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이 선물해준 표지들 |
인생그래프꼭짓점 등장인물 소개 |
※ 글에서 나오는 '지탱대'라는 단어가 '지지대'라는 단어로 바꼈습니다! '지탱대'라는 말보다는 '지지대'가 더 정확한 말인 것 같아서 ㅎ
그럼 8편으로 고고싱
인생그래프꼭짓점 08 |
퇴근 후, 호원과 성규 둘이서만 고깃집으로 향했다. 예의상 우현에게 같이 가실래요?하고 물어봤지만 피곤하다며 단박에 거절 당했다. "오늘은 자리가 없네요. 좀 기다려야겠다." "……." 고개를 쭉 뺀 호원이 가게안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행동에 성규가 같이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누구 찾으세요?" "아뇨,아뇨." "두리번거리셨잖아요." "그,그냥 목이 좀 아파서 이렇게 이렇게 운동. 스트레칭." 호원이 횡설수설하며 목을 마구잡이로 돌려댄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성규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동우가 안 보이네…. 동우 있어야 서비스도 많이 받는데…." "그 친구분이요?" "작게 말했는데 들렸어요?" "네?" "무지 작게 말했는데…." "아…. 그냥 들렸어요." "동우가 있으면 고기도 팍팍 주고 상추랑 그런 것도 팍팍 주거든요. 근데 걔 웃음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잠깐 어디 갔나봐요." "그렇구나…."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은 호원의 성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점점 줄이 줄어들고 성규와 호원이 들어갈때쯤 어디선가 달려온 동우가 성규의 등에 폴짝 업혔다. "으하하하하하! 언제 왔어?" "아오,무거워! 얼른 내려와!" 오늘은 그냥 평범한 옷에 선글라스를 낀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잠시 실망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호원이 덜컹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어? 저번에 뵜던 분이네. 안녕하세요." 에구머니나! 선글라스 테두리가 진한 보라색이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8. 치이이 - 불판 위의 고기들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한 손에 집게를 쥐고, 다른 한 손엔 가위를 쥔 성규가 능숙하게 고기를 굽는 동안 호원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린다. "친구분은 많이 바쁘신가봐요?" "아, 동우요? 아뇨.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장사 잘 되는데 혼자 나대느라 저래요." 선글라스를 벗어 목에 건 동우가 테이블을 여기저기 옮겨가며 손님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서빙하는 알바생보다 바쁘고 정신없어 보인다. "쟤가 가게 손님들을 거의 다 친구처럼 대하거든요. 그래서 단골도 많구요." "아아…." 형광등 100개 켜놓은 듯이 환한 동우의 눈웃음에 호원이 잠시 시린 눈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다른 곳보다 동우의 주변만 더 환한 듯한 느낌이다. 한참을 바삐 돌아다니던 동우가 드디어 성규의 테이블에 도착했다. "우하, 바쁘다,바빠." "나돌아다니니깐 바쁘지." "찾는 사람이 많은걸 어떡해." "그나저나 이거 불편해죽겠네." 붕대가 두툼히 감긴 검지 때문에 가위 잡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손은 또 왜 이래? 동우가 물어오자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한 성규가 붕대 반창고를 떼고 꽁꽁 말려져있던 붕대를 모조리 풀어냈다. 잔뜩 처바른 연고 때문에 상처가 하얗게 불어있었다. "요거 조금 베인 것 가지고 붕대만거야?" "내가 한 거 아냐. 갓파같이 생긴게…. 큼, 아무튼 나 손 아프니깐 니가 고기 좀 구워라. 호 대리님. 그 쪽에 있는 건 익었으니깐 드셔도 되요. 고기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네,네." 정말 고기를 구워줄 모양인지 가위와 집게를 집어든 동우가 고깃집 사장님다운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샤샤샥 자르기 시작한다. 한참 갈비를 뜯던 호원이 동우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멋지네요." "네? 뭐가요?" "그 선글라스요." "아, 이거요? 가게 오다가 어떤 아저씨가 만원에 팔길래 샀어요." "한번… 써봐도 될까요?" "그럼요. 잠시만요." 동우, 냅킨을 뽑아 선글라스에 튄 기름을 닦아낸다. 