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부부
12
겁도 없는 김태형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 한 장 없이 테이블 위로 엎어져 있었다. 그의 앞으로 놓인 소주잔은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그는 약간 취기가 든 얼굴로 큰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을 들이킨 사람은 김태형인데도 내 머리가 다 아파왔다. 어이 없는 광경에 웃음이 절로 나와 눈물 고인 눈으로 김태형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녕.”
“나가요, 일단.”
“이름 씨, 안녕.”
살짝 풀린 웃음으로 헤실대는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나가서 얘기해요, 일단. 김태형이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바닥에 발을 붙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지라도 않을까 불안한 눈과 손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김태형은 생각보다 멀쩡한 모양이었다. 팔을 붙잡은 내 손을 잡아 내리고는 얌전한 걸음으로 걸어가 계산을 하고는 문을 연다. 얼굴도 그리 망가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이 남아 그의 뒤로 걸으며 그의 걸음을 살폈다. 계속 걸음을 떼 아파트 공원에 다다랐다. 한참을 말없이 앞에서 걸어가던 그가 가만히 멈춰 섰다가 뒤로 몸을 빙글 돌려 웃으며 물었다. ‘나, 어제 어디서 잤게요?’ 가벼운 목소리로 묻는 말에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볼이 벌겋다. 이제야 지금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달아오른 볼. 묻어뒀던 삼 년 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어제 어떤 여자를 만났거든, 예쁘장하더라고. 그 여자랑 내가 뭘 했게? 간밤에, 둘이서 뭘 했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내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이름 씨랑 한 것보다 더한 것도 했어요.”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뱉었다. 왜 이래요, 지금. 갑자기 왜 그래요. 그러나 김태형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지난 기억으로부터 온 두려움이 한순간에 덮쳐와 뒷걸음질을 쳤다. 김태형이 겉옷 주머니에 손을 꼽고 나를 지켜봤다. 나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분 간의 정적 끝에 내가 울음 섞인 말을 뱉었다. 뭐가 그렇게 담담해요? 그 말에 김태형이 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더니 픽 웃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뭐라도 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생활에 간섭할 사이였어요, 우리가?”
언제부터, 그랬는데. 우리가. 김태형이 아스팔트 바닥에 대고 발장난을 친다. 나는 고개를 더 아래로 떨궜다. 이제 완전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내 시야에서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사람이 돌아서는 게 무서웠다. 삼 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그 돌아서는 누군가 하나 잡을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하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김태형을 만나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정말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혼자 가만히 선 내 모습은 여전히 한심했다.
고개를 푹 숙인 내 쪽을 한 번 본 김태형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남 주기 아깝긴 하지. 감정 없는 말투에 헛구역질이 올라와 눈물이 고였다.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아직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회피해 보려 했다. 그러나 억지로 웃으며 발을 돌려 그의 반대쪽으로 걸어 보려던 때, 김태형이 내 팔을 잡아 내 몸을 돌린 후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고 내 귀에 대고 조곤조곤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왜 이래요? 막말로, 그 이상 되기 싫어했던 건 당신이잖아. 누가 몹쓸 짓 한댔어? 결혼까지 한 사람이, 어차피 민윤기랑도 볼 장 다 봤을 거 아냐. 뭐가 어려운데? 어차피 네 회사 대표랑도 별 소문 다 났잖아. 한 번만 더 해, 응? 한 번 꾹 참고 욕 좀 먹으면 되잖아. 그다음엔, 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우리 둘이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는 한 손으로 내 목 뒤쪽을 세게 잡아 눌렀다. ‘왜, 민윤기는 나랑 좀 달라 보여?’ 그의 말에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억지로 얼굴을 묻은 그의 가슴팍에 대고 펑펑 울었다. 그러다 겨우 잠시 울음을 멈추고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그는 쉽게 밀려났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보이기 싫어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집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고민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민윤기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겨우 울음소리를 참아내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눈을 붙이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민윤기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거실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발견하곤 방에서 달려나와 내 몸을 돌린다.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래.’ 다정한 목소리에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더 아래로 숙였다. 그것도 잠시, 민윤기가 억지로 내 얼굴을 올려 확인하더니 그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제야 마주한 민윤기의 얼굴을 보고 더 크게 울음을 쏟았다. 빨개진 눈으로 목이 다 메여 그에게 말했다. 풀어요. 다 풀어요, 우리. 할 말 다 해요.
