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캐롤 터킹턴-
*
상혁이가 택운씨 병원에 입원한지 이틀이 됬다. 집에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했지만,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떠는 것 보다는
인적이 많은 병원에 있는게 낫지 않을까 가 우리의 작전이였다. 작전이라기 보다는 거의 강제 선택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셋이 같이 있는게 덜 위험하니까.
택운씨의 인맥이라고 하니 1 인실에 머물게 되었다. 그 일이 일어난 뒤로, 나는 계속 어색했고, 상혁이도 내 눈을 슬금슬금 피하는게 보였다. 첫 날에는 이재환이 와서 우리 둘에게
'너네 뭐야? 왜 이렇게 어색해? 설마...설마..잤니?"
라고 물어본 뒤로는 더 어색해졌다.
이재환은 상혁이에게 쌍욕을 먹은 뒤로 택운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상혁이는 큰 침대같은 곳에서 자고 나는 보호자로 되있어서 간의 침대에서 잤다.
원래는 상혁이가 미안해서 나보고 큰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데 그렇게 자다가 간호사에게 혼이 난 뒤로는 간의 침대로 쫓겨났다.
둘 쨋날 밤에 나는 하루종일 정택운 씨의 일을 돕느라 피곤 했는지 간의 침대에 눞자마자 잠이 들었다. 가을로 접어들자 한참 추워질때라 어르신들이 관절로 인해 병원에 많이 오셨다. 손이 부족하다 하여 병원에서 잠시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택운씨의 제안에
"네, 할께요. 어차피 상혁이랑 있어봤자..할 말도 별로 없고 아직..."
라고 긍정적이면서도 어중간한 답을 했다. 그생각보다 일이 많아 좀 후회도 했다.
그렇게 바로 잠이 들었는데, 한 밤중에 머리결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드는게 느껴졌다. 두피로부터 오싹한 기운이 들자 몽롱하게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잠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창문 쪽으로 부스럭거리며 고개를 틀자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면서 내게 다가왔다.
"미안, 깼어?"
한상혁의 목소리.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내가 누워있는 곳이 창문과 높이가 비슷했다. 그는 다가와서 내가 누워있는 곳에 옆에 기대어 앉았다.
" 별빛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가와 만지는 나의 머릿결도 내 볼을 간질거리는 머리카락도, 그의 뒤로 비쳐오는 달빛 전부가 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대로만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거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던 걸 지도. 나는 움직이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만이 그의 손결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고, 이 긴 밤이 금방 지나가버릴 것 같았다 .
-삐, 가느다란 선율이 고막을 지나갔다. 미간을 찌푸리자 상혁이가 이마 가운데를 누르면서 주름이 생기면 더 못생겨 진다며 내게 웃어보였다. 그는 내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며 읽어보라는 눈짓을 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며 받아들자, 그는 마지막 문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문장을 읽으려고 했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아는 글자인데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답답했다. 읽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장 끝,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다시 그에게 건네주며 여기, 마침표를 찍어야지 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내가 가리킨 곳을 한 번 보고, 나를 보며 웃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별빛씨, 별빛씨!!"
정택운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게 됬다. 눈을 비비며 보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정택운씨가 보였다.
나는 간의 침대가 아닌 다른 큰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어제 먹다 남은 사과 반쪽이 접시 위에 놓여져 있는게 보였고, 내가 입던 겉 옷이 걸쳐져 있는게 보였지만,
보여야 할 한상혁은 없었다.
"네?"
"혁이가...없어졌어요."
"네? 아니, 에이 설마. 화장실이나, 산책 갔겠죠"
"이간호사, 뉴스 좀 틀어줄래요?"
그는 잠시, 망설이는듯 했지만, 뒤에 서있던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간호사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리모콘을 들어 전원을 킨 뒤,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면이 돌아갈 때마다 무서움을 느꼈다. 혹시나 , 혹시나 내가 아는 사람이 나오면 어떡하나.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는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쳐갔으며, 화면이 정지하는 순간, 그 많은 생각들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모씨, 연쇄살인범이라며 자백?'
아
아
읽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까.
소리없이 우는 나를 보고 정택운씨는 눈치를 보더니 간호사들 보고 나가라는 손 짓을 했다. 간호사들이 나가고 문을 닫자, 자신도 믿기 힘들다는 듯,그는 티비의 전원을 꺼버렸다. 어지러웠다. 너무 갑잡스러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될지도 몰랐다.
"제게 항상 말했었어요, 자신의 끝은 자신이 마무리 짓겠다고..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용서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언젠가는...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말을 안하고 갈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왜...가게 놔뒀어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게 마무리래요? 우리는 어떡하라고..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끅끅 울어대는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빠르게 터치를 했다,
그 핸드폰의 스피커에서는 한상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빛아,
이걸 들을때는 이미 나는 네 옆에 없겠지.
너가 그랬지? 후회하냐고. 아니, 후회하지 않아. 너를 만났던 그 순간, 너를 데리고 온 그 날부터 나는 너무 감사해.
너희들과 계속 있고 싶어. 함께 지내고 싶어.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이 거지같은 인생을 청산하려고 해.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날 조금이나마 용서해 주실까?
말 없이 간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택운이 형, 재환이 형 잘 챙겨줘.
내가 집에 돌아가는 날, 문을 열면 ..언제나 그랬던거 처럼...반겨줄꺼지?
두서없이 나열된 그의 문장들은 내 고막을 울렸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내 머릿속을 휘졌고 있었다.
그는 평범함을 동경헀다. 정말 사소한 것들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그걸 위해 모든걸 마무리 지으려 했다.
고인 물을 떠버리고, 그 길을 건너가려 한다. 자신이 써내려간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으러 간다.
그는 항상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밀어 주길, 용기를 주길,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기다려 주길.
"천사의 몫이라는 말이 있어요. 와인을 나무통에서 숙성시킬 때 증발해서 없어지는 양이 10퍼센트정도 된다고 해요. 사람들은 그걸 천사들이 가져가고,
좋은 술을 만들어지게 해준다고 하죠. 상혁이는 이 말을 듣고는 제게 이렇게 말했었어요."
천사들에게 내 인생의 10퍼센트를 주면 90퍼센트의 행복을 주지 않을까?
" 상혁이는 지금 나무통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거에요. 90퍼센트의 행복이 찾아오길. 우리가 가져다 줘야죠. 그 행복"
우리는 천사들이 10퍼센트를 가져갈 동안 기다리면 되요. 그게 저희의 몫이에요.
택운씨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 옳은 길이 될것이니라.
이 세상에 잘못된 길은 없고, 잘못 든 길만 있을 뿐. 깨닫기만 하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나는 아직 복잡했다. 남은 건 나의 몫이 였다. 그도 견디고 있다. 나도 견뎌내야 한다.
우리들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행복을 동경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장미빛 고래 입니다.
정말 이번 화가 제일 오래 걸린 거 같아요. 많은 고민을 했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느낌일까 하면서.
그래도 항상 쓰고 확인버튼을 누르면 허전하고 아쉽네요. 더 잘 쓸껄하면서 후회해요.
모든걸 이해하고 있는 택운이와 모든걸 이해해야하는 김별빛,
이번 화를 쓰면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네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마지막 화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