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은 저를 지목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맨 뒤 가운데 자리에는 찬열이 긴 팔을 쭉 뻗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변백현이 청소하라고 하면 청소 할게요."
찬열의 말이 끝나자 반 전체가 웅성거렸다. 선생님도 당황하신듯 '정말이니?' 라고 되 물으시며 칠판에 백현의 이름을 적으셨다. 이윽고 백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백현은 떨리는 다리를 감추려 애썼다.
원래 반장이 되고 싶어 했던 아이들의 연설이 끝나고 백현의 차례가 왔다. 반장따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다. 공부할 시간도 없어 쪽잠까지 자는데. 눈에 가시였던 찬열이 더 미웠다.
백현이 교탁앞에 서자 산만했던 교실이 잠잠해졌다.
"뽀, 뽑아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짧은 연설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백현은 넘어오는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친구의 이름을 써넣었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와 같이 찬열과 눈이 마주쳤다. 큰 소리로 묻고 싶었다. 나한테 왜이러느냐고.
*
얼마전부터 찬열은 백현을 괴롭혔다. 아니, 괴롭힌다기 보단 관심을 가졌다. 학기 첫날부터 일주일 동안은 아무 말 없이 백현을 지켜보았다. 잠도 자지 않는지 수업시간 내내 뒷통수가 따가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말을 걸어왔다. 찬열의 소문은 1학년때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와서 처음엔 겁을 먹었다. 그러나 찬열은 소문과는 조금 달랐다. 아주 조금이지만.
"니가 우리반 1등이지?"
"응? 응."
"그럼 나중에 수학문제 좀 알려줘. 혼자는 못 풀어서."
그 이후로도 자주 말을 걸어왔다. 작년에는 몇 반이었냐는둥, 밥은 누구랑 먹냐는 둥. 백현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없었다. 다만 찬열이 말을 건 것 만으로도 백현을 곤란하게 했을 뿐이다. 가끔은 뒤돌아 보기가 무서웠다. 고양이 같이 큰 눈이 언제나 백현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날 찬열은 다른반 친구들을 데려와 백현을 소개했다.
"내 친구야."
"얘?"
"응."
"아오 이 또라이 같은 새끼."
"왜. 백현이 착해."
찬열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불량했다. 옷차림이 불량한것은 아니었지만 교무실에서 자주 봤던 얼굴들이었다. 교무실 안에서는 주로 백현이 서있었고 그들은 엎드려 있었다. 백현은 책위에 박아 놨었던 얼굴을 쉽게 들지 못했다. 보채듯 백현의 등을 툭툭 친 찬열이 덧 붙였다.
"얘가 숫기가 없어."
주변에서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박찬열이 또 엄한애 꼬신다고. 사실 찬열은 성격이 원래 좋진 않았다. 성격 뿐만 아니라 심성적으로 악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는게 제 삶의 낙이라고 말할 정도 였으니 말 다 한거다. 그래서 올해의 타겟은 백현이었다. 찬열은 고개를 드는 백현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두드렸다. 햇빛에 빛나 반짝이는게 꼭 물방울 같다.
"아, 안녕."
친구들 몇명이 '귀엽네.' 라고 말은 했지만 백현은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찬열이 맞장구 치며 '그치? 귀엽지?' 라고 했다. 고개만 끄덕이던 친구들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백현의 옆에는 찬열만 남았다. 아직까지도 백현의 머리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찬열이 손톱을 세워 백현의 머리를 벅벅긁었다.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를 울리는 소리가 싫어 고개를 흔들었다. 기분을 알아챘는지 찬열이 자리로 돌아갔다. 백현은 찬열의 손이 닿아있던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아직 머리카락이 따뜻했다.
잠깐 동안의 회상에 빠져있던 백현은 교탁을 두드리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다. 칠판엔 벌써 바를 정(正)자가 여러개 보였다. 칠판을 훑던 백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변백현 반장. 부반장 민원호. 모두 박수."
