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에게 안긴 채로 걸어가는 시간은 5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태형에게는 영겁의 시간과 같았다. 태형은 다 큰 성인 남자가 이렇게 다른 성인 남자에게 안긴다는 게, 그리고 그 안겨있는 감촉이,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바닥이 더러워진다며 저를 안아 든 정국이었지만 태형은 정국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 내려 달라는 듯이 몸을 살짝 비틀었다. 피만 닦아주면 바닥 안 더럽히고 걸어갈 수 있는데.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웅얼거리는 게 태형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제 중얼거림에도 대답조차 없는 정국을 흘끔거리며 쳐다보던 태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들어 올리는 정국의 행동을 가만히 곱씹으며 시선을 내려 정국의 발을 내려다보던 태형이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지금보다 바쁘게 움직이던 작은 발, 그리고 그 발을 내려다보던 자신. 까마득하게 어렸을 때였나, 발을 다쳐 엉엉 울던 그 날 제 손을 잡아주던 조그마한 손이 태형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단편 단편 재생되는 기억의 조각들은 그 크기가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서인지 조각난 기억의 짝을 하나 찾아냈다 싶으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이미 놓치고 난 후였다. 잘게 조각난 기억은 여전히 어린 시절이라는 큰 틀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지 못했고 찾기를 포기하자 아예 희미해져 먼지 속에 가려진 듯했었다. 가끔 이렇게 누군가가 뽀얗게 먼지가 앉은 서랍을 열면 툭 하고 떨어져 나오는 기억들을 빼면.
정국이 태형을 안고 간 곳은 욕실이었다. 욕조 끄트머리에 태형을 앉히고는 물을 틀어 태형의 발치에 물줄기를 흘려보내자 아직 채 데워지지 못해 차가운 물이 그대로 붉게 물든 발을 적셨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에 발가락을 오므리자 그 모습을 보던 정국이 눈꼬리를 접었다.
"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네요. "
" 아, 아니, 제가 할게요. "
손을 뻗어 정국의 손에 들린 샤워기를 잡으려 하자 정국이 뒤로 살짝 물러서고는 쪼그려 앉아 태형의 발을 손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새를 못 참고 굳어버려 물줄기만으로는 지워지지 않던 핏자국이 정국의 손길에 금세 힘없이 흘러내렸다. 샤워기를 잡으려 뻗었던 손이 갈 곳을 잃자 멋쩍은 듯 손을 두어 번 오므렸다 폈다 하던 태형이 손을 내려 욕조를 짚고는 정국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제게 언뜻언뜻 보여주는 친절함의 의미가 궁금했다.
" 쓸데없는 객기 부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
" … 죄송해요. "
" 장미는 보기에는 분명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만지려고 했을 때 자꾸 가시가 거슬린다면 가시를 다 뽑아버리는 수밖에 없거든요.
" … "
" 아니면 그대로 꺾어서 버리거나. "
나긋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정국의 말은 분명한 경고였다. 그것도 아주 붉은색을 띠고 있는. 어쩌면 지금껏 다른 희생양들보다 특별하게 대우해주고 있던 태형에게 주제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태형의 귀에 하나하나 새겨 넣은 정국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 그냥 꺾어 버리긴 아까운 꽃이긴 하지만 자꾸 거슬리게 굴면 어쩔 수 없어요.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만 달싹이며 불안한지 이리저리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는 태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정국이 샤워기를 내려놓으며 수건을 집어 들어 깨끗해진 태형의 발을 닦아주고는 처음처럼 태형을 안아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린 태형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정국의 옷깃을 잡았다.
" 수영 씨가 준 목숨인데 그 여자 몫까지는 살아줘야죠. 김 태형 씨한테 양보해준 목숨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막 다루면 쓰나. "
정국의 낮은 목소리는 그대로 태형의 죄책감에 깊게 꽂혀 들어갔다. 아직 아물지 못한 속죄의 흔적에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파고들어 벌어진 상처를 난도질했다. 죄를 지은 건 정국의 쪽이었지만 죄책감을 짊어진 건 태형이었다. 앞으로 더 짊어져야 할 것들이 많았음에도 태형은 처음 느끼는 감정에 얇은 줄 위에 선 것처럼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태형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줄 위에서 떨어지게 될 때쯤, 그 아래에서 미소 짓는 건 자신이 되리라고 정국은 생각했다.