동우의 배려에 감탄한 호원이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히 선글라스를 받아썼다. 정장에 선글라스. 호원이의 쉬크한 매력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우와. 진짜 잘 어울려요! 그 영화 이름이… 아, 테트리스! 테트리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같아요." "하하하하하. 저도 봤어요, 테트리스. 앤디 워쇼스키가 주연이였죠." 입이 터질 정도로 쌈을 쑤셔넣고 햄스터처럼 우물거리던 성규가 잠시 멈칫하며 곰곰히 생각했다. 앤디 워쇼스키가 주연으로 나온 테트리스…. 그거 매트릭스 아니였나? * 호원이 계산을 하는 동안 신발장 위에 놓인 섬유탈취제를 온 몸 구석구석에 골고루 뿌렸다. 매콤한 박하사탕을 입안에 잔뜩 넣고 기다리는데 호원이 한 손에 선글라스를 들고 나온다. "어? 동우가 줬어요?" "하하하하하. 네. 제가 됐다고~ 됐다고~ 하는데 계속 가져가라고~ 가져가라고~하셔가지구요…." 누가 보면 저 선글라스가 십만원은 하는 줄 알겠네. 하지만 호원은 선글라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선글라스와 카운터에 서서 계산서를 정리하는 동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규씨." "네. 왜요?" "성규씨는 참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요." "에이. 호대리님은 서동그룹 아드님인 팀장님이랑 친구면서. 동우랑 저랑은 쨉도 안 되죠."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이쑤시개를 찾던 호원이 동우의 전화번호가 적힌 고깃집 명함을 한장 집어 정장 안 주머니에 스윽 넣는다. * 호원의 차에서 내린 성규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우렁차게 조수석 문을 닫았다. 우현의 하얀 벤츠가 집앞 가로등밑에 세워져있다. "…운전하다가 기절을 하질 않나, 피 조금 난 거 가지고 오버를 하질 않나…." 알면 알수록 또라이같다니깐. 검지 손가락을 보며 중얼거린 성규가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마루에서 TV를 보던 명수가 미세하게 풍기는 고기 냄새를 맡고는 킁킁거리며 다가온다. "킁킁…. 고기 먹고 왔지? 동우형 가게에서." "탈취제 뿌렸는데도 냄새나냐?" "응. 달달한 갈비냄새." "얼씨구. 동네 멍뭉이들이 친구하자고 안 그러디? 엄마는?" "방금전에 아줌마들이랑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오더니 바로 뻗어서 자." 가방을 침대위로 던지고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긴 성규가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향한다. 벗은 옷들을 욕조 안 빨래통에 넣고 샤워기물을 틀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따뜻한 물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드릅게 따끔거리네." 상처가 난 손가락에 비누 거품이 들어가자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쓰라려 온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최대한 사용하지않고 샤워를 마친 성규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혼자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기가 힘들어 엄지 발가락으로 TV를 보고 있는 명수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왜." "나 이것 좀 해줘." "뭘." "여기 아야했어." "뭐?" "TV 좀 끄고 와봐. 형 다쳤다고." "몰랐지. 봐봐." 명수, 검지손가락을 홱 채가더니 이리저리 만지작만지작거린다. 성규가 오만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파!" "쉿! 엄마 깨겠다!" "살살해." "알았어. 근데 왜 다쳤어?" "묻지말고 빨리 소독이나 해줘." "안 봐도 비디오지. 꼴값떨다가 다쳤지?" "아니거든. 아아! 쓰라려." "다쳐도 어쩜 이렇게 밴드 붙히기 애매하게 다치냐." 상처부위 빨간약을 톡톡 두드리고 연고까지 발라준 명수가 밴드를 붙히려다가 잠시 고민을 했다. "왜 세로로 다쳤어? 가로로 다치지." "내가 세로로 다쳐야지~하고 세로로 다쳤냐?" "쯧. 거즈 붙혀야겠네." 하얀 거즈를 상처부위에 대고 반창고를 대충 잘라 거즈 주변에다가 척척 붙혀주더니 다시 TV를 향해 벌러덩 드러눕는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좀 제대로 해주면 안되냐?" "제대로 했잖아. 아, 졸려. 잘래." TV를 끈 명수가 하품을 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궁시렁거리며 약통을 치우는데 문득, 차라리 우현이 해줬던 붕대가 더 쌈박하고 깔끔하단 생각이 들었다. * 오늘은 주말을 앞둔 즐거운 금요일. T.G.I Friday. 