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남, 홈 데이트, 성공적
눈가가 영 뻑뻑하다. 겨우 천천히 눈을 뜨다가도 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쓰려오는 속에 배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헛구역질이 난다. 아, 과음했네. 지끈거리는 이마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정신을 차려 보려 그대로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다 낯익으면서도 딱히 완전히 익숙하다고 할 수 없는 향이 코를 건드렸다. 은은한 과일 향이 풍겼다. 아까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조금 수월해져 몸을 대충 일으키고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하얀색 옷장, 침대 머리맡에 진열된 아기자기한 동물 인형들. 서랍장 위로 올려진 피규어들과 한쪽 캐비넷에 담긴, 혹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게임기. 한숨을 쉬며 침대를 벗어나 옷장에 기대어 있는 가방을 챙겨 방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전정국의 행적을 쫓았다. 욕실 안에서는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숙취도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 봐야 할 일은 없어 보여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이상한 부분에서의 깔끔함을 중요시하는 전정국은 어김없이 삼선 슬리퍼를 제외한 모든 신발을 신발장 속으로 넣어 놓았다. 신발장을 열어 전정국이 넣어둔 내 컨버스화를 찾아내 발을 구겨 넣었다.
“벌써 가?”
“…….”
“왜, 아예 아침밥까지 챙겨 먹고 가지.”
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을 땐, 반나체 상태의 전정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내 눈! 비속어를 뱉으며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시원하게 드러낸 상체에, 한쪽 어깨에는 흰 수건을 걸치고 시선을 내리면 그와는 상반되게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수면바지를 입은, 어, 미친놈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전정국은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고 일 리터 짜리 물을 꺼내 통째로 입에 갖다댄다. 고백하자면, 손가락 사이 틈을 살짝 만들어 놈의 몸을 훔쳐봤다. 잘 빠졌네. 새끼, 많이 컸어. 몰래 웃음 지으며 그를 관찰하고 있을 때쯤, 그가 현관으로 걸어와 내 머리 뒤쪽에 손을 얹고 그대로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끌고 왔다.
“누나는 꼭 인사도 없이 훌쩍 가 버리더라.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따져 보면 도둑놈 맞지, 인마……. 괜히 꿍얼거리며 네 손길을 따라 소파 위로 걸터앉았다.
“민폐는 다 끼쳐놓고 아침만 되면 사라져.”
“야, 넌 날 집까지 데려다줬어야지.”
그 말을 듣고 설거지를 하던 전정국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이 먹고 바라는 것도 많아,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와 귀에 박힌다. 그 말 한 마디에 또 발끈해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맨 등짝을 노려보며 죄 없는 쿠션을 안고 퍽퍽 때렸다. 귀신같이 알아낸 전정국이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곤 말한다. ‘아침부터 로우킥 맞기 싫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요.’ 그 말에 조용히 쿠션을 내려놓았다.
삼 년 전 이맘때였을 거다, 아마. 취업을 준비하며 마음만 급한 통에 되는 게 하나 없어 서울에서는 탑으로 불리는 명성 높은 영어 학원에 등록했던 적이 있다. 고작 세 달을 머리를 싸매며 공부했던 그곳에서 건진 것은 전정국과의 깊은 친분 하나였다. 한 번도 제 손으로 멀쩡히 교재를 챙겨 오는 날이 없던 멍청한 전정국 덕에 각자 짝이 없던 우리는 좁은 교실 안에서 붙어 앉아 세 달을 함께해야 했다. 그렇게나 짬 내서 쌓은 정도 정이라고, 마침내 작년, 미성년자 딱지를 떼게 된 전정국은 나의 좋은 술 친구가 되어주었다. 알코올만 들어가면 눈이 뒤집어져 집도 잘 못 찾아가는 개가 되는 나는 전정국네 집에서 아침을 맞는 일이 허다했고, 나를 쪼아대는 전정국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해 바로 저번 주, 나는 더 이상은 전정국의 집에서 신세를 지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그 비장한 다짐은 일주일 만에 깨져 버렸다.
