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하고 무식한 것들과는 아무리 대면하고 입을 꿈뻑거려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학이 흔치 않은 고등학교 3학년, 백현이 회장으로 당선된 바로 다음주에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어색한 교복을 입고 교실에 발을 들인 세훈이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다. 수험생의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학기초였음에도 세훈은 학교만 왔다 하면 원래의 교실 정원을 넘겨 교실의 맨 뒷자리에 비어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침 자습 시간부터 점심시간까지 내리 잠만 퍼질러 자댔다. 쉬는시간 종종 사물함에 필요한 문제집을 꺼내러 가면서 책상에 반듯하게 뉘인 동그란 머리통을 보며 백현은 ‘아, 저 새끼는 공부에 손을 놨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세훈과 처음 대화를 한 순간 세훈에 대한 생각은 공부에 손을 놓은 아이, 에서 상식에 손을 놓은 아이, 라고 바뀌게 되었다.
수업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세훈을 아니꼽게 본 선생님들이 자는 세훈을 억지로 깨워 일으켜 간단한 질문을 했을 때에 동문서답을 하거나 부정확한 답을 우물거리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반 아이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면서 적절하지 못한 단어를 선택한다거나 말을 하는데에 있어서 버벅거리는 것 등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백현이 세훈을 제일 꺼리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와 책상에 앉아 백현은 제일 먼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사고력을 요하는 난이도가 높은 수학 문제집을 풀며 잔잔한 노래를 듣기 위함이었다. 한 페이지에 다섯 개 씩 배정된 문제를 두어개 쯤 풀어갈 무렵 나무늘보마냥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잠만 자던 세훈이 몸을 일으켜 비워진 백현의 옆자리에 앉아 백현이 듣고 있는 이어폰 하나를 빼앗아갔다. 백현의 입장에선 한없이도 무례한 행동이었다. 샤프를 쥐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춰 세훈을 쳐다보자 세훈은 말했다.
“너 옛날 가수 노래 듣는 거 좋아해?”
“……윤종신이 옛날 가수야?”
“맞지 않나. 윤종신이 요즘 가수는 아니잖아.”
“활동 계속 하고 있잖아. 신곡도 매달 내는데.”
“데뷔는 늦게 했잖아.”
“……”
“요즘 데뷔한 아이돌 가수가 아니니까, 윤종신은 옛날 가수.”
그 때에 백현은 세훈의 귀에 덜렁거리며 꽂혀져있는 이어폰을 우악스럽게 빼내오고 싶었다. 노래 좋다, 며 백현이 듣고 있는 노래의 제목을 묻고 관심을 보이는 세훈에게서 다시 고개를 홱 돌려 문제집에 억지로 시선을 꽂아 넣으며 백현은 불쾌함과 굴욕감을 동시에 느꼈다. 영어 듣기 파일들만 난무한 mp3 플레이 리스트 사이에서 몇 곡 되지 않는, 담담한 사랑을 말하는 담백한 목소리가 녹음된 멜로디를 세훈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간혹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윤종신이 개그맨 아니었느냐는 글이 올라올 때에도 남들과 같이 웃어넘기지 못하고 꽁한 반응을 보이는 백현에게 세훈이 한 말은, 백현이 제일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또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무례함이었다.
Sing a song 01
w. 그 많던 싱아
백현은 세훈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했다. 백현을 옛날 가수 좋아하는 애, 라고 부르던 세훈이 언제부턴가 야 변백현, 백현아 하고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오며 공부하는 백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문제를 풀어내려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부담스럽게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1학년과 2학년을 가리키는 노란색과 하얀색의 명찰을 단 여자 후배들이 백현과 세훈의 반 창틀에 옹기종기 늘어붙어 백현의 옆에 있는 세훈을 보며 소곤거리는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잘 생긴 전학생이 왔다고 소문이 났나보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백현이 체육복을 갈아 입을 때나, 영어 단어장을 들고 급식실로 향할 때나, 백현의 친구를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눌 때나, 매점을 갈 때나 계속 백현의 옆에 붙어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고 일방적인 장난을 거는 세훈을 거슬려했다. 물론 세훈을 향해 쏟아지는 여학생들의 시선도 함께 말이다.
