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의 기억은 온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라곤 내 앞을 막고 총을 든 열댓명의 가드들과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진 강한 통증. 뒷쪽으론 책상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박지민. 총상의 충격으로 정신을 놓을 것 같던 순간. 얼핏 스친 박지민의 웃는 얼굴. 그리고 아득함. 어지러움. 분노.
“물갈이” 지금이 딱 기회인 것 같아서, 괜찮죠? 그날 박지민의 방에서 어깨에 총을 맞았을 때,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폭주하겠구나. 그리고 난 그의 의도대로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아버리고는, 내 내면속에 꼭꼭 담아 두웠던 능력들을 하나 둘 개방했겠지. 그리곤 그 방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을 거다. 정신적으로. 그들은 미치거나, 바보가 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 사회에선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을 테지. 물론 박지민 그 사람은 내가 반쯤 미쳐서 제 무능력한 가드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을 홍차나 마시며 나른한 표정으로 지켜봤겠지만. 정신적인 살인. 난 열명이 넘은 민간인들을 한 순간에 망가뜨린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폭주를 했다면.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내가 폭주하지는 않았나 보다. 아직도 어깨엔 총상이 남아있고, 머리도 몸도 이렇게 아픈걸 보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넓은 침대 속이었다. 내 몸 상태를 모니터링 하는 기계들과 코에 꼽아진 산소줄만 없었다면 내가 누워있는 공간이 고급 호텔룸 인줄 알았을 정도로, 잘 꾸며진 병실은 센티넬로서의 나의 위치와 희소성을 더욱 실감하게 했다. 특별관리대상자가 이럴땐 또 괜찮네. 그렇게 별 의미도 없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몸을 누인 침대는 꽤 포근했다. 긴장한 티를 내며 제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만 빼면. “내가 뭐 그쪽 죽인데요?” 왜 떨고 지랄. 적응안되게. 어제처럼 해봐요. 당당하던데 아주. 주제도 모르고 보나마나 윤기오빠가 경고 좀 한것 같은데. 뭐, 나도 당신한테 별로 좋은 감정은 없어서 그쪽이 먼저 협박했잖아. 전정국 감히 누굴 건드려. 건방지게 **
“나한테 기대라고 했잖아." 말도 못 할 정도로 어지러워서 정신을 놓으려 했을때, 전정국이 왔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입맞추는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와 함께 도착한 의무요원이 내 팔에 안정제를 놓는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순간에, 폭주직전의 센티넬이 안식을 되찾았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절망이 일렁이는 전정국의 눈이었다. “얘 총 맞았잖아. ” “가이딩 하십시오. 전정국요원. 폭주위험 대상자입니다. 지금 당장 하세요. 더 진행되면 늦습니다.” “폭주가 벌서 진행되고 있는것 같은데, 지금 가이딩 하면 김탄소 위험한거..” “센티넬이 폭주하면, 통제가 안된다는거 알고 있을텐데.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게 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룰이죠.” 명령입니다. 가이딩 하세요. 불복종은 처벌사유입니다. G15. 그 남자는 정신을 잃은 김탄소에게 안정제를 주사하곤 내게 가이딩을 하라고 했다. 상처에서 저렇게 피가 솟는데. 이렇게 강제로 멈추면 위험한거 아니냐고. 지금 김탄소 위험한거 아니냐고.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형식적이고 건조한 대답 뿐이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것. 그게 이 사회의 룰이라고? 센티넬을 제 마음대로 다루고 통제하는게 옳은 일이라고? 이용할만큼 이용하고 버리는건 한순간이다 이건가. 좆까라그래. 차라리 솔직해지지? 센티넬이 두려워서 가뒀다고. 센티넬의 능력이 탐나서 내 발밑에 둔거라고. “G15. 당장 가이딩하지 않으면 명령볼복종으로 처벌하겠습니다. ” “아......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깊다고 하던데. 센티넬에게 완벽한 안식을 주는 가이드가 사라진다면. 그 센티넬은 온전할까요? 아마 미치거나, 죽거나. ” “지금 협박하는건가?” “네. 협박이죠. ” “종종 이런식으로 하거든요. 협박. 센티넬을 다루는데 가이드만한게 없죠. 그것도 각인된 가이드라면. 완벽한 목줄이지. 센티넬에겐. ” 역겨워. “이게 이세계의 룰입니다. G15. ”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던 남자가 한 말이다. *** 오래전부터 센터에서는 센티넬을 통제하기 위해 가이드를 이용했다. 일반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은 능력이 없는 보통사람에겐 질투와 위험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센티넬은 소수였고, 사회에서 힘을 가졌던 무리들이 보통사람 이었다는데에 있다. 그들은 센티넬을 배척하고 통제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센터를 세웠다. 센티넬을 연구하면서 정신적으로 예민한 센티넬들을 통제할수있는 가이드들을 발견했고. 센터는 그들을 이용해서 센티넬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센티넬에게 완벽한 안식을 주는 가이드들은 센티넬에게만 특별할 뿐 일반인과 똑같은 힘을 지녔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이드를 통제한다는것은 곧 센티넬을 다루는것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각인된 가이드는....... "김탄소. 그만 울어, 다른사람 피해주지 말고.” 민윤기의 연락에 병실에 도착하자 마자 그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문뒤로 느껴지는 김탄소의 슬픔은 통증이 되어 몸을타고 흘렀다. 너 얼마나 아팠길래. 이렇게 울었는데? 연민의 표정을 지우고는 부러 매정하게 말했다. 내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그 애의 마음이 편하다면 이까짓 가면쯤이야 백번도 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가 여긴 왜 왔어. ” .....하나도 안 미안한가보네? 하긴, 너도 가이드지 센터의 손과 발이되어, 우릴 통제하는게 너희 일이잖아. 조절하고, 통제하고, 그 망할 안식을 주고 덕분에 아직도 있어 여기 흉터. 그 애가 거스럼 없이 제 옷을 내리더니 어깨의 상처를 내보였다. 그리고는. “나 아파. 가이딩 해줘. ” 그게 네가 할 일이잖아. 그렇지 전정국? 그애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을 맞춰왔다. 그럼 나는 언제나 모른척, 아닌척.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거 잊었어? 괜히 나한테 피해주지 말고. ....손 잡아 ” 널 사랑하게 된 것을. 네 약점이 되어 버린것을. 들킬수가 없어서. 그가 자신의 커다란 손을 건넸다. 그의 손을 잡자.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굴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랐다. 자신을 위태롭게 바라봤다. 항상 널 볼때면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자꾸 욕심이 생기는 날 자제할수가 없어서. 이걸론 안돼. 키스해줘. 저번처럼. 정국아. 각인된 가이드는, 필연적으로 각인의 대상자인 센티넬을 사랑하게 되기에. 센티넬과 가이드는 서로에게 맹목적이며. 완벽한 약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