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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과 함께한 정국의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언제나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던 정국의 태엽이 마치 누가 빨리 감아 놓기라도 한 것처럼 속도를 높였다. 따분한 일상을 전환시켜준 살인이라는 흥분제는 정국에게 일시적인 쾌감을 줬지만 지루한 삶에 피어난 빠알간 아드레날린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담뱃불이 깜빡이듯, 유약하게 빛나다 금세 꺼져버리고 마는 쾌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너무나 금세 없어져 버려서 짙어지는 갈증을 채워주기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했으니까. 아마 사람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겠지, 조그마한 불빛이 타들어 가는 짧은 순간에 흩어지는 달콤함을 놓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갈구하는 거겠지. 태형에게서 입을 떼어낸 정국이 혀를 내어 제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 사람은 참 적응력이 빠른 동물이에요. "
" … "
" 하물며 개새끼도 입양 가면 몇 날 며칠을 안 자고 짖어대는데, 납치당한 사람은 늘어지게 늦잠도 자고 그러잖아요. "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태형에게 싱긋 웃어 보인 정국이 몸을 일으켰다. 귀까지 빨개진 태형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볼과 같았다. 너무나도 다른 상황의 놓인 둘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확연하게 다른 색을 띠고 있었지만, 얼굴에 드러난 색은 비슷했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나, 결국 그 경계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 대체, "
" … "
"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
태형은 기어코 튀어나오는 진부한 단어들의 조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체 자신을 왜 납치한 것인지, 왜 이런 일을 하는 건지, 태형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정국에 입에서 나올 그냥, 이라던가 아니면 예뻐서, 와 같은 추상적인 대답이 아닌 명확한 대답을.
" 왜일 것 같아요? "
" 그거야 죽… "
" 태형 씨가 날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
" 네? "
" 그냥 오락성이 짙은 유흥거리가 아니라, 태형 씨는 나한테 훨씬 질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
항상 궁금한 맛을 내는 입술만으로도 이미 만족스러운 사냥감이긴 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성욕을 채워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이 태형의 이면에 숨어있을 것이라고 정국은 확신하고 있었다. 돈에 환장하는 화장품 향이 가득한 싸구려 계집들의 머리와는 차원이 다를 테지. 단지 태형의 아름다움 때문에 태형을 데려온 것이라면 아마 정국은 당장 그날 목을 베어냈을 것이다. 생명의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는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그 시간이 흘러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에. 하지만 정국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 … 내가, 당신한테요? "
정국은 그저 가만히 놓여있는 게 아닌 살아있는 인형을 원했다. 쉽게 망가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아름다운 꼭두각시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꼭두각시를 만들기에 자신이 잡아온 여자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같이 나약했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해답에 점차 잊혀가던 계획이었다. 그때 정국의 눈에 띈 것이 태형이었고, 정국의 방 벽을 가득 메운 사진들 사이로 밝게 웃고 있는 태형의 사진 한 장이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 네, 당신이 나한테요. "
정국의 말에 태형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정국에게 줄 수 있는 ‘만족감’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정국을 만족시키는 것인지, 답을 듣기 위해 한 질문은 꼬리의 꼬리를 물며 또 다른 질문들을 만들어냈다.
" 내가 전 정국 씨를 만족시키면. "
" … "
" 그럼 나갈 수 있는 거죠. "
낮게 울리는 이름에 정국의 눈썹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혁명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태형이 자유에 대한 갈구를 멈추게 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태형은 자신이 일으킨 것이 자신에게 가지고 올 변화를 모르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을 것이다. 바뀌는 것이 무엇이든, 정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태형 씨가 손에 쥐고 있는 열쇠를 구멍에 맞출 수만 있다면. "
의미심장한 말을 뱉은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 식사로는 누가 괜찮으려나, 아침을 잘 챙기지 않는 정국이었지만 오늘은 아침을 챙기고 싶은 날이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고깃덩이를 태형에게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에가 가장 큰 이유기는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접시를 비우는 태형을 보는 것은 정국에게 꽤나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은 언제가 좋을지 생각하면서 잘 구워진 고기를 입속으로 욱여넣는 태형을 바라보는 것이 말이다.
등급이 매겨진 소고기를 고르듯 날짜가 쓰여진 고깃덩이들 중 비교적 가장 최근의 날짜가 쓰여진 것을 꺼내어 구워낸 정국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접시에 담아 태형에게 가져다주었다. 정국이 건넨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태형이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에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접시를 받아들었다.
확실하게 결론지어지지 않은 말을 뇌까리던 정국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방을 나갔다.