몰아치는 박수 속에서 백현은 고개를 숙였다. 괜히 원호에게 미안해졌다. 애초에 반장이 될거라고 기대를 모았던 이는 원호였기 때문이다. 다시 교탁에 서서 감사말을 전하려는데 우뚝 솟은 머리통이 눈에 띄였다.
"앞으로 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탁을 나오면서도 따가운 시선은 떼질줄을 몰랐다. 원호가 감사말을 하는데도 오직 찬열만이 백현을 쳐다봤다. 그 웃는 입이, 눈이 무서웠다. 백현은 달아나고 싶었다.
*
"반장. 수학 숙제 어디다 내?"
"나한테 줘."
책상 한켠 가득 쌓인 수학 프린트들 위로 또 한장이 부피를 더했다. 시계를 올려본 백현이 종이 묶음들을 가슴에 안았다. 교무실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급하게 발을 옮기는데 찬열이 백현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가?"
"교무실."
백현의 팔을 놓아준 찬열은 뒷문을 통과하는 작은 등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결국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뒷문을 지나 복도를 보니 백현이 있었다. 변백현! 크게 불렀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라졌다. 찬열은 오랜만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복도를 가로질로 모퉁이를 돌자 백현이 계단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주변엔 수학 프린트들이 온통 흩어져 있다. 찬열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뭐해. 교무실 간다며."
"어, 근데 이거 다 떨어뜨려서..."
말끝을 흐리는 백현의 볼을 꼬집고 찬열도 허리를 숙였다. 40장의 프린트 묶음들 중엔 클립이 풀어져서 전부 흐트러진것도 있었다. 프리트를 줍기에 정신이 없던 찬열이 지나가던 1학년을 세웠다.
"이것 좀 주워와. 나중에 2학년 5반으로오면 오빠가 빵 사줄게."
찬열의 말에 1학년 여학생의 얼굴이 발개졌다. 주섬주섬 줍는 하얀손이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1학년의 마른 손을 지켜보던 백현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백현과 찬열은 2학년 3반이었기 때문이다. 여학생은 다 주운 프린트를 건네주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우리가 5반이었어?"
찬열은 대답없이 백현의 품 안에서 프린트 반뭉치를 앗아갔다. 백현이 대답을 보채듯 '응?' 이라고 묻자,
"아 몰라."
라며 고개를 돌린다. 백현은 처음보는 찬열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쑥쓰러워하는 박찬열. 둘은 말없이 교무실까지 걸어갔다. 백현이 교무실 문을 열려고 하자 찬열이 백현을 붙잡았다.
"이거. 가지고가."
"왜? 같이 들어가."
"난 가면 좆 털리니까."
찬열이 귓볼에 박힌 피어싱을 매만졌다.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 백현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 한 가운데 홀로 서있던 찬열은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종이 다 끝나갈 쯤 백현이 헐레벌떡 문을 열었다.
"빨리 가자. 종쳤어."
"다음시간 뭔데?"
"한문."
"그럼 좀 늦어도 돼. 천천히 가."
찬열이 여유롭게 말했다. 오히려 급한 백현을 교실쪽이 아닌 후동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백현은 잡혀있던 팔을 뿌리쳤다.
"어디가려고?"
"화장실."
"바로 앞에 있잖아. 거기서 빨리 해결하고 가자."
찬열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백현은 찬열이 화가 났을까봐 어쩔수 없이 잠자코 따라갔다. 백현은 이번 한번만 이라고 다짐을 했다. 지금 간다는 후동 화장실은 쥐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다. 실험실을 지나 어두컴컴한 복도를 걷자 먼지쌓인 화장실 표지판이 보였다. 찬열은 남자화장실이 아니라 여자와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백현은 물기 가득한 타일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여자화장실이야? 남자화장실은 저기 있는데."
"저긴 쥐가 진짜로 나오거든."
찬열이 안심시키듯 백현의 어깨를 주물렀다. 낮인데도 화장실은 어둡고 습했다. 찬열을 따라 세면대 위에 올라앉은 백현은 엉덩이가 축축해지는것을 느꼈다. 회색 바지가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그걸 본 찬열이 낄낄댔다.
