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 김태형과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이야기.txt
[ 오늘 신입생 대면식이 있을 예정이니 다들 저녁 6시까지 학교 앞 술집으로 모여주세요 ]
"박지민. 너 여기 갈거야?"
"가야지. 대면식 이런거는 가는거래."
"...아. 술 못 마시니까 가기 싫어."
"탄소 술 못마셔?"
교수님의 강의 오리엔테이션으로 짧게 끝난 오후 수업을 마치고 전공서적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향하던 도중에 과 단톡이 울렸다.
대면식이 있을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개강 첫 날부터 술이라니. 대표 술찌인 내가 박지민에게 괜히 투정을 부리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국이 물었다.
술을 못마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게 인지상정. 은 대신 대답하는 박지민때문에 실패.
"얘 부라더소다 마시고 취할걸."
"그 정도야?"
"부라더소다도 술이야. 무시하지마."
3도는 술 아니냐!! 그것도 술이라고 미성년자한테 안 판다고!!
결국 나는 순순히 주량이 반 병 남짓이라는 것을 밝혔다. 말이 반 병이지 기억을 잃지 않으려면 그것보다 덜 마셔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오늘 나의 목표는 안 취하는건 바라지도 않으니 말실수 없이 집에 잘 가는거. 이것만 성공해도 참 좋을텐데.
박지민은 그래도 여자 선배가 거의 없으니 남자 선배들에게 애교를 부려서 술을 안 권하도록 해보라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애교의 'ㅇ'자도 모르는 나에게 뭐라고 하는거야. 시방.
아니꼬운 표정으로 박지민을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선 정국이 거든다.
"안 돼. 그러다 탄소한테 다 반한다."
"아, 그러려나. 그럼 기공 여신 김탄소 오늘 탄생하나요~"
"이 쉐키들이 나를 못 놀려서 안달이네."
원래 공대 여자는 여신이 되는게 아니라 남자가 되는거랬다. 다른건 뭐든 상관없으니 술만 남자들처럼 안 줬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서점에 도착했다. 오늘 교수님이 사오라던 책 하나만 샀을 뿐인데 아주 매우 정말 무겁고 두꺼웠다.
가격은 또 어찌나 비싼지, 내가 이 저자들처럼 공부를 잘해서 책이라도 하나 썼다면 돈을 참 많이 벌었을텐데.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보니 정국이 돌연 내게 손을 내민다.
"줘. 들어줄게."
"어휴. 됐어."
"무겁잖아. 또 거절하면 안 들어준다."
"...그럼..."
염치없지만 좀...들어주겠니...ㅎ.
정국에게 책을 넘기니 돌아오는건 니가 더 힘이 셀 것 같다는 박지민의 망언 뿐이었다. 제기랄. 솔직히 좀 인정.
아직 여섯 시가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그동안 박지민의 자취방에 가있기로 하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면 냉장고부터 털어볼까.
박지민의 자취방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사실 산지 얼마 안되서 그런 것 같다. 아마 여기는 곧 쓰레기소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침대의 반을 차지하고 거의 눕다시피 앉았다. 나머지 침대 끝 쪽엔 정국이, 박지민은 자리가 없어 바닥에 주저 앉았다.
순간 저 두꺼운 전공서적도 그렇고 내가 오늘 집에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민. 나 오늘 취하면 집에 데려다 줄거지?"
"김태형 불러."
"...아, 미안하잖아."
"그게 누구야?"
아. 정국이는 김태형 모르지, 참.
우리 둘의 대화에서 나온 김태형이라는 인물이 궁금했던 정국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또 난감하네. 이걸 뭐라고 대답해줘야하나. 하숙생? 동거인? 아니야. 말이 이상하잖아.
"어...친구?"
"아. 집이 가까워?"
"...어...가깝지..."
사실 같이 살아. 정국아.
"박지민, 너랑도 친구야?"
"응. 중학교. 얘랑 걔는 유치원 때부터."
"와...진짜 오래된 친구다. 게다가 집도 가까우면 많이 보겠다."
"아무래도...그렇지...?"
많이가 아니라 매일 봐. 정국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짝꿍끼리 손도 잡고 그러던데."