즉 Thanks God, It's Friday.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열고 나오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우현의 차가 성규의 앞에 딱 멈춰선다. "8시 10분. 맨날 이 시간이네요?" "팀장님도요." 이젠 타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자연스레 조수석에 올라탄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아뇨. 왜요?" "방학 앞둔 초등학생마냥 신나보여서요." "비유를 해도 꼭…. 내일 주말이잖아요." "주말이 왜요?" "쉬잖아요." "전 집에서도 서류 보는데요?" "누가 보래요? 전 안 봐요. 그래서 신난거고. 저번처럼 기절하지말고 운전이나 제대로 하세요." "기절 안 했어요." "그럼 졸도?" "그냥…그냥 잠깐 어지러웠을뿐이에요." 자존심 세우기는. 성규가 콧방귀를 뀌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현의 운전은 언제나 항상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운전 매너가 탄탄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추월하거나 클락션을 누르는 일이 없다. 우현의 차를 타며 성규가 관찰한 결과였다. 여자들이 왜 운전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에이,부러워. 얼른 차를 사던가해야지. 평소와는 다르게 회사 정문에 차가 멈추자 성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벨트를 풀며 묻는다. "왜 주차장으로 안 가요?" "전 갈 곳이 있어요. 김성규씨만 내리세요." "네. 그럴려고 했어요."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성규가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이제 익숙한 일터가 된 볼네드 건물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나도 이제 대기업 다니는 회사원이지롱." 킁큭킷쿱킥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회전문을 열고 들어간 성규가 마주치는 회사 직원들에게 일일이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기획부실 문을 열고 들어가 여기저기 인사를 하며 자리로 향하려던 성규, 동우가 줬던 선글라스를 끼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호원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저게 뭐하는 짓이야. 성규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자 호원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때요?" "멋있으세요." "하하하하. 아니에요. 아닙니다. 멋있긴 하하하하." 입이 귀에 걸리셨구만 아니긴 무슨…. 작은 거울을 꺼내어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는 호원을 무시하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 옆에서 찰칵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셀카찍은 것 같았는데. 잘 못 들었나…. 정장 마이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는데 또각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직원 네 명이 성규에게 다가온다. "저…김성규씨." "네?" "궁금한게 있는데…." "저한테요?" "네. 물어봐도 되요?" "제가 아는 거면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릴게요. 뭔데요?" "남팀장님이랑 매일 같이 출근하던데 무슨 사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팀장님이랑 저요? 그거야 당연히 팀장과 사원 사이죠. 비즈니스 관계라고나 할까." "바로 옆집사는 사이라던데." 엄멈머.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성규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그게 왜요?" "진짜 팀장님 같이 동거하는 여자있어요? 진짜에요?" "애인사이래요?" "설마 약혼자는 아니죠? 그쵸?" 뭐야, 이 여자들. 완전 남우현 팬클럽이잖아. 근데 동거하는 여자라면 순재씨를 말하는건가? 성규가 여직원들에게 향해있던 몸을 책상쪽으로 돌렸다. "그건 팀장님 사생활이라 제가 따로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직접 물어보시는게 빠르실텐데. 그리고 알고 있다고 해도 팀장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해드릴수도 없어요. 