 나라의 일부. 참으로 넓구나. 내 참을성도 이리 넓어서 다행이다. 내 상처가 깊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맞아도 마음에 파인 흉터까지 닿지 못했다. 처음 만난 오라비에게 맞은 뺨은 붉게 타올랐다. 살의 아픔보다 심장의 아픔이. 옷을 얹고 흰 속옷을 가린 남준이 내 뒤로 서서 찢어진 남매를 지켜본다. 붉은 뺨을 보고 자신이 더 가슴 아픈지 버럭 화를 내며 명령했다.
"말 해! 네 상처가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고해."
"……."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널 지켜줄 수 없어. 말하란 말이다. 저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네게 어떤 모욕을 안겨줬는지! 빠짐 없이 말하란 말이다!"
"……."
"네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구나. 고문 흔적들은 어디로 팔아넘겼느냐. 녹의 놈들이 꾀를 부리더냐? 분가루를 떡칠해서 네 몸의 흉터들을 지웠더냐? 어떤 말이라도 해보거라! 설령아, 이러면 네가 죽어."
"녹은 저를 고문한 적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내게 준 붉은 칼을 꺼내 네 목에 겨눈다.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워보이는 정국은 눈에 핏대가 섰다. 고였던 눈물은 말라버리고 배신감과 실망감. 그 눈에 담긴 건 내가 담지 못하는 것. 너무 많은 걸 포기해서 담기도 힘든 것. 당신은 그럴 힘이 있잖아. 녹의 공주와 풀잎, 홍의 사신들. 녹과 홍이 보는 앞에서 나는 정말 끝을 달리는구나. 최악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너를 위해 살아왔다. 너를 보기 위해 살아왔다. 너 하나만 꺼내려고 살아왔어 나는. 네가 한 말은 지금 나를 모욕하는 발언이다. 홍을 배신하는 게야?"
"……."
"그 누구도 너의 셀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을 이리 깔끔하게 없앨 순 없어. 말을 하지 않을 것이냐? 내 손에서 죽어봐야겠어?"
그 칼로 날 벨 수 없다. 날 베기 위해서라면 오지도 않았을 사람. 매정하고 격하고 불꽃처럼 타오를 사람.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그를 외면했다.
"끝까지 네 오래비 생각은 안 하는구나."
내 입에서 옳은 말이 나오지 않자 고개를 저으며 칼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내가 세월들을 말해도 녹의 쪽에선 증거가 없으니 오히려 홍을 몰아붙힐 거다. 그렇다면 정국은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겠지. 전쟁을 초래하기 싫었다. 일찍이 죽었어야 하는 목숨인데 남은 여생만큼은 뜻 있게 보내고 싶다. 거북이가 눈물에 아른거린다. 지민의 주황 머리가 보고 싶다. 정국이 내게서 멀어지자 이 상황을 지켜보는 녹의 공주가 말문을 열었다.
"충견이군. 주인을 물지 않는 충견이로세."
"닥쳐라."
"지금 내게 뭐라 하였느냐? 요망한 홍의 놈이."
"네 년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남준이 정국을 말렸으나 참지 못하고 붉은 칼을 뽑아 낸다. 동시에 녹의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홍을 몰아세운다. 달을 그리며 칼을 휘두른 정국에 쓰러지는 군사 두어명. 붉은 핏방울이 분수처럼 튄다. 적은 수에 밀리는 홍에 남준이 정국의 칼을 잡았다. 때를 잘못 잡은 것 같사옵니다. 빠른 시일내로 설령 공주님을 빼어낼 방도를 찾아내보지요. 신의 충언을 들으시옵소서. 정국이 입술을 물으며 칼을 꾹 쥐었다. 녹의 군사들이 정국에게 다가온다. 그는 결국 칼을 거두고 말에 올라타 후퇴했다. 남겨진 나는 남준의 옷을 붙들었다. 손이 잘게 떨렸다.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을까. 사람으로서 살고 싶었는데 너무 큰 바람인가. 마지막으로 정국이 말을 남기고 간다.
"두고 보아라. 기필코 녹의 공주, 네 그 더러운 입이 더는 지껄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말굽들이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홍의 무리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유쾌하지 못한 만남.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 했다. 차라리 오라버니, 당신의 등에 엎여 도망치고 싶어요. 녹도 홍도 아닌 다른 곳으로. 하지만 세상은 둘로 나눠져 나를 몰아세운다. 그저 그의 다리를 잡아서 매달리고 싶었다. 나 좀 차라리 데려가서 노예로 쓰던가 끓는 물에 담가 삶아죽이던지 해주세요.
녹의 공주와 풀잎, 나. 궁녀들과 군사들이 나를 둘러쌓았다. 물끄러미 처다보는 공주. 부들거리는 손이 주먹을 쥔다. 내가 입에 거짓말을 달았어도 나는 당신의 충견이 아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당신. 천적이지만 당신을 내가 업어 키웠어. 원치 않은 운명을 받들고 내가 기어서 당신 발을 핥았어.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고 지치고 실패하고 고문당하고. 이제는 내게 손 내미는 사람까지 내쳐야 해. 모든 걸 억누르고 살아가는 이런 나를 불쌍하게 생각한 적 있어?
차가운 눈은 녹의 공주의 것. 나를 내려다 보는 공주가 계단을 내려온다. 내가 거북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처음 눈물을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잔뜩 흘러 넘치는 눈물들이 악을 담고 있었다. 내 턱을 잡고 돌리는 공주가 내 몸을 훑더니 뺨을 내리친다. 이에 피가 묻어나 입술에 넘쳤다. 당신은 날 안타깝게 생각한 적 있어? 사람이야? 감정이 없어?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 심해지는 폭력에 풀잎이 안절부절 발을 굴린다. 얼굴에 일정하게 상처가 나자 뿌듯한 미소를 짓는 공주. 내 몸에 찍혔던 낙인들을 기억해? 이를 갈고 삼키던 말들. 나는 그녀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리내어 묻는다. 목숨을 걸고 물어보는 질문.
"공주님. 이 년에게 한 번이라도 사람으로 동정해본 적 있으십니까?"
정국과의 대면에 올라왔던 감정들이 폭발하여 억누른 소릴 냈다. 항상 말하고 싶었어.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호위무사, 개. 붉은 여우말고. 사람인 적 있었는지.
"언제 네가 사람이었느냐."
"……."
"적호, 네가 도대체 언제 사람이었고, 한 나라의 공주였느냐. 네 사정이 딱하다 하여도 봐주지 않는다. 인질을 건드리는 것이 홍의 나라 법도라면 이것이 녹의 나라 안의 법도이니라. 네가 사람 대접 받지 못할 운명인 것을 너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냐?"
"……."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운명이라니요.
"넌 그저 입 닥치고 내가 밟을 등을 내주면 되는 것이다. 왜? 패배의 슬픔은 그런 것이야. 넌 홍의 모욕감을 나타내는 것일 뿐. 홍의 업이 너의 존재라는 말이다. 손에 쥐고 죽도처럼 가지고 노는 존재. 버려져도 아무도 상관 쓰지 않아. 네가 죽으면 녹의 땅 일부가 되겠지. 죽어서도 홍의 나라엔 발 한 끝도 닿지 못한다."
울컥 정국이 떨어뜨린 내 붉은 검을 쥐자 군사들이 몸을 저지한다. 창들이 내 목을 향해 날을 세운다. 얼굴을 적시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공주는 내게 뒤를 보이며 거북궁으로 유유히 들어간다. 하나의 손짓 후.
"기어오르는 걸 보니 널 너무 풀어준 것 같아. 홍의 황제는 제가 남기고 간 말이 왜 네게 짐을 되는 걸 모를까?"
눈 없이도 한 번 더 짖을 수 있는지 보겠다.
군사들은 손짓을 본 후, 밧줄로 내 몸을 묶고 얼굴을 억세게 들어올린다. 꿇어앉은 내 눈을 억지로 벌리는 손들에 짐승이 우는 소릴냈다. 망막 앞에 미칠듯이 춤추는 불꽃들. 발악은 저지되어 손 쉽게 사람 한 명을 불구로 만든다. 동공이 타들어 간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나는 그렇게 시각을 잃었다. 시야를 억누른 한 옷감. 꽉 조이는 질감에 원망이 하늘 끝까지 솓구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할 일이 끝난 군사들은 자리를 무르고 그 곳엔 아기 곰이 어미를 찾는 듯한 울음소리가 거북궁 마당을 기어다닌다. 지민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사람을 찾아갈 두 눈이 보이질 않는다.
싸늘한 공기. 설령제로부터 닷새가 남았다.
6. 닿는 손끝.
박효신-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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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하게 부는 바람이 주검 같은 몸을 스쳐간다. 시각을 잃었다.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공포심을 조장했다. 어두운 밤. 내게 어두운 밤이 내려 낮이나 밤이나 깜깜한 어둠. 추위는 사람 살을 떨리게 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워있는 몸. 눈을 가린 거적대기를 수전증을 일으는 손으로 풀어냈다. 굳은 눈가에 피딱지를 조금씩 떼어냈다. 반항하며 생긴 눈가의 상처. 살 안의 안구가 파열되어 굴리면 굴리는대로 상처가 느껴진다. 눈물을 흘리며 닫힌 눈살을 비볐다. 뇌 속에서 거북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 꼴로 그의 앞에 설 수 없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주홍 머리와 그 호박색 눈동자. 비단결 흑장미색 도포도. 남은 기억에서 지민의 흔적을 쫓았다. 그리고 거친 감촉의 옷에 닦아낸다. 메마른 얼굴이 건조하다. 닫은 눈두덩이 위로, 옷감을 찢어 묶었다. 흉측한 꼴을 가리고 손을 더듬었다. 붉은 칼. 잘못 잡고 베인 손에 송글송글 이슬이 맺혔다. 아이같이 울고 싶다. 지민의 손길이 그립다. 꾹 눌러 참는다. 지민. 그가 지금 내 앞에 있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상공에 흩날릴 것같다. 헛질끝에 칼을 허리 옆 칼집으로 넣었다. 그렇게 부서질듯한 몸으로 바닥을 기어가 거북궁의 계단을 매만졌다. 내가 그를 찾아 맹인의 손짓으로 휘젓는다. 기어오르는 계단에 무릎이 부딪히고 낡은 옷이 더 닳는다. 얼음같이 상쾌한 禁池금지의 체향이 그리워. 거북궁 입구를 찾아 기어오르자 군사들이 나를 일으킨다. 공주님이 머무르는 곳엔 신성한 행위만이 허용된다며. 비웃음을 흘리고 부축을 받았다. 거북궁의 벽을 짚었다. 힘이 없는 내가 발로 땅을 딪고 일어서자 군사들은 매정하게 나를 놓아 밖을 지키러 가버린다. 다리의 힘이 풀림과 함께 쿵하고 닫힌 문.
그래. 항상 그랬지. 고문을 행하고 나도 그들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대했다. 나는 아파도 그들처럼 그렇게 행해야만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 바닥을 원망한다. 쓰러진 몸이 거북이를 향해 나아갔다. 공기의 중력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버거운 몸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기었다. 아무리 그치려고 해도 눈물이 틈 사이로 나와 얼굴을 적셨다. 이 앞으로 가면 두 개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을 것이고. 지민이 있는 곳을 향해 외워버린 길을 눈 없이 간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입술을 물고 무릎으로 기어 거쳐 가야 하는 복도 옆 벽을 짚었다. 닳은 손톱을 세워 일어난다. 징그럽게 끈질긴 정신력이 다리를 끌었다. 그리고 고난 끝이 닿았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벽처럼 느껴지는 문을 더듬다 禁池금지의 문을 만졌다. 힘 없는 손.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늦은 밤을 지키는 거북궁 안, 궁녀들은 모습도 소리도 나타내지 않았다. 고로 공주와 나, 풀잎. 거북궁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뿐. 거북궁 밖은 군사들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설령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전쟁이다. 거북이와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민에게 내 꼴에 대한 어떤 변명을 해야 될까. 슬펐다. 솔직하게 마음을 주면 그에게 부담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사실, 당신이 내 거짓을 털어갔으면 좋겠어.
문을 여니 정원의 특유의 향기. 풀잎과 이슬. 산기슭에서나 맡을 법한 내음에 울음을 삼켰다. 지민. 지민, 당신은 어디있습니까. 내가 가슴에 담은 사람. 볼 수 없는 그.
"많이 늦었네. 놈들이 네게 뭐라든?"
저 멀리서 들리는 소년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우러나왔다. 그 따뜻한 걱정이, 계속 가슴의 문을 두드린다. 눈에 차오르는 아픔과 설움. 삼키고 삼켜도 목에 얽매이는 이 엉어리가 심장으로 내려가 핏웅덩이로 떨어진다. 나는 숨기고 살아야 되는 사람. 연기를 하고 살아야하는 내가 죄스럽다. 가슴에 고인 핏웅덩이가 파원을 그린다. 눈을 누른 옷감이 마를 새 없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무거운 몸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거북이를 향해 걸어갔다. 거북이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모래가 지근지근 느껴지는 어둠의 한복판에 쭈구려 앉았다. 그러니 사륵 옷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음 덩어리가 눈 위로 앉았다. 눈을 가린 옷감을 풀으려고 하는 차가운 손에 손목을 붙잡는다. 아무 일 없었던 목소릴 내길 참 힘겹다. 하지만 내가 해온 일이 물거품이 된다 생각하니 굳은 성대가 감사하다.
"별 일 없었습니다."
"기껏 네가 보라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거북님."
"거북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지민. 지민이라,"
"우리, 놀이 하나해요."
"무슨 놀이? 넌 참 갈피 잡기 어렵구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갑자기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해.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엔 눈을 가려 오곤 놀이를 하자?"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그저 어떠한 거라도 좋아요. 이왕이면 제가 도망치는 역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네가 그러하면… 내가 술래를 하마. 술래나 도망치는 사람이나 눈을 가리고 하는 술래잡기라, 참 근본 없구나. 정원도 적당한 넓이니 할 만 하겠군. 대신 너를 잡는다면 너는 그 안대를 풀어야 될 것이야. 반항 않고."
"그러지요."
끈을 묶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일어나 정원을 봤을 적을 기억해내어 대각선으로 걸어갔다. 눈을 가린 지민이 제자리에서 이동한 후, 수를 세라고 한다. 정원의 구석, 낮은 돌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가까이, 연못에서 무슨 소리가 울렁거렸다. 사람의 말소리가 아닌 바람 부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는 잘 들리지 않는 타인의 숨소리. 나는 이제 붕대가 풀리면 그를 직시하는 연기를 펼쳐야한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지 못할 지민 몰래 북받친 감정을 흐느꼈다. 수를 세지 못 하고 있자 한숨소리가 들렸다.