어느새 다다른 정국의 방은 태형의 예상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세 명이 누워도 될 정도로 넓은 침대 위에 태형을 올려놓은 정국이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가자 태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가깝게 느껴지는 숨결에도 불구하고 입술에 닿아오는 감각이 없자 천천히 눈을 뜬 태형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국이 짧은 웃음과 함께 태형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 그런 얼굴하고 있으면 나도 참기 힘들어요. "
" 그런 게 아니라… "
" 자는 사람 건드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요. "
아직 잠에 들지도지도 않았지만 불편할 게 뻔했다. 자신을 납치한 장본인이자 제 눈앞에서 한 여자를 무자비하게 죽여버린 살인마의 옆에서 어떻게 잠에 들 수가 있겠는가. 아침에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불확실한데. 태형이 침대에 앉아 아랫입술만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자 정국이 금세 미간을 좁히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말했잖아요. 안 죽인다고. "
순전히 태형에게 보여주기 위한 살인은 꽤나 정국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숨을 끊어놓는 방법부터, 뒤처리까지 훨씬 많은 시간을 소요했으며 그 과정은 더 길고 난잡했다. 뭐든지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정국에게 계획 없이 진행된 오늘 하루는 피곤함으로 다가와 그의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숨을 고르던 정국이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태형의 작은 한숨 소리가 정국의 말에 먹혀들어갔다. 정국의 살기 어린 으름장에 결국 태형이 바닥에 붙어있던 발을 떼 침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놨다. 하얀 이불과 태형의 구릿빛 피부가 대조되어 한층 더 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경계선이 있는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태형의 가슴팍이 느릿하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잘 어울리네요. 정국이 나긋하게 말을 내뱉었다. 상황에 썩 어울리지 않는 문장에 태형의 가슴팍이 일순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꺼졌다. …뭐가요. 사람을 경계하는 강아지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정국을 노려보던 태형이 정국의 미소에 꼬리를 내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국의 다정해 보이는 미소 속에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발전되면 이런 느낌이려나. 다섯 살배기의 아이처럼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태형의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 김 태형 씨만큼 침대랑 잘 어울리는 사람은 못 봤는데. "
" …네? "
" 칭찬이에요. "
" … "
" 김 태형 씨를 알아본 저에 대한 칭찬. "
안 죽이길 잘했네. 픽 웃으며 태형을 내려다보던 정국이 협탁 위에 있는 리모콘으로 불을 끄고, 태형의 옆에 누웠다. 한순간 침대가 크게 일렁이자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손을 가슴팍에 올린 태형이 커다란 눈을 꿈뻑였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태형은 뇌에 억지로 주입을 하며 스스로 안정을 취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사리 진정되기 만무할 터.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몸을 떠는 태형의 진동이 정국에게까지 느껴졌다. 정국의 정갈한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 추워요? "
" …아뇨. "
" 손이라도 잡아줘야 돼? "
정국은 피곤했다. 지친 눈꺼풀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정국의 짜증이 어린 목소리에 태형은 고개를 저으며 하얀 이들로 지퍼를 꾹 채워 말문을 막았다.
태형은 꾹 참아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을 억지로 삼켜냈다. 피곤했던 탓인지 태형과는 달리 금방 잠에 빠져든 정국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던 태형이 상체를 일으켜 정국을 내려다봤다. …죽일까. 정국만 없으면 태형은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난다. 지금 태형이 가장 원하는 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마른 침을 삼켜내며 정국을 바라보던 태형의 손이 어느덧 정국의 목에 가까이 다가갔다. 식은땀을 뚝, 뚝 흘리며 정국의 목에 손을 가까이하던 태형이 쓰러지듯 침대 위로 엎어지며 눈물을 내뱉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정국과 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더럽혀지기 무서웠다. 또, 정국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비참한 자신의 처지와 기회가 있음에도 잡지 못하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새벽까지 투명한 눈물을 쏟아내던 태형이 제풀에 지쳐 달지 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창을 통해 몰래 들어온 햇살이 방을 환히 비췄다. 방을 환히 비추다 못해 퉁퉁 부은 태형의 얼굴을 간질이는 탓에 태형이 잠투정을 부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속 편하네. 어느새 샤워까지 마친 정국이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며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으로 가 담배를 꺼내 입술 사이에 끼워 넣곤 필터 끝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씨가 작게 일렁이더니 이내 크게 번지며 담배가 타들어갔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느릿하게 내뱉는 정국의 숨결에 따라 뿌연 연기가 춤을 추듯 매끄럽게 공중으로 흐트러졌다.