알고 있지도 않지만. 아무튼 대답은 이만하면 됐죠?" 가시가 섞인 성규의 말에 여직원들이 숙덕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일이나 하셔. 잿밥에 관심은 말구. 성규가 혀를 차며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괜시리 짜증이 났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궁시렁거리면서 거칠게 마우스를 클릭하는데 옆에서 또 한번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대리님! 셀카 좀 그만 찍으세요! 일 좀 합시다!" "아,해,해야죠!" 성규의 버럭에 깜짝 놀란 호원이 급히 선글라스를 벗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 회사도 제치고 우현이 도착한 곳은 할머니가 입원해있던 병원이었다. 바깥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있는 최 여사와 할머니를 보고는 우현이 급히 차에서 내린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그냥 안에 계시지." "안은 답답해. 그리고 방금 나왔어." 최 여사의 부축을 받으며 벤치에서 일어난 할머니가 우현의 차로 향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아침 먹었다. 회사로 가자." 우현이 벨트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뒷좌석으로 몸을 홱 돌려 할머니를 쳐다봤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할머니 오늘 퇴원하셨어요." "오늘 퇴원한 거 나도 알아." "그럼 오늘 운전기사가 저라는 것도 아셔야죠. 집으로 모셔다드릴테니깐 푹 쉬세요." 과감하게 핸들을 집쪽으로 돌렸다. 말을 해도 안 들어먹는 우현을 잘 아는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 회사 점심 시간. 성규와 마주보고앉은 호원이 잔뜩 집어온 핫도그를 먹으며 회사 여직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안에 여직원들은 우현이와의 신데렐라의 로맨스를 꿈꾸고 있어요." "신데렐라의 로맨스요?"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로맨스죠. 부잣집 아들이랑 가련한 여주인공이 만나 서로 사랑을 하게 되는 그런 꿈의 로맨스." "그러니까 팀장님이랑 어떻게 잘 되서 결혼까지 골인하는걸 원하고 있는거에요?" "그렇죠." "하이고,참나. 호 대리님. 신데렐라 원작 결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성규가 수저를 손에서 잠시 내려놓았다. "우리가 아는 신데렐라 스토리는요, 독일의 그림형제라는 작가가 샤를 페로의 원작에서 잔인한 부분만 빼고 아름답게 각색한 내용이에요. 원래 결말대로라면 못된 언니들과 계모는 새들한테 눈이 쪼여 먹히고 평생 장님으로 살아가게되죠." 신데렐라 로맨스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건데 신데렐라 로맨스를 바라고 있어, 쯧. "그래도 신데렐라로맨스는 모든 여자들이 한번쯤은 꿈꾸지않나요?" "신데렐라 로맨스에서 신데렐라로 출연할지 계모로 출연할지 아니면 언니들로 출연하게될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신데렐라 로맨스를 바란대요? 마음맞는 사람이랑 하는게 결혼이에요. 얼굴따지고 능력따지고 집안따져서하면 그게 결혼입니까? 계약이지. 종신 계약." 성규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근데 왜 이렇게 흥분해요? 무섭게…." "제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노력없이 성공하려는 사람들이거든요." "우현이랑 마인드가 똑같네요? 우현이도 노력없이 성공하려는 사람들 싫어하는데…." "아무튼간에 제가 지식 하나 알려드렸으니깐 핫도그 하나만 먹을게요." 호원이 울상을 지었다. 알려달라고 한적없는데…. * 오후 3시. 오늘도 이쁘게 차려입고 레디락에 온 성열이 항상 부끄부끄하던 표정과는 달리 잔뜩 부루퉁해서는 오렌지 주스에 꽂힌 빨대만 잘근잘근씹어대고 있다. 자리에 앉은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명수와 말 한 마디조차도 못 나눴다. 그렇다고 명수가 성열을 못 본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들에게 있었다. 신몰남 명수에게 뿅 가서는 시도때도 없이 명수만 불러대는 통에 아예 명수 담당 테이블이 되어버렸다. 성열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게다가 가끔씩 여자들에게 눈부신 웃음을 지어보일때면 가방끈을 잡은 성열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 결국 가방을 챙겨 일어난 성열이 주스값을 계산하고 레디락에서 나와 터덜터덜 정류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좋은데 기분은 끝도 없이 우울하다. 