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앨범 받아주세요.” 웃는 여자아이는 참 예뻤지만 그 예쁜 얼굴은 이미 지겹도록 보아온, 이곳에서는 이미 ‘흔한것’이나 다름 없었으므로 나는 끝까지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저 아이돌 그룹, 오늘 이 방송에서 첫 무대를 가진다고 했던가. 쇼파 구석에 처박힌 채 잠든 최종훈과 의자에 앉아 저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나를 흘끔거리며 하고있을 생각이야 뻔했다. ‘잘 나가지도 못하는게 선배인척은 더럽게 하네.’ 내지는 ‘조만간 날 보면 절로 허리가 굽혀지게 해줄테니까.’ 쯤의. 얼마정도의 패기까지 갖춘 호기로울정도의 그 무한한 열정과 상상력. 이래서 어린애들은 좋고, 싫다. 계속해서 나를 흘끔거리는 여자무리가 거슬렸는지 이재진은 예의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홍기형이 기분이 많이 안좋아서 그래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앨범 잘 들을게요. 감사합니다.”
하등 쓸데없는 소리. 하지만 이재진의 저 쓸데없는 소리가 가끔은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지금 같은 순간. 이재진의 사람좋은 미소에 아이들은 군소리 않고 고개만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어폰을 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이어폰은 빠져나간다. 이재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재진 뿐이 아니었다. 송승현도, 최민환도, 최종훈도. 모두 하나같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지랄맞게도 승부욕만 강해서.” “닥쳐. 됐고, 최종훈 빼고 전부 오만원씩 내놔. 얼른.” “아오, 맏형이 매정하긴. 지금 내 지갑속의 작은 재정난이 보이지 않아? 응?” “그딴 표정으로 쳐다보지마라, 존나 역겨우니까. 너 얼마전에 저작권료 들어온거 내가 모를줄 알지? 진실로 소소한 재정난을 한번 겪어보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오만원이나 내놓으시지?” “아 진짜 매정한…아오 씨. 야 최민환 송승현 너네도 오만원씩 내놔.”
더이상 찡그려질 수 없을만큼 인상을 찌푸린 이재진의 투덜거림에 송승현과 최민환도 반정도는 강제로 지갑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이재진과 최민환, 송승현의 피같은 오만원짜리 세장은 모두 내 손에 들어왔고, 본능에 충실한 나와 최종훈은 신의 심판이라고 불리우는 가위바위보 결과에 따라 각각 7만원과 8만원씩을 나눠가졌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폐를 주머니에 꽂아넣고 웃고있는 나를 보며, 이재진은 혀를 차고 송승현은 고개를 휘저었으며, 최민환은 조용히 궁시렁거리기에 바빴다.
“아니, 어떻게 신인걸그룹이 손수 씨디를 들고왔는데 한마디를 안할 수가 있어? 지들이 그러고도 남자야?” “최민환 좋은말로 할때 닥쳐라?” “아 뭐, 맞잖아. 솔직히 요즘 신인들 중에 지손으로 씨디 들고오는 애들이 몇이나 되? 다들 노래한곡 덜렁 내놓고 활동도 똑바로 안하고. 반응 좀 좋다 싶으면 그때야 앨범 나오고…” “신인땐 원래 다 그래 병신아. 우리 소속사가 특이케이스인거야. 그리고 막말로 앨범을 지들이 만드냐? 다 소속사가 만들어 주는거지. 저년들 가자미눈하고 나랑 최종훈 야리는거 봤냐? 딱 눈동자에 나 당신들 무시해요. 하고 써서 LED전광판으로 빙글빙글 돌려대고 있더만.”