"시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정원을 느리게 걸어다니는 지민이 정원의 벽을 짚었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오는 지민의 발걸음에 입을 막았다. 작게 구르는 숨소리. 조금 먼 길이라서 돌아오는 지민의 발걸음을 따라 상상이 펼쳐졌다. 이대로라면 잡히고 말 텐데 몸이 슬픔으로 가득 차 말을 듣지 않는다. 조금씩 떨리는 어깨를 부둥켜 앉곤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헌 옷 위로 얼굴을 숨기고 꺽꺽거리는 울음을 숨긴다. 어차피 잡힐 건데, 도망쳐도 녹의 놈들 손에 잡힐 것인데, 이런 작은 술래잡기에서 내가 안 잡힐 수가. 눈 마저도 뺏기고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 내가 거북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는 너무 멀기만 하다. 녹의 공주가 사는 지민의 가슴에 감히 들어설 틈이 없었다. 더 슬픈 것은 이젠 볼 수 없는 그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 흑장미색 얇은 도포. 정국의 무서운 얼굴과 공주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발목을 잡는 녹과 홍의 족쇄가 억세서 자유를 볼 수 없다. 가슴 안 핏웅덩기가 울리면서 슬픔을 토했다. 응어리 진 상처들에 또 한 번 붕대를 적신다. 부운 눈이 느껴졌다. 붕대에서 샌 눈물이 볼을 적시고 손으로 떨어졌다. 내 앞에 선 발자국 소릴 듣지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입 안을 웅웅 울리는 울음. 꽉 문 이로 잇몸이 상할 것 같았다. 도달할 수 없이 높은 욕망에, 바닥에 있는 나는 쭈구려 앉아 이렇게 울 수 밖에 없다.
"여기야?"
"……."
머리를 더듬는 손이 차갑다. 축축한 나의 손을 뻗었다. 어쩌면 내 앞에 있을 그 이의 얼굴을 향했다. 닿았다. 술래가 아닌 도망 치는 사람이 술래를 잡았다. 요동 치는 입술을 물고 더듬었다. 그의 주황 머리칼, 차가운 피부. 부드러운 냉혈한의 피부를 더듬다 눈두덩이를 만졌다. 보석같은 눈을 덮는 살이 보드라웠다. 처음에 그가 붕대를 착용했지만 아마 풀었으리라. 눈 위를 만지자 장애물이 없었다. 내가 울고 있는 걸 다 봤다고 생각하니 더욱 설움이 치고 올라왔다. 얼굴을 만지던 손을 떨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곧 내 시야를 묶은 붕대가 풀려지고 눈을 떴다. 여전히 암흑. 내 얼굴 앞으로 닿는 추운 숨. 찢어진 눈동자를 바로 내렸다. 보이지 않아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 뒷편에서는 들키길 원했으면서. 모순이다. 볼을 감싸는 차가운 손에 고개가 들려졌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네 눈동자 색이 어떤지 아느냐?"
"……."
"일렁이는 불꽃이 감도는. 그런 검붉은 보배이다. 보고만 있으면 빠질 것 같이 깊고 붉어."
"……."
"숨기면 모를 줄 알았더냐. 피하면 피하게 둘 줄 알았더냐.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 줄 알았더냐."
"……."
"난 네가 겁내는 녹이든 홍이든 어떤 편도 아니다. 나는 그저 녹을 지키는 거북이일 뿐이야."
네 편이지.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어루만져줘야 하는 거야. 보이지 않는 눈알을 굴리며 흘리는 눈물을 닦는 내 손이 얼음장 같았다. 그가 해주는 위로가 그를 품은 내게 독이 되어 박힌다.
"너는 네가 스스로 아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지킬 수 없어. 소중한 것을 뺏기고 심장이 도려지고 말거야 라고, 녹의 공주가 내게 해줬던 말이다."
내가 연모하는지, 당신은 알까. 몰라. 한참 모르지. 드러난 고문의 상처 빼곤 모르는 거북아. 내 마음을 알았으면 녹의 공주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을거야. 지민의 마음속엔 아직도 녹의 공주란 꽃이 피어있다.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슴에 칼을 꽂고 사랑에 대한 거짓을 폭로한 사람인데 그는 바보 같다. 어루만져지는 눈가로 시린 감촉에 앞이 트인다. 그래, 잊고 있었다. 지민은 영물인 걸. 눈의 껄끄러움이 사라졌다. 눈을 떴다. 흐릿하다. 주황 머리와 흑장미색 도포가 보였다. 흰 손까지. 지민이 나를 일으켜 이끌었다. 맞잡은 손에 온도가 낮아진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연못가 앞으로 온 나. 지민은 나를 넘어뜨리고 풀밭에 뉘었다. 땅에 내 등이 닿는 건 흔한 일이 아닌걸 지민도 잘 알 것이다. 누워서 잘 수 없는 숙명을 가진 내가 땅과 맞닿을 때는 누군가에 의해 고문 당할 때나, 공주를 죽이러 온 자객과 싸우다 넘어질 때. 또 흐르는 눈물이 잔디와 입맞춤했다. 일어나려는 몸을 다시 눕히는 지민이 내 옆에 눕는다. 사이가 얼마 멀지 못했다. 가까운 손의 위치에 냉기가 서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잡힐듯한 손. 손가락 끝이 가증스럽게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긴 움직여서도 아니 됐다.
정원의 천장을 마주보고 누운 우리는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열리는 천장에 쏟아질 듯한 별들이 인사한다. 해에 가려졌던 것들. 친절하지 않는 바람이 싸늘하게 들어와 코를 스쳤다. 지민은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어줬다. 절실하게 원하는 딱 한 가지 빼고. 나를 담아주는 것.
까만 색일거라고만 생각했던 밤하늘은 녹색, 남색, 보라색 등등. 어두운 계열의 색으로 바뀌곤 한다. 오래보고 있으면 그들이 조화롭게 섞이고 별들은 그 안에서 깜빡거렸다. 내가 지민에게 오지 않았다면 과연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었을까. 다행이기도 하지만 슬픈 일을 보아야 하는 것이 고역이다. 지민을 볼 수 있지만 지민을 보면 녹의 공주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 녹에서 자란 공주들은 내게 아픔을 선사한다. 지민이 사랑한 녹의 공주를 내가 닮을 수 있을까. 아니, 녹의 공주를 넘으려면 난 지민과 맞서야 할 것이다. 그건 혼자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가슴 시린 일. 닿는 손끝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별들을 구경했다. 모든 아픔은 뒤로 했다. 지민이 옆에 있다. 그래, 자꾸 심장이 지민이 옆에 있단 이유 하나로 소리 들려라 뛰었다. 지민의 숨소리와 나의 아픈 숨소리가 섞인다. 그런 것들이 정원을 매웠다. 나처럼 하늘을 보는 지민이 이제야 입을 열었다.
"설령아. 설령제가 무슨 날인줄 아느냐."
"……."
"말하기 싫으면 내 얘기만 듣고 있거라."
"…예."
"설령제는 눈이 내리는 날을 축복하는 제사이니라. 설령, 곧 네가 태어남을 기뻐하는 날이야. 너는 눈이 내리는 날 태어났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겠느냐."
"……."
"공주가 말 했었지. 눈이 내리면 녹과 홍은 사그라들거라고. 녹과 홍을 잠 재우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나도 그 말을 믿었어. 그 눈이 오기 위해 나는 네게 기대를 걸고 있다."
"……."
"눈이 내리는 날, 기적이 일어날지도. 지금 너는 내게 기적같은 존재다. 내가 걸어놓은 결계까지 뚫고 온 너는 내게 큰 존재야."
"……."
"이 세상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내 생각을 아는 사람은 너 뿐이고, 이 세상 너를 아는 사람 중에서 너를 잡아줄 사람은 나 뿐이다."
눈꼬리를 따라 물이 흘렀다. 잎사귀에 닿는 눈물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손에 묵묵히 눈물만 흘리고 있다 손가락이 내 손끝을 타고 조심스레 올라왔다.
"나와 녹의 공주가 꿈꾸었던 백의 나라로 가자. 네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널 위한 눈이 내리는 그곳으로."
차가운 손이 내 손을 덮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아는 처량한 마음에 내뺀다. 연모하는 마음을 깊게 해주는 건 그 아무 뜻 없는 맞닿음이다. 내가 거두어야 했다. 하얀 손이 민망해져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나는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고 하늘을 본다. 녹의 공주라는 말이 나오면 저절로 움추러드는 마음이 죄같았다. 미천한 내가, 누굴 꿈꾼다고. 지민과 녹의 공주가 꿈꾼 백의 나라로 가자는 말이 화살촉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녹의 공주가 꿈꾼 게 올바른 것일까. 정말 귀가 맛갔으면 더 나을 뻔 했는데. 아니다, 그러면 지민의 소년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꽉쥔 손아귀에는 아무 것도 남는게 없다. 몸을 둥글게 말아서 운다. 내가 있는 녹의 땅을 흔드는 그가 미웠지만 가까이 하고 싶다. 나를 보는 그 눈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볼 수 없었다. 그대로 날 보는 지민을 외면하고 눈을 감았다. 곧 애증의 관계로 넘어가는 마음이 쓰리다. 초라하고 불쌍한 나를 모르고 하늘의 밤은 너무나 순수하고 어여쁜 것으로 가득찼다. 스르륵 자리에 남았던 자신의 손을 거두는 지민이 날 따라 눈을 감는다. 그의 손이 따뜻해지는 바람은 곱게 접어 가슴의 핏웅덩이에 담군다. 백의 나라 같이 허망한 꿈은 꿈꾸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희망 고문이니까. 그가 남기는 손가락의 여지에 희망을 품지 않는 이유. 내가 더 아플까봐. 진실을 알면 내가 상처받을까봐. 슬픔을 머금은 코끝을 스치고 가는 칼바람이 매서웠다.
-短篇 거북뎐 三장 (完)
四장
7. 얼음꽃.
꿈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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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지민을 찾았다. 흰 구름 아래 잔잔하게 흔드리는 잔디. 들판 위 산산하게 부는 바람. 녹색으로 깔린 땅 한가운데에 서있는 지민을 향해 걸어갔다. 광활한 벌판위에 선 흑장미색 비단 도포를 입은 주황 머리 남자. 조심스럽게 다가가 뒤에서 안았다. 차갑지 아니한 포근한 살결이 꿈인걸 일깨어준다. 안고는 있는데 동떨어진 느낌에 눈을 떴다. 일어난 나는 아픈 머리를 짚고 일어났다.
체감상 사흘 정도 앓았다. 열린 천장이 보인다. 옆에는 눈을 감은 지민이 작게 숨을 고르는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있었다. 정원의 잔디 위에 누워있던 우리는 그대로 각자의 꿈에 들어갔었다. 주위에 떨어진 안대를 찾아와 지민의 옆에 그대로 앉았다. 차가운 손이 그의 배 위로 곱게 올려져 있다. 보랏빛을 띄는 흑장미색을 머금은 도포가 얇아 몸의 선이 보인다. 허여멀건 지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죽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 같다. 꽃잎색으로 물든 입술. 현재 눈 뜬 이 시각, 새벽의 별이 뜬 하늘에 회색빛이 돈다. 연못은 무엇보다 더 투명한 물로 흔들거렸다. 조용히 지져귀던 작은 새들이 다들 잠자는지 조용하다. 거북이마저 잠자는 시각. 조심히 손을 가슴팍에 얹었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이 차갑다. 지민의 심장은 차가운 피를 흘려보냈다. 건들이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낙엽같은 나를 위로해준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자신도 녹의 공주 그늘에서 힘들면서. 그렇게 닿지 않는 혼잣말을 외롭게 뱉었다.
"여기에 녹의 공주가 사는군요."
차라리 말이다. 차라리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조금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내가 떨구어버린 그의 손이 너무 차가워보여 미안함을 담아 쥐었다. 내 손이 얼어붙는 대신 온기의 장소가 바뀐다.
"그럼 내 안에 누가 살았으면 좋겠는데."
바보 같은…! 갑자기 뜨여진 눈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덥썩 잡는 차가움에 꼼 짝말고 숙인 몸을 어쩌할 수 없었다. 손을 빼내려고하자 더 억세게 잡는 지민에 거리가 좁혀졌다. 석류 같이 붉은 입술에 민망해졌다. 그 입으로 뭔 말을 할지,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혹시라도 심장박동소리가 들려지면 낭패인데 안타깝게도 숨길 거리가 못 되는 것 같다. 내려다보는 그는 아주, 예뻤다.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래. 지민은 곧바로 내 손을 놓았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등을 돌린다. 쓸쓸한 손이 공중에서 떠돌다 주먹을 쥐었다. 서서히 해가 모습을 드러내 노란 빛물이 정원으로 넘쳤다. 붉은 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뭔 호강을 누리려고 기대하는 거지. 꽃을 피우기 전에 새싹을 뽑아야 내 마음이 덜 아플 수 있는데. 몸도 힘든 와중에 머리까지 힘들면 내가 이 세상을 직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풀잎에게 다녀올려고 禁池금지의 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스락, 풀잎이 눌려지는 소리. 몸을 일으킨 지민이 내게서 등을 돌린채 말했다. 그러함에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너처럼 어여쁜 모습으로 날 바라봤을텐데. 왜 내게 사랑한다 한 마디도 안 해주고 그렇게 떠난 걸까. 안겨준 건 고작 흉터뿐이잖아. 날이 선 칼이 심장을 파고 들 땐 그렇게나 아팠는데."
자신의 마음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말로 마음을 베이게 한 풀이 더 아픈 법. 몸으로 받는 칼보다 말이 더 쓰리고 오래가는 법이다.
"쉽게 내뱉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었고, 내뱉지 않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었어. 그 단어는 목울대에서 걸리는거야. 나올 듯 말 듯. 내 사랑은 구름같았나봐. 항상 펑펑, 눈이 내렸어. 사랑으로 가득한 눈이. 거짓임을 깨닫고 모두 녹아버렸지. 그 이후로는 눈을 다 내려서 말라버린 구름이 공기중으로 흩어졌어. 내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면 구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조금씩 눈을 내렸으면. 한꺼번에 주지도 말고 메마르게 하지도 않고."
"꼭 그러세요. 그런 사람이 생기면 꼭 조금씩 사랑해주세요."
아프다. 많이 가슴이 아프다. 그럴 사람이 생길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게 나일리가 없다. 그리고 난 그에게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보이지않는 햇빛을 보려고 하면 장미가시들을 밟고 가야했다. 이미 망가진 마음. 무서웠다. 눈을 얹은 꽃이 너무나 빛났다. 지민이란 꽃은 너무 예쁘고 나와 정반대였다. 지민의 얼음꽃을 꺾을 용기조차 남지 않은 내가 지민에게서 멀어지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지민 곁에서 힘겨워 하는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일까. 이곳을 나가면 다시 못 돌아올지 모른다. 먹먹한 가슴은 드러내지 않아야 하니까 덤덤한 모습을 보여준다. 등을 돌린 지민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설령아."
"예."
"돌아올거지?"
"……."
어둠이 내린 정원의 천장이 닫혔다. 하늘이 더이상 보이지 않고 연못에서 비치는 물빛만이 주황 머리를 비춘다. 그렇게 아름답게만 남아주길. 어둠에 가려진 나를 멀리서 기웃거리는 지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 나는 이를 악 다물었다. 우리 사이에는 허공만이 남았다. 누구 하나 줄일 수 없는 허공의 사이에 소년의 목소리만이 온다.
"기분이 이상해. 지금 네가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
"……."
"……."