정류장 벤치에 털썩 앉은 성열이 답답한 한숨만 연거푸 내뱉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명수가 밉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많이 밉다. 명수한테 짜증도 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라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큰 소리로 불러세웠다. "허억…허억. 이거…허억." 검은색 앞치마를 맨채로 달려온 명수가 성열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이거…하아, 성열씨 자리에 있던데 성열씨 거 맞죠?" "…아,네." "계속 불렀는데 안 들리셨나봐요. 하아…." 명수가 숨을 가다듬으며 환히 웃는다. 밉다는 말 취소. 솔직히 인간적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멋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w.남위엔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우현은 회사에 출근하지않았다. 볼일있다더니 회사를 빠질 정도로 급한 일인가? 퇴근길에 유용했던 교통수단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했다. 퇴근길에 앉을 자리 없을텐데…. 좋은 꾀가 생각난 성규가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짱동!" [어어.] "오늘은 불금불금! 불타는 금요일! 가게야? 술 한 잔 할까?" [지금 단체 손님 몰려서 무지 바빠! 끊어! 나중에 통화하자! 뿅!] "뭐 임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이게 바쁘다고 친구를 내쳐? 성규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퇴근 준비를 하는 호원에게 의자를 질질 끌며 다가갔다. "호 대리님! 퇴근하고 어디가세요?" "당연히 집에 가야죠. 에이치오엠이. Home." "아…. 그러시구나." 호원의 차도 못 얻어타게생겼다. 저번에 보니깐 반대쪽에 살던데…. 결국 혼자 쓸쓸히 회사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장동우 말고는 같이 술 마셔줄 사람도 없네…. 에이씨. 하늘은 또 왜 저렇게 시커먼거야." 평소 간간히 보이던 별마저 안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이다. 콩나물 시루처럼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빽빽한 지하철에 올라타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 다시 정류장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우현의 차로 오고갈때는 금방이었는데…. 한참 정류장을 향해 걷던 성규가 길가의 야외포장마차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그 이모가 하고 있으려나?" 술도 땡기고 집에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운 날이라서 야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테이블 사이로 분주히 서빙하고 있는 주인이모는 예전 성규가 면접에 떨어진 슬픔으로 술에 취해 엉엉 울때마다 다독여주던 그 주인이모였다. "이모!" "어어! 오랜만이네! 이름이…성규! 그래,맞다,성규! 왜 이렇게 간만에 왔어?" "그냥 좀 바빴어요. 취직했거든." "드디어 취직했어? 맨날 와서 질질 짜고 가더니만." "에이. 그게 언제적일인데….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김밥이랑…홍합탕이랑 오돌뼈 주먹밥이랑 순대 주세요. 간이랑 허파많이많이!" "먹는 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기다려. 금방 가져다줄게." 나무젓가락을 꺼내 손으로 돌돌 말며 미리 입을 푸르르하고 풀었다. 오늘은 마시고 먹고 죽는거야. * 저녁이 되서야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나온 우현이 서둘러 차 시동을 걸었다. 저녁이 되기전에 돌아가려던 계획은 할머니가 여러 얘기와 잔소리로 우현을 붙잡아놓으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넓디 넓은 저택이지만 이상하게 저 집 안에만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라디오를 켜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팝송이 흘러나왔다. 팝송을 따라부르며 차 안의 모든 창문을 열자 시원하고 매쾌한 밤공기가 한가득 들어온다. 괜시리 술이 생각나는 밤이다. "…많이 밀리네." 차들이 시원하게 나아가질 못하고 조금씩 찔끔찔끔거리며 움직인다. 