아무튼 이홍기 독설 알아줘야돼, 하고 중얼거리며 최종훈은 다시 소파에 허물어졌다. 미친새끼가, 둘이 있었으면 박장대소 하면서 지도 한몫. 아니, 두 몫은 족히 거들었을 거면서 막내들 앞이라고 시크한척 하기는. 그런 최종훈을 보며 이재진은 웃는다. “맞아, 그런 주제에 또 솔직하긴 존나게 솔직해서 지 감정을 숨길줄을 몰라요. 지난번에 그 홍기형이 싫다했던 애들, 걔내들이 인사하러 왔을때 표정 봤어? 대-박.” 그리고 송승현은 또 맞장구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생각난건데. 옛날에 스타골든벨 녹화갔을때. 나랑 홍기형이랑 둘이. 그때 누구 게스트중에 아이돌? 이었나, 아무튼 어떤 여자가 와서 인사하니까 홍기형 대놓고 싫은표정 하면서 꼽주던데. 나 그땐 몰랐는데 지난번에 그 그룹 메인보컬이 걔라면서? 노래 더럽게 못한다고 했던.” 그러더니 또 지들끼리 뭐가 좋다고 낄낄 웃었다. 어차피 남자 다섯이서 모였다 하면 나누는 대화란 뻔한 것들 뿐이다.
“그나저나 재진이형 거짓말해서 어떡해? 쟤내들 알면 또 뒤에서 존나게 씹어댈텐데. 딱 봐도 얼굴에 뒷담 잘깐다고 써있더라.” “뭐,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홍기형이 진짜로 기분이 안좋았던건지 지들이 알게뭐야? 어떻게 아는데?” “쟤내도 몇번 대기실에 인사오다보면 자연히 알게될 걸 뭐~ 홍기형 진짜 기분 나쁠땐 사람이 얼마나 악마같이 변하는지. 홍기형 말할때 목소리가 은근 나즈막하잖아. 그 목소리로 존나 조곤조곤하게 욕을 읊조려 씨발. 그거 안겪어본 사람은 모르지. 존나 얼마나 사람이 소름끼치고 무서운지….” “맞다. 아 씨발……알 게 뭐야 지들이 나를 씹건말건. 어차피 우리도 여기서 걔내 씹고있는데. 그리고 홍기형은 벌써 구운 오징어마냥 존나 씹히고 있을걸?” “맞아. '아 진짜~ 별로 인기도 없는게 선배인척은 존나 한다니까?' '아까 그 표정 봤어? 대박~ 존나 재수없어~' '그러면서 꼴에 네일아트도 한다잖아. 지가 기집애도 아니고 뭐야~ 재수없어~' '얼굴도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진짜 게이아냐? 깔깔깔깔.'”
송승현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이재진은 죽어갔다. 최민환은 그새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최종훈은 또 잠이 들었다. 에이, 천하의 잠만보 같은 새끼.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한참을 서로 마주보며 웃던 송승현과 이재진이 눈꼬리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닦아내며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는다.
“미친. 송승현 진짜 존나 똑같아. 아 씨발 미칠거같아. 아 나 진짜 배 터질거같아.” “그렇다니까? 신인애들이 홍기형 씹어대는 단골 리스트. 재쮸없쪙~ 게이가탕~ 인기도 없는게~” “야 야. 마지막건 좀 빼라.”
대기실 문을 닫으며 최민환이 맞장구쳤다. 그러자 송승현이 왜? 하고 물으며 입구에 선 최민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또 뭐가 웃긴지 혼자 낄낄거리던 최민환이 얼굴 앞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건 딱 3개월 한정이잖아. 짧으면 2주일, 길어봐야 3개월 지나면 그소리 싹 들어가는거 모르냐? 3개월 지나도 그소리 하는애들은 진짜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간도 덜 된 새끼들이야. 대가리 존나 안돌아가는. 아메바같은.” “그러니까 존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과정에 문제가 생긴새끼들.” “뭐, 왜, 뭔데? 왜 나만 몰라!”
자신만 모르는 이야기에 단순한 송승현은 열폭한다. 어김없이 이재진과 최민환은 그런 송승현을 진득하니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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