문을 열고 나갔다. 정원과 다른 녹의 세계. 禁池금지의 문을 닫고 나니 울음이 차올랐다. 나는 지민을 등졌다. 문에 기대어 앉아 아이처럼 엉엉 우는 나는 후회를 한다. 이게 우리 두 명에게 제일 아프지 않는 방법인데. 깊게 파고들지도 않고 새싹을 짓밟히는 아픔만 견디면 되는데 왜 이리 숨이 턱턱 막히는지 모를 일이다. 지민을 멀리서 바라보는게 내 최선의 행복. 가까이서는 내가 욕심이 나서 버틸 수 없어. 아픔은 감수하려고 받는 것이다. 흠벅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았다. 그럼에도 나오는 것들은 안대로 가린다. 눈이 돌아왔다는 것을 가리기 위해 안대로 시야를 묶었다. 붉은 검을 들고 복도를 걸었다. 수근대는 소리와 함께 휘청이며 걸어간 복도. 미로같은 복도에서 살아온 나는 길을 더듬으며 공주의 방을 찾았다. 내 자리니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하는 곳. 공주의 방문 앞에 앉아 칼을 들고 복도를 짚었다. 조용했던 방 안에서 도자기가 깨지는 소음이 뚫고 나온다. 거북궁의 주인이 운명을 거부하는 소리가.
"왕위따위 내가 왜 올라가야 하느냐!"
"마마, 고정하셔야 합니다. 설령제가 나흘밖에 남지 않았사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해야하는 내가 꼭두각시 같구나. 여기에는 내가 없어. 어찌 이렇게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야! 내가 적호를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알고 숨이 넘어갈 듯한 아버지는 그딴 명령을 내리는 건지. 이제야 나는 적호의 모든 것을 빼앗은 천하의 모진 년이 되었구나!"
"적호님은…."
들렸다. 문 너머로 가슴이 알고 싶었던 이야기가 흘렀다. 내 심장에 비녀를 꽂았던 사실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 줄 아느냐. 내 어렸을 적을 같이 하고 나를 업고 다닌 그 사람이 원래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사람 것을 계속 빼앗아갔어. 방 안에 하나 둘씩 차는 보석함, 비단옷을 볼 때마다 죄악이 내 몸을 가득 쌓였지. 내 것들이 아닌 적호의 것인데 내 손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자란 적호는 모를 게야. 내가 자신의 물건까지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걸. 그 사람, 제 건 그 붉은 칼 밖에 없어. 거렁뱅이 같이 같은 옷을 닳도록 입으며 그 칼로 내 목숨을 노리는 것들을 베었지. 제 조국의 사람들을 죽이는 그 사람 마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야. 하지만 손을 내밀려하면 녹은 홍을 꺼트려야된다는 그 눈길에 숨이 졸렸어."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사람이다. 녹의 사람이지만 적호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았을고?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적호를 보면 가슴 아팠다. 만약 녹이 아닌 홍이 승리했다면? 내가 적호의 밑에 있었을 게다. 뭘 해도 우리의 운명은 바뀌지 않아. 누군가의 발에 깔려야 했어. 사람 같이 대해주려 해도 보는 녹의 사람들 눈때문에 그 사람 등을 밟아야 했다. 계속 상처를 내고, 살을 지져 쇠로 문대고, 살을 베고. 볼 수가 없다.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볼 수가 없다. 조국도, 사람도, 이름도 포기한 그 여자는 자존심도 없지. 그딴 모욕을 어찌 참고 또 내 밑에 밟혀가며 등을 내주니 속이 뒤집어지고도 남았을 것인데. 내가 그 여자였으면 이미 자결했을 거야. 버티지 못하고 제 붉은 칼로 내장을 찔렀을 거다."
"……."
저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제가 불쌍하지 않다 하셨으면서 너무 하십니다.
"심장에 화살을 꽂는 억척같은 말을 뱉으며 항상 후회했다.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그 적호의 무너지는 붉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어. 이제는 내가 그 사람 눈을 빼앗았구나. 눈을 빼앗았어. 빼앗을 게 없어서 이젠 불구로 만들고. 난 아직 어려. 고작 스물 둘, 내가 그 높은 자리에 어떻게 올라가니. 피로 물든 그 자리에 올라가면 그 시각부터 전쟁을 해야하는데, 내 대신 적호가 전장에 나간단 말이다. 그렇게 최후를 맞이할 적호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이 가슴에, 돌 하나가 내려앉은 듯 갑갑해 죽을 것 같아. 그 사람곁에서 보호받는 게, 보호받는 게 아니야. 아픔이 전해져오는 것이 나까지 통증을 느끼게 만들어. 무기력한 그 눈이 죽어가서 죄책감에 밥알을 씹을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살아가는 시간만큼 적호가 죽어가는 시간이라고 느껴져서 숨을 쉬기 미안했어."
안대를 한 게 잘한 짓인지 눈물이 저절로 스며들었다. 적적한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방문에 기댔다. 풀잎이 조용히 울음을 토하는 소리와 공주의 물기 어린 소리가 깊게 뇌리에 박혔다. 한참을 그렇게 각자 슬픈 감정을 삼켰다.
"세상에 운명이 어디있어. 더럽고 치사한 걸 뿌리치려면 다 운명이라 치부하지. 내가 홍을 꺼트리는게 운명이라면 받아드린다. 하지만 왕의 자리가 아랫 것들을 밟는 자리라면 거부하겠어. 한 사람 인생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올라가고 싶지 않아. 난 홍의 황제가 두려워. 적호에게 모질게 했던 만큼 나는 다 돌려받을 게야. 내 죽는 꼴 보고싶지 않으면 사촌이나 친척 나부랭이들을 알아봐. 나말고 더 좋은 왕이 될 사람들이 많을 게야."
"공주님…. 설령제가 나흘 남았습니다. 어차피 치루셔야 해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엎으실 수 없습니다."
"…제기랄."
"준비가 덜 끝나셨으니 궁녀들을 다시 불러들이겠습니다."
떡하니 공주의 방문 앞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 풀잎이 눈물을 닦았다. 나를 조심히 피해 궁녀들에게 간 풀잎. 머리 위로 떨어진 슬픈 눈빛. 닫힌 공주의 방문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안대로 보이지 않지만 눈이 피곤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여기까지면 되는데 왜 자꾸 동정의 표를 던집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는데 계속 그렇게 슬퍼만 하면 감정 낭비랍니다. 우르르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나를 치고 지나간다. 나는 그럼에도 우두커니 앉아 길을 막았다. 공주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리에 박힌 돌이 돼서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발과 몸에 치여도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거북궁을 떠들석하게 했다. 설령제가 나흘 남았다.
8. 황혼.
돌고 돌아서- 김준수
사흘. 사흘이 지났다. 꼬박 공주의 방앞에서 새었다. 있는 죄책감, 없는 향수병에 마음이 치였다. 거북이를 잊지 못 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흘이 지난 밤이 되자 내 눈이 실명됐던 일이 없던 것처럼 궁은 돌아갔다. 내가 성기를 잃었을 때처럼, 마치 개미 하나 죽은 것처럼 세상은 돌아갔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더듬으며 공주의 방으로 들어온다. 새근새근 숨소리는 낮에 있었던 그녀의 고해가 없었던 마냥 차분하다. 방바닥에 앉아 벽에 기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자 풀잎이 안 자고 있었는지 내 손을 덥썩 쥔다. 바쁜 일정에 오랜만에 잡는 풀잎의 손이구나.
"적호님. 괜찮으세요? 풀잎년이 적호님의 눈이 되어드릴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공주님이 일부러…."
"알아. 괜찮아."
"그래도 이제 앞이 안 보이실텐데 어떡,"
"내 언제 이야기해준댔지 않았느냐."
안대를 풀고 눈을 떴다. 갑자기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빛에 캄캄한 눈을 껌뻑이다 풀잎의 퉁퉁 부운 눈이 보인다. 네가 보여. 정말 보입니까? 정말로요? 그래. 난리법썩인 풀잎의 어깨를 누르고 말했다. 아픈 얘기지만 두리뭉실하게 눈이 보이는 이유를 말해준다.
"어디론가 다녀왔어. 한 거북이를 만났지. 그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어."
"꿈의 얘기입니까?"
"한 겨울 밤의 꿈같은 이야기지."
"삭막한 세상에서 꿈이라도 꾸셨다니 다행입니다."
"점잖게 들어. 농담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니."
"알겠습니다. 적호님께서 한 번도 이야기를 해주신 적도 없는데 말이죠."
소쩍새 소리가 들리고 머쓱해졌다. 내가 풀잎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 적 없나. 그럴만도 하지. 좋은 것을 겪은 적이 없는데. 헛기침을 하고 풀잎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잠자는 공주 옆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꾸민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하여튼 공주님과 숨바꼭질을 할 때 한 연못을 보았어. 사실 그 연못을 봤을 때는 더 오래 전인데 항상 가고 싶어했던 곳이라 고민을 하고 있었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데요?"
"정원. 깜깜한 정원에 작게 빛나는 연못이 있었어. 공주님 방 안에 정원이 있다고 생각해봐. 그 안 끝에 연못이 있었어."
"그럼 개구리랑 연꽃도 있고 부레옥잠도 있었겠네요?"
"아니.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산호색으로 빛나는 연못. 그 주위는 안개로 가득차서 신비롭다고 해야하나."
"그런 곳이 있답니까? 녹의 나라에 그런 곳이 있다면 저는 바로 짐을 싸서 도망쳤을텐데요."
"그럴 순 없으니까."
"옙."
"헌데 오늘 네 표정이 밝구나.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적호님이 이야기해주시니까요. 이 년에게 좋은 일이라고 있겠습니까. 고작해야 고기 반찬 하나 얻어 먹었다 이런 거지 별 거 없습니다. 계속 해주세요!"
"…그렇구나. 그래, 그 연못에서 거북이 하나가 살더라니. 그 거북이의 눈이 참 영롱했다. 나무에서 나는 보석인 호박이 눈에 박혀서 나를 올려다 보더니 말하더라."
"뭐라고요?"
"흉터다, 라고. 나를 치유해주는 그 거북이가 나중에 말해주길 자신이 오천 년동안 살았다고 하더라. 생긴 거로는 갓태어나게 생겨서 하는 행동도 귀여웠는데."
"적호님 안 어울려요."
"뭐가?"
"적호님이 뭘 보고 귀엽다고 한 것 처음이에요."
"별 게 다 처음이구나. 그 거북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있는데 보여주랴?"
"네!"
"종이 한 장과 붓 한 필만 몰래 가져오련."
들키면 죽는데 목숨을 걸고 들고 올게요! 벌떡 일어난 풀잎이 쪼르르 공주의 서랍을 뒤지더니 먹물을 붓에 묻혀 종이와 한 장을 가져온다. 거북이가 입으로 쓰던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 종이에 그리자 雪零이 완성되었다. 참 귀여웠는데. 이걸 '설령'이라고 읽더라. 이게 설령님 이름 아닙니까? 그래. 내 이름을 이렇게 쓴다고 해. 고 놈 참 기특하네요. 종이를 요리조리 돌리던 풀잎이 추억을 돋게 하는 말을 한다.
"이거 혹시 가로, 세로 길이 같습니까?"
거북이도 같은 길이인 것을 모르고 헤매더니 눈대중으로 알아맞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갑자기 아파왔다. 마구 뛰는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 붓을 종이 위에다 두니 작게 번진다. 거북이의 발자국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던 지민의 옆모습이 생각났다. 주황 머리, 검은 비단 도포. 보석처럼 빛나던 눈동자까지.
"용하네요. 꿈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그 거북이가 적호님 글도 가르쳐주고 흉터랑 상처도 낫게 한 거 아닙니까? 밤마다 사라지시더니 그런 곳을 다녀오셨군요."
"그렇지."
"그런데 왜 오늘은 가시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거북이가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몰래 홀려서 갔다왔나봐. 어떤지 한 번 들어보거라."
"알겠습니다!"
붓을 질끈 쥔 풀잎이 똘망똘망해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바둑돌같아서 맑아보였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야무진 풀잎의 손목이 성할 데 없어보인다. 그걸 보며 지민의 사람인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완 다르게 아름다웠다 상상만으로도. 내가 그의 눈에 마음이 동했나. 볼 때마다 심장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떠올린다. 내 얼굴에 가까이 왔을 적 그의 모습을.
"머리가 주황색이었어. 황색보단 어떻게 보면 홍색에 좀 더 가까운. 눈은 보석을 박은 것 같이 호박색이고. 피부가 백옥같이 하얘. 흑장미같이 보랏빛을 띄는 검은색 도포, 아 얇았어. 몸의 선이 다 보일만큼 얇아서 몸에 붙어 흘러내렸어. 그는 목선이 예뻐. 목젖이 나와있고 얼굴에 작은 점이 세 개 정도 있었고. 이마에 두 개, 볼 한 쪽에 하나. 거북이 일때는 몸집이 작아서 처음에 자라인 줄 알았어. 그는 자라라고 말하는 것도 싫어하고 거북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해. 그렇게되면 부를 호칭이 없어서 거북이라고 부르는데 정말 싫어하지. 정작 자신은 거북이인 모습을 더 좋아하고. 거북이일때는 앙증맞아서 귀여운데 사람이 되면 냉철하고 자신이 기분이 좋을 때 잠깐 경계를 풀어. 그리고 입술은 웃을 때 벚꽃을 물은 것처럼 분홍으로 물들어."
내 말을 듣으며 그림을 그리다 이상하다고 느낀 풀잎이 고개를 번뜩들고 말했다. 수상한 눈치. 종이에 지민이 그려졌다. 얼추 그와 비슷하게.
"그 사람 연모하죠?"
"뭐?"
"좋아하시냐 말이에요. 딱 봐도 좋아하는 사람의 말투인데? 막 사랑에 빠진 듯한 말이잖아요 이건!"
"아니야. 안 좋아해."
"이미 걸렸수다.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어요? 얼른 가야죠! 그 사람 기다릴거잖아요."
"거북이는 좋아하는 연인이 따로 있어. 그리고 쓸데 없이 희망 품어봤자 안 돼. 너도 알잖니. 난 타인을 상처주고 타인에게서 상처받아."
"엑…. 그래서 가시지 않는거에요? 도망치시는 거에요?"
"도망이라니. 물러나준거잖아. 나도 그 사람도,"
"적호님. 그 거북인지 뭔지 기다리고 있을거에요. 사람 냄새도 못 맡아보고 살은 오천 년된 거북이가 적호님 몸도 치료해주고 글도 가르쳐줬는데 매정하게 돌아서시는 게 어딨어요."
"아냐. 어찌 보면 거래였거든. 거북이가 이해가지 않는 예언이 나도 해당되는 것 같다고 했지."
"뭔데요?"
"거북이가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도 녹이 아닌 홍을 품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대."
"그 거북이, 녹의 사람을 사랑했어요? "
"……눈치가 빠르네."
"근데 왜 그걸 몰라. 오천 년동안 고민했다면서. 그냥 변명 아니에요? 적호님 도와는 주고싶은데 건지가 없는거죠. 거북이도 알 걸요. 하 참, 왜 몰라 이걸. 나도 밤푼이도 아는데. 녹 아니면 홍. 품는다는 뜻이 별 거 있나요? 사랑하란 뜻이잖아요."
사랑이란 단어가 낯설다. 그리고 거북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을까. 만약 홍의 사람인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녹의 나라에 충성하지 않고 지민에게 완전히 돌아선다면? 혼란스러운 머리에 지민의 모든 모습이 지나갔다. 흉터를 없앴을 때부터 내 손을 잡고 내게 돌아오라고 했던 말을 했던 거북이. 내가 보고 싶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마지 못해 해주면서 내 몸을 어루만져줬다. 그 손길이 아직도 뚜렷하게 내 살에 남았는데. 차가움이 가득하던 그 손. 마지막으로 하얀 얼굴도 웃던 지민의 입술이 분홍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지나간다. 그리고 풀잎이 자신의 품에서 한 편지지를 꺼내 어지러운 내 손에 쥐어준다.