앞 차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전진하는데 매쾌하던 밤공기에 미미한 음식냄새가 섞여들어왔다. 어디서 들어오는 냄새인가했더니 길가에 주황빛을 내며 장사중인 야외포장마차가 보인다. 대학다닐땐 순재와 자주 가곤 했었는데…. "…어?" 그냥 지나치려던 포장마차 야외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 잡다한 안주가 가득한 테이블 위에 사이다 한 병,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이 깔끔히 비워진 채로 세워져있다. 평소 소주 한 병이면 헬렐레하는 주량이지만 술이 땡기는 날이라서 그런지 취했는데도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어라. 끅. 다 먹었다." 소주 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빈 소주병을 내려놓은 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하더니 소주병을 집어들고 이모에게 '이몽~ 나 한 병 더 가져갈게!'하고 소리친다. 푸흐흐 웃으며 뒤를 돌자 어느새 자신의 테이블에 우현이 앉아있다. "…허깨비인가." 눈을 슥슥 비벼봤지만 나무젓가락을 뽑고 손으로 돌돌 비비고 있는 남자는 확실한 우현이 맞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성규가 우현에게 홱 삿대질을 한다. "우이씨, 내 가방!"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우현이 깔고앉은 자신의 서류가방을 힘을 줘 잡아뺀다. "혼자 먹으면서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너 무어야. 끅. 너 언제 왔어" "지금 반말했어요?" "내가 끅.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서 반말했다,이 시캬." 우현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눈도 풀린 걸 보니. "둘러보세요. 빈 자리가있나." 성규가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 테이블을 확인했다. 모든 테이블이 손님들로 가득 차있다. 대부분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다. "언제 다 찼지. 에이씨…." "좀 먹어도 되죠? 저녁을 시원찮게 먹어서요." "어어! 누가 먹으래!" 김밥을 향해 젓가락질을 하려고 하자 성규가 손등을 찰싹 내려친다. "치사하게 이럴 거에요?" "그래. 치사하게 이럴 거다." "…아줌마! 여기 우동 한 그릇만 주세요." 끅! 딸꾹질을 한 성규가 새로 가져온 소주의 뚜껑을 따고 자신의 빈잔에 소주를 따랐다. "…너도 따라주까?" "운전해야해요." "그럼 말고." "그리고 우리가 아직 반말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 좀 가려서 하시죠, 김성규씨?" "니가 뭔데 반말할 사이의 옳고 그름을 따져?" "그럼 나도 반말할까?" "이게 형한테 주글려고." 단숨에 소주잔을 비운 성규가 '크으~'하며 순대 간을 집어 입에 넣는다. "생긴건 와인만 먹게 생긴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래." "와인만 먹게 생긴건 어떻게 생긴건데요?" "거울 안 보고 살아?" "자주는 안 봐요." "그럼 보고 살아, 앞으로…. 끅." "지금 이렇게 반말하고 추태부린거 내일 아침이면 후회하실텐데?" "후회는 과거에 목 매다는 사람만 하는거야, 짜샤. 난 다 잊을거거든? 그러니깐 너도 잊어라…." 주인이모가 우현의 앞에 따끈한 우동을 내려놓았다. 서동그룹 큰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우동이라니. 언밸런스한 모습에 성규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왜 웃습니까. 사람 기분나쁘게." "서동그룹의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우동이나 먹고 있구…." "……." 우현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춰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를? 서동그룹 아들이라는거?" "…네." "며칠전에 호대리님이 말해줘서 알았지. 왜? 난 알면 안 되는 기밀사항이라도 됐었나?" "그건 아니죠. 그 쪽이 뭐라고." "참나. 내가 얼마나 잠재력이 많은 사람인데…." "근데 왜 이호원은 호대리님이고 나한텐 반말합니까?" "넌! 너는 말야… 그래,넌…재수가 없다. 맞아, 재수가 없어." 빈잔을 다시 채우더니 이번에도 역시 원샷한다.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부럽다…." "뭐가요." "너…." 성규가 젓가락으로 우현을 콕 집어 가리킨다. "돈도 많지, 집도 있지, 차도 있지…." "부러우면 지는거에요." "부러워해야 이길 수도 있는거야." "…그런가." "그래도 조금은 고맙다…. 끅." "나한테요?" "그래애…. 너 덕분에 취직도 하고 빚도 갚을 수…." 