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했던 나의 유년기. 흐릿한 기억 속에 선명한 너.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우리의 관계는 어딘가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단지 우정으로만은 국한되지 않는 미세한 떨림과 애정이었다. 달달한 초콜릿의 카카오 함유량처럼 우리 사이에 사랑이란 아주 소량의 첨가물에 불과했다. 멋스러운 턱시도를 입은 남자아이와 하얀색 신부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손 꼭 잡고 유치원 학예회 오프닝 멘트를 할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투닥대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반반씩 함유되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쓴맛을 내는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들을 한 곳에 몰아넣으면 문제가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서른 명의 학생들 중 누군가는 철저하게 소외되고 버림받는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나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성재를 닮아 그런지 내 성격 또한 상당히 괴팍하고 정의로웠다. 체육 시간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농땡이 피우는, 주먹질 좀 한다는 아이들의 지갑 털이 장면을 목격한 후 그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린 게 문제의 원인이었다. 다른 반이라 자주 만나지 못 했던 성재는 내가 따돌림당한다는 사실을 끝내 모르고 내가 죽고 난 후에야 자책했다.
죽음에 관련된 책을 읽고 성재에게 사후(死後)에 대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인지 -비록 내용은 가볍지 않았지만- 가볍게 던진 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성재였다.
" 나는 죽어서도 내가 바라고 꿈꾸는 것들을 다 이룰 수 있는 세계에서 살 거야.
거기서는 죽지도 않으니까 평생 놀고먹고 다 하면서. 너는? "
" 음.. 그럼 나는 네가 사는 그 세계에서 같이 놀고먹어야지 "
성재의 눈이 흥미에 가득 차 반짝하며 빛났다. 그래, 기꺼이 초대해주지. 하며 허세를 부리는 그가 어린 아이같아 웃음이 났다.
아이들은 치가 떨리게 무서웠고 잔인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 옆 등나무 쉼터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사람은 무섭도록 어리석다. 그런 일상에 적응하는 어리석은 내가 무서웠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두려웠던 날은 짧았던 현실 세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체육 시간에 체육복을 입고 오지 못 했다. 내 체육복을 빌려 간 그 아이는 선생님께 불려나간 나를 졸렬하게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를 째려볼 수 없었다. 되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참해진 거지. 한심했다.
" 오늘까지만 수행평가 깎는 걸로 봐줄게. 다음부터는 얄짤없이 벌점이다. 체육 시간 끝나면 남아서 지하 창고 청소하고 가. "
그날 체육시간, 조회대 옆 계단에 홀로 앉아 우리 반 남자아이들과 열띤 축구 시합을 하는 성재를 바라봤다. 겨울의 중심에서 극강의 한파를 달리던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축구하는 아이들은 전부 반팔 차림이었다. 게다가 덥다는 듯 손부채질까지 했다. 나는 겹겹이 입은 내복도 모자라 두터운 오리털 패딩을 여몄다. 같은 운동장이었고, 같은 겨울이었지만 둘의 온도 차이는 생생히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성재가 야속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 순간 따뜻하면 그걸로 됐다. 그 이유는 나중이 돼서야 깨달았다. 아픈 건 나만으로 충분한 이유.
지하라서 따뜻할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뭐부터 치워야 하지 막막해져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자 창고 속 가득한 먼지가 폐에 얹혔다. 먼지부터 해결해야 되겠구나. 빗자루로 바닥에 그득히 쌓인 먼지를 정성껏 쓸었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먼지에 쓸데없이 연민을 느끼며 창고 밖 쓰레기통에 모은 먼지들을 버리려 문고리를 돌렸다. 순조로이 돌아가던 녹슨 쇠문고리가 철컥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바닥의 냉기보다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설마. 얼마나 문고리를 돌렸는지 손에서 나는 철봉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그렇게 몇 번 시도를 한 후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언젠가는 열어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난 그들에게 겨우 먼지 같은 존재였다. 책상 위 얇게 얹힌,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런 작은 먼지. 손으로 쓸면 그제야 거뭇하게 눈에 띄는 그런 존재였다. 그들이 까맣게 잊어버린 나의 존재감을 깨달아 창고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말했다시피 때는 극강의 한파를 달리던 겨울이었다. 나는 홀로 그곳에서 먼지와 함께 현실 세계에 마침표를 그었다.
누구도 나의 죽음을 추모해주지 않았다. 다만 성재를 제외하고. 내 소식을 접한 성재는 내 책상 위에 얇게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그 위에 하얀 안개꽃 가지를 올려놓았다. 방과후 교실은 정적이었다. 그 진공 속을 성재의 울음소리가 매웠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습했다.
" 늦게 알아서 미안해. 하고 싶던 말이 있었는데.."
내가 있어야 했을 성재의 옆자리에는 외로움만이 가득했다.
" 그 세계에서 네가 원하는 거 다 하면서 살아. 너 외롭지 않게 나도 늦지 않게 갈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거기에서 할게. "
그도, 나도 늦게 알았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지독히 쓴 초콜릿이었음을. 우정과 애정이 오래도록 쌓이면 지층이 단단한 사랑이 된다. 그 간단한 공식을 깨닫기엔 우린 너무 철없었고 유치했다.
미성숙했던 시절, 청소년기를 가장한 유년기였다. 이제는 흐릿한 기억 속 오직 너만이 선명하다.
반복재생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성재는 여주의 뒤를 따르게 돼요..ㅠㅠㅠ
성재야 죽디먀ㅜㅠㅠㅠㅠㅠ하......
일주일 만인데 이런 똥글이라 죄송해요..
귀한 포인트 내고 읽어주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계타실 거예요★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