"가요. 거북이한테 가요. 그리고 이걸 읽어 달라고 해요. 변명거리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다시 돌아가는거에요."
"…이게 뭔데?"
"홍의 올빼미 아시죠? 남준이라던 그 남자. 그 남자가 검은 망토를 쓰고 와 제게 몰래 쥐어주었습니다. 왜 적호님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걸 알면서 주는 걸까요? 아마 남이 읽어주는 걸 알지도 몰라요. 그 남이 거북이요. 이렇게 된 이상, 적호님 운명이 거북이일지도 모르겠네요. 적호님이 홍의 사람이잖아요."
두꺼운 쇠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것마냥 머리가 띵했다. 홍의 나라에는 돌아가지 못해. 사신들이 분명 반대할 게 뻔해.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공주. 그곳으로 가도 불행은 마찬가지고 전쟁은 여전히 일어난다. 녹에 있어도 불행은 여전하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내가 살 곳이 필요해. 제발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지민의 곁이다. 설령제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전쟁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편지를 꾹 쥐고 일어났다.
"데리러 올게. 전쟁 전에 꼭 데리러 올게. 풀잎아 기다리고 있어. 널 데리고 갈 거야."
"어디로요?"
"하얀 눈이 내리는 나라로."
빙그레 웃는 풀잎이 좋아요를 연발한다. 잠결에 몸부림치는 공주에 놀라 자리를 치우는 풀잎.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치우는 모습을 뒤로 데리고 올 것이라는 약속을 던졌다.
"좋아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있을게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디서 기다리면 되죠?"
"이곳. 공주님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다들 거북궁 밖에서 설령제라고 정신없을거야. 꼭 이 자리에 있어야 해."
"그래요. 얼른 가보세요. 거북이보러."
내 심장이 요동쳤다. 한동안 꾸깃꾸깃 접는다고 힘들었던 가슴이 펴져서 갈망한다. 처음처럼, 그때처럼. 소년의 목소리를 갈망한다. 편지를 들고 공주의 방을 나가 미로같은 복도를 서둘러 걷는다. 복잡한 거북궁의 복도를 걷고 돌고 마침내 禁池금지의 문 앞에 섰다. 이제 이 문을 열면 지민이 보일 거다. 이 문 앞에서 수 많은 감정들이 오고 갔다. 쿵쾅대는 설렘, 다시 오지 못한다는 슬픔, 떠나야했던 고통, 이 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을 거북이에 기쁨. 나는 떨림과 설렘, 미안함을 겪고 있다. 문을 꽃잎 만지듯 조심히 열고 발을 내딛자 보이는 것은
야윈 인간의 지민과 투명하고 하얀 여자. 쿵 내려앉는 억장. 입술을 부비던 여자가 지민의 주황 머리를 헤집더니 손목을 잡혔다. 그러자 순순히 밀려난 여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불안해 하던 여자는 지민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녹의 공주구나. 내 자리를 녹의 공주가 채웠었구나. 괜찮아. 지금 본 녹의 공주는 망령일 뿐이야. 이런 아픔은 견딜 수 있어. 언제까지나 녹의 공주와 고리로 연관된 지민이었던 걸 알고 있었잖아. 눈으로 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정승이 되고 말았다. 와장창 깨지는 유리같은 심장이 떨어져 발등을 찍는다. 마음에 피가 또 번져서 자국이 된다. 달빛에 사라지자 지민이 나를 향해 뒤돌아본다. 안녕 거북아. 난 너앞에서만 작아지는 사람이야. 언제까지 상처를 받을지 의문이구나.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까.
설령이 떠난 지 사흘이 지났다. 설령제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설령이 떠난 시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하루가 남았다. 내일 하루만 지나면 설령제가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끝나면 모든게 망가질 텐데 모든 걸 버리고 설령은 나를 떠났다. 설령이 눈을 잃고 돌아온 그날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사람이 바람 같아서 살짝 겁을 먹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을 잡는 한 가닥같은 말에 대답이 오질 않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길게 느껴지는 나날에 힘이 빠졌다. 외롭고, 그립다. 조심스레 찾아 잡았던 그 뜨거운 손이 빠져나가고 내 울타리에서 설령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왜 뒤늦게 내가 잠자고 있을 때 내 가슴 위로 손을 얹었는지 불가사의하구나.
쓸쓸한 달빛. 나는 무얼 기다리고 있으려나.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가 생소하다. 옆에는 설령 대신 다른 사람이 공백을 채웠다. 달빛에 내려온 새하얀 녹의 공주. 잔잔한 연못 앞에 앉은 나는 무릎을 앉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내 곁에 눈녹듯 앉아 내게 속삭인다. 흰 살결, 하얀 옷. 설령과 달리 녹색의 눈. 설령과 닮은 그녀의 외모. 하지만 설령과 달리 그녀가 하는 말은 생김새만큼 차갑다.
"거봐, 내가 말했죠? 그 아이는 오지 않을 거에요."
"나도 알고 있었어.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녹과 홍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야. 안타까워."
"혹시 몰라. 녹과 홍이 사라지고 나면 백의 나라가 올지."
"그래요? 그런데 지민, 사람이 되길 싫어했잖아. 왜 그러고 있어? 난 거북이일 때 당신이 더 좋아요."
"당신 말고 설령이 사람인 모습을 좋아하거든."
"뭐야, 이제 당신 마음에 나는 없는거야? 영원히 사랑한다며."
"무슨 소리. 난 당신 아직도 사랑해."
"거짓말. 그러면 그 아이에게 왜이리 잘해줬어요?"
"당신 닮아서."
"지민은 거짓말쟁이야.그냥 그 아이가 좋잖아."
"당신도 거짓말쟁이지. 내게 사랑한다고 거짓말했잖아."
"그렇긴 하지. 이 세상에 거짓말쟁이가 아닌 사람은 없어요."
"그렇군. 좋은 뜻이라 받아들일게."
"왜 내가 당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해요?
"네 눈빛이 너무 진실했거든. 네가 나를 절실히 사랑했다면 내 심장을 칼로 후비지 않았을거야."
"그랬나요. 그렇다면 설령 그아이, 당신 곁을 왜 떠났을까요?"
"그러게. 그건 나도 몰라."
"나를 닮았네요. 이 그림 지민이 그린거에요? 예나 저나, 지민 그림솜씨는 다를 바가 없네요. 빼다 박았네요."
"응. 당신 닮았어."
풀밭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든 공주가 내 옆에 앉더니 초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그 표정 오랜만이야. 첫 번째 전쟁 시작할 즈음 본 것 같았는데 오천 년 만이네. 연못에 작은 파동을 만들던 내 다리가 젖었다. 그리고 연못 위로 설령에게 온 편지가 떠올랐다. 젖은 편지엔 슬픈 내용이 담겨있다. 그걸 본 공주는 편지를 흐트러버리고 종이를 풀밭에 내려놓았다. 나는 연못에 떠오른 설령의 어두운 얼굴을 초점 없는 눈으로 쫓았다. 禁池금지의 문을 열고 나가버린 사람. 공주는 내 얼굴을 만지며 불안한 표정을 했다. 그래, 그 표정 오랜만이라니까. 나와의 사랑에서 여유롭던 당신이 내게 그 불안한 표정을 보여주니 볼만했다.
"지민."
"응."
"나 아직도 사랑해요?"
"당연하지."
"그렇다면 입 맞춰주세요."
머뭇거리던 내 입술에 닿은 공주의 입술 느낌이 짙어졌다. 어느새 내 위로 앉은 공주가 나를 갈망했다. 차가운 사람들끼리 나누는 온정은 차갑디 차갑다. 너는 혼령인데 내가 뭘 어찌 하랴. 주황색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더 파고 드려고 하는 공주에 얇은 손목을 붙잡았다. 닿은 입술 살이 멀어지고 하얗게 질린 너는 내게 말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 벌벌 떠는 그 음색이 우스웠다. 나는 터진 실소 후 얼굴을 굳혔다. 왜 이제 와서 나를 붙잡아. 뿌연 연기로 사라지는 공주가 배신당한 얼굴을 한다.
"지민은 변한 거야."
"난 변한 거 없어."
"아니. 곧 변할 거야. 지민을 잘 알아서 별로에요. 그런 변화."
"그래? 그럼 한 번 물어볼게. 내가 녹이 아닌 홍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게 별로야."
"무슨 대답이 그래? 하 참…. 공주님, 백의 나라를 본 적 있어?"
"글쎄, 그건 지민이 찾는 문제인 거 같은데. 나는 왜 당신이 같은 실수를 할 듯한 기분이 들지. 설령이다!"
사라진 공주. 흔적도 없다. 달빛만 처량하게 남아 나를 비추고 뒤에선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
"……아."
넋을 잃은 설령이 나를 보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禁池금지의 문.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었던 녹의 공주와 나를. 야위어가는 나처럼 황폐한 그림자가 얼굴에 진 설령. 그 손에 든 편지지는 나를 방치해두고 뒤늦게 찾아오기 위한 변명거리? 지금 놓치면 또 달아날 것같아 굳은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손목을 잡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구석에 내몰자 붉은 눈에 나를 담는다. 내 주홍 머리,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하얀 얼굴. 나처럼 평온하지 못했을 거야. 내게서 벗어나려 하지마. 이 곳은 너와 나의 안식처고 벗어나면 온갖 상처를 받고 말 거야. 그 붉은 눈을 보자 내 가슴팍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야 겁쟁아. 도망가고 잘 지냈니?"
"……."
"나는 아닌데."
말이 끝나도 너는 말이 없다. 반가움 뒤론 답답함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손목을 놓고 뒤를 돌았다. 내가 어떻게 해도 너는 여전할 거야. 어찌 이리 답답할 수 있지. 녹의 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힘들다. 그래도 너는 너고 녹의 공주는 녹의 공준데. 다를 거라 생각했던 내가 틀렸나? 벽을 보고 얘기하는 느낌에 고개를 젓자 옆구리로 팔이 들어와 꼬옥 안는다. 얼굴을 등에 묻는 설령에 심장이 멈췄다. 등에 닿은 볼에서 따뜻함이 퍼지고 배에 깍지를 낀 손. 차가움 말고 너와 같이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핏줄을 탔다. 그 아슬아슬한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어긋났던 손의 맞잡음도 이젠 제자리를 찾았다. 같은 온도로 변하는 손이 이질적이다. 나는 그렇게 차갑게 식었던 마음에 너의 홍의 불꽃이 옮아왔다.
"안녕 못합니다."
"……."
"보고 싶었습니다."
"얼만큼?"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많이요."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이제 나와 같이 있으면 되는 거야. 날 꼭 쥐고 놓지 않으면 돼. 녹의 공주를 닮은 너와 같은 실수를 한대도, 같은 흉터가 나도 나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다만 앞만 보고 가자.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울기만 하지 말고 앞으로 가면 되는 거다. 함께.
소쩍새 소리 말고 반딧불이가 피어올랐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처럼 미묘한 반딧불이가 피어올라 빛나는 산호색 연못을 맴돈다.
-短篇 거북뎐 四편 (完)
마지막 五장
9. 소원.
지켜줄게
"이 포옹의 의미는 뭔데."
"…겨울이라 추워서 그럽니다."
"은근슬쩍 넘어가려하긴."
지민의 등에 붙어 얼굴을 부드러운 도포에 묻었다. 푸른 장미꽃 향기.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나니 마음에 장작을 뗀듯 타닥하고 불씨가 피어올랐다. 꿈 속에서 항상 내가 지민의 뒤에서 안았는데 현실에서 펼쳐지는 환상이 두렵다.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민이 깍지를 풀어 제 손에 잡고 연못앞으로 끌고 간다. 따뜻한 손이 꿈같고 더이상 시리지 않았다. 냉혈이 빠르게 돌고 열기가 나의 맥박수까지 올린다. 잔디 위로 앉게 되니 지민이 내 뒤로 앉았다. 머리를 쓰담는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머리에서 목 뒤로, 목에서 어깨로 느리게 빠지는 손이 멈췄다. 그리고 어깨를 팔로 감는 지민에 눈을 떴다. 불편한지 앉은 다리 위로 나를 들어올려 앉힌다.
가슴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혹시 그 안에서 살던 얼음꽃이 녹아서 내가 자랄 공간이 생겼으리라 벌써 장담까지 해버린 가슴이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나는 모르는 건데 일말의 희망에 그렇게 나는 기뻐했다. 하지만 희망이란 줄에 손을 뻗어 잡으면 그저 투명한 빛줄기일까 겁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나다. 마음아 경거망동마라. 확신이 없다면 꿈을 품지마라. 잊었느냐, 나는 불행한 사람이란 것을. 그렇게 나는 기댈 곳 하나 믿지 못하고 모자라며 딱하다.
"이러지 마세요."
"가만히 좀 있어봐."
"남사스럽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뭘. 이대로 있어. 참 포근하고 좋구나."
어깨에 얼굴을 두고 끌어 앉는 지민의 손이 내 손위로 겹쳐왔다. 살얼음 같기만 하던 손이 펄펄 끓는 내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간다는 건 너무나 달콤하고 가슴 저렸다. 사이가 좁혀지는게 믿겨지지 않지만 가능성이 보이면 보일수록 욕심이 생긴다. 등에 닿는 지민의 가슴에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저와 같은 박자로 뛰고있는게 착각이 아닐런지요? 따스함이 거짓이 아니지요?
"오늘은 무얼 가르쳐줬으면 좋겠느냐?"
"… 거북님이 하고 싶은 거라면 모든지 다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요."
목 언저리에 고개를 기댄 지민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넌 또 능구렁이 담넘듯 넘어가려고 해. 움찔함을 참고 눈망울만 도륵하고, 굴렸다.
그리고 내가 거북이라고 하지 말랬지. 지민이라고 몇 번 말했을까.
숨 같은 얕은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니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주황머리 그 머리카락이 귀를 간질거렸다. 그런 굳은 손을 겹쳐 붓 하나를 잡게 만드는 지민이 종이를 앞에 둔다. 하얀 손이 종이를 짚고 내 손을 움직인다. 어떨떨하게 긋는 선이 시원하고 새롭다. 곁에서 말하는 지민의 가슴팍에서 웅웅거림이 내게서 전달되어 간질거린다.
"비悲. 이때까지 네가 겪어온 것들은 '슬플 비' 悲 라고 한다. 그 '비'란 것이, 네 세상에 잔뜩 내려 널 아수라로 떠내려보냈어."
이어서 지민이 그 종이를 구겨 공중으로 던지니 눈으로 변해 사르륵 공기중으로 사라진다. 남은 눈알갱이들이 풀잎으로 떨어져 햇빛에 반짝인다. 새 종이를 끌어와 두고 내 손을 다시 잡는다. 붓으로 쓴 두 번째 한자는 종이를 꽉 채운 크기.
"受 받을 수, 心 마음 심. 이 두 글자를 합치면 무슨 한자가 나오는 줄 아느냐?
愛 사랑애. 마음을 받는 것이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주고, 누군가가 주는 것을 네가 받는게 사랑이야. 억누른다고 사라질 것이었으면 피어오르지도 않았겠지."
