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군지정(戀君之情)
임(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변함없는 사랑
마을은 더 이상 활기를 띄지 않았다.
어지러이 검은 깃털이 떨어져 있고 피가 곳곳에 흩뿌려지듯 굳어있었다. 저 검은 깃털들.. 어쩌면 그렇게 오국(烏國)이 쳐들어온 거라 티를 내며 쳐들어오는 건지. 각 병사들마다 검은 깃털을 갑옷에 꽂아 자기들이 오국의 병사임을 티냈었다. 까마귀란 조류 자체도 오국에서 밖에 나오지 않으니 의심할 거리도 없었다.
오국의 습격이 있는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수습조차 못하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꼭 굳게 닫혀있는 저자로 보아 민심이 많이 돌아선 듯 보였다.
"신녀님."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황제가 내게 붙여준 호위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냄새가 역해 신녀님께 해가 될까 겁이 납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그 또한 닫혀있는 저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공터에 상인들이 잔뜩 나와 나에게 이것저것 건네고, 저 구석에서 어린 백성들이 놀이를 하고 있고, 또 저쪽에선 누가 봐도 화려하고 예뻐 보이는 아가씨들이 이 노리개, 저 노리개를 자신의 옷에 대보고 있을 터인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그가 잡생각을 떨칠 생각인지 잠시 머리를 젓더니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곧, 다시 괜찮아 질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요."
"원우.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엔, 다릅니다.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어요."
"......"
"얼마 전까지 상가를 돌아다니던 상인들도, 저기서 놀이를 하던 어린 백성들도, 아직 어리고 또 예쁜 아가씨들도.. 다.. 제 안일함 때문에 죽었단 말입니다."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원우는 강 쪽으로 눈을 돌렸다. 햇빛이 비쳐 반짝거리던 강. 하던 맑아서 청강(淸江)이라 불리던 그 강조차 붉게 물들어 썩어가고 있었다. 용이 되어 더욱 번창할 것 같던 우리 이국(彲國)도 점차 저 강처럼 썩어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라버니, 책 읽어주세요!"
"어떤 책을 읽어주면 네가 좋아할까?"
"전 오라버니가 읽어주는 책이라면 다 좋습니다!"
"그래? 흠, 이 책이 좋겠구나."
오늘은 항상 꿔오던 사무치게 외롭고 미치도록 가슴 아픈 꿈이 아닌 듯싶었다. 내가 항상 꿔오던 꿈은 버려지거나 버려지기 직전인 듯 우울하기만 했지만 오늘의 꿈은 뭐랄까, 몽글몽글했다. 그 감정이 꿈에서 깨어난 나에게도 전해진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슴께에 손을 올려두고 그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라 잊기 싫었다.
어린 소녀는 마냥 그 오라버니가 좋았나보다. 끊임없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만 그 오라버니라는 사람의 얼굴을 여태껏 보지 못해서 아쉽기까지 했다. 다시 잠들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똑- 똑-
정갈한 두드림 후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님이 드십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그는 으레 그렇듯 하녀에게 들어오지 말라 손짓 한 후 문이 닫히기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황제답게 근엄한 모습만 보이는 그는, 내 앞에선 황제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말투를 사용하고, 표정을 짓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그제야 한 발자국 떼며 물었다.
"방금 일어났습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에게로 와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주었다. 3년 전 갑자기 신녀에 간택된지라 온갖 치장을 하느냐고 머리가 상할 대로 상해있었다. 그것을 승철도 느꼈는지 내가 아프지 않게 조심히 쓸어주었다.
"오늘도 안 좋은 꿈을 꾼 겁니까?"
항상 어린 소녀의 꿈을 꾸면 늦잠을 자던 날 잘 아는 승철의 말이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몽글몽글한 느낌에 가만히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몽글몽글... 신녀님다운 표현이네요. 뭔지 알 것 같습니다."
따뜻하게 웃은 그는 창가로 가 창문을 살짝 젖혔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는 밖을 가만히 내다보던 그가 돌아서 나를 보았다.
"작국(鵲國)의 신녀와 아는 사이라 했지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으로 가 종이를 펼쳐 오늘 꿨던 꿈을 적어나갔다. 내가 적을 동안 승철은 조용히 방석 위에 앉아있었다. 이따금 뒤를 돌면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가만히 나를 볼 뿐이었다.
작국의 신녀라..
