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인생 전부를 피아노와 함께 지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인 지금.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나에겐 가망이 없었다. 난 완벽한 수포자, 과포자였고 시험기간에만 교과서를 들춰보는 정도였다. 그런 내게 공부란 그냥 시간 낭비였다. 여차여차 시간은 흘러 아무런 생각 없이 재활치료를 하며 방학을 끝냈다.
종인이와 경수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손이 이렇게 작은데 어찌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냐고. 나는 피아노를 치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손이었다. 열여섯 살 즈음, 나는 내 손가락이 짧고 마디가 굵어 피아노를 치기에 적합하지 않은 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건반을 두드렸다. 차라리 그때 피아노를 포기해버렸다면 지금쯤 우리 반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공부를 하며 대학을 갔을 텐데.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
“저기, 나 여기 앉아도 되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묻는 얼굴이 낯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갸웃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석을 향해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곤 공책을 꺼내 무엇인가를 마구 휘갈겼다. 얼굴은 귀공자요, 성격은 파탄 자구나.라고 생각하며 책상 위로 스르르 엎드렸다. 그러길 오분이 채 안되어서 민석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옆에 앉은 루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일 년 반을 다녔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민석이 아무리 학교 일에 관심이 없다 해도 세 개 반 밖에 안되는 남고에, 동급생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결국, 호기심이 폭발했다.
“전학 왔어? 이름이 뭐야?”
“루 한. 중국인이야.”
“교환 학생인 건가? 난 중국인들은 다 배 이만큼 나와서 뒤뚱거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너무 바보같이 보이려나. 그런데 난 진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중국인이라는 루한은 꽤나 큰 키에 눈에는 짙은 쌍꺼풀이져 있었고, 코는 반듯하게 올라간 게. 딱 만화에 나오는 귀공자처럼 생겼더랬다. 그렇게 생각하기를 한참, 갑자기 루한이 공책에 쓰던 것을 멈추곤 동그란 눈을 민석에게 맞췄다.
“네 이름은 김민석. 피아노 전공.”
“……?”
“그냥 너가 귀여워서 선생님께 좀 여쭈어 봤어.”
그렇게 루한과 민석의 첫 만남은 다른 사람들의 첫 만남처럼 어색하고 설레었다.
2
“아니. 나도 여기서 내릴 거야.”
기막힌 우연인지 루한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렸다. 쌀쌀한 날씨 탓에 빠른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내내 루한은 민석의 뒤에서 같이 걸었다. 처음엔 정말 가까이 사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집 앞에 다다르자 루한이 저를 따라온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조금 심기 불편한 얼굴로 루한에게 물었다.
“여기 우리 집이야. 그런데 왜 따라와?”
“그냥. 데려다 주려고.”
“…….”
“손가락. 나중에 꼭 말해줘. 나 갈게.”
하고 루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루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민석은 루한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루한이 다시 돌아볼 것 같아서. 하지만 루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 엄마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민석의 대한 이야기였다. ‘민석이 계속 피아노 시킬 거예요?’ ‘그럼 어쩌겠어. 쟤가 할 줄 아는 게 어디 있어.’ ‘민석이 피아노 때문에 돈은 돈대로 나가고, 민서 이 계집애는 뭣도 모르고 칠렐레팔렐레 놀고만 있는데. 우리 집 꼴이 어떻게 될는지.’ 하며 한숨을 쉬는 부모님. 민석은 방문을 닫고 항상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피아노를 바라봤다. 손의 근육이 당겨왔다. 정말 손가락의 상태가 계속 호전되지 않는다면, 민석은 피아노를 칠 수 없다. 어느새 민석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이 10월 7일이지? 7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선생님 이제 그렇게 발표 시키면 감옥 간대요!”
“그런 게 어디 있어! 7번 나와!”
수학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수학 학원이나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는 민석은 중학교 수학 이후로 수학에 손을 뗐다. 물론 엄마와 아빠는 은근슬쩍 수학 학원을 다녀 보지 않겠느냐며 물었지만, 민석은 피아노 칠 시간도 부족한데 수학 학원 다닐 시간 있으면 연습을 더하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덕분에 수학 학원은 민석의 동생 민서가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걸려도 수학시간에 걸리다니. 젠장. 민석은 엎드려 있던 자세를 고쳐앉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난감하게 선생님을 바라보며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려는 순간 옆에 앉은 루한이 책을 밀어 건네주었다. ‘펴진 페이지 3번 문제야.’ 고맙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성질 급한 선생님이 빨리 나올 것을 재촉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얼결에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간 후 문제를 보았다. 루한을 처음 봤을 때처럼 공책에 휘갈겨 쓴 지렁이 같은 글씨가 아니라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로 풀이과정이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루한이 공부를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민석은 칠판에 수식을 베껴 썼다.
선생님의 칭찬을 들은 민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루한에게 물었다.
“너 수학 되게 잘하나 보다? 그런데 왜 문과 왔어?”
“그냥. 너 보려고.”
뻥치지 마.라며 민석은 루한의 어깨를 살짝 쳤다. 하지만 점점 민석의 귀가 달아올랐다. 그걸 놓치지 않은 루한은 ‘에에? 귀 빨개진 거 봐. 너 나 좋아하냐?’라고 민석을 놀려댔다. 잔뜩 열이 오른 민석은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리고 아니거든? 나 여자 좋아해!’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제 분에 못이긴 민석은 결국 고개를 돌려 엎드렸다. 루한은 그런 민석이 귀여워 빨개진 민석의 귓볼을 지분댔다.
“야! 뭐 하는 거야! 어딜 만져?”
“나 사람 귓볼 만지는 거 좋아해. 습관이야.”
변태야?라고 식겁하며 루한의 손을 떼낸 후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엎드린 민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한이 다시 민석의 귀로 손을 뻗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민석의 귓볼을 만져도 민석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민석이 잠들은 것 같았다. 루한은 민석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하며 민석의 귀를 조물조물 만져댔다.
사실, 민석이 자고 있지 않았던 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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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ㄹㄱ와 동시 연재합니다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그냥 가볍게 읽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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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꽃은 진짜 거의 호평밖에 못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