자기도 모르게 꺼낸 '빚'이라는 말에 성규가 아랫입술을 삐죽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우리 집 빚이 저어~기 언덕보다 높을껄?" "재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 "체감이라는게 은근 정확한 법이거드은…." 어느새 우현은 우동도 먹지않고 자기도 모르게 성규가 하는 술주정을 다 들어주고 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나 사실 피아노 되게 잘 쳐! 너도 봤지? 딩동딩동 잘 치는거. 난 참 재능이 많았는데…." "지금 자화자찬하는거에요?" "그래, 시키야. 내 자랑 좀 했다. 불만있냐?" "자꾸 시키시키거리는데 듣는 시키 기분 좀 나쁘네요." "그럼 골라내고 듣던가…." "…돈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고 돈 밖에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하다는 말 알아요?" "어떤 나사풀린 놈이 그딴 소릴 지껄여. 쯧." "김성규씨는 돈 말고 많은 걸 가졌잖아요. 재능도 있고 지식도 많고." "어쭈. 재수탱이가 왠일로 칭찬을?" "재수탱이요?" "그래, 이 재수탱아." 우현이 피식 웃자 성규가 눈을 바싹 부릅뜬다. "그렇게 웃지말라고 짜샤…. 웃을거면 하하호호 소리내서 웃어. 그렇게 바람빠진 튜브처럼 피식피식 웃지말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김성규씨 눈이 아예 감기려고 하니까." "뭐어? 이씨…. 너 지금 나 눈 작다고 놀리는 거지…! 이 새키 이거." 성규가 휙 손을 휘둘러 우현의 머리통을 때린다. 졸지에 얻어맞은 우현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짓자 성규가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휙 벌린다. "걱정마. 조만간 쌍커풀 수술해서 개구리, 아니지. 개구리는 너무 작으니까…아! 소새끼! 그래! 소새끼 눈망울처럼 커다란 눈이 될테니깐 그때까지 놀리기만 해봐. 너 주거~ 이씨…." "왜 성형을 해요. 그 눈도 괜찮은데." "니가 내 눈으로 28년 살아보던가…." 가방을 챙겨 일어난 성규가 주인 이모한테 다가가 우현의 우동값까지 계산을 한다. "내가 너 우동 계산했다! 그러니깐… 나 차 태워줘…." 우현이 결국 웃고 만다. * 해롱거리는 성규를 부축하며 초인종을 누르고 명수에게 성규를 떠넘긴 우현이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현에게 술 냄새가 확 풍겨오자 순재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다. "어후. 술 냄새. 술 마셨어?" "나 술 마시고 운전 안 하는 거 알잖아." "근데 술 냄새가 왜 나지…." "김성규씨 술 취해서 잠깐 부축했는데 옮아왔나 봐." "성규씨 술 많이 취했나 봐? 이렇게 술 냄새가 밸 정도면." "말도마. 어휴…." "저녁은 먹었어?" "응. 성열이는? 자?" "일찍 잠들었어. 오늘도 나갔다 왔거든." "짜식. 대견하네. 나 피곤하다. 먼저 들어가 잘게." "응." 방안으로 들어온 우현이 정장을 입은 채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내가 너 우동 계산했다! 그러니깐… 나 차 태워줘….' 정말 난생처음 만나보는 타입이다. 우현이 서동 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태도가 변하곤 했다. 선물을 바친다거나 아부를 한다거나. 그러나 성규는 남달랐다. 어째 더 막 대하는 것 같다. "…재밌네." 그래. 김성규씨는 참 재밌는 사람이다. * 학수고대하던 토요일.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앉아있는 성규의 표정은 어두침침했다. "…아으, 낯깎여서 못 살아…." 어젯밤, 술에 잔뜩 취해 우현에게 꼬장을 부린 게 생각나 눈앞이 막막해져 왔다. "아아, 난 몰라….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술 취해서 생쑈를 한 거지." 바로 옆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명수의 말에 성규가 자기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래도 토는 안 해서 다행이다…." 정말 토까지 했다면 날 앞마당에 파묻었을지도 몰라. 일단 사과는 해야 될 것 같아 핸드폰을 집어들고 전화번호부에서 우현의 연락처를 찾았다. 심호흡을 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본 컬러링인 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잠시 뒤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도 아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네'란다. 소름 돋아서 멀미가 날 것 같다. "…어디세요?" [집입니다.] "저…제가 어젯밤은," [지지대는 언제 만들어주실 겁니까?] "…네?" [지지대가 없으면 나무가 휜다면서요.] "그,그렇죠." [만들어주든지 아니면 사서 오든지.] 