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테의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올려놓고 피로가 쌓여 건조한 눈을 비볐다. 계속 나오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시계로 눈을 돌리니 시침은 숫자 12에 아슬아슬 닿을 듯 말 듯 다가서고 있었다. 책상 저편에 놓인 휴대폰을 대충 손으로 끌어와 부재중 전화 한 통 없는 화면을 확인했다. 절대 불안해 하는 게 아니지. 그렇고 말고. 단지 사 년 하고도 몇 달을 더 만난 여자친구로서 조금의 섭섭함을 느낄 뿐이었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쪽잠이라도 눈을 좀 붙이면 피곤함이 아주 조금은 가실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한 피로가 밀려온다. 다시 겨우 제 뺨을 두어 번 찰싹찰싹 때리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열두 시 삼십 분이다. 입을 쩍쩍 벌리며 달고 사는 하품을 여러 번 했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 이만 노트북을 덮으려던 때, 멀리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인사는 이미 한참 낯간지러워져 버린 사이였기 때문에 그대로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인기척이 가깝게 들려오자 고개를 돌려 하얀 얼굴 위 빨갛게 물든 볼을 민윤기의 볼을 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안쓰러운 놈. 술도 못하는 놈이 여기저기 붙잡혀서 억지로 독한 술을 들이키고 다닌다니.
“안 자네.”
“이제 자야지.”
“예쁜아, 나 기다렸어?”
“좆 까. 오늘까지 쓸 거 있어서 못 잔 거야.”
몇 년을 들어도 민윤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를 지칭하는 ‘예쁜이’라는 애칭을 듣는 일은 늘 처음과 같이 소름끼쳤다. 애정표현에 박한 민윤기는 유독 술이 들어가면 세상 제일 솔직한 놈이 된다. 아니, 오히려 가식적으로 변하는 걸지도 모르고.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인 민윤기가 금세 내게로 다가와 나를 품에 안는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만큼 피곤한 마당에 민윤기까지 주사를 부리니 괜히 신경질이 난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머리칼 위로 입을 맞추는 민윤기의 얼굴에 대고는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우리 예쁜이. 내가 널 진짜 좋아해.”
진짜. 진짜로, 많이. 엄청. 왜 이렇게 예뻐. 다 예뻐. 여기저기 다 예뻐. 민윤기의 그 손발이 절로 접히는 멘트에 바보같이 귀 끝이 달아올랐다. 티를 내지 않으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속옷과 잠옷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는 욕실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애인이랑 동거하지 마세요 2
(부제: 그와 나의 알코올이란)
민윤기와 진지하게 만남을 갖기 시작한 날로부터 반 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이야기. 문창과에는 선비들이 시조를 읊으며 음주를 하는 것 마냥 일주일 세 번 꼴로 모임을 만들던 선배들이 있었다. 재수까지 해 어렵게 입학한 스물한 살 새내기였던 나는 선배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에 따랐고, 그 날 역시 막 친해지는 중이었던 언니의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검은 뒤통수에 인상을 썼다. 아, 입맛 다 버렸네. 술을 홀짝거리던 민윤기가 엉거주춤 일어서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래도 이리저리 소문이 났던 정호석과의 연애를 끝내 버리고 민윤기와 새로운 시작을 했다는 것을 떠벌리는 꼴이 되긴 싫어 그의 눈을 무시하고 빈 자리가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김탄소.”
“어?”
“자리 비었어.”
“아, 어.”
“자리 비었다고.”
어지럽게 시끄러운 공간 속 민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술에 약한 민윤기는 알코올 몇 방울이면 꼭 저런 진득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곤 했다. 술잔에 술이 차기도 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피할 줄 모르는 민윤기에 못 이겨 가방을 들고 일어나 그가 비워둔 옆자리로 가 앉았다. 세 달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와 가까이 붙는 일은 떨렸다. 텍스트로 쌓은 연애 경험의 폐해다. 가만히 앉아 빨갛게 물들어가는 그의 하얀 볼을 힐긋거렸다. 스물한 살 치고는 어른스럽다 생각했던 민윤기는 다시 보니 스물한 살 치고는 또 앳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창과 안에서도 밖에서도 꽤 유명세를 타고 있던 유명인사를 남자친구로 두고 바라보는 일은 기분이 참 묘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을 눈으로 훑으며 아래로 타고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면 꽤 곱상한 얼굴이다. 이런 놈이 추리 소설을 쓴단 말이지. 이런 놈 머리에 사람 죽고 죽이는 시나리오가 들어 있단 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복학생 오빠가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민윤기가 표정으로 묘하게 불쾌한 티를 낸다. 이따금씩 민윤기가 귀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연애 초기의 설렘을 느꼈었다. 민윤기의 눈을 애써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술게임이 빠질 수 없지. 싹싹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많은 점수를 따 놓았던 정호석의 주도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오징어를 물고 질겅질겅 씹고 있던 민윤기를 따라 오징어를 입에 넣었다.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놀이부터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신박한 게임까지, 나와 민윤기는 그저 진행에 따라 대충 맞춰 가기만 했다.