백현은 수능 예비 소집일이 되는 날까지도 세훈에게 왜 그렇게 여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지, 왜 전교생이 의무인 야간 자율학습을 세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도 되는지, 왜 세훈이 간혹가다 오후 수업 전체를 빼먹어도 아무런 지적이 없는지, 세훈은 밤에 대체 무얼 하길래 학교만 오면 죽은듯이 잠만 자는지, 그 모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세훈에게 관심이 없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훈을 향한 그 관심은 백현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었고. 그리고 백현은 수능날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수험장이 같은 학교라며 좋아하고 킬킬대던 오세훈과 설마 같은 반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수험장으로 향하는 백현의 눈에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예인들만 타는 것 같은 큰 차에서 평소와 같은 교복 차림이 아닌 잘 꾸며진 사복을 입고 내린 세훈을 향해 적지 않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단순한 후배들의 응원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꺅 하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세훈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거나 단 게 들어있는 군것질거리를 세훈에게 내미는 여학생들이 모세의 기적과 같이 길을 만들었다. 세훈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린 세 명의 남자들 때문이었다. 세훈을 따라내려 그를 에워싼 세 명의 남자들 모두 세훈과 같이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연예인으로 착각할 법 하게 잘 생긴 사람들을 보며 백현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열린 차 문에서 수험장 교문까지 고작 몇 걸음이나 걸린다고 세훈의 목도리를 여며주고, 머리를 정리해주고, 볼을 부벼주며 시험을 잘 보라고 응원을 해주고, 소풍이라도 온 것 마냥 커다란 삼단 도시락을 내미는 그들의 행동이 여느 수험생을 응원하는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세훈더러 오빠 수능 잘 보세요, 수능 대박나세요, 오빠 서울대 가세요, 하는 여자들의 철없는 응원소리를 들으며 백현은 한 쪽 얼굴을 구겨 비웃었다. 니들이 오세훈이랑 어떻게 아는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쟤는 분명히 수능을 보다가도 학교에서처럼 쳐 잘 것이고 서울대는 커녕 저 어딘가 지방에 호수 큰 거 하나 끼고 있는 이름도 없는 대학교도 가기 힘들 것이라고.
백현은 교문 앞이 소란스러움을 틈타 세훈에 눈에 띄지 않으려 재빠르게 교문 안으로 몸을 들였다. 무슨고 화이팅! 하고 교문 바로 앞에서는 또 학교의 후배들이 응원 피켓을 들고 서서 난리였다. 따뜻한 차와 주전부리를 내미는 같은 학교 교복의 후배를 보며 백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걸음을 옮기며 차를 홀짝이려 할 때에 아침이라 잠겨서 그런지 약간은 끽끽대는 목소리의 세훈이 백현을 불러 세웠다. 변백현!
백현은 그 부름을 무시하고 빨리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겨야한다는 생각을했다.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돌아간 고개에, 백현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온 것은 식전부터 물광 메이크업이라도 했나 번쩍번쩍 빛나는 잘생긴 남자 셋과, 이제는 세훈이 아니라 그 남자 셋을 둘러싸고 있는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여자들이었다. 세훈을 포함한 그 모두가, 세훈의 말 한 마디에 백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백현은 뜨거운 차를 넘기지 못하고 쿨럭댔다. 재빠르게 백현의 옆으로 뛰어온 세훈이 사레가 들린 것 마냥 기침을 해대는 백현의 등을 무식하게 두드렸다. 무언가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여전히 켁켁대며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백현이 괜찮다고 손을 내젓자 세훈은 한손에 든 도시락통을 교문 앞의 인파에게 흔들어보였다. 시험 잘 치고 올게요!
* * * * * * *
백현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것이 오세훈 때문이라고. 그 날에도 역시나 언어 듣기 문제 2번 문항을 채 넘기지 못하고 책상에 풀썩 쓰러지고, 수리는 오엠알 카드를 받자마자 거침 없이 정답을 체크하고, 점심 시간에는 간도 제대로 배이지 않고 무식하게 양만 많은, 딱 봐도 솜씨 없는 남자들이 나름대로 공을 들여 만든 도시락을 나눠먹고, 부른 배에 오엠알 카드에 마저 체크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이 들고, 사회 탐구는 선택과목 세 개만 정해서 보는 게 아니라 전체 과목, 문항 전부를 푼답시고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나게 부산스러움을 떨던 오세훈 때문이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수험장에, 같은 교실이라고 또 오버스럽게 반가워하는 세훈에게 백현이 약간의 절망감을 느끼고, 조금 전에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세훈이 답한 내용 때문이었다.
“내 팬들.”
“너한테 팬이 왜 있어?”