그러더니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성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폴더를 닫았다. 뜻밖에 별말이 없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어제 팀장이 나 부축해서 왔을 때 있잖아. 팀장도 술 취했었어?" "아니. 되게 멀쩡했어. 말도 또박또박하고." 근데 왜 이러지…. 분명 한 소리 들을 것 같았었는데…. "야. 일어나." "왜?" "옆집 가야 해." "옆집? 옆집은 왜?" "닥치고 연장 챙겨." 이거라도 안 하면 난 죽어. * "…김성규 죽여버려." 여리 꽃밭에 앉아 호미로 지지대 꽂을 자리를 파고 있던 명수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성규가 못들은척하며 자신의 옆에 쭈그려앉아있는 성열에게 물었다. "근데 순재씨가 안 보이네요?" "…마트갔어요." "아아. 마트가셨…구나." 우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성규가 얼른 꽃밭으로 시선을 돌린다. "성열씨는 몇 살이에요?" "저 스물네살이요…." "어? 명수랑 동갑이네? 둘이 친구로 지내면 되겠다!" 성규가 박수를 짝 치며 말하자 성열이 얼굴이 빨게져서는 손가락으로 흙만 만지작거린다. 명수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호미질만 한다. "그냥 편하게 '명수야'하고 불러요. 친구끼리." "아… 괘,괜찮아요." "에이. 얼른." "아아…." 성열이 곤란해하며 무릎에 얼굴을 묻자 벤치에 앉아있던 우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온다. 우현의 눈빛이 '적당히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성규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여기 흙 부분 좀 잡아봐봐." "여기?" "응." 성규가 흙 부분을 뭉쳐 잡자 널빤지 기둥을 땅에 쑤셔 박은 명수가 망치질을 한다. 기둥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박아넣은 명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삼각형 모양의 지지대가 금세 완성되었다. "이건 나무를 심고 나무가 아직 땅에 뿌리를 못 내렸을 때 설치하는 거에요. 어느 정도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렸을 때 빼주시면 돼요." "김성규씨가 알아서 와서 빼주시면 되겠네요." "왜 제가 그걸…." "왜요? 하기 싫으세요?" "…누가 싫댔어요. 제가 해야죠." 내가 저 재수탱이앞에선 다신 술을 안 마실 테야. 우현과 명수와 성열이 손을 씻으러 꽃밭 옆에 있는 수돗가로 향했다. 우현이 분사 호스를 잡고 살짝씩 뿌리는 물에 성열과 명수가 나란히 손을 씻는다. "김성규씨는 손 안 씻습니까?" "씻어야죠." 소매를 걷은 성규가 수돗가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흙묻은 손에 물방울이 톡톡톡 떨어진다. "안 뿌려주세요?" "뿌리고 있잖아요." "…물 몇 방울로 손을 어떻게 씻어요." "더 틀어줘요?" "네. 그래야 씻죠." "알았어요, 그럼." 우현이 씨익 웃더니 분사 호스를 잡은 손에 세게 힘을 줬다. 푸슉! 굵은 물줄기가 분사되면서 성규의 소매를 잔뜩 적셨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우현이 끅끅거리며 웃는다. 성규가 후우- 하고 앞머리를 불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어제 지은 죄가 있으니 내가 참아야지. 참자, 참어. "누가 샤워한댔어요? 손만 닦게," 푸슈슈슉!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성규의 얼굴과 머리를 적셨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후우. 그래. 이것도 참아야지. 성규가 푸흐,하고 입에 들어간 물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리자 또 한 번 거센 물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염병할, 이젠 못 참겠다. "아, 실수. 죄송해요." 분사 호스를 내려놓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우현이 벤치 쪽으로 향한다. 쭈그려 앉은 채로 굳어있던 성규, 분사 호스를 덥석 잡아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우현의 뒷모습을 겨냥했다. 내가 두 번은 참는데 세 번은 못 참지. 성규 손에 들린 분사 호스에서 우현을 향해 거친 야생마같은 물줄기가 뿜어져나온다. 시원한 물줄기는 우현의 뒷모습을 흠뻑 적셨다. 그 모습을 보던 명수와 성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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