전정국은 보기와는 다르게 가정적인 놈이었다. 콩나물국을 끓여 내게 먹인 그는 이제 날 거실 바닥에 앉혀 놓고 티비를 보며 과도를 놀려가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도 제대로 못 깎는 사과를, 전정국이 깎고 있다고. 곱상하게 생겨 먹어서 세탁기도 못 돌릴 것 같은 놈이.
“나 어제 누나 재우느라 거실 나가서 잤어요.”
“아, 이 놈아. 미안해. 앞으로는 진짜 안 올 거야.”
“와도 되니까 침대 살 돈이나 줘요. 아예 하날 더 사 놓든가 해야지.”
그리고 누난 남자친구도 없어? 왜 술만 마시면 나한테 전화해. 남의 집 쳐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깨우질 않나.
전정국의 말에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비죽 내밀고 몰래 그를 흘겨봤다. 어린 새끼가 아침부터 잔소리야. 동물농장에 집중하며 티비 화면 속 아기 돼지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전정국이 아기 돼지들과 나를 번갈아보며 말한다. ‘……닮았네. 그래도 누구처럼 속은 안 썩이겠지.’ 대단한 도발에 그의 뒤통수를 세게 쳤다.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 끙끙대는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누나 요즘 일 바빠서 피곤하거든. 건들지 마. 그 말에 전정국이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피피티를 만들고 있는 그의 옆에서 스트링 치즈를 까 먹었다. 야, 국아. 너 냉장고 굉장히 잘 채워놨다. 어쩜, 내 취향으로만 꼭 맞춰서. 입을 꾹 다물고 묵언수행을 하며 발표 준비에 집중하는 그의 옆으로 붙어 쫑알댔다. 전정국이 이마를 덮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누나, 제발 집에 좀 가면 안 돼요……?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여간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낄낄대며 그를 보고 있으니 아, 안 돼, 이거 끝내야 돼, 정신 차려, 하고 중얼거리며 제 뺨을 찰싹찰싹 친다. 수 년간 그를 지켜본 결과로는 그는 자기 학대를 즐기는 타입인 듯하다. 틈만 나면 제 뺨을 때리고 벽에 머리를 박는다.
“국아, 나 아예 너네 집에서 살까? 그럼 내가 술 마시고 너네 집 와도 할 말 없어지잖아.”
전정국이 입술을 꾹 물고 짜증을 참으며 말한다.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그런 쓰잘데기없는 이유로 남자랑 동거를 해. 그에 아랑곳 않고 헤실헤실 웃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표 준비에 집중하려다가도 다시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본다.
“이거 되게 위험한 사람이네?”
“내가? 뭐, 어디가.”
“우리 집에서만 자는 거 맞죠? 아무 남자 집에나 막 들락거리는 거 아니고?”
그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새끼야, 넌 누나를 뭘로 봐. 그가 제 등짝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뭘로 보긴, 자기 집 멀쩡히 두고 집 빌리고 밥 축내는 양심 없는 사람이지…….
점심때가 되니 전정국이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린다. 라면 냄새가 진동하자 흰 반팔 티만 걸친 그의 뒤로 가 라면을 끓이는 그의 모습을 구경했다. 크으, 역시 요리하는 남자의 이, 등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하니 전정국이 어이가 없다는듯 웃는다. 아줌마, 방해되니까 가서 티비나 보고 계세요.
“누나가 도와줄 거 없어?”
“다 끓이고 나서 나타나서 도와주긴 뭘 도와줘.”
심통 난 표정을 하고 그의 뒷모습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니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김치나 꺼내와요, 하고 말한다.
전정국은 정말 잘난 놈이었다. 얼굴로 봐서는 먹고 놀아도 누나들의 지갑에서 평생 돈을 털어갈 수 있을 것 같이 생긴 놈이 의외로 싹싹하고 가정적인 면이 있었다.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대학에서 성적 장학금을 타 오는 놈이었다. 성격만 좀 토끼같이 순둥한 놈이었으면 미성년자 딱지 떼자마자 바로 채가는 건데, 쩝. 아쉬워라.
