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울어대는 자명종을 부여잡고 시간이 멈추길 바랐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흘렀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탓에 무려 20분이 흐른 후에 겨우 눈을 떴다.
이럴 때 모닝콜 해 줄 여자친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냐.
이 나이 먹도록 왜 여자친구를 못 만들었느냐 궁금한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 물론, 없었던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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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우야, 오늘 무슨 날이게~? "
" 어, 오늘? 아 당연히 기억하지 자기야. "
" 무슨 날인데? "
" 오늘 빨간 날! 쉬는 날이잖아 우리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
박수까지 쳐가며 웃는 나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의도를 나는 진정 몰랐다.
" 자기야... 왜...? 내가 뭐 또 잘못했어...? "
" ... 야 전원우, 오늘 우리 기념일이잖아. "
" ... 알고 있었어 하하, 알고 있지 자기야! 내가 그런 거 까먹을 사람으로 보여? "
" 너 지금 그 말도 3 번 째야, 이제 다신 안 까먹는다고 또 사과 할거야? 넌 어쩜 사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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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랑한지 얼마나 된 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일 하다보면 까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고작 그 날짜 하나 잊는다고 사랑이 식기라도 하는가?
아무튼 그렇게 그녀는 날 떠나갔다.
미어터지는 출근길의 지하철에 악으로 버티고 버텨 서있다 보니 창 너머로 보이는 꽃봉오리가 어찌나 미운지 그만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일상이 되풀이 되고 무심결에 창 밖을 다시 봤을 땐 새하얗거나 연분홍 빛을 띄는 벚꽃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제길, 이제 지옥이 다가오는구나.
아니 커플들은 대체 왜 벚꽃을 본다고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
봄은 분명,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 하는 것일 텐데, 왜 그들이 제일 행복한 계절일까?
아 물론, 내가 그들이 부럽다고 괜히 딴지를 거는 것은 정말 아니다.
진짜로.
점심 시간이 되어 잠시 직원들과 회사 밖으로 나왔다.
커피 한 잔을 들고 걷다보면 커피 위로 무언가 살며시 날아와 앉았다.
" ... 벚꽃이네. "
아, 드디어 오셨네.
예쁘다, 새색시 볼처럼 발갛게 물들인 자태가.
그러나 내게는 그저 나무에서 내리는 쓰레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아직 남은 커피에 입맛을 다시다 벚꽃과 같이 흘려보냈다.
떠내려 가는 벚꽃이 자꾸만 내 눈길을 끌었지만 나는 외면한 채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좋은 봄날에 홀로 남아 하는 야근은 참 죽을 맛이다.
벚꽃에 휩싸여 하하호호 웃는 저들을 보자니 괜시레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져왔다.
결국 헤어질 텐데 뭐, 안 그래?
사랑도 벚꽃도 다 한 때다, 제일 예쁜 시기가 지나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 이것도 괜히 딴지를 거는 게 아니고 진실이니까...
한숨을 폭 내쉬고 키보드 위로 엎어졌다.
고갤 들어 모니커를 봤더니 ㅋ만 잔뜩 눌러졌는지 문서엔 ㅋ만 가득했다, 컴퓨터 마저 날 비웃나 싶은 느낌에 기분이 나빠져 전원을 끄곤
서류들을 챙겨 늦은 퇴근을 할 준비를 마쳤다.
사무실을 벗어나 회사 로비로 향하고 있던 나의 눈길은 연분홍 유니폼을 갖춰입고 마스크를 낀 채 바삐 청소를 하는 한 여자에게 멈췄다.
벚꽃 생각 나라고 유니폼을 연분홍색으로 맞췄나?
괜시레 씁쓸해지는 기분에 가던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낮에 흘려보낸 벚꽃잎 한 잎처럼 자꾸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시선이 멈추는대로 그녀를 계속,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갤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마스크를
휙 벗더니 어느새 내 앞에 와 서있었다.
당황한 채 그저 어버버 거리며 바라만 보고 있으니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그녀가 나를 위로 올려다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 ... 나 돈 없어서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에요. "
그 말을 내뱉곤 얼굴이 붉어져서 울려고 하는 그녀.
뭐라 표현 해야할까, 그냥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꽃봉오리 같았다.
" ... 알고 있어요. "
" 네? "
" 알고 있다구요, 그쪽이 돈 없어서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란 걸요. "
" ... "
그녀는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그저 두 눈만 깜빡였다.
무슨 자신감이였을까, 나는 아직도 나의 행동에 이불을 차며 후회 중이다.
" ... 이름이 뭡니까. "
" ... 네? "
" 이름, 뭐냐구요. "
" 칠봉이요. "
" 내일도, 봐요. 꼭. "
이것이 그녀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지금.
나는 한 번도 그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그녀를 피하기 바빴다.
그 사이 벚꽃은 만개하여 더더욱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아니, 벚꽃이 아니라 그녀가.
그리고 지금 나는 확신을 가진다.
그녀를 좋아한다.
아무리 그럴 리 없다며 모른 척해도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백했다.
하지만 여리면서도 당돌한 그녀와의 사랑은 3 번의 벚꽃과 함께 끝이 났다.
아스라히 번지는 포근한 내음.
또다시 네가 내게 예고없이 다가와
한껏 나를 흔들고 떠났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푸른 들판 위
너를 닮은 작은 존재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그게 참, 예쁘다.
새하얀 눈송이 보다도 가볍게
콧잔등에 내려앉는 벚꽃이라는 아이
그것도 참 예쁘다.
봄 이라는게 너를 참 많이 닮았다.
봄은 언제나 내게 온다.
애써 외면해 보려해도
자꾸만 마음 속을 간질여 온다.
그래서 나는 봄을, 나의 봄인
너를 매번 잊지 못해 사랑한다.
나의 봄인 봉이에게, 전원우가.
벚꽃 이야기 치고는 조금 늦어버렸네요, 틈틈이 썼던 글을 붙여 드디어 올립니다.
우리 봉봉들 벚꽃 구경은 많이 하셨나요?
제게 있어 봄은 봉봉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