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고, 흘러가면 흘러가는대로 그냥 두면서.
나 역시 흘러가는 마음을 그대로 두면,
결국은,
역시나 너.
이혼녀 둘은 할 말이 많았다. 헤어지고 보니 살 때보다 한탄할 것이 더 많다는 두 명의 중년 여자들의 주 대화였다. 그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고 자란 동네가 같았고, 졸업한 여자 고등학교가 같았고, 전 남편이 졸업한 대학교들도 같았고, 비슷한 시기에 이혼을 했으며, 외아들이 하나 있었다. 양육권 싸움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각각의 외아들들은 그들의 엄마의 뒤를 따라 정든 집을 나섰고, 기막힌 우연의 연속인지 어쩌면 정해진 인연일지 모를 그 신기한 관계처럼 어쩌다보니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살게 된 것이었다.
세훈은 낯을 많이 가렸고, 종인은 매사에 무신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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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이 형 밥은?
"어, 뭐, 먹었어."
-네가 동생이니까 형 밥 잘 챙겨줘!
-세훈이 저녁은 먹었어?
"몰라."
-모르는 게 어딨어! 빨리 뭐라도 먹여. 집에 먹을 거 많잖아.
"몰라. 먹을 거 없어."
-또 뺀질대지. 빨리 세훈이 밥 차려줘.
갈대밭이 우거진 남부로 여행을 떠난 그녀들은 엇비슷한 시간에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죽이 잘 맞아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는 여자 둘의 목소리가 사라지니 집은 절간같았다. 종인은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열려있는 방문 너머로 닫힌 세훈의 방문이 보였다. 세훈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갑자기 심통이 몰려왔다.
"피자 먹을래?"
망설임도 없고 조심성도 없이 종인은 세훈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던 세훈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말았다. 너무도 솔직한 반사신경에 민망한 세훈은 말을 얼버무렸다.
"이따 부를테니까 나와."
아..뭐..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세훈이 망설이는동안 종인은 문을 도로 닫고 가버렸다. 근 한달만에 얼굴을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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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엄마들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쯤 둘의 사이는 꽤나 친근해졌다. 세훈은 학교에선 이러지 않는데, 종인 앞에서 숫기 없는 여자애처럼 구는 제 자신이 못마땅했다. 종인이 저를 소심한 찌질이로 볼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세훈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는 종인은 소파의 팔걸이에 앉아있었다. 엄마가 여행지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들과 소소한 기념품들을 자랑하면 종인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심심하다."
종인의 엉덩이가 쭈루룩 미끄러졌다. 소파에 앉아있는 세훈에게 몸을 기댄 종인이 말했다.
"이따 농구나 하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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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볼 거 없는데."
세훈의 침대에 엎드려있던 종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근데 너네 학교 교복 괜찮더라."
의자에 앉은 세훈이 아직 벗지 않은 하복을 보며 종인이 말했다.
"나 너네 학교 구경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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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던 세훈은 3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만에 되돌아왔다. 가는 길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어지러워 정신을 못 차리겠다던 세훈의 연락에 종인은 곧장 택시를 타고 강화도에 가서 세훈을 데려왔다. 동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까지 마른 입술 밖으로 앓는 소리를 내는 세훈을 애타게 지켜만 보다가, 어릴 때 내가 아프면 엄마가 어떻게 해줬더라 생각을 하다가, 진작에 병원엘 갔어야 하는데 자책하며 옷을 챙겨입다가, 눈을 감고 있는 세훈의 백지같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종인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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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형 차 뽑았다."
"헐. 진짜? 형이 돈이 어딨다고."
"사실은 구라."
"그럴 줄 알았어."
"드라이브 갈래?"
"어?"
"사실은 이거 심부름때문에 트렁크에 김치 담은 찬데. 같이 바람이나 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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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운전도 못하냐."
"덕분에 밤바다 보고 좋잖아."
"남자 둘이 바다 보는 게 뭐가 좋아."
"그런가."
"당연하지."
"난 좋은데."
종인이 세훈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세훈은 얼른 눈을 피했다. 종인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달라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좋다."
"...."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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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운전때문에 어쩌다보니 부산까지 오게 되었다는 종인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인은 민망해하거나 덩달아 웃거나 하는 것 없이 무뚝뚝하게 내일 올라갈게, 하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우리 게이로 보는 건 아니겠지?"
막 화장실의 문을 열고 나온 세훈이 키를 건네주던 사람을 생각하며 장난스레 물었다. 세수 후에 물기를 제대로 털어내지 않은 머리칼에 묻은 물방울이 얼굴 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게이로 봤으면 좋겠다."
"어?"
"그렇게 보면 재밌잖아."
종인은 엉뚱한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넘겨들은 세훈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태어나 처음 와보는 모텔이었다. 허름한 여관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달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물소리가 쏴아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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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은 팔베개를 하고 잠을 청하지 못했다. 등을 보이고 누운 세훈은 아까부터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종인은 깜깜한 천장에 대고 별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삼백을 조금 넘기게 세고 종인은 세훈의 어깨를 흔들었다. 세훈은 잠든 모양이었다.