"맞아. 내 짝꿍은 어디서 뭐하는지."
"그 친구랑 짝꿍도 많이 해봤겠네?"
"...응...몇 번..."
지금도 가끔 손 잡아. 정국아. 생각해보니 손만 잡는건 아닌 것 같아. 정국아...
하지만 나는 해맑게 대화를 하고 있는 정국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우선 한 집에 산다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친해진지 두 달도 안 된 친구에게 말하기엔 뭔가...좀...그래...
나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아꼈다. 더 일이 커지기 전에 그냥 김태형에게 미리 말을 해놓는게 나을 것 같아 카톡을 했다.
[ 나 오늘 술마셔 ]
[ 대면식 ]
[ 근데 - 김태형 ]
[ 근데라니... ]
[ 데리러가라고? - 김태형 ]
[ 그냥 알아두라고 ]
[ 박지민이 안 데려다 준대? - 김태형 ]
[ 몰라 ]
[ 아무튼 알겠어 - 김태형 ]
[ 엄마한테도 나 늦게간다고 말좀 ]
[ 오키 - 김태형 ]
-
시간에 맞춰 술집에 도착한 우리는 끝 테이블부터 채워앉으라는 낯선 선배의 말에 구석진 곳으로 가 앉았다.
여섯자리 테이블에 나와 내 옆엔 정국이, 그리고 내 맞은편엔 지민이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빈자리를 선배들이 채웠다.
그리고 그 중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
한명씩 자기소개를 시작하고 선배 중 하나가 우리 모두의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여자라고 상대적으로 조금 따라주긴 하더라. 하지만 저것도 나에겐 조금이 아닌 것을...
처음부터 술을 빼면 안좋은 이미지로 기억될까봐 눈을 꼭 감고 원샷을 했다.
내가 술을 못마신다는 것을 아까 알게된 정국이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마시기 힘들면 나한테 말해."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와중에 이름이 정호석이라던 선배 한 명이 나와 정국이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 분위기를 몰아가기 시작한다.
"오~너네 둘이 뭐야. 뭐야."
"...예?"
"나 촉 되게 좋아."
"친구에요."
"네...친구에요..."
오늘 술자리가 편히 끝나진 않을 것 같았다. 어딜가나 한명쯤은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우리 테이블에선 저 선배였다.
다른 테이블은 아직도 친해지고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분위기 같은데 우리는 벌써 술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작했던 눈치게임에서 숫자는 6중 4까지 도달해있었고, 남은 사람은 나와 정국이었다.
하지만 정국이는 숫자를 외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계속 나를 바라보길래 소심하게 5...하고 말하니 정국이는 기다렸다는듯 술잔을 내밀었다.
...와. 감동...
그렇게 술게임은 계속 되었고, 정국이도 저런 식으로 내가 마셔야 할 술을 대신 많이 마셔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 잔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로 나는 그렇게 주량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술게임은 또 겁나 못해서 이번에도 내가 걸리고 말았다. 이젠 뭐 해탈의 경지에 오를 정도다.
이미 취기가 올라오는 중인데 이걸 또 마시면 정말 필름이 끊길 것 같았다. 아련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는데 아니 글쎄 정국이가 또.
"흑기사 돼요?"
"전정국 괜찮냐."
"아니...정국아. 그만 마셔도 돼."
"마지막이야."
결국 정국이는 또 내 잔을 대신 비웠다. 아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흑기사니까 소원을 들어주라는 주변의 목소리였다.
"어...소원이 뭔데...?"
"나중에 따로 말할게."
재미없다, 김이 빠진다며 장난 섞인 야유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정국이 꽤나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매우 멀쩡해 보인다.
정국이 무슨 소원을 내게 말할지 조금 두려웠지만 지금까지 정국이 마셔준 것만 생각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선배들은 단체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비록 손에는 담배곽이 들려있었지만.
그나저나 나 지금 혹시 어지럽냐.
"...나랑 바람 쐬러 갈 사람."
"같이 나갈래?"
"그래. 니가 김탄소 술 좀 깨우고 와."
"조용히 해. 박지민. 못쉥긴게."
"...너 취한 척 하면서 욕하는거지."