한 번 더 끼니를 챙기고 다시 노트북을 꺼내 바닥에 앉는 전정국의 모습을 지루하게 지켜보다 그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 양쪽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어깨를 주무르니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고 있던 전정국이 화들짝 놀라 제 가슴을 부여잡는다. 아, 누나! 좀! 무얼 하기도 전에 귀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전정국을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 정국이,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보수적이야, 이 놈.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다시 닫고는 결국 눈을 돌렸다. 한눈에 봐도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재밌어 끅끅대며 웃으니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내 앞으로 다가와 팔로 내 얼굴 양옆의 벽을 짚고 나를 내려다본다. 예고도 없이 훅 다가온 그의 얼굴에 벽에 머리를 딱 붙였다. 살짝 위쪽에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이번엔 내 귀 끝이 빨개졌을지도 모른다.
“무슨 기분인지 알겠지.”
“어, 어.”
“하지 마, 앞으로.”
그의 말에 엉겁결에 그렇다 대답을 하니 그가 떨어져 다시 노트북 앞으로 가 앉았다. 화끈거렸을 내 얼굴이 상상되어 창피함에 발버둥을 쳤다.
“진도 더 빼고 싶으면 앞으로도 자주 오든지.”
“안 와, 개새끼야…….”
다시 오나 봐라. 내가 다시 술 처먹고 네 집 찾아와서 네 침대에서 자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돼지다. 작게 중얼거리며 발표 준비에 열을 올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거, 놈 참……. 잘생겼구만. 고등학생 때는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말야. 입술을 삐죽거리며 스트링 치즈를 까 먹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전정국이 타자를 치던 것을 멈추더니 나직이 말한다. 치즈 그만 먹어라. 잠시 정적이 흐르고, 네, 하고 대답하며 치즈를 내려놓았다. 쟤가, 분명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쟤 머리 위에서 놀았단 말야. 답답한 마음에 뒤로 돌아 벽에 대고 이마를 콩콩 찧었다. 벽에 대고 머리를 박는 전정국을 한심하게 보던 내가 어느새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아, 닮아가나 봐.
그리고 바로 다음 주, 나는 어김없이 술에 취해 전정국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전정국의 침대를 차지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더보기 |
그렇게 여주는 돼지가 되어따. 일찍 철든 가정적 전구기X몇 살 더 먹고 철 안 든 여주 누나 이런 밝고 창창한 글 정말 오랜만에 쓰네요 ;ㅁ;... 두 달인가 하튼 몇 달만에..... 이런 걸... 쓰니까...... 막 오장육부가 오그라들기도 하구....... 끄으으....... 작년 8월에 썼던 정국이 글인데 차마 그대로 올릴 순 없어서 대화 몇 개만 남겨두고 싹 다 갈아엎어서 올려써오 성인 전정국의 연하오빠미를 응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구요? ^♥^..... 혼자 있고 싶으니 다 나가주세요 |
| 암호닉 |
[시나브로] [민슈비] [우사기] [수액☆] [젱둥젱둥] [찌몬] [부산의 바다여] [레몬사탕] [낑깡] [토마토] [여름밤] [낭자] [블리] [윤기꽃] [동상이몽] [룬] [고엽] [0221] [자몽] [부릉부릉] [마틸다] [0309] [근육토끼] [우유] [동룡] [탱] [니뇨냐] [트리케라슙쓰] [초딩입맛] [또르르] [하얀레몬] [슙블리] [11시 58분] [민트] [0103] [작가님워더] [0630] [핫초코] [토마토마] [맙소사] [비림] [뷰류륭] [이요니용송] [배고프다] [0504] [둥둥이] [골드빈] [노란귤] [다들브이] [슈기] [두둠칫] [현] [렌게] [허니귤] [지블리] [캉캉] [굥기] [햄찌] [힐링] [지니] |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방탄소년단/전정국] 연하남, 홈 데이트, 성공적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1/02/15/5f57468258d557a4042483097a01cf5c.gif)
![[방탄소년단/전정국] 연하남, 홈 데이트, 성공적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10/04/13/0d3773259ff741b7dbdaa7a5f945c092.gif)

현재 sns에서 난리난 눈쌓인 포르쉐 낙서 박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