민윤기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왜 그러는데, 하고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것인지 말없이 손등으로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 손을 쳐내다가 마지막에는 진이 빠져 그가 계속 내 눈물을 닦도록 내버려 두었다.
“말해 봐. 뭐가 그렇게 서러워.”
“난, 진짜, 사람이 너무 싫어.”
“…….”
“정을 주면 꼭 틀어져 버려요. 난 이게 너무 무서워요.”
미안해, 하고 그가 날 안는다.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며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하고 중얼거린다. 그대로 기운이 다 빠져 그의 품에서 잠이 들 때까지 그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미안해, 이름아. 미안해.
눈을 떴을 때는 민윤기와 한 이불을 덮고 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잠이 든 민윤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아직은 이 상황이 어색해 몸을 뒤척이니 민윤기의 팔이 내 몸 위로 올라온다. 괜찮아, 하고 민윤기가 작게 말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에 홀린 듯이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꼭 감싸 안았다. 한참이나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시 잠에 들지도 못하고 눈만 깜박거리며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 민윤기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름아. 더럽고 싫겠지만, 그래서 다시 얘기도 꺼내기 싫었는데, 한 번뿐이니까 들어. 난, 힘이 들었어. 네가 힘들어 하는 게 너무 힘이 들었고, 내가 뭘 해 줘도 너는 어쩔 수 없이 힘들어 한다는 게 너무, 무능력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 분명 난 널 육 년 동안 알아왔는데, 그게, 이상했어, 내가 알던 네가 하나도 안 보이는 게. 그래서 난, 이런 얘기 들려주기 싫지만, 그때 잠깐…… 널 놨어. 그냥 놔 버렸어, 그대로 떨어지게. 근데도 난 힘들었다? 다 큰 척해도 나도 애더라고. 나이를 서른 먹어도 애더라고. 누가 그러잖아, 남자는 나이를 암만 먹어도 애라고. 난 너한테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었어. 그럴 자신이 있었는데, 사람이 필요했어. 나도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어. 나한테도, 고생했다고, 힘들어도 힘 내라고, 그 한 마디 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 나는. 그래서 무작정 사람을 만났어. 그렇게 가볍게, 정말 가볍게 만났어. 그러다가…… 어, 그 날은, 미안해, 눈 꼭 감고 들어, 듣기 싫겠지만.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더 늦어도 말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끝내러 갔어. 끝내려고 마음은 먹고 갔어.
그래, 어……, 사실 못 끝냈었을 거야, 어떻게 해도. 항상 마음만 먹고 있었거든. 막상 만날 땐 그런 생각이 안 드니까. 그렇게 갔는데, 어쨌더라. 아, 그래. 다짜고짜 술을 먹이더라고. 걔도 방송물 먹으면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대충 눈치는 챘었나 봐. 말을 꺼낼라 치면 바로 술을 먹이더라고. 에라, 모르겠다, 싶었지. 오늘만 이렇게 놀고 다음번 만날 땐 꼭 말 꺼내자. 그 날따라 뭔가, 마지막인 것처럼, 한을 풀겠다고 맘 먹는 사람처럼 만지더라. 그대로 받았어. 철이 더럽게 없었거든. 응, 난 죽일 놈이었거든. 그리고, 그 상태로 집에 들어갔어. 머리는 산발을 하고, 와이셔츠 카라에 립스틱 묻히고. 아침에 일어나서 네가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말하더라, 그냥……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진짜 무너지는 눈으로, 네가. 난 그러고도 정신 못 차렸어. 알고 있지? 난 그러고 나서도 못 끊었어. 남는 시간마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술도 마셨어.
그러다가 한 번은, 김남준이 그러더라. 가볍게 만나는 거면 그만하라고. 아, 이게, 내가 무슨 지랄을 해도 한 마디 토를 안 달던 놈이 그러니까, 내가 진짜 썩을 놈 같더라. 그때서야 느꼈어, 나는. 진짜 바보 같지만 그때서야 느꼈어. 그리고 넌, 난, 내가……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민윤기가 눈을 뜨고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작게 울고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등을 토닥인다.
“네가 먼저 말 꺼내고 내 말 들어줬다고 앞으로 네가 나 예전처럼 대할 거란 기대 안 해.”