그 언니는, 신을 받기 전의 나를 아는 것 같이 보였다. 신녀가 신을 받게 되면 신을 받기 전에 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며 동기(同氣: 형제와 자매, 남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며 자신마저.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언니이기에 호기심과 두려움에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어쩐지 마지막 서신을 보낸 후로 언니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신녀들의 신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 돌아옴과 동시에 더 이상 신탁을 받지 못하는 몸이 된다는 거였다. 설마..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며 나쁜 생각을 그만두고 오늘 꿈에 대해 다시 적어 내려갔다.
다 적고 책상 한편에 종이를 말아 놓으니 기다렸다는 듯 승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무엇을 본 건지 아십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해 저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작국의 신녀는 특이하게도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근데, 오늘따라 승철이 이상하다. 이렇게 이것저것 물을 사람이 아닌데.. 아. 알겠다.
"황제 폐하. 이제 대답해주세요. 이야기했던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일주일 전, 진실을 말해달라던 나의 말에 승철은 생각을 정리하고 일주일 후에 나에게 말해주겠다 하였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진실에 대해 묻는 나의 말에 승철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나에게 만큼은 오라버니처럼 다정하기만 하던 그가 이리 정색을 할 땐 근엄한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곧 표정을 푼 승철이 예의 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난, 가장 신녀다운 너를 받아 준 기억뿐이거든요."
간택하다, 라는 표현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승철은 말했었다. 나의 손목을 잡은 승철은 곧 잡아당겨 자신의 앞에 날 앉혔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며 끌어안고 어깨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요즘, 승철은 그 답지 않은 행동을 자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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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 달 후. 저잣거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창문을 젖히면 보이는 그 풍경은 예의 그 저잣거리 같았다.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만큼 무뎌진다는 것이니.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전쟁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는 너무 무섭다. 그리고 두렵다.
"원우."
나의 작은 부름에 문이 열리고 원우가 들어왔다. 내 옆에 있더라도 못 들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임에도 원우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승철이 나에게 원우를 붙여준 이유였다. 예민한 감각과 빠른 반응. 일당백은 하는 이국 최대의 무사였다.
"저잣거리에 나갈까 합니다."
"바람이 많이 찹니다."
"답답합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원우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침소를 나갔다. 그와 동시에 궁녀들이 들어왔다.
원우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저잣거리에 나왔다. 이리 활기를 빠르게 되찾을 줄은 몰랐다. 내 뒤를 따르고 있는 열 명의 하녀, 하인들과 원우를 보아 내가 신녀임을 알 텐데도 사람들은 내게 욕하는 것 없이, 오히려 나에게 살갑게 다가와 이것저것 건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역사를 잊고, 전쟁에 무뎌진 자들은 그들의 똑같은 수법에 다시 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승철에게 건네지 못한 가장 최근의 신탁이었다. 난 그것이 두려운 거였다.
"신녀님. 이번에 새로 나온 옥가락지입니다."
"한번 드셔보셔요, 신녀님! 제가 만든 찹쌀떡이여요!"
찹쌀떡을 들이미는 열살 남짓한 사내의 목 앞으로 검집을 이용해 위협을 주는 원우를 말렸다. 그리곤 그 사내아이와 눈을 맞추려 무릎을 굽혔다. 원우의 위협에 잔뜩 겁을 먹은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의 손에 들려있는 찹쌀떡 앞으로 두 손을 건넸다. 손 위로 찹쌀떡을 올려준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곧 언제 겁을 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저의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였다.
그 아이를 보며 찹쌀떡을 베어 물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원우는 신녀님 때문에 이리 나올 때마다 속이 탄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국의 백성들입니다. 나에게 해를 가할 리 없어요. 마치 원우가 나에게 해를 가할 리 없듯이."
"허나. 조금이라도 위험하신 일을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며 저잣거리를 조금 더 걷기 위해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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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실을 다녀오신 겝니까?"
승철이었다. 내가 없던 나의 침소에 들어와 있는 그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아무 의심 없이 그에게 대답했다.
"네. 오늘 어느 아이가 준 찹쌀떡을 먹었습니다. 평범한 찹쌀떡이었는데 매우 맛있었습니다."
"아, 찹쌀떡을 좋아하셨군요. 내 장인을 불러다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그저 아이의 마음이 예뻤던 겁니다."
"신녀님의 마음도 예쁘십니다."