‘어, 김탄소 걸렸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나를 보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보며 상황을 파악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머뭇거리다 맥주잔을 들었다. 잔 손잡이를 쥔 손을 천천히 올리려던 때, 상황을 깨달을 틈도 없이 민윤기가 잔을 낚아채 갔다.
“흑기사.”
손을 들고 말하며 잔을 입으로 갖다댄다.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병신. 술을 잘하면 얼마나 잘한다고. 모두 나와 같은 눈으로 민윤기를 바라보다 한 마디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야, 근데 왜 김탄소 흑기사가 민윤기냐?’ 정호석이 작게 실소를 터뜨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돌렸다. 꾸역꾸역 술을 들이킨 민윤기가 잔을 내려놓고는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진짜…… 등신 같지만 멋있다.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다. 정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글자와 숫자가 적힌 종이를 돌렸고, 종이를 받아 들어 펼치니 반듯한 글씨로 숫자 4가 적혀 있었다. 종이를 만지작거리니 민윤기가 내 손에 들린 것을 흘끔거린다. 이윽고 3학년 선배 한 명이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윤기는 시선을 거뒀다.
“7번, 어, 그리고……. 몇 번 할까. 4번?”
그 말과 동시에 민윤기가 내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갔다. 내 손에는 민윤기가 뽑았던 종이가 쥐어졌다. 놀라 그를 바라보니 민윤기는 태연하게 턱을 괸다. ‘얼음 해, 얼음. 얼음 옮기자.’ ‘칠 번 누구냐. 사 번도 얼른 나와.’ 소란 속 정호석이 미소를 띠고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민윤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것도 같다. 정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고, 모두들 나머지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재촉했다. 민윤기에게 약간의 미안함도 들어 그를 바라봤을 때, 눈을 감고 고민하는 듯하던 민윤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 그리고 정호석의 시선까지 민윤기에게 집중되었다.
“전데요, 사 번.”
“…….”
“제가 사 번이라니까요.”
정적의 의미를 굳이 설명하자면, 많은 관심에도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민윤기가 이 시점까지 술자리에 남아 스스로 입을 열었다는 것.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낮고 멋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 몇 없었다는 것. 그 정적에 괜히 덩달아 머쓱해진 내가 눈치를 봤다. 민윤기가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가 얼음을 들었고, 자연스럽게 정호석의 목 뒤쪽을 한 손으로 잡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 민윤기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빨리 하고 끝내자.’ 민윤기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입에 얼음을 문다. 흔들리는 정호석의 눈동자를 보니 두 사람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집 근처 건물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변기 커버를 올리고 구역질을 하는 민윤기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늘 모두 게워내는 민윤기였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조금 더 격한 느낌이다. 그래도 꼴에 남자친구라고 걱정은 들어 그에게로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세면대로 걸어가 물로 입 안을 헹궈낸 민윤기가 거울을 보며 숨을 고른다.
“너, 두고두고 기억하고 앞으로 이 은혜 갚아.”
“기분 많이 이상했어?”
“네가 전에 만나던 놈이랑 입술 부비는 꼴 보는 것보단 덜 이상해.”
그 모습이 귀여워 큭큭대다 그의 뒤로 가 그를 꼭 감싸 안았다. 그의 허리를 감싼 팔을 약한 힘으로 떼어내려던 민윤기가 이내 따라 웃고 만다. 그래, 정말 내가 살면서 본 놈 중 가장 등신 같았지만 가장 남자답고 멋있는 놈이었다.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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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만 해 오던 술게임 망상을 적었슴다 적었다구요...! 윗부분은 현재 이야기고 윤기 사진 아래로는 연애 시작하고 반 년쯤 지났을 때 이야기애오 암호닉 신청해 주시는 댓글을 보니 기부니 넘나 좋아요 윤기 저거 짤 진짜 핵예쁘네요 아껴두고 싶어 미늉기......^^ㅎ..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까 유치해 주글 거 같지만 연애 얘기가 다 그런 거죠 뭐 남이 보면 유치한 거... (코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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