그냥, 들어줘서 고마워. 그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는 날 한참을 안고 중얼거렸다. 울지 좀 마라. 안고 있어도 사라질까 봐 너무 무섭다. 그 말을 듣고 그제야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기사가 떴다. 분명, 떴는데, 그게. 사진 속에는 보라색 머리의 김태형이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김태형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답지 않게 미리 잡혀져 있던 인터뷰에서 바로 기사에 대한 해명을 늘어놓았다. ‘그냥, 친구 먹기로 한 사이에요. 저게 허리를 이렇게 감싼 게 아닌데, 과장이 됐더라고요, 그게.’ 그에게 갈 피해는 나에 비해 크지 않았음에도 그는 해명을 했다. 나를 대신해 열심히 변명했다.
나는 일상을 되찾았다. 평소처럼 촬영에 임하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정국이와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아, 며칠 새 정국이의 표정은 조금 안 좋아진 것을 느꼈다. 무리해서 일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하나 달라진 것은, 내 하루에 민윤기가 다시 더해졌다. 말동무가 되어 주던 전정국이 바쁠 때마다 민윤기는 나의 새로운 외출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운전에 대한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를 위해 늘 나와 함께 걸어 주었고, 예쁜 자전거를 주문해 나에게 선물했다. 그는 작업 사이사이에 내 얼굴을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그는 자주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매일 밤 나를 꼭 감싸 안고 잠들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날, 그는 내게 연분홍색 목도리와 스노우볼 한 개를 건넸다. 눈이 오지 않는 스노우볼에는 남자아이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건네받은 목도리를 매만졌다.
“너한테 줄 선물이야. 원래 작년에 줄 거였는데.”
“진짜?”
“그리고 그거, 스노우볼, 주문 제작이라니까. 하나밖에 없는 거야, 저거.”
기쁜 얼굴로 목도리와 스노우볼을 바라보는 내 표정에 괜히 민망해졌는지 그가 이런저런 말들을 꺼낸다. 몸을 돌려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입을 맞췄다. 그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이내 팔로 나를 감쌌다. 눈을 꼭 감고 그와 못다한 이야기들을 말없이 나눴다.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스노우볼 옆에 민윤기가 내게 선물한 스노우볼을 나란히 두었다. 여전히 눈은 오지 않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김태형 |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대로 벤치 위로 쓰러졌다. 망신창이가 된 얼굴을 쓸어 주려던 손을 애써 내리며 감싸 안고 달래 울음을 그쳐 주고픈 마음을 몇 번이고 억누르며 참았는지 모른다. 아, 이거…… 생각보다, 좆 같네. 중얼거렸다. 난생 처음으로 이만큼이나 진심을 나눠 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기분 더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몸을 일으켰다. 이미 벌인 일, 후회는 없다. 그녀를 따라 울어 버리고 싶은 맘을 꾹 참아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당신이 행복한 게, 그게 나한테는 더없이 좋은 거지. |
어.......... 어................. 끝나버렸네...................? (동공지진) 예 뭐 본편은...... 여기서.... 끝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 ^♥^ 세상에... 별 거 없어서 죄송함댜....... 급전개에 당황하신 분들께도 죄송해여...... 난 한 편은 더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분량 맞추다 보니 워 다 써 버렸네요 여주 윤기 얘기는 여기서 끝이구여 (...) 앞으로 남은 글은 1. 태형이 번외와 2. 후기 플러스 해석글 입니당 후기 플러스 해석글만 달랑 올리면 읽어주실 분 많이 없을 거 같아서 윤기 여주 번외를 꼽사리로 넣으려고 생각 중이에여 수고하셨다고 인사하지 마새오 저 태형이 번외도 쓸 거애오...... 우리 소듕한 태형이 나쁜 놈 되면 안 되니까 위에 접기 태그? 하튼 그걸로 아주 조금의 글 적어놨어유 그럼 넘 갑작스럽지만 지금까지 쇼윈도 부부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 아 그리고 독방에 추천해주신 분들ㅠㅠ 진짜 감사합니다 저 독방지박령이라 추천글 보게 됐는데ㅠㅠㅠㅠㅠㅠ 너무 감사해요ㅠㅠㅠ어쩌다_보니_완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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