환히 웃는 승철의 모습에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어주시는데 어째서 이리 이질감이 드는 것인가.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뒤로 어쩐지 흐트러진 것 같은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하나가 빈다. 그것에게로 다가가 두루마리를 확인하려 하는데 그런 나를 막듯 승철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눈이 또 굳었다. 그래. 그는 이국의 황제이다. 이 높은 자리에 올라온 만큼 그는 가볍지 아니하고 마냥 다정하지 아니하며 그 깊은 내면에 잔인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황제이다.
"어찌하셨습니까."
"......"
"어찌하신 겁니까."
"태워버렸습니다. 신녀님, 꿈입니다. 한낱 꿈입니다."
"하, 한낱이요? 황제 폐하 눈엔 그것이 한낱 꿈으로 보이신단 말입니까?"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 곳엔 그 사람이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승철은 자기 멋대로 태워버린단 말인가. 나에게 단 하나의 언질도 없이.
오랜만에 느껴보던 그 기분 좋은 느낌을, 잊었다.
"...그럼 어찌하란 말입니까."
"적어도 저에게 언질은,"
"내 앞에서 네가 다른 남자에 대한 꿈을 꾸고, 그것을 적어내리고, 그것에 웃고 있는데... 도대체 저보고 어찌하란 말입니까,"
뭐라 더 말하려던 승철은 뒷말을 삼켰다. 울컥 이며 올라온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질감.. 신녀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그의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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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녀님께서 지금 저잣거리에 나가셨다고 합니다."
신하가 정갈하게 쌓여있는 두루마리 중 하나를 펼쳐주며 말하였다. 고개를 끄덕인 승철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승철은 가만히 국새를 들었다. 국새,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그 국새는 허공에서 멈추었다. 순식간에 그 곳에 있던 신하들이 숨을 멈추었다. 개중 가장 가까이에서 승철에게 보고를 하던 신하는 승철의 굳은 표정만큼 숨 막히는 주위 공기를 느끼며 그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가만히 국새를 잡은 채 멍하던 승철이 떨고 있는 신하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신녀님의 방엔 아무도 없는 것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다시 고개를 끄덕인 승철이 국새를 내려놓더니 일어났다. 주위의 공기가 더욱 숨 막히게 내려앉는다. 어떠한 표정도 없는 그의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는 신하는 고개를 숙여 제 발치 만을 바라본다. 그런 신하의 귓가로 승철의 발소리가 들린다.
터벅, 터벅, 터벅.
고개를 숙여 시야가 좁은 와중에 보이는 승철의 신발에 신하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방에 아무도 없다, 궁녀 따위도 없다는 것이냐?"
"...이, 있사옵니다."
"헌데 왜 아무도 없다고 한 것이지?"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엎드려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는 신하를 바라보던 승철은 그를 지나쳐 자신의 침소를 나섰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따라 수십 명은 되는 듯한 궁녀와 신하들이 따라나섰다.
신녀가 없을 때의 그는 예민하고 또 예민했다. 또한 신녀와 관련 있는 일에 예민했다.
모든 것은 신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신녀의 침소 앞.
승철은 망설였다. 주인 없는 곳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것은 황제답지 않은 고민이었다. 승철은 곧 결심한 듯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반드시 불태워 없애고 싶은 문서가 저 안에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결심인 듯 보였다. 신하들과 궁녀들을 대기시킨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신녀만의 냄새가 난다. 꽃향기. 그 향기에 취한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닫았다. 밖에서 신하가 위험하다고 하든 말든 제 할일을 끝내겠다는 고집이 강했다.
책상으로 간 그는 책상 위에 있에 올려져 있던 두루마리 하나하나를 다 펼쳐 읽어보았다. 이것도 어두운 것, 이것도 어두운 것. 한참을 찾아보던 그의 손에 드디어 밝은 것이 있다.
"몽글몽글,"
속이 뒤틀린다. 세로로 길게 찢은 그것을 여러 번 겹쳐 찢어버린다. 꿈속의 그 남자가 무엇이기에 신녀가 울고, 붙잡고, 웃는 것인가. 아직 켜져 있는 등불에 찢겨진 조각 하나하나를 불태운다. 신녀의 밝은 기운을 불태운다. 재가 되어 떨어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승철은 차갑기만 했다.
신녀는,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
신녀를 사랑하는 멋진 황제 최승철을 응원합니다.
이곳 배경상 신녀는 황제와 혼인을 하지 못합니다.
넘나 안타까운 것..
+가운데 정렬은 신녀의 시점, 왼쪽 정렬은 작가+승철시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