" 일어났어요? "
아늑한 이불 속에서 잠에 취했던 태형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멀뚱멀뚱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된 건지, 잠이 덜 깬 탓인지 반쯤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속눈썹을 팔랑이는 태형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정국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필터가 급하게 줄어들며 정국의 입속을 연기로 가득 채우자 입에 물었던 담배를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내던지며 태형의 턱을 잡아 입술을 포개었다. 자다 일어나 비몽사몽 한 태형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닫았다. 좀체 벌어지지 않는 태형의 입술에 미간을 찌푸린 정국이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며 태형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곤 태형을 꽉 끌어안아 태형의 척추를 꾹, 꾹 누르며 느릿하게 내려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태형의 앙상한 뼈를 누르며 내려가던 중 으응. 야릇한 신음과 함께 자연스레 벌어지는 태형의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를 흘려보내고 나서야 입술을 떼어냈다.
" 켁, 이게, 크윽, 큽, 무슨, "
" 모닝 키스. "
눈시울이 붉어져선 연신 마른기침을 하는 태형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혀로 핥아 올린 정국이 작게 웃으며 다시 태형의 입술을 머금었다.
태형의 입술은 마법 같았다. 항상 다른 맛이 느껴졌다. 단맛, 짠맛, 쓴맛. 제각각으로 맛을 뽐내는 입술이 나쁘진 않았다. 욕심이 많은 어린아이처럼 담배보다 더 중독성 짙은 입술을 쪽쪽 빨아대던 정국이 비죽 웃음을 터뜨리며 혀를 넣어 태형의 혀를 옭아맸다. 지금은 단맛이네. 꽤 불편한 자세로 태형의 입술을 탐하던 정국이 태형의 골반을 잡아 확 끌어당겨 더 깊숙하게 태형의 입안을 휘저었다. 고른 치열을 훑기도 하고, 길을 잃은 듯 갈팡질팡하는 태형의 말캉한 혀를 빨아올리기도 하며 뜨거운 입안을 탐하던 정국이 더 묵직하게 침대 위로 무게를 실으며 태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랜 입맞춤으로 숨이 차는지 얼굴이 뻘게져선 자신의 가슴팍을 꾸욱 밀어내는 태형의 손목을 잡아 목에 두르게 하고서는 태형이 예민하게 느끼는 비밀스러운 곳까지 침범하며 더 진득하니 입을 맞췄다.
" 하아, 하… "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에 태형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정국을 바라봤다. 서로의 타액이 섞여 입술에 매달려 기다란 호선을 그리던 선을 혀를 내어 끊어 낸 태형이 정국의 목에 두른 팔을 조심스레 빼려다가 정국이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자 윽.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처음과 같은 자세로 돌아갔다.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태형의 눈두덩이에 짧게 입을 맞춘 정국이 태형의 옆구리를 지분거리며 살풋 웃음 지었다.
" 잘 잤어요? "
꼭두각시 인형처럼 멍청하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던 태형은 파도처럼 몰아치는 수치심에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태형의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던 정국이 태형보다 더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태형의 입술을 살짝 머금으며 아래에서부터 위로 느릿하게 태형의 고개를 끌어올리며 태형의 아랫입술을 콱 물었다.
" 오늘도 잘 부탁해요. "
정국이 입술을 맞댄 채 나즈막히 속삭이며 태형의 입술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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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엄청 빨리 온 것 같지 않습니까. 다 알아. 으힣. 독자님들 많이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기다린 시간이 딱 두 편 정도 나올 것 같아서 연달아 올리는 겁니다. 나 잘해찌? 잘해찌! 아, 이제 암호닉 받는 거 잠시 멈추겠습니다. 중간고사 끝나면 다시 받을 테니, 걱정 마시고. 오늘도 예쁜 하루 보내십시오. 사랑하는 그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