"……."
연못 물 위로 띄운 종이는 곧 물에 녹아들었다. 대신 글자만이 동동 떠 부드럽게 흔들렸다. 어수선한 거북궁이 흔들림에. 설령제가 내일이다.
지민의 품에서 벗어나 연못 위로 뜬 글자를 만지자 연못이 하얗게 변한다. 흰 불빛이 얼굴을 비추며 한 형상이 물에 일렁인다. 지민은 내 옆에 앉아 싱그러운 호박색 눈을 반짝였다. 수면에 눈덮인 하얀 동산이 펼쳐진다.
언덕에 노니는 하얀 머리, 하얀 피부.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의 아이들. 펄럭이는 흰 옷을 입고 연을 날리기 위해 달리는 아이들. 꺄르르 아이 웃음소리가 나다닌다. 텅 빈 하늘에 흰 구름들이 무리지어 흩어진다. 그렇다. 지민이 죽음 속에서 보았던
백의 나라다.
전에 지민이 내게 말하고 보여줬던 모든 것들이 스쳐지나간다.
네모난 것들이 땅 위에 서있다. 땅에 닿는 부분이 낡아서 조금 금간 듯. † 모양이 네모난 것들 위로 앉았다. 네모안에 또 작은 네모들이. 사람들이 네모난 것들 앞에 작게 그려져있다. 거북이가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푹 빠져서 연못물을 울렁거렸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긴 의자에 앉아 있다. 헐렁이는 흰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하얀 산으로 달려가 연을 날린다. 녹색과 홍색이 잘 어우려진 연을. 그러더니 하얀 동그라미가 땅으로 내린다. 만지면 뽀드득 거릴 눈이 내린다. 넓은 대지에 다른 네모난 것들이 정렬되어 눈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녹과 홍은 잠잠하게 눈에 녹아들었다. 낮은 산과 작은 마을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항구와 함께.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내가 말했지?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나와 녹의 공주가 꿈꾸었던 백의 나라로 가자. 네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널 위한 눈이 내리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백의 나라로. 백의 나라란 가상의 세계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내 어디 기댈 곳 없고 어디 제대로 마음놓아 숨 쉴 수 있는 곳 없다. 그 곳을 가기 위해선 한 가지 어려운 조건이 충족되어야했다.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백의 나라로 갈 수 있다고.'
연못 안 흰 머리의 아이들이 연을 하늘로 올리는데에 성공하자 물이 맑아졌다. 그 못 위로 보이는건 붉은 눈동자의 나와 호박색 눈동자의 너.
네 마음에 내가 있다면. 녹의 얼음꽃이 녹고 홍의 불꽃이 옮아갔다면.
내 지금 이 생각이 틀렸다면 네가 나를 그렇게 오롯이 나를 담고 있을까. 지민은 손가락으로 수면을 툭 건드리고는 내 집중을 빼앗았다. 내 눈에 네가 담긴다. 아직 그 속에는 녹의 공주가 살잖습니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거북이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그 속에서 빠져 숨막혀 죽었으면 좋겠다. 내 시야는 흐려지고 내 미래는 어두워서. 백의 나라라는 망상에 빠지면 뒤에 올 아픔이 가늠되지 않아. 거짓이란 것을 알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가슴이 느껴야했다. 지민 너도 알잖아. 네가 겪어봐서 알잖아. 그 심장에 박혔던 녹의 공주의 칼. 아직 네 가슴에 남아있잖아. 오천 년의 시간은 약따위가 되지 않았다. 나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고통들이 사실 아무렇지 않았다. 난 분명히 아프고 슬프고 애통하다. 내 마음은 아수라장이다. 황폐한 땅이 갈라져 금방이라도 쩍 갈라질 것만 같다. 난 그걸 외면하고 이제껏 참아왔는데.
더이상 차갑지 않은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자연스레 몸을 기울였다. 스르륵 머리를 지민의 품에 기댄 나는 썰물처럼 몰려오는 울컥함을 토했다. 홍의 황제 전정국. 내 오라버니 전정국은 나 하나만 보고 살아왔지만 끝을 모른다. 결국 파멸이야. 녹과 홍의 균형이 깨지면 자연은 파괴될 것이다. 녹의 공주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거운 왕관을 쓰고 핏길을 걸어야한다. 그리고 나는 홍에 물들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 오염덩어리로 가득한 나는 누구에게도 스며들 수 없다. 그 상대방이 내 더러움으로 물드니. 나는 공기와도 같은 사람. 전쟁 속에서 사라져야되는 사람이라.
상처 속에서도 덤덤한 지민과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나. 등을 토닥이는 손이 따스해서 더욱 눈물이 났다. 이때까지 참아온 설움이 터져서 멈추기엔 늦음에.
"바닥에 있더니 좋더냐."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계속 있으려고 하니 물어보는 것이다. 홀로 서려 하니 위태해보여 물어보는 것이다."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째 네 목소리는 주인의 말과 다르게 아슬아슬하구나."
"……."
흐느끼는 내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내린 후, 다시 내 등을 쓰담고 달랜다. 지민의 흑장미색 옷깃을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운다. 한참을 지민의 품에서 그렇게 목 매어 우니 속이 다 허는 말을 한다.
"내가 필요하면 말 해."
"필요없습니다.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이야? 내가 네 눈앞에서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어?"
"제발 눈 앞에서 사라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나와 말을 섞을 수 없을 것이야. 내 품에 안겨 이렇게 울지도 못할 거고. 그래도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애초에 없었으면 이러지도 않겠지요."
못된 말만 하는 내가 밉진 않은지 지민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너도 알잖아. 조금이라도 내게 화를 내주면 안 돼? 내가 당신에게서 정을 뗄 수 있게. 뿌리까지 이 감정을 뽑을 수 있게. 나는 너에게 상처만 줄거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하긴. 너를 도와줬더니 넌 더 상처 받아왔지. 나도 알아."
"……."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봐. 넌 내가 진짜 필요 없어?"
"……."
"그러면 너는 왜 내게 손을 내밀었니. 평생 널 기다리도록 두지. 언젠간 외로움에 소멸할 텐데."
"……."
반짝이는 밤하늘. 그 아름다움 아래선 상처받은 사람들. 난 멀어질 수 없는 걸 알면서 계속 상처를 냅니다.
아무 감정 없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너에, 너를 하찮게 여기는 너에, 차라리 내가 죽을 망정 너의 죽음을 읊는 너에
"너는 내가 말라서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발 저 죽겠습니다. 계속 참다가 속이 문드러져 죽겠습니다. 왜 그렇게 저를 힘들게 하세요. 네?"
내 모든게 결국엔 다 터져버렸다.
"이 푼수같은 사람. 내가 너를 어떻게 아끼는데…. 어찌 그렇게 이해를 못 해. 제 숨통을 쥐고 흔드는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이에요. 그런 말 할수록 억장이 무너집니다! 여기 숯으로 가득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알아. 네 얼굴에 다 쓰여있거든. 나 아파서 죽기 직전인데, 참고 있어요."
"아시는 분이 저를 이렇게 놀립니까. 저 안 되는 걸 알아서 희망이란 희망은 다 버렸습니다. 개한테 물려서 뜯기던 어린 아이는 그때부터 죽었습니다. 수단으로 살아가던 저는 하혈을 하고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침소에 누워서 아기집을 들어낼 땐 두 번 죽었습니다. 전 살아있는 시체일 뿐입니다. 나로 더 상처받기 전에 밀어내면 상대방이 상처받은 얼굴로 절 내려봐요. 제 오라버니를 처음 본 순간 코가 아려왔습니다. 하물며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봤는데…. 손도 못 잡아봤는데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밀어내고…. 손찌검이 날아와도 아픈 줄 몰랐어요. 그렇게라도 데려가려고 했던 정국이 무서운 얼굴을 해도 그 눈동자에 눈물이 서려있었습니다. 전 민폐덩어리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는 죽은 사람입니다. 네, 저 아파요. 아픈데 참고 죽어가는 시간을 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근데 네 얼굴이 어떻게 변한 줄 알아? 죽기 직전이던 네 얼굴이 애탐으로 바뀌었어. 저 사람이 나 좀 사랑해줬으면 좋겠는데 아파서 죽겠어요라고. 지금 네 얼굴은 잔뜩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인데. 넌 살아있어. 내가 말했지 않니. 살다가 네 얼굴 한 번쯤은 돌아보라고."
"제 얼굴 봐서 뭘 하겠습니까. 시한부 인생인데.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납니다. 녹의 공주는 왕위에 올라 전쟁의 쑥대밭으로 제가 그 사람 대신 말을 타게 됩니다. 그래요! 이게 끝인 거예요. 이런 풀 한 포기 같은 인생, 이렇게 끝날줄 너무 일찍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죽음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사랑이 뭐가 대수입니까. 저 혼자만 하는 풀잎 같은 사랑은 언젠간 얼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멈출 수 있어. 설령. 잘 생각해봐. 넌 현명한 아이니까 잘 생각할 수 있어. 지금 네가 암흑에 있어서 까막눈이 된 것 뿐이야. 네가 지금 해야되는 말을 꺼내면 모든 게 끝나."
"아니요. 달려올 때는 오직 한 가지만 보고 뛰어왔는데 돌아보니 발에 족쇄가 있더군요. 운명이요. 전 불행해요. 마음이요? 단정지어서 말, 못합니다. 항상 입막음되었고 전 오라비한테 마저 할 수 없었던 말을…."
"난 네가 뭘 주저하는 지 알아. 말해줄까? 네 입술 대신 네 마음, 내가 말해줘?"
죄책감에 목이 매여 말을 잇지 못하다 굳은 얼굴의 지민이 편지지를 빼앗아가 자신 마음대로 읽는다. 그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손이 떠난지 오래다. 눈물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네가 느낀 나는 어떤 사람이니. 모든 걸 다 떠나서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니. 네 눈에 보이는 나는 어땠니.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면에 이상한 말이라도 꺼내 시선을 끌었습니다. 제 눈에 너의 호박색 눈이 담겼습니다.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내 이마의 흉터를 보고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흉터를 만지더니 자신도 당황했는지 주춤했습니다. 그 거북이는 어째서인지 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정말 죽을 듯이 기뻤습니다. 말라붙은 마음에 한 거북이가 들어왔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던 거북이를 품어서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너를 보기 위해 정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날 기다리는 거북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서 살아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만 하세요."
"사람의 모습이었으면 좋으련만 거북이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너를 보고 있었습니다. 주황 머리, 흑장미색 얇은 도포, 호박색 눈동자. 차가운 살결이 싫었습니다. 따뜻하게 변해서 안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너와 이야기를 할 때는 네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인 모습이 편해서란 말을 했지만 내가 진정한 사람인 모습이 보고 싶었겠지. 안 그렇니?"
"제발 그만 하세요. 부탁입니다."
부정하는 내 아픈 목소리를 넘고 줄기차게 숨겨왔던 것을 줄줄 읽는 너는 과연 편지지를 읽는 게 맞을까. 아님 나를 읽는 게 맞을까. 그 편지지의 글은 끝나지 않았나? 지민은 내 마음을 억지로 열어서 들여다본다.
"공주에게 베인 코의 상처는 없던 자존심에 계속 흔적을 남겼습니다. 내일 올 홍의 왕에게 갈 때 지민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정원이 내겐 더 포근하고 안정적이서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수도 없이 거짓말을 해야했습니다. 난 아픈데 괜찮지 않은데 거짓말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 위해선 내 몸에 남은 자국들을 지워야했습니다. 거북이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아픔의 흔적이 아팠습니다. 아프지 않은데, 마음이 아리었습니다. 이것이 새겨질 때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질 때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남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이젠 입증할 것들이 없습니다. 살을 갈라 뛰는 심장을 보여줄 수도 없고 안에 고인 핏웅덩이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오라버니에게 거짓을 고하고 녹의 눈치를 보다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포대기에서 그 소년이 눈물을 흘리고 설령아라고 부를 때가 엊그제 같은데 훌쩍자라버린 그 소년의 상처 받은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도 참았습니다. 내 말에 내가 상처 받고 그 상대도 상처받았습니다. 나는 녹의 나라의 눈치를 보는 녹의 공주의 명에 따라 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거북이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내 상처를 가리고 싶고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민에게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내 상처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프다. 이 숨이 들어갔다 나가는 곳이 답답하고 아프다. 숨쉬기 힘들 소리를 내며 울었지만 너는 넘어서 꿋꿋하게 말한다. 내가 아픔은 삼켜도 사랑은 삼킬 수 없었다. 네가 말했듯 사랑이란 단어는 목울대에서 걸리는 거라고, 나도 그랬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보고 있는 편지지의 내용은 어디로 가고 내 마음을 뚫어서 봐.
"거북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가린 안대는 나의 상처를 가려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거북이는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내 말을 따라 술래잡기를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거북이는 눈을 감지 않고 정원 가장자리로 멀리 돌아와 나에게 시간을 주었습니다. 나의 눈을 치료해준 거북이의 얼굴을 더듬었습니다. 주황 머리, 흑장미색 얇은 도포, 호박색 눈동자. 상처의 아픔을 나홀로 삼키려고 했지만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 요 그랬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네가 오천 년 동안 품었던 녹의 공주를 아직도 사랑해서 미웠습니다. 꿈에서 너를 찾으면서 잠결에 이름을 부를 정도로 앓았습니다. 네가 옆에 있어도 멀었습니다. 네가 내 손을 잡아왔지만 아무리 해도 닿지 않은 걸 알아서 뿌리쳤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곤히 잠자는 네 가슴 위에 손을 올렸습니다. 갑작스레 눈을 뜬 너에 놀라 바로 떼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만. 이젠 그만,"
"나는 네 안에 녹의 공주가 아닌 내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숨겼습니다. 나는 네가 녹의 공주를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찮고 더러우며 먼지같은 존재로 느껴지고 녹의 공주란 사람이 어여쁘고 날카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 그래서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렇게 멀어지려 했습니다. 이 문을 나가고 돌아오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나는 네가 돌아올거냐 물어보는 말에 가슴이 찔렸습니다."
숨을 몰아서 쉬고 눈물을 흘리는 나. 너는 끝끝내 나를 읽고 편지지를 접는다. 내 마음처럼 뚫어져라 보던 편지지는 접혀진다. 너는 그 호박색 눈으로, 내가 사랑하는 눈에 종이 쪼가리가 아닌 나를 담는다.
"하지만 너는 대답하지 않고 이 정원을 떠났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너는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게 처음 보여준 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네 자수정 같은 눈에 내가 담겼습니다. 희망이 가득 차오른 눈도 붉어서 내게 물집이 터진 손을 내밀었습니다. 네가 절대로 놓지 않는 그 붉은 검을 놓게 하고 싶었습니다. 불행해 보이는 흉터가 이마에 있는 너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축축한 내 손을 잡아오는 네 손이 따뜻하다. 더이상 차갑지 않다. 너는, 어디까지 왔니. 나는 네 마음 속 어디에 있니. 눈물이 흥건한 내 얼굴을 들어올리고 말하는 너는 슬픈 웃음을 짓는다.