" 혁명, 열쇠. "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혁명이 열쇠를 가져오는 것일까, 열쇠가 혁명을 일으키는 것일까. 마치 예로부터 논쟁이 된 닭과 알의 관계인 것만 같은 둘의 관계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태형은 아무것도 몰랐다.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혁명과 열쇠를 중얼거리던 태형의 고개가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어제와 같이 향긋한 향기를 뽐내며 정국의 손에 들려있는 하얀 그릇에 침을 삼킨 태형이 홀린 듯 손을 뻗어 정국에게 접시를 받아들었다. 천천히 먹어요. 음미하면서. 태형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각선으로 드리워진 눈꺼풀을 치켜뜨며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 힌트 좀 주시면 안 돼요? "
" 힌트는 이미 드렸어요, 김 태형 씨. "
" … 네? "
" 한 번에 다 알려고 들지 마요. "
그러다 체해요. 벚꽃잎이 팔랑이며 흐트러지듯, 나긋나긋 울려 퍼지는 정국의 목소리는 그 어느 것보다 날카로웠다.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정국의 말 한마디에 사시나무 떨듯 파들파들 몸을 떨어대는 것은.
정국은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의사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정국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몸에 딱 맞는 수트 같았다. 의사로서 정국에게 최대의 강점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긴박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차분히 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의사의 본분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 즉, 정국이었다.
그릇이 흔들릴 정도로 몸을 떨어대는 태형의 머리 위로 하얀 천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크게 몸을 움찔이며 이내 딸꾹질을 하는 태형이 천 사이로 아른아른 보이는 실루엣에 헙, 숨을 멈추며 허벅지 위에 올려진 그릇을 꽉 잡았다.
" 개새끼들은 주인 냄새 베인 옷을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
" … "
" 그 냄새 맡으면서 기다려요. "
의사로서의 정국은 최고일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정국은 최악이었다.
태형의 코로 훅 끼치고 들어오는 짙은 정국의 향기에 태형은 필사적으로 숨을 참아냈다. 정국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실피실 흘리며 태형의 시야를 차단한 자신의 티를 걷어내곤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꼭 감은 태형의 입술 사이로 하얀 엄지손가락을 욱여넣었다. 냄새만으로도 발정 나면 어떡해요. 정국의 손가락에까지 느껴지는 태형의 몸의 진동에 손가락을 더 깊숙이 넣으며 태형의 입안을 크게 휘저은 정국이 태형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 애석하게 죽어버린 소영 씨를 위해서, 사람 한 명을 살리러 갈 거예요. "
눈앞에 드러난 정국의 군더더기 하나 없는 탄탄한 몸에 태형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그래야 개체 수가 맞죠. 안 그래요? "
하얀 와이셔츠에 팔을 끼워 넣던 정국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에 단추를 채우다 말고 인상을 확 찌푸리며 침대 위에서 나뒹구는 핸드폰을 잡아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전화를 받으면서도 느릿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매던 정국이 바지마저도 벗어버리자 태형은 급하게 고개를 떨구며 다 식어버린 고기만을 바라봤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정국이 병원을 가려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떠오른 재미있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리며 태형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저 오면 이따 재미있는 게임 해요. …뭔데요? 태형 씨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또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정국이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태형의 입술에 짧게 입을 포개고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정국이 나가버린 방 안에는 태형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미 차게 식어버린 고깃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형은 왠지 모를 구역질이 올라와 웁, 웁. 헛구역질을 하며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놨다. 나가고 싶다. 태형만이 들을 수 있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정적과 함께 먹혀들어갔다.
" …키야아! "
" 형아. 뛰지 마, 넘어져. "
한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휘청이며 몸이 기울어지는 아이의 손을 덥썩 잡은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잡은 손을 더 세게 그러잡았다. 나중에 내가 …가 돼서, 돈 많이 벌면 형아랑 꼭 같이 살 거야. 보는 사람도 미소 짓게 만드는 환한 미소를 가진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져 까맣게 변하는 상황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 허억, 헉… "
거친 숨을 몰아쉬던 태형이 큰기침 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꿈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태형의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꺾였다. 그립지만, 위험한 것 같은 꿈. 대체 뭘까… 탐스러운 목선을 위로 쭉 뻗으며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태형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태형의 눈도, 태형이 걸어야 할 길도 너무 어두웠다.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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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왔습니다. 예, 제가 왔다고요! 여러분! 빨리, 빨리 환영의 박수를! 속으로만 치십쇼. 보고 싶었습니다. 글 올릴 때마다, 이 말은 이제 필수가 된 것 같네요. 항상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잘들 지내셨죠. 감기 걸리지 말고,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기고. 나중에 저 없어도, 생각날 수 있도록 마음속에 잘 새기시길 바랍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그대들. 사랑합니다.오랜...ㅁ...ㅏ...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