"오줌쌌냐? 좀 보고앉아."
"어두워서 안보인단 말이야."
손으로 마른곳을 더듬더듬 짚은 백현이 그위에 앉았다. 찬열이 주머리를 뒤적거렸다. 잠시후 백현이 손으로 길쭉한 뭔가가 잡혔다. 마르고 버석거리는 길고 얇은 어느 것 이었다.
"이거 뭐야?"
"담재. 너 안펴?"
"응."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펴봐."
찬열이 아무렇지 않게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주황불이 잠깐 타오르다 꺼졌다. 담배끝이 빨간색으로 물들다 주홍색으로 변했다. 백현은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처럼 담배필터를 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매운연기가 갑자기 들어와 코가 쓰라렸다. 기침이 터져나왔다. 콜록거리는 백현의 등을 두드려 준 찬열이 진정하라고 타일렀다. 세면대에서 뛰쳐 내려온 백현이 환풍기 아래에서 기침을 했다. 아직까지도 매운연기가 코에 멤돌았다. 백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급하게 말고. 천천히해 천천히."
"죽을 것 같아."
백현이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가에 웃음을 띄우고 다시한번 입에 대 보라는 찬열의 말대로 백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무슨맛 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다 태운 담뱃불이 필터 끝까지 다가왔다. 찬열이 백현의 손에서 꽁초를 뺏어 세면대 주변에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잘하네. 가자. 벌써 20분 지났네."
찬열이 백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올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별 말 없이 교실까지 올라왔다. 백현은 멍한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찬열은 그런 백현을 한번 돌아보고 뒷문을 활짝 열었다. 한문 선생님께서 왜 늦었냐고 물으셨다. 기다렸다는듯 선생님의 심부름을 운운한 찬열이 백현을 돌아보았다. 백현도 고개를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설마 백현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신 선생님은 알겠다고 하셨다. 찬열이 자리에 앉고, 백현도 자리에 앉았다. 칠판엔 하얀 글자가 꼼지락 거렸다. 백현은 자리에 엎드렸다. 짝꿍 승호가 포스트잇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백현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너한테 담배냄새나.'
백현이 교복안쪽의 냄새를 들이 마쉬었다. 이건 찬열의 냄새였다.
*
그 후로 백현은 담배를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찬열과 붙어다니게 된 백현은 주변 아이들의 시선을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찬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랑 다니면 애들이 다 쳐다봐. 머리아파."
"그게 왜?"
"그냥. 별로야."
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찬열의 옆자리에 엎드렸다. 찬열과 같이 다닌 이후로 백현은 책상위에 자주 엎드렸다. 찬열이 백현의 머리를 비볐다. 백현의 머리속은 여러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곧 다가올 시험과 찬열. 그리고 담배. 학교오기전에 폈는데 벌써 그리웠다. 백현은 엎드린 채로 찬열의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왜이래."
"말려..."
주변을 돌아보던 찬열이 백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동 갔다올래?"
"아니. 이제 수업이야. 그것도 수학이잖아. 수학은 너도 빼기 싫다며."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찬열은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찬열이 입을 쩝쩝거렸다. 백현도 텁텁해지는 입이 싫었다. 어지러워지는 머리아래로 찬열의 두꺼운 손이 겹쳐졌다. 따뜻하고 푹신해서 잠이 솔솔왔다. 눈이 스르르 잠길때 쯤 찬열이 물었다.
"시험끝나고 어디 놀러가?"
"아니. 왜?"
"나랑 어디좀 가자."
"그래."
그말을 끝으로 백현은 깜빡 잠에 들었다. 찬열은 슬슬 저려오는 손바닥을 그대로 두었다. 뒤에는 자리를 뺏긴 찬열의 짝꿍이 서 있었다.
"백현이 자리에서 수업들어."
찬열이 웃으며 말했다.
@
본격 변백현 물들이기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