진심 취했나. 자꾸 나도 모르게 취중진담이...ㅎ.
자리에서 일어나니 순간 어지러움이 확 몰려왔다. 애써 비틀거리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고 걸었다.
하지만 몸은 내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정국이 내 어깨를 잡고 부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건물 밖까지 나가 보이는 아무 벽에나 몸을 기댔다.
"많이 어지러워?"
"...응..."
"여기 잠깐 있어. 술 깨는 약이라도 사올게."
"...괜찮은데..."
하지만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정국이는 이미 저만치 가있었다.
술기운 반, 멍한 정신 반으로 정국이가 떠난 길을 바라보는데,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린다.
"여보세요오..."
'뭐야. 너 취했지.'
"김태형이네..."
'취했네. 못산다. 진짜.'
"응...나 취했나보다..."
'언제 끝나. 그거.'
"곧...?"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쪼그려 앉았다. 취해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몸이 흔들렸다.
저 멀리서 정국이 돌아오는게 흐릿하게 보였다.
'데리러 갈게. 지금 가면 돼?'
"웅..."
'알겠어. 술 더 마시지 말고.'
"응..."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게 가까이 온 정국이 유리병 뚜껑을 따 내게 건넸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받아마셨는데 맛없어. 으에. 그리고 정국은 곧 끝날테니 다시 올라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다시 돌아간 테이블엔 선배들 사이에 껴서 어색함 가득한 표정으로 술을 받아마시고 있는 박지민이 보였다.
나와 정국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선배들은 다들 내가 취해보이긴 했는지 하나같이 이만 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행인건가.
정국은 나를 바래다 주고 오겠다 말을하고 내 겉옷을 대신 챙겼다.
방금 올랐던 술집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때마침 김태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디야."
'넌 어디야. 나 다 왔어.'
"어. 저기있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니 보이는 김태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 김태형을 처음 본 정국을, 김태형도 마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둘이 초면이고 뭐고 난 안 보인다. 왜냐면 난 취했거든. 나는 취했어. 나는 어지러워.
"그쪽이 태형...?"
"아. 네. 이제 가셔도 되요."
"여기 옷."
"둘이 인사했어? 인사해!"
"...조용히 좀 해."
"왜 둘이 인사 안 해..."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왜 둘을 인사시키고 있는거야. 말이 나도 모르게 막 나간다. 이래서 음주가 무섭습니다. 여러분.
김태형은 정국이에게 받은 옷을 내게 입혔다. 사실 입으라고 줬지만 내가 팔 넣는 구멍을 못찾아 결국 입혀줬다.
"정국이 안녕!"
"조심히 가."
나는 김태형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정국이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고는 김태형이 이끄는대로 걸었다.
"나 곧 술 깰거야."
"왜."
"왜냐면 정국이가 술 깨는거 사줬거든."
"...그래."
술에 취해 눈치라곤 개나 줘버린 나는 김태형의 표정이 그닥 좋지않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정국의 얘기를 떠들었다.
"정국이가 흑기사도 해줬어."
"... ..."
"아니면 지금 더 취해있었을지도 몰라."
"야."
"응?"
"너 일부러 그러냐."
김태형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덕분에 나도 그 자리에 서 멍청한 얼굴로 김태형을 바라봤다.
나중에야 내가 도를 넘게 정국의 이야기를 했다는걸 깨달았지만 그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왜 김태형의 표정이 안 좋았는지도, 왜 김태형이 화가 났는지도.
"나 놀리는거지."'
"...아니야..."
"너 취했으니까 말하는건데."
"... ..."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는거 아니야."
-
호석이 특별출연 짝짝짝
질질끄는거 별로 안좋아하니 후다닥닥 써브러야겠어요
결말이...결말이 다가옵니다...
그나저나 독자님들? 전편 댓글보니까 한 방에서 왜 안자냐고 다들 그러시던데..(ㅇㅅㅁ)
한 방에서 재울걸 그랬나봐요(부끄)
짤없이도 여러분은 이해하는데 문제 없으실거라고 믿고 믿습니다
마우스가 고장나서 짤까지 넣으려면 오래걸릴까봐 그냥 올려요ㅠㅠ
~♥~ ~♥~〈 암호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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