“있으니까 있지. 왜. 나 인기 많은 거 보니까 질투나?”
“아니, 전혀. 그럼 그 사람들은 누군데?”
“누구. 다 내 팬이라니까.”
“아니, 남자들.”
“아 그거, 우리 팀 형들.”
“……팀?”
“응. 나 연말에 데뷔해.”
“……어?”
“뭘 놀라. 다음달 말에 가요대전 하는 거 꼭 봐. 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자. 집에서 봐도 되긴 하는데 직접 나 응원하러 와도 좋고.”
“……뭐라고?!!”
그래. 오세훈만 아니었다면. 오세훈과 같은 반에서 시험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오거나 조금 더 늦게 와서 막 수험장에 도착한 오세훈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오세훈과 같은 수험장이 아니었다면. 오세훈과 아예 1년 내내 같은 반이 아니었다면. 오세훈이 우리 학교에, 우리 반에 전학만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오세훈한테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그 말만 묻지 않았더라면. 데뷔를 한다는 세훈의 말 한마디가, 백현을 크나큰 패닉에 빠뜨렸다. 그래서 평소와 같은 맨정신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번호교환도 뭔가에 홀린듯 해버리고. 내내 잘 해오던 컨디션은 시험지를 받아들기도 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려 시험을 보는 내내 문제 한 번 보고 옆 분단 앞자리에 엎드려서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는 세훈을 한 번 보는 바람에, 백현은 그간 잘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뜨려버렸다.
[뭐해 10:21 a.m]
책상에 놓아둔 핸드폰의 액정이 밝아졌다. 아직 이름도 저장해 놓지 않은 세훈의 번호가 문자를 보내왔다. 백현은 답장해 줄 기분이 아니어서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만 보았다. 밝았던 액정이 다시 까마득해졌다. 백현은 손에 쥔 성적표를 망연한 눈으로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었다가, 훑었다가,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교실 분위기는 묘하게 붕 떠 있으면서도 가라앉아 있었다. 교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수능을 보기도 전에 재수를 결심했거나 공부에 관심이 없어 성적표를 받아들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곧잘 장난을 쳐대는 아이들과, 생각보다 혹은 생각만큼 잘 나온 점수와 등급에 2차 수시의 날짜를 계산해보며 대입의 희망에 부푼 아이들, 백현과 같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성적표를 손에 쥐고 금방이라도 분노라던가 슬픔과 같은 감정을 터뜨릴것만 같은 아이들. 백현은 종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와드득 구거지는 모양새를 했다. 마지막으로 모의고사를 본 성적보다 훨씬 떨어져있는 등급과 점수였다. 이 성적으로는 2차 수시도 갈 수 없겠다고 판단한 백현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내 성적표가 아닐거라고 부정을 해보아도 백현의 수험번호와 주민번호, 이름이 틀림없이 인쇄된 성적표였다.
다시 한 번 핸드폰이 불을 밝혔다. 이번엔 포토메일이었다. 벽 전체가 유리인 옆면이 살짝 보이고 황토색의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땀에 절은 앞머리를 하고 카메라를 보며 예쁜 척 하고 웃어보이는 세훈의 얼굴 밑에 [힘들어ㅜㅜ 10:26 a.m] 하는 세훈의 문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백현은 구겨진 성적표를 반듯하게 접어 가방에 넣고 한숨을 훅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까맣게 변한 핸드폰을 손에 쥐어 문자 작성란을 켰다. 세훈에게 하는 답장이 아니었다. 백현의 성적 결과를 누구보다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백현은 차마 얼굴을 보고서 할 수 없는 죄송스러운 말을 힘 없는 손가락으로 키패드를 눌러 썼다.
엄마, 나 아무래도 재수해야 할까봐.
그 많던 싱아 |
연재를 하는 동안 총 세 개의 커플링이 등장을 할 예정입니다. 일단 1편에서 선을 보이는 커플은 세훈X백현. 곧 데뷔할 아이돌 가수 세훈이와 재수생 백현이 ㅎㅎ 이 외에 또 어떤 커플들이 등장을 할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하나는 메이저, 하나는 마이너입니다. 가볍게 구상한 소재이고 완벽하게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 틀이긴 하지만 쓰는 저도, 읽으시는 분들도 가벼이 즐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러니 신알신과 암호닉은 언제든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덧글 하나라도 큰 힘이 되니까 저한테 힘을 주세요 으쌰으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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