"설령은 지민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는 조금씩, 조금씩 사랑해주라고 했습니다. 설령의 목소리에 물기가 담긴 건 자기도 몰랐을 겁니다. 설령은 제 마음은 알아도 지민의 마음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제 살기 바빠서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녀는 무엇에 이끌려 나흘만에 지민을 찾아왔습니다. 정원에 돌아온 설령은 어째선지 지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손에 쥔 편지지가 떨려왔습니다. 이 편지지는 여기로 돌아오기 위한 변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설령은 지민의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 흑장미색 얇은 비단 도포를 좋아했습니다. 설령은 지민을 좋아합니다. 설령은 지민을 사랑합니다. 그 말 하나 못 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 못난 사람을 받아준 지민은 어쩌면…"
말을 끊은 지민은 더 일그러지는 내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닦는다. 네 호박색… 내가 사랑했던 호박색 그 눈동자에 내 붉은 눈동자가 담겼다.
넌, 나를 담는다. 난 너를 담았다. 난 너를 사랑해.
"검붉은 머리, 상처받은 자수정같은 눈동자, 낡은 호위무사 복장. 지민은 그게 눈에 밟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천 년만에 만난 사람의 그 붉은 눈에 가슴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해도 눈을 감는다 해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난 너에게 도움이란 이름 뒤에서 손을 잡았습니다. 난 너를 안쓰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겉보다 그 안에 있는 핏웅덩이에 피를 다 빼주고 싶었습니다. 그 안에 눈이 내렸음 좋겠습니다. 녹으면 맑은 빛을 내는 연못이 되겠지요. 무엇으로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 눈으로 다 보입니다. 투명하고 순수한 그 눈에 마음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런 나는,"
지민은 설령을 좋아합니다.
아마 처음부터 나는 너를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를 본 순간 얼음꽃은 녹은 지 오래니까. 녹의 공주를 닮아서 너를 사랑한게 아니야. 내가 똑같은 실수를 해서 가슴에 또 한 번 칼이 박혀도 후회하지 않아.
엉엉 아이처럼 우는 나를 품에 안고 머리를 쥐고 쓰담는 지민. 차갑지 않은 이 품이 거짓이 아니었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 기적이 일어난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 너를 꼭 붙잡고 목 놓아 운다. 내가 기댈 곳은 오직 너 뿐인 걸 왜 몰랐을까. 이 따뜻함이 네 품이라서 다행이다. 천국이 부럽지 않다. 모든 상처는 네가 사라지게 해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울려서 미안해."
북받쳐서 품을 파고 들었다. 어디서 마음 놓고 울 수 없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였던 것들이, 폭발하여 멈출 수 없었다. 따스한 손길이 필요했었어. 누군가 내 곁을 지켜주길 바랐어. 토닥이는 손, 안긴 흑장미색 도포 품. 네 차던 혈액은 나로 인해 빠르게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너도 알까. 벙어리 같던 나는 너를 놓지 못해. 그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어. 난 너로 모든 게 바뀌었어. 난 전쟁에 나갈 생각이 없어. 녹과 홍에서 머무를 생각이 없어. 오직 너와만 있으면 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있었으면 좋겠어. 눈이 내리는 날. 넌 설령제가 나를 축복하는 날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그 날 기적이 일어날까. 하지만 이미 내게 기적이 일어났는걸.
아래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느낌. 고개를 들어 지민을 마주보니 눈꼬리에서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프게 웃는 너는 내 마음과 같단걸 말하지 않아도 알것만 같았다.
하혈. 감히 선뜻 나서 말할 수 없었던 그것마저 끝내 터져버렸다.
너와 있으면, 내가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모든 게 돌아갔으니. 새로 마음을 태어나게 할 순 없었지만… 넌 큰 것들을 이뤄주었다. 본래의 것이 아니래도 네가 준 것이라면 다 좋다. 놈들이 집었던 살이 벌어지고 피가 내려왔다. 공주의 방에 들어온 자객과 칼싸움을 벌이다 조우했던 그 날. 아래를 들어냈던 그 때를 지운다. 배를 쓰담은 지민은 작은 입맞춤을 주었다.
"넌 부족한 게 없어. 하찮지도 더럽지도 않아 설령 공주님. 눈처럼 아주 깨끗한 걸."
닿았던 입술이 믿기지 않아 그 입술에 손을 대었다. 가까운 얼굴에 심장이 뛰었다. 너를 만난 게, 그게 운명이겠지. 그래, 나도 내 뜻대로 살 권리가 있어. 네가 준 거니 마다하지 않을게. 눈물 범벅으로 웃으니 주황 머리 남자도 웃었다. 훔쳐봤던 꽃잎색으로 물들던 입술. 부드러운 입술에 댄 손을 자신의 손바닥에 마주 대는 지민은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네가 녹의 공주보다 어여뻐. 이리 말 해도 진담과 농담 구분할 줄 모르지?"
"저는 까막눈이니까요. 멍청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가르칠 게 많네 공주님."
덩달아 나까지 그 웃음이 옮아왔다. 어, 웃었다. 멍멍한 코 끝을 튕겨내는 두 번째 손가락. 그리고 부드럽게 닿아오는 입술에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허리를 잡아오는 손, 입술을 겹쳐무는 네 입술은 따뜻하다. 아래가 끈적한 피로 물드는 지도 모르고 나는 너에게 물든다. 지민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지는 그때와 같이 또 다시 연못에 녹았다.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지민은 알고 있었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그 편지 안에 자신을 죽이라는 내용이 담긴 걸.
-홍의 나라.
파열음이 황실을 울렸다. 녹의 나라를 다녀온 후 정국은 폐인이 되어 국사를 돌볼 수 없었다. 지금 정국은 복수심으로 불타 보이는 것은 붉은 검 뿐이다. 설령의 손에 어렸을 적 정국의 칼이 들려있었지만 그들의 감정은 통하지 않았다. 어린 날의 정국은 오직 자신의 동생을 동정하며 자랐다. 그에게 연민이 들 수 밖에 없다. 둘을 지켜보고 커 온 나는 정국을 도와주겠다고 맹세했다. 홍의 올빼미인 나는 녹의 공주에게 한 번 당한 정국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정국이 보냈다고 했던 편지는 내가 쓴 내용이 가득했다.
정국이 설령을 그리워하는건 그녀도 안다. 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선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설령은 홍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화환을 반대하는 세력이 커졌다. 그들 사이에 주축인 석진 대신은 정국의 부름으로 한걸음에 왔다.
"부르셨습니까."
"내일 녹을 칠 준비는 모두 준비되었는가."
"말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모든 게 갖추어졌습니다. 불안하시면 지금부터 갑옷을 입고 있도록 명을 내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군사들의 최상의 상태로 출전시킬 테니. 남준, 말한대로 편지를 보내었는가."
"예. 아마 그 사람 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내일이 대의가 이루어지는 날이다. 설령제. 설령이 태어난 날. 녹의 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서 만만의 준비를 했다. 홍은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설령과 정국을 이을 매개체. 그리고 오천 년 동안 홍이 녹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의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나는 녹에 잠적한 동안 조사했다. 설령이 고문을 당하던 시절 나는 손을 쓸 수도 없이 발만 굴렸다. 그러다 더이상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녹의 황실 궁전을 떠돌았다. 거북궁의 어린 주인, 녹의 공주가 머무르는 곳. 거북궁. 미로처럼 복잡한 거북궁의 구조에 의문을 느껴 그곳을 나는 그림자처럼 거북궁의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거북궁 외부를 벽에 손을 대고 몇 바퀴 둘러보았다.
녹의 건재함의 뒤엔 홍의 후계자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홍의 나라에서 녹과 홍에 관련된 서적을 뒤지다 무언가를 발견했었다. 녹과 홍을 이어주던 사람은 단 두 사람. 녹의 첫 번째 공주와 홍의 첫 번째 황자. 후박나무 씨를 이을 남자는 주황 머리. 그 자는 녹의 공주와 뜻을 함께 하여 녹과 홍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녹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허황된 눈의 나라를 꿈꾸던 자의 최후는 쓸쓸했다. 달에게 사랑하는 녹의 공주를 위해 녹을 보호하겠다는 기도를 한 주황 머리는 심장에 칼을 맞아 죽었다.
그가 죽은 곳은 거북궁. 홍의 왕은 황자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녹에게 패배당했다한다. 박 씨의 대가 끊긴 후, 전 대 왕들의 성은 없었다. 오직 이름뿐.
약 오천 년 전의 이야기이다. 나는 혹시나 그를 의심해 과장된 예측을 했다. 그가 다시 살아나 그가 사랑한 녹의 공주의 나라를 지켜주는 것이 아닌지. 영물로 태어나 녹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그를 제거함이 옳다. 그 예측에 대한 확실한 감정이 선 것은 설령이 정국을 만났을 때였다.
그녀가 거침없이 겉옷을 벗었을 때 이상함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곁을 겉돌아 알고 있었다. 설령이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얼마나 심한 짓들을 당했는지.
설령이 어릴적 꽃가마를 타고 녹의 나라로 건너올 때 맞은 돌로 새겨진 이마의 흉터까지 흔적없이. 흔적없이 모든 게 사라져있었다. 정국은 귀 너머로 들은 소리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분함과 억울함. 얼척이 없는 이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설령이 거짓을 고함에 분노했고 그녀를 데려올 수 없었다. 녹의 공주가 뱉은 속쓰리는 말에 지금껏 눈이 뒤집혀 잡히는 물건마다 던져버렸다. 그때 빛난 내 눈은 무언가를 잡았다. 예측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고 설령이 내게 글을 읽을 수 없다고 편지를 다시 주었을 법도 한데 편지지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편지지에 대한 일말의 말조차 없었다.
누군가 그녀를 지켜주는 것에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처음 편지에 의문을 담아 써 설령에게 쥐어주었다. 거북궁에 수상한 장소가 없는지 설령에게 찾아보란 내용을.
확신을 담은 나는 글을 읽는 자에게 저격의 말을 두 번째 편지지에 담았다. 경고의 예고장이다. 그 편지지는 설령을 도와주는 풀잎이란 자에게 쥐어주었다. 홍이 녹을 밟으려면 그 사람을 처단해야 된다. 설령은 홍의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더이상 정국을 배신할 수 없을 것이다. 혈육의 정. 적어도 그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녀를 뒤쫓으면 주황 머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물을 죽이면 홍의 오천 년의 묵은 한을 풀 수 있다. 하지만 조화는 파괴되겠지. 녹과 홍의 대립은 부서지고 온 세상은 불로 타오를 것이다.
이쯤이면, 그 자가 편지지를 읽은 시간이 되고도 남는다. 그 편지지에는 설령에게 주황 머리를 죽이란 명이 담겨있다.
소리가 크게 울리는 대전 안. 나와 석진, 정국이 숨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석진은 설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다. 설령은 황실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존재라 부정탄다고 믿는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녹의 손에 탔으니. 녹이란 말에도 기겁하는 홍의 사람들이다. 몇 번째 언쟁인지 세기도 힘들다. 대립은 석진과 홍의 왕. 말 하지 않아도 그들 대화는 어떻게 흐를지 뻔했다. 지친 그들은 모든 걸 생략하고 결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내일이면 끝난다. 이 언쟁도 끝이 나고 설령의 회귀가 판가름된다.
"다 죽여버리면 되잖아. 온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때서야 자네들 성에 찰텐가?"
"대사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주군 뜻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이제서야 주장을 굽혀줘서 참으로 고맙군."
"허나 설령공주님이 다시 돌아올까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녀도 아는 겁니다. 대우는 다르지 않을 거란걸. 녹이 편하면 편했지 이곳은 더 만만치 않을 텐데요."
"……."
"남준. 이번엔 확실하겠지? 희대의 모든 황제께서 실패해온 치욕을 한 번에 엎어야 해. 그들의 역사를 뒤집는 일이야."
"확실합니다. 이번엔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제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황제께서는 좋은 책사들 두었군요. 이만한 충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한 반복이다. 불에 탄 풀들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 녹이 스멀스멀 자라 홍의 발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뿌리를 뽑는다면 후련하겠지. 그리고 허전하겠지. 불만 존재하는 세상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을 걸 안다. 생태계의 흐름이 깨지면 그만큼 돌아오는 파급력도 세겠지. 그런대도 우린 파멸의 끝을 달린다. 악에 받힌 우리는 복수를 위해 얼마나 고개를 숙였던가. 소중한 사람 마저 뺏기며 우린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가.
우리 모두 불행한 사람이다. 내일은 설령제다. 정국의 동생 설령이 태어난 날이다. 눈이 내리는 날, 정국은 설령을 빼내올 것이다.
풀밭이 피바다가 될 차례다.
10. 전쟁.
우린 달라졌을까- 윤하, 존박
코에 작은 얼음 알갱이가 떨어졌다. 참을 만한 느낌이었지만 볼에 가라앉는 두 번째 차가움에 눈을 뜬다. 작게 내려오는 흰 솜들에 눈을 비볐다.
"…눈이다."
처음 눈을 보는 나는 넋을 빼놓고 올려다 봤다. 항상 궁에 갖혀서 살았더니 생전 처음 눈을 본다. 열린 정원의 천장 위로 구름 무리가 지나가고 하나씩 눈을 흘린다.
쏟아지지 않고 조금씩 내리는게, 지민이 말한 사랑같았다. 우리는 눈구름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눈을 뜨니 보이는 것들은 새롭다. 옆에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주황 머리. 흑장미색 도포를 벗어 내 위로 덮은 너는 흰 옷만 입고 있다. 추운지 웅크리며 나를 안는다. 자연스럽게 나는 허리에 팔을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는 너는 포근한 눈길을 주다 갑자기 날이 선 눈으로 변해 일어난다. 얕게 느껴지던 흔들림. 지진이 심해지더니 녹의 땅을 흔든다. 정원의 나무들의 이파리들이 눈에 띄게 흔들린다. 어젯밤 모여 짠듯 연못 물의 파동도 심해졌다.
녹의 나라 땅이 울리는 소리. 설마.
풀잎이 녹의 공주의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해가 중천에 걸렸다. 지민이 도포를 입고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문으로 달려갔다. 禁池 금지의 문을 열자 소란스러움을 넘어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핏빛 마루. 지민의 손을 꼭 잡고 나가려고 하지만 지민은 한 발자국 내밀지 않는다. 굳은 표정의 지민은 내 손을 놓았다.
"난 연못을 나갈 수 없어."
"어째서…."
"잊었구나. 난 연못의 지박령이자 영물이야. 내가 나가면 녹이란 나라가 송두리째 사라질거야. 이 거북궁도, 나도. 모든 게 사라져."
"……."
"기다리고 있을게. 이 연못을 지키고 있을게. 어서 다녀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없거든."
"정말 기다리고 있으셔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빙그레 웃는 지민은 거북궁이 무너지는 소리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파고 들어오는 군사들.
"걱정 말고 어서 가라니까."
등을 떠밀려 나가게 된 나는 닫힌 문에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되돌아온 현실. 약속을 했던 풀잎이, 풀잎이 위험하다. 녹의 공주의 생사도 알 수 없다. 붉은 검을 빼내 칼날을 빛냈다. 복도를 조심히 걷자 눈 앞에 보이는 건 궁녀들의 시체. 나뒹구는 피로 칠갑된 녹의 사람들. 자동적으로 빨라지는 걸음마를 주체할 수 없었다. 녹의 공주는 설령제로 거북궁을 나가있다. 그렇다면 풀잎은 홀로 공주의 방에 있을 텐데. 최악의 상황이 눈 앞에 펼쳐져 오싹함을 버릴 수 없었다.
