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반존대를 써요 /채셔
남준의 얼굴에서 음료수가 뚝, 뚝 떨어졌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준은 눈을 깜빡이더니 제 옆에 있던 티슈를 몇 장 꺼내 제 얼굴과 티셔츠를 닦아냈다. 미안……. 고개도 다 들지 못한 채로 남준에게 사과하자, 남준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된 게, 그 웃음도 옛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마치 변한 것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남준은 한결같았다.
"나, 남자친구 있어."
"……아."
온화하게 웃던 남준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너무, 너무… 늦었다, 우리는. 흐릿한 미소와 허심탄회하게 내뱉은 말에 남준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든 남준은 전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에 오히려 내가 더 기가 눌리는 기분이었다. 남준을 바라보자 남준은 다시 웃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아니, 안 늦었어. 남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 나왔다. 어쩜, 어쩜 저렇게 제 마음 숨길 줄만 알던 버릇도 어디 하나 변한 데 없이 똑같을까.
"내가 얼마나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고 노력했는데."
"……."
"그리고 그게 뭐 때문이었는데."
남준은 억울하다는 듯이 굴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랩 음악을 취급해주지도 않던 때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남준을 가만히 바라보다 미련없이 일어났다. 남준의 시선이 나를 쫓는다. 남자친구가 싫어해. 나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말을 뱉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남준의 마음에 균열이 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쯤 남준이 어떤 모습으로 상처를 견뎌내고 있을지도. 시간이 지났더라도 한결같은 남준이라면…. 주먹을 강하게 쥐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다른 남자를 좋아하니까. 다른 남자에게 설레고, 다른 남자에게 사랑 받고 사랑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쉽게도 남준은 장장 8년 전의 첫사랑, 그런 존재 밖에는 되지 않았다.
*
"어때요? 완전 젠틀하죠."
"…아, 그게."
"막 엄청 여자 배려하는 스타일 아니에요?"
참 고역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여사원들이 우르르 내 주위에 모여들어 하나같이 남준 얘기를 늘어놓는다는 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냥 매너 좋으시더라구요.'하고 대충 대답해주었다. 남준과 말을 섞어봤다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이렇게들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친절하셨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럴 거면 자기네들이 인터뷰하지, 그건 또 일하는 거니 싫은가보다. 나는 앉아 인터뷰 자료들을 정리했다. 가만히 분류하고 있다가 서류철을 꺼내기 위해 일어선 순간, 남준이 거친 걸음으로 내 앞에 섰다. 멍하니 남준을 바라보자, 남준은 '김여주 씨, 나 좀 보죠.'하고 딱딱한 말투로 말해왔다. 멍하니 남준을 바라보다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남준은 제 작업실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민망하게 일어서서 남준의 방으로 뒤따라섰다. 뒤에서 여사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콕콕 박혀들었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너 아니야?"
"……."
"그럼 너도 알겠다, 내가 이렇게 포기 안 할 거."
나는 남준을 노려보았다. 남준은 내 예상과 같이 꼭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남준의 주먹을 내 손으로 잡았다. 순식간에 힘이 풀리기에, 똑바르게 펴주었다. 이렇게 하면 상처 나. 멍 들잖아. 내 말에 끝내 남준은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나 때문에 아프지 마. 나 때문에 아픈 건 싫어. 나는 남준의 손을 꼭 잡고 어릴 적 엄마의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남준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미안해, 하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우리 자기가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아."
뜻밖의 저기압에 망개는 내 볼을 쓸어주었다. 퇴근길에서부터 집 앞에 설 때까지 내가 말이 없던 탓에 망개만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내 집 앞에 서서 내 볼을 부여잡고 입술을 쭉 내리던 망개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멋진 남자친구를 이미 만나버렸는데 어떡해. 우린 이미 늦은 거다. 결국 사랑은 타이밍이다. 불가항력이다. 어쩌면 운명의 소용돌이다. 사랑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민에게 천천히, 천천히 안겼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털어내자 지민은 나를 틈 없이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결 진정이 되는 기분이다. 이렇게 따뜻한 품에 안기니까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혹시…."
"……."
"혹시, 남준이 형하고 싸워서 그런 건 아니죠?"
나는 떨어져 지민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침으로 계속 축이며 망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심스럽게 묻자, 지민은 '아…….'하고 말 실수를 한듯 초조한 티를 냈다. 그게……. 아니, 현세 누나랑 우연 씨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남준이 형이랑 싸웠다고 하길래…. 나는 망개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나를 걱정하는 그 눈 앞에서 차마 남준이 내 첫사랑이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남들의 말을 듣고 그걸 으레 믿어버리는 지민이 미워서일까. 그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울먹이는 나를 달랜 지민은 집까지 들어서서 나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런 일 있을 때는 자는 거라고 했어요. 지민은 이제 아예 내가 남준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리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되려 아파오는 머릿속에 더 이상 생각들을 들어앉히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내 배를 따뜻하게 토닥이는 손길과 함께 들려오는 지민의 노래에 편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9. 초록 사과가 빨갛게 물들떄까지
지민과 함께 출근해서 인터뷰 자료를 기반으로 보도 자료를 작성하려는데, 팀장님이 나를 불러왔다. 의문스레 다가가자, '이 질문들이 누락됐는데?'하고 인터뷰지를 내게 건넸다. 나는 인터뷰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 또 김남준을 보지. 가만히 서 있는데, 오히려 팀장님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다른 사람 시킬까…? 팀장님도 나와 남준이 싸웠다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네, 하고 뒤돌려는데 뒤에서 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다시 인터뷰하죠."
"……남준ㅇ…."
"들어와, 김여주."
나도 모르게 남준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남준도 내 이름을 직접 불렀고. 또 어제와 같이 여사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헐, 그럼 싸운 게 아니네. 나는 그게 지겨워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준을 따라 남준의 작업실로 들어가려는데, 제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남준이 씩씩거리며 뒤돌아섰다.
"너 나랑 싸웠다고 했냐."
"……."
"너 나 아예 안 볼 생각이야?"
"………."
남준은 이를 으득 갈며 한숨을 뱉어냈다. 그 한숨 안에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다 들어차있었다. 너한테는 첫사랑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적어도 이제까지 이 바닥에서 버티게 해준 힘이었어. 알아? 남준의 억울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남준의 눈에는 지나가는 행색을 하면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들어가서 얘기해.'하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하지만 남준은 입술을 꼭 물고 거친 숨을 내밀 뿐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남준의 손목을 잡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내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첫사랑."
"……."
지민이었다.
※이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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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음 편은 남준이 번외로 만나요! 아 참, 어제 쓰다가 잠들어버려서 미안해요 8ㅅ8 혹시나 기다렸을까봐... 엉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