종인은 세훈의 어깨를 돌려 위를 보게 바로 눕혔다. 아플 때 본 이후로 처음인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다. 저번과는 달리 평온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종인은 주춤하다가 곧바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푹신하고 뜨뜻한 것이 제 입술과 맞닿았다. 종인은 얼굴을 겹치고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입술을 떼고는, 제 자리에 도로 누웠다.
그리고 설명하듯 말했다.
"이건 재밌으라고 한 거 아니야."
"......."
"장난으로 한 것도 아니고."
"......."
"왜 했는지, 그냥 나도 모르겠다."
"........"
"별 세다가 갑자기 하고 싶길래."
종인은 애써 눈을 감았다. 세훈에게 등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종인은 신경쓰지 못했다. 고른 숨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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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왜 여자친구 안 만나?
귀찮아서.
종인의 대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 이걸 줘, 말아. 세훈은 방문을 닫고 고민했다. 편의점에서 포장된 걸 파는 걸 사긴 했는데, 주기엔 너무 남사스러운 데코레이션이었다. 종인이 정말 중요하게 준비하던 시험이라길래 뭔가 챙겨주고 싶긴 했지만, 이런 건 애교스러운 취향을 가진 여자들이나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나 간다."
"어어!?"
예고도 없이 방문이 또 열렸다. 외투를 목 끝까지 올려 잠근 종인은 세훈의 책상 위에 올려진 큰 리본이 달린 상지를 발견했다.
"뭐야, 나 주는 거?"
"어?!"
"형 시험 잘 보라고? 감동이네."
"아, 그게."
"그럼 나도 미리 줘야겠다."
미리 수능 잘 봐, 동생. 2주 뒤에 있는 시험 선물을 미리 책상에 던져놓고 가는 종인이었다. 세훈이 준비한 상자를 들고 가는 종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책상 앞에 멀뚱하게 선 세훈은 종인이 던지고 간 꾸러미를 들어보았다. 안이 보이는 투명 비닐에 속은 아직 다 차지 않은 군것질거리였다. 달달한 초콜릿과 엿, 마카롱과 작은 쪽지 두 개가 들어있었다.
'수능 대박'
'합격 기원'
뻔한 수능 응원 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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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사이트에 주민번호를 조회해본 세훈은 말 없이 컴퓨터를 껐다. 옆에서 덩달아 초조하게 지켜보던 종인이 물었다.
"왜?"
"....아.. 몰라."
"....."
"....형."
"아..."
세훈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종인은 실망한 세훈을 북돋아주려고 했다. 인생의 선배랍시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고 있는데 세훈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형! 나 합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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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환영회다, 동아리 OT다, 동창들 모임이다 어쩐다 해서 세훈은 하루 걸러 하루 술자리를 가졌다. 까지게 생긴 거랑은 달리 술도 제대로 못 하는 거 같은 게 날이면 날마다 헤롱거리며 들어오는 게 종인은 마뜩잖았다. 전화는 몇 통이나 걸어도 받지 않았다.
아 씨발, 짜증나. 무슨 상관이야.
종인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잡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길거리에서 자빠져 자든 말든 무슨 상관인지. 괜히 심통이 나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불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세훈의 선배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심술이 가득 차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걸 보니 깜빡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침대가 풀썩거리며 꺼졌다. 옆에 커다란 사람 한 명이 낑겨 누운 게 느껴졌다. 알싸한 알콜 냄새가 가까웠다.
"형."
"야 술냄새 나."
"형, 나는...."
세훈은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에이, 됐다. 하며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뒷말이 궁금했지만 종인은 부러 묻지 않았다. 대신에 옆에서 금세 잠이 든 세훈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확 안아볼까 생각을 하다가 가만히 등에 손을 올리고 토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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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에 시달리는 세훈을 세훈의 엄마와 종인의 엄마가 장난스레 등허리를 한번씩 때리고 지나갔다. 오꽐라 오꽐라, 하며 별명을 지어 붙여 놀리는 엄마들을 보고 세훈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러면서 괜히 한 번 눈치를 본 종인은 신경쓰지 않는 듯 커피머신 맞은편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훈은 빤히 종인을 쳐다보다가 틀어져있는 거실의 TV로 시선을 돌렸다.
세훈의 시선이 돌아가자마자 종인은 고개를 들었다. 까치집 머리를 하고 소파에 쪼그려 앉아있는 세훈은 보고만 있어도 계속해서 자꾸 눈에 담고싶어지는 것이었다. 종인은 알고 있었다. 세훈이 어제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전까지 제 옆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세훈의 시선을.
외출준비를 하는 중년 여자들이 소녀처럼 꺄르륵 웃어댔다. 종인은 그 쪽을 돌아보며 슬쩍 웃었다. 원래대로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 다시 저를 빤히 보고있던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종인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세훈이 우웩, 하는 리액션을 취하면서도 이렇게 눈을 한 번 마주쳤다는 것에 환히 웃었다.
지금 이대로가 딱 좋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수 있는 그런 사이가.
무심결에 시선이 가는 곳에 마주보는 사람이 서로인 그런 사이가.
-안단테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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