* 1각 전.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꼭두새벽부터 설령제가 시작되었다. 덩달아 공주님이 왕위를 물려받는 날이다. 흰 천이 길게 날린다. 녹의 황실에서 제일 큰 거북궁 앞에서 식이 시작된다. 익숙한 자리임에도 공주님은 손을 떠셨다. 표정은 아닌 척 하면서 안쓰럽게 손을 떠셨다. 화려하면서 수수한 흰 비단 옷. 공주님 몸집보다 더 큰 옷을 입은 공주님. 그녀가 어렸을 때만 생각하면 그녀는 아직 어리고 철 없는데. 어느새 커다란 짐을 지고 무거운 옷을 입었다. 백금의 왕관까지 무거워보였다. 식이 시작하려고 하기 전 눈이 한 알씩 내린다. 꽃잎처럼 하늘하늘 내리는 눈. 텅빈 눈으로 올려다 보는 공주님은 내게 물었다.
"풀잎."
"네, 공주님."
"내가 왕위에 오른대도… 꼭 전쟁을 해야되는 걸까?"
"황제께서 유언을 거부할 생각이신겝니까?"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닐텐데. 진담 반 농담 반. 진심이 담긴 말을 거짓말이라 치부하는 공주님은 아슬아슬해보였다. 우리가 원하는 삶은 아득한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
제 2의 인생이 아닌 이상, 우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식이 시작되는 뿔피리 소리에 공주님은 녹색 비단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 녹의 황제는 이슬 맽힐 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공주님은 울지 않으셨다. 멍하게 지금처럼. 금실이 박힌 신을 신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신다. 황제가 머무르셨던 궁 위에는 그가 입었던 옷이 걸려 바람에 휘날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멀리 날리는 아버지의 옷을 바라보는 공주님은 눈을 깜빡였다.
시간을 지체하는 그녀의 몸짓. 차차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저 위의 황제의 자리를 보았다. 나는 무사히 잘 올라가는 그녀에 안심했다. 하지만 갑자기 울리는 땅에 궁녀들과 내신들. 녹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녹의 나라 경계선부터 달려오는 붉은 말. 그 위에 붉은 갑옷의 남자가 활을 쏘았다. 그 화살에 맞은 궁녀가 쓰러지자 설령제는 피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수선하고 전쟁통인 곳에서 어렵사리 빠져 공주님의 방 구석에 가 숨어 설령님을 기다렸다. 지진처럼 울리는 녹의 땅에 말굽소리가 진동했다.
설령님. 오신다고 했으니까. 기다린다. 제발 어서 설령님이 나를 찾아오시길. 약속을 잊지 않기를.
계단을 걸어올라오는 정국에 공주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소스라치게 벌벌 떨었다. 궁 외부를 모두 장악한 정국. 남준은 정국의 명을 받고 설령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궁 내부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러. 녹의 요물인 주황 머리까지. 홍이 어떠한 얼척도 없는 이유로도 녹에게 패배하지 않도록 뿌리까지 뽑을 수 있게.
"가소롭구나. 그때처럼 한 번 입을 놀려보지 않겠느냐?"
"……."
"녹의 공주랍시고 기를 세우는 것이야? 칼 앞에서는 도덕따위 없다는 것을. 우매한 너는 무슨 말을 해야될지도 모르겠지."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옳지. 그렇게 빌어. 설령처럼 빌어. 기어서 다리도 잡아서 빌어봐."
몸이 굳었던 공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빌었다. 녹색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해선 망막을 채웠다. 또르르 고운 피부를 따라 내려오는 눈물이 정국의 붉은 칼 끝에 떨어진다.
"나도 어쩔 수 없었소. 내가 시킨 것들이 아니야. 나도 하고 싶어서 뱉는 말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렇게 사리사욕을 채웠나? 설령의 것들을 네 것으로 돌리고 넌 때깔 좋게 살았겠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 공주님? 참, 피부도 고와. 설령은 해에 달궈져 울긋불긋하기만 한데."
지금은 홍의 후계자 때문에 아니지. 코웃음을 친 정국이 몸을 낮춰 녹의 공주의 왕관을 빼들었다.
"내가 그러게, 경고하지 않느냐."
요동치는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 말을 끝으로 군사들이 몰려와 공주의 몸을 강박한다. 날리던 흰 천들을 가져오는 군사들. 입을 벌리는 손짓에 울부짖는 공주. 그 안으로 집어넣는 흰 천들. 입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 해서 꾸역꾸역 넣는다. 정국은 그녀를 뒤로하고 높은 곳에 서서 녹의 나라를 내려다 보았다. 녹의 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인 거북궁. 더럽게도 기름진 땅이구나. 입을 찢고도 행위는 계속 되었다. 비명 소리를 뒤로 한 정국은 화살에 박혀 죽은 궁녀를 보았다. 그 사람에게서 면사포을 빼낸 정국이 기도가 막혀 코로 숨을 가삐 쉬는 공주에게 걸어갔다. 얼굴이 젖은 공주 얼굴 위로 면사포를 올렸다. 군사들은 공주의 얼굴과 몸을 붙잡고 뜨거운 물을 대령했다. 천을 더 가져오는 군사들이 그 위로 겹쳐올리고 물을 빠르게 젖어들었다. 정국은 무심한 얼굴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여갔다.
쉽게 죽지 않는 사람의 목숨. 그는 몸부림치고 온몸으로 괴성을 지르는 공주에 양잿물을 부었다. 코로 입으로. 얼굴에 뚫린 모든 구멍으로 들어가는 양잿물. 장정 여럿이서 한 사람을 천천히 죽였다. 잠시 후 피가 면사포를 물들였다. 고꾸라진 공주에 손을 놓았다. 코와 입으로 솓는 피들은 모두 설령제에 쓰이는 천에 물들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한 공주의 옷깃을 잡아쥐고 정국은 거북궁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머지 군사들은 남은 녹의 궁 안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그리고 남준의 명으로 거북궁 수색에 나섰다.
풀잎은 모든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자리에 웅크려서 있었다. 잠자코 귀를 막아 눈을 감았다. 공주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풀잎은 눈을 뜨자 설령을 찾아왔던 홍의 올빼미가 서 있었다.
"설령은 어디 있습니까."
"알려주지 않습니다."
"공주님이 그렇게 말하시던가요."
"약속했습니다. 설령공주님을 도와주기로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공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전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저를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나는 홍의 말 따위 듣지 않습니다."
꼭 칼을 꺼내야 말을 듣습니까.
풀잎은 위협 속에서도 요지부동 설령을 기다렸다.
*
복도를 막는 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홍의 군사들. 붉은 갑옷 사이를 벤 붉은 검. 나는 홍의 사람이 맞는가. 쓰러지는 자들을 밟고 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야. 제발. 제발, 살아있기를. 안 좋은 기운이 몰려와 더욱이 검을 세게 잡았다. 귀신같은 놈들이 미로는 어떻게 알아서…! 공주의 방 앞에 도착하자 남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피가 묻어있는 방문. 열려있는 방문에 풀잎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떨리는 눈동자. 칼에 깊숙히 찔리는 너는 어째서 웃고 있을 수 있어. 검을 떨어뜨리고 너를 향해 걸어갔다. 칼이 뽑히고 바닥에 쓰러진 너는 피를 토한다.
'적호님 사라지는 거 싫어요. 난 적호님 좋단 말이에요.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불쌍한 적호님 어떡해…. 도와드릴 게 없어서 미안해요.'
'모든 걸 다 끌어안으려 하지마세요. 적호님께서 어딜 다녀오시는지는 모르나 도와드리겠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쇤네지만 적호님을 항상 걱정하고 생각한답니다. 공주님께서 적호님 공백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 맘 편히 다녀오세요.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다면 제게 꼭 말해주셔야 합니다.'
풀잎아.
'전 괜찮습니다. 적호님은 너무 아프시잖아요. 저, 풀잎년보다 더 크시지만 건드린다면 으스러질 것만 같습니다.'
'저같은 년을 사람 대접해주셨던 분이 설령공주님 뿐이니까요.'
"적호님. 괜찮으세요? 풀잎년이 적호님의 눈이 되어드릴 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공주님이 일부러…."
…풀잎아.
내가
"풀잎아…. 미안해. 늦게 돌아온 내가 미안해 제발… 눈좀 제대로 떠 보거라-! 응? 내가 돌아왔니라. 너를 데리고 가려 돌아왔는데 어째서 너는…."
"공주님…."
"어으, 으 내가, 미안, 해 풀잎아…. 제대로 올려다 보거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느냐 어? 어윽으으 내가… 왔는데 데려갈 수,가 없어."
오열하며 분출하는 피가 묻는 네 얼굴을 쉴 새 없이 닦아댔다. 희미한 빛이 담긴 네 녹색 눈이 감기는 걸 억지로 뜨게 해보지만… 너는 멀어져 간다. 피묻은 손을 올려 너는 내 눈물을 닦는다. 그 손을 잡아 놔주지 않았다. 입으로 역류하는 피에 너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 힘을 아끼란 말이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불러,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불러봐도 좋다. 무엇이든 말해도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줘."
"공주님. 저도, 설령님과 함께 꿈꾸고 싶었습니다. 설령님만의 세상을 말하는데 저도 그 세상에 가고 싶었습니다."
"같이 갈 수 있어 풀잎아 놓지마. 내 손 놓지마, 풀잎아 조금만 정신차려. 가자. 응? 살 수 있어-! 너 살 수 있다고 제발 응?!"
살의 색을 가리는 피가 더욱 흩어지고 너는 피와 숨을 삼켰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남준은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해.
"설령님이 말한 그 거북이도 보고 싶었고, …눈의 세상인지 눈이 내리는 곳인지 그곳으로 설령님과 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이라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텐데 컥,…."
역류는 멈추지 않았고 내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파리하게 변하는 풀잎의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막고 끌어안았다.
"갈 수 있어. 갈 수 있어 풀잎아.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마!!"
"그 주황 머리 남자도 설령, 님 좋아한답…니까?"
"지금 네 안위만 생각하거라! 너는 참 오지랖도 넓구나. 네 상황은 안 보이는 것이냐?!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있다. 네 숨이 얕아지는 걸 왜 몰라!"
"저는,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설령님을 보면 제가 죽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내 얘기 말고 네 얘기를 해줘. 부탁이야."
"제가 먼저 백의 나라에서 설령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때 가서, 그때 가서 말씀드릴게요."
"이 어리석은 것아…."
눈을 감는 풀잎이 숨을 껄떡이더니, 내게 조용히 말하고 숨졌다.
'거북이와 함께 도망치세요.'
너는 어떻게 끝까지 내 걱정만 하다가 죽을 수 있니.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 있단 말이냐. 숨이 넘어가도록 오열을 했다. 너는 피를 나눈 동생같았다. 너는 마치…. 먼 친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차가운 시체를 안고 목을 놓는다. 초상집에서 들을 그런 곡소리로 방을 채웠다. 우르르 들어오는 홍의 군사들에도 나는 소리를 삼키지 않았다. 내가 공주를 만날 때 처음 만난 풀잎은 활기찼다. 쭈뼛거리면서 내게 다가온 것도 풀잎이었고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첫 번째 사람도 풀잎이었다. 공주를 찾으러 다니면서 같이 뛰었던 사람도 풀잎이었다. 그런 네가 사라졌다. 몸만 두고 너는 어디로 떠났니. 내가 늦게 온 탓에 너는 어리석게 나만 기다리다 가버렸다. 너야말로 도망을 갔어야지 멍청아.
"공주님."
"……."
"공주마마."
"그 홍의 나라의 공준지 옹주인지 죽은 지 오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은 사람 찾지 마세요.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목맬 수도 있으니까."
"어디 있습니까."
벌떡 일어나 떨어진 붉은 검을 주워 남준을 향해 날을 세웠다.
"이제 제 눈에 뵈이는 건 없습니다. 그 때 죽였어야 했는데 후회합니다."
"공주님은 녹의 사람입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아니, 녹의 사람으로서 살아갑니다."
"당신은 누구의 편입니까."
"아무도, 아무의 편도…."
"홍의 황자, 어딨습니까."
"그 분은 제가 지킬겁니다. 누구에게도 발 들여주지 않을겁니다."
고집을 피우고 이를 갈자 남준은 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나를 포박하려는 놈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버리고 공주의 방을 뛰쳐나갔다. 지민. 지민이 위험하다. 남준이 어떻게 알고 있는진 몰라도 눈치 한 번 빠른 놈. 그 남자는 우리를 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거북궁을 뒤지고 종래엔 녹을 불사지르고 날 끌고 갈 것이다.
신기루처럼 번지는 황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검을 들고 내게 걸어온다. 홍이 기여코 녹의 멸망을 초래한다. 기회를 잡고 여린 풀의 목을 조르는 홍의 남자.
정국.
홍의 왕. 거북궁 복도에서 만난 정국의 얼굴은 너무 말짱하였다. 그 손아귀에는 참혹한 시체의 공주. 흰 옷을 입은 녹의 공주의 입에는 피로 젖은 종이가. 얼굴 위로는 면사포로 덮여 숨구멍을 막았다. 너덜너덜한 얼굴의 공주. 공주의 뒷덜미를 잡은 정국이 내 앞으로 그녀를 던졌다. 쓰러진 공주. 나는 바라지 않았어. 그녀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원하지 않았다. 네가 맘대로 네 직성을 푸는 것이지 오라버니. 살인자의 눈빛을 한 정국은 걸어왔다. 피묻은 검을 보더니 걸음을 멈춘다.
"그 검 이리 내."
"싫습니다."
"말 들어."
"오라버니는 제 모든 것들을 빼앗아갑니다. 어째서 모르십니까. 복수심에 눈이 멀어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난 너 하나만 보고 살았어. 너를 빼내기 위해 칼을 갈아왔어. 무얼 더 바란단 말이냐. 더 보아야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네가 상처받은 것? 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으로 고문받는 것?! 너만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다. 또는 홍을 위해서."
"당신과는 말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거짓을 고한게야?! 그 때 순순히 따라왔으면 좋았잖아. 그렇다면 네가 이런 피들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전 홍으로 돌아갔어도 불행했을 겁니다. 저를 거부하는 사람들. 차라리 암묵적으로 제게 압력을 주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죽음같은 생활은 익숙합니다. 거 패배한 게 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권력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나라를 그렇게 무너뜨리고 싶으십니까? 그냥 이런 곳에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이런 꼴도 보지 않고 오라버니를 좋게 기억했을텐데요."
"닥치거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데려갈 것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국을 밀치고 禁池 금지의 정원을 향해 달려갔다. 지민이 기다리고 있다. 더이상 늦어서 사람들을 죽게 두지 않아. 내 앞을 막아서는 군사들을 짓밟고 앞을 헤쳐나갔다. 정국은 군사들을 물렸다. 그리고 복도 위를 쓰러질 정도로 달리는 내 뒤를 밟았다.
"설령은 내가 쫓는다."
마지막 11. 소원을 말해줘.
어린 공주님을 찾을 때 많이 달렸었다. 이 거북궁의 벽에 부딪히는 게 익숙해. 눈물이 났다. 다시는, 우리는 복도를 달리며 숨바꼭질을 할 수 없다. 공주님은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숨을 수 없었다. 풀잎은 공주님을 애타게 찾으며 나와 함께 달릴 수 없다. 아픈 시절이지만 아프게 버텼지만 우리는 그래도 같이 있었잖아. 각자 성향은 달랐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었잖아. 비록 불행의 길이었지만 같이라서 외롭지 않았다. 아슬아슬해도 우리 세 명은 갈라낼 수 없었잖아.
그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다. 내게 남은 건, 오라버니. 그리고 거북이. 내가 기댈 곳은 거북이일 뿐이다. 禁池 금지의 문을 향해 뛰었다. 늦지 않길. 부디 나를 향해 살아있는 모습으로 반겨주길. 나는 몸에 익어버린 통로를 몸을 던져 뛰었다. 미친 듯이 달려서 닿은 멀리서 보이는 문. 열고 들어가 엎어졌다. 문턱에 걸려 넘어져 눈물을 쏟았다.
얼음으로 둘러쌓인 정원. 뚫린 정원을 감싼건 두꺼운 얼음의 벽. 지민은 홀로 외로이 싸우고 있었다. 녹은 무너져버렸고 우린 무엇을 위해서,
"여기가 홍의 황자가 사는 곳이야?"
뒤따라 들어온 정국. 그에 지민이 핏기 없는 얼굴을 돌려 눈을 빛냈다. 나는 그 둘의 중앙에 서 검을 잡았다. 정국은 자신을 향해 세운 자신의 검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주황 머리의 남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가오지 마세요."
"설령. 난 네 오라버니야. 저 한낱 요물보다 못한 존재더냐?"
"전 오라버니 믿지 않아요."
"설령. 나는 너를 위해 살았어. 너 하나만 보고 살았어. 녹을 죽이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야. 내 모든 것은 너에게 걸었어."
"……."
"기억나니. 정말 어렸을 때라 넌 기억 못하겠지. 전쟁통에 네가 태어났을 때 난 너무나 기뻤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난 슬프지 않았어. 눈물을 흘리며 난 포대기를 감싸안았었지. 붉은 비단에 감싸진 너는 너무나 어여뻤지. 나는 너만큼은 고우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어. 눈이 내리는 날, 피가 튀어도 천막 안에서 네 수발을 들었지. 그 마저도 기뻤다. 눈같이 뽀얗고 오물거리던 네가 너무 예뻐서 눈이 내리는 것처럼 황홀했어. 그래서 바로 네 이름을 지었지. 사람들이 모두 말려도 순수한 뜻으로 네 이름을 지었어. 눈이 내리는 날. 설령이라고. 1년에 딱 한 번 내리는 너는 내게 희귀하고 고귀했어. 내 생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핏덩이. 내 동생.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적군들에게 빼앗겨 너를 보내야 했어. 그래서 내가 아끼는 검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쥐어 보냈다. 너는, 그 검으로 너를 지켰으면 했어. 적의 나라에 가서 기죽지 않고 네 몸을 보호하길."
"……."
"책사인 남준을 보내서 소식을 듣는 내 가슴은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졌다. 여자인 너는 몸이 좋지 않았어. 그럼에도 놈들은 네 손에 칼을 쥐고 억지로 무예를 배우게 했지. 너는 반항을 하려 도망쳤다 끌려가 개들의 사육장에 가둬졌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약국이라 어떤 수도 쓸 수 없었어.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다 굽혀 가며 보석함으로 옆구리를 찔러보아도 그것들은 다 녹의 공주의 손으로 들어갔지. 그래서 너는 풀려났냐? 아니. 개들에게 발기발기 뜯겨서 죽기 직전에 풀려났어.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을 너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찢어졌다. 나는 하나 둘씩, 아니 계속해서 돌아오는 남준의 편지지에 화만 늘어나. 오죽하면 화병이 걸렸을까. 미꾸라지니, 자궁을 들어내니 뭐니. 네 몸에 녹의 낙인을 찍니.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뽀얗고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아이가,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서, 어떤 짓을 당해서, 어떤 꼴이 되었는지 나는 궁금했어. 그리고 참을 수 없었어. 내가 네 아픔을 한끝이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순 없지만 그 소식으로 나는 이미 속이 다 타버렸어."
"……."
칼을 떨어뜨린 정국이 눈물을 흘렸다. 독한 사람이 혈육 앞에서 무너졌다.
"이십여 년 만이야. 너를 본지. 너를 보지 않은 시간이 스무여 년이 넘었어. 너무나 늦었지만, 너를 만나러왔어. 너를 빼내려고 이를 갈았어. 하지만 너는? 너는 나를 모른척 해. 내가 준 그 검을 쥐고서 너는 녹의 공주 옆에 서있지. 나는 처음 네가 네가 아닌줄 알았어. 싱글싱글 웃던 웃음을 기대한 것을 아니지만 녹의 사람처럼 너무나 변해버린 네가 내 마음을 난도질했다. 상했을 몸은 어째서 멀쩡하게 눈 앞에 뽀얀 살을 내놓고 있는지. 내가 들은 네 아픔들은 다 무엇인지. 허송세월을 보내고 내 인생을 모두 날려버리는 듯이 조롱하는 맨살에 분노했다. 어떻게 나를 배신하는 너를 모른채 할 수 있어. 거짓말을 하는 네가 우는 걸 눈 감을 수 없었어. 말로만 듣던 너는 눈을 마주봐 주지 않고 눈물만 내흘렸지."
"……."
"좋아. 알았어. 둘이 돈독한 사이란 것 알겠어. 하지만 일은 다 끝나가. 저 남자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나. 녹은 무너졌고 홍은 복수심인 불로 타오르고 있어."
"……."
"하나만 골라. 녹, 홍. 네 그 붉은 칼로 나를 찌를 것인지 저 남자를 죽일 것인지 선택해."
뒤를 돌아 본 지민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애써 웃음을 찾으려는 네가 안쓰러웠다. 지민은, 말라가는 입술을 훑고 말했다. 나는 말이야,
"괜찮아 설령아. 아마 너를 완벽하게 사랑하기는 힘들었나봐. 이렇게 될 줄은 알았는데…."
입술을 물던 지민은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웃음은 밝았지만 네 입술이 꽃잎색으로 물들지 않았다.
"똑같은 실수를 할 줄 알았어. 괜찮아. 너라면… 네 손이라면…. 네 손에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어떤 선택을 하던 너를 원망하지 않을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너인걸. 구름처럼 조금씩 조금씩 사랑해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정말 빠듯하구나. 일자를 잴 때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이렇게 코 앞으로 다가올 줄 몰랐어. 네가 아닌 내가 시한부였던 걸. 죽을 시간을 재고 있던 게 어찌나 그리 애타고 가슴 조리던지. 하지만 너와 있을 땐 모든 게 즐거웠고 행복했어. 네가 나를 찾아오길 너무나 기다리고 있었어. 그 자수정같은 눈동자가 또다시 보고 싶어서 손을 꼽았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말 제발 해줘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네 맘 가는대로 따르면 돼. 이왕 죽을 건데 네가 들려주지 못했던 말 다 해줘도 되려나?"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지민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그 눈동자에 눈물을 매달고 그렇게 웃으면 나는…. 이 검을 쥐고 있기 힘들어. 그 누구도 심장에 칼을 박을 수 없어.
"나는 녹의 공주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니야. 너는 모르겠지만 많이 닮았어. 까마득한 오천 년 전이구나. 그녀도 사실 글자를 볼 수 없었거든. 눈이 어두웠어. 이제와서 말하는 건데 나는 거북이가 편해서 그런게 아니고 네게 내 모습 보여주기 부끄러웠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웠거든. 그런데 네가 나보고 예…쁘다? 예쁘다라고 했었지. 그때 네 눈에 담긴 내 눈동자를 보고 생각했지. 혹시 너 나를 좋아해? 귀엽다고 할 땐 정말 싫었어. 너에게 듬직했으면 듬직했지 귀엽게 느껴지게 하긴 싫었어. 그래서 네가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온갖 핑계를 댔지. 녹의 공주가 아닌 홍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는 거 나도 알았어.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한 순간, 아. 나는 이미 너를 신경쓰고 있었구나. 말동무가 아닌 그 이상으로. 그 마음 막지 않았어. 날이 갈수록 커지는 마음은 막아봤자 헛수고거든. 첫 번째 인생에서 깨달았어. 내가 녹의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거야. 그때 반한 건 새 인생을 살아도 비슷한 곳에서 또 반하게 되거든. 그저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그게 절 사랑한 이유에요?"
"그럴 리가. 굳이 꼽자면 그래. 하지만 사랑하는 이유를 찾으려면 못 찾는게 당연해.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어? 그냥 너라서. 너라서 사랑했어."
"지금 저는 어때요. 아파 보입니까?"
"아니. 나 없어도 잘 일어날 것 같아."
웃는 너는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노력한다. 난 너의 눈물을 처음 봐. 지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랬잖아. 나도 울고 너도 울고.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어느 사람의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어떻게 다시 네 가슴에 칼을 박니.
"녹의 공주가 말했었지. 내가 똑같은 실수를 할 것같다고. 맞아. 난 다시 심장이 찔릴 거야. 널 사랑한 순간부터 그 사실은 알고 있었어. 남은 시간에 조금씩이 아닌 퍼붓는 사랑을 할 걸. 난 계속 후회해. 널 사랑한 걸 후회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를 후회하는 거야. 다시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아. 자 어서 찔러.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죽어도 좋아."
"찌르지 않을 거에요."
"그럼 어떡할래. 네 오라버니를 죽일거야? 그건 아니잖아."
"그럼 한 마디만 해주세요."
"어떤 말이 듣고 싶어."
"진심이 담긴 한 마디요."
정원을 감싼 얼음들이 녹아흘렀다. 바깥에 온통 군사로 쌓여 우린 눈물 한 바가지를 흘린다. 지민은 걸어와 나를 안고 제 눈물을 닦았다. 주황 머리. 주황 머리. 비단결 같은 그 머리카락. 흑장미색 얇은 비단 도포. 하얀 피부에 호박색 눈동자. 내가 보는 마지막 눈물 담긴 네 눈동자는 더욱 반짝였다. 네 모습이 마지막일까. 이게 마지막일까. 정말 마지막일까. 마지막으로 널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붉은 검을 쥔 손이 떨렸다. 넌 내게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해줄래.
"사랑해 공주님."
칼날이 빛나고 피가 번졌다.
지민을 밀어내 칼을 더 세게 쥐었다. 정국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리한 감각에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 폈다. 애써 웃는 나는 검을 돌려후볐다. 검은 옷에 번지는 피. 지민은 눈물을 쏟아냈다.
검을 거꾸로 쥔 나는 내 배를 찔렀다.
장기가 돌려지는 느낌에 칼을 확 뽑아 떨어뜨렸다. 네가 아플 일 없어. 내가 말했지. 난 불행한 사람이라고. 더이상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아.
내가 없으면 되잖아. 나를 데려가려고 힘쓰지 마. 나로 슬퍼하지 마.
피가 불밭에 가득 쏟아지고 앞이 어지러웠다. 기어서 지민에게 다가가 귓가에 말했다.
"어때요. 이 정도, 면 괜찮은 선택이죠?"
미친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내 사람들을 지켜내서 행복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내 생애 제일 행복한 순간.
풀잎, 공주님. 둘 다 지켜낼 수 없었지만 남은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었다. 내가 녹의 공주와 다르단걸 입증한 순간 행복이 샘솟았다.
내 선택. 난 네가 날 사랑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 거와 똑같아. 나도 후회하지 않아.
힘이 빠져 풀밭에 누워 숨을 불규칙하게 쉬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들이 몽환적이게 보인다.
지민은 급히 눈물을 거두었다. 숨이 떨어지기 직전인 나를 이고 연못 앞으로 갔다. 산호색으로 빛나는 연못이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났다. 주백색과 비슷하게 빛나는 연못에 빠졌다. 그리고 너도 함께.
연못 안은, 우리의 상처로 가득했다. 벽에 선반들이 있었다. 끝도 없는 그 선반에는 투명한 병이. 그 병 안에는 네 낙인들이 담겨 있었다. 상처들, 아픔들. 나머지 병들에는 지민의 아픈 기억들이 담겨있었다. 형상으로 가득한 병들이 깨지고 지민은 정신을 잃어가는 나를 잡았다. 보글보글 물방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널 치료해줄 수 있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설령아. 널 치료하게 해줘."
"괜찮아요. 이대로도 괜찮아요. 지민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이대로 있어줄 거죠?"
이를 내어 있는 힘껏 웃으니 지민은 아프게 나를 따라 웃었다. 그 반짝이는 호박색 눈은 나를 향해 눈부시게 빛난다. 입을 맞춘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넌 녹의 공주와 달라. 인정해. 녹의 공주와 달리 겁쟁이가 아니야."
"……."
"소원을 말 해."
"……."
"네가 바라는 것. 가고 싶은 그곳. 네가 편히 쉴 그곳을 말해줘."
눈 앞으로 지민이 형용한 모든 것들이 지났다. 행복해보이던 그 모습에 나도 마음이 하얘졌다. 연못은 내가 보았던 형상들로 채워서 아름답게 울렁거렸다.
네모난 것들이 땅 위에 서있다. 땅에 닿는 부분이 낡아서 조금 금간 듯. † 모양이 네모난 것들 위로 앉았다. 네모안에 또 작은 네모들이. 사람들이 네모난 것들 앞에 작게 그려져있다. 거북이가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푹 빠져서 연못물을 울렁거렸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긴 의자에 앉아 있다. 헐렁이는 흰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하얀 산으로 달려가 연을 날린다. 녹색과 홍색이 잘 어우려진 연을. 그러더니 하얀 동그라미가 땅으로 내린다. 만지면 뽀드득 거릴 눈이 내린다. 넓은 대지에 다른 네모난 것들이 정렬되어 눈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녹과 홍은 잠잠하게 눈에 녹아들었다. 낮은 산과 작은 마을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항구와 함께.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내가 말했지?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나와 녹의 공주가 꿈꾸었던 백의 나라로 가자. 네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널 위한 눈이 내리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백의 나라로. 백의 나라란 가상의 세계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그런 곳에 가기 위해선 한 가지 어려운 조건이 충족되어야했다.
'백의 나라라는 곳이 있다구요?'
'존재해. 그런데 가질 못해. 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어. 신이 내게 말했지.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난 아직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백의 나라로 갈 수 있다고.'
드디어 깨달았다. 불 같은 상처구나. 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불처럼 타들어갈 듯한 칼의 아픔이었구나. 나는 지민의 백의 나라로 가는 기적을 꿈 꾼다. 편안히 꿈을 꿀 수 있길.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게. 주황 머리, 너와 함께.
눈을 감으며 지민을 감싸 안았다.
나는 녹도 홍도 택하지 않았다. 너를 택했을 뿐이지. 너는 녹과 홍으로 정의할 수 없다.
"백의 나라. 눈이 내리는 나라에 가요."
모든 게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연못에 퍼지던 내 피도, 나를 꽉 안고 놓지 않으려하는 너의 촉감도. 네 주황 머리, 흑장미색 도포, 호박색 눈동자까지.
다시 만나는 그날에는 네가 날 알아봐주길. 네가, 아니 내가. 우리가 꿈꾸던, 그 백의 나라에서.
내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네가 꼭 먼저 손을 내밀어줘야해. 내가 처음 거북이였던 너를 보았을 때처럼.
"저도 지민 많이 사랑해요."
-短篇 거북뎐 五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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