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철벽을 쳐요 w. 채셔
19. 그에게 딱 맞는 여자로
거의 합방이었던 어젯밤,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순수하게 잘 수가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저씨는 무성욕자가 틀림이 없다. 엄청 안겼는데, 그 정도면 뭔가가 성사되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사실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전혀 없어서 모르겠다. 내가 어제 아저씨를 유혹한 게 맞는 건지. 그냥 영국에서 심심할 때마다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했었는데. 그건 외국이니까 다른 걸까. 아니면 내가 전혀 그런 쪽으로는 매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저씨가 출근을 했다. 휴학을 한 터라 만날 친구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심심해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검색 창에 아저씨를 쳐보기 정도였다. 아저씨는 유명 아이돌들의 노래를 작업하는 프로듀서이자 비트 메이커니까, 당연하게 검색 창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갓윤기, 윤기 쌤, 민피디와 같은 수식어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아저씨의 인터뷰가 있기에 클릭했다.
김: 와, 그럼 BTS의 곡들은 거의 작업에 다 참여하신 거네요?
민: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랑 지민이는 다 참여했어요. 작곡하고, 작사도 하고, 편곡도 하고, 비트 다듬고. BTS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 다른 아이돌들도 마찬가지죠. 저희 손에서 모든 음악들이 흘러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에는 정말 힙합 뿐만 아니라 각종 음악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시고 있던 랩몬스터가 저희 회사로 영입이 돼서, 더 새로운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 정말 핫하시네요. 그럼 이런 능력자에게도 이상형이 있지 않나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는 훈남 프로듀서로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민: 에이, 제가 아이돌도 아니고……. 어, 음, 굳이 이상형은 없어요. 그냥, 일하는 여자가 멋져보일 때가 많죠. 그건 여자 분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그런 능력자들요. 다들 그럴 걸요,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일하는 여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다. 지금 내 모습은……. 쌩얼, 똥머리, 편한 반팔, 편한 트레이닝 바지, 무직. 일하는 여자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 얼굴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전혀 일하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걸. 사실 내 동기들은 거의 취업 준비를 하고 있거나,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는데 나 혼자 조금 늦어졌다. 아저씨에 맞는 여자가 되겠다고, 무턱대고 영국으로 어학 연수를 떠났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전혀 아저씨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걸. 힘없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노트북을 저리 미뤄두고, 대(大)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취업 준비를 해야겠구나, 정말.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취업 준비. 그리고 홀로 서기. 언제까지 아저씨에게 '어린 애'가 될 수는 없다. 아저씨에게 딱 맞는 여자. 늘 상상해왔지만, 아저씨에게는 그런 여자가 잘 어울렸다. 똑부러지게 일에서는 일, 매력에서는 매력. 다방면에서 훌륭한 여자. 정말 그런 여자가 되어야겠다. 다이어리에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놓고, 덮었다. 내일, 집을 알아봐야겠다. 아저씨의 집에서는 절대 취업 준비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추측이 아니라, 팩트다.
"꼬맹, 나 왔어."
"아저씨!"
노트북 가방을 들고 들어온 아저씨를 반갑게 맞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이 없던 하얀 얼굴이, 내가 안겨들자 발그레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아저씨, 밥 먹어. 아까 시간이 남아 만들어놓았던 반찬들을 꺼내놓고, 밥을 퍼 아저씨의 앞에 놓았다. 요리했어? 아저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를 식탁 앞에 앉히자 아저씨가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 우리 꼬맹이, 다 컸네. 완전 표정이, 딸이 처음 차려준 밥상에 뿌듯함을 느끼는 아빠다. 금방 데워진 된장찌개를 식탁 중간에 놓곤, 아저씨의 앞에 앉았다. 아저씨가 크게 한 숟갈을 퍼 입 안에 넣는다.
"……맛 없어?"
"아니, 완전 맛있는데?"
아, 아저씨 밥 진짜 맛없게 먹었었지. 저도 제 표정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건지, 아저씨는 노파심으로 몇 번이고 맛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어쨌든 아저씨. 밥을 먹는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화두를 돌렸다. 왜? 하고 꿀꺽 밥을 삼키는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뭐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데? 아저씨의 질문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나 아저씨 집 나갈 거야."
"…………뭐?"
충격을 먹은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아저씨는 물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나서야 내게 '왜?'하고 다시 되물었다. 취업 준비하게. 아저씨에게 뜻을 전하자, 아저씨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잘 나가는 사람이잖아. 나는 아니고. 아저씨는 다시 물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괜히 끄덕거리는 아저씨의 반응에 내가 정말 아직 어린 애였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독립도 하고, 홀로 서기도 하고, 취업도 하고. 아저씨한테 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저씨는 입에 있던 밥을 다 삼키고 나서야 내게 말했다.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어. 좋아서 하는 연앤데."
"………그래도."
나도 멋있는 여자가 될래. 내 말에 아저씨는 잃었던 미소를 조금이나마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말없이 밥만 먹던 아저씨는 잡고 있던 내 손에 뽀뽀를 해주며 '알겠어.'하고 대답했다. 대신 빨리 자리 잡아, 열심히 해서. 아저씨의 말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이 비워진 반찬 그릇과 밥 그릇을 싱크대에 놓고 대충 물을 채워 넣은 아저씨는 곧바로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백허그를 해주었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몇 번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다 일어섰다.
"그래도 예쁘네."
"응?"
"그런 생각 했다고 하니까. 잘 길렀네, 우리 꼬맹이."
아저씨가 달게 웃어주는 걸 바라보면서 그 품에 폭 안겼다. 그래서 언제 집에서 나가게? 아저씨의 말이 귀에 둥둥 울린다. 아저씨의 손길을 받다, 내일, 하고 대답했다. 뭐어? 하고 아저씨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 하고 탄식을 하던 아저씨는 나를 다시 꼭 안았다. 이걸 어떻게 보내지. 나를 안고 몇 번 뒤뚱거리던 아저씨는 축 쳐진 목소리로 아아, 어떻게 보내냐, 하고 다시 한 번 한탄했다.
아저씨의 한탄과 비소는 식탁에서만이 아니라 그날 밤에도 계속되었다. 처음이었다, 아저씨를 내 품에 안고 달래본 건. 완전 아저씨가 애기가 됐다. 시무룩하게 축 쳐진 얼굴로 잠에 든 아저씨의 볼을 쓰다듬는다. 왠지 잘 때에도 기분 나쁜 꿈을 꾸는 건지 퉁퉁 부어오른 볼에다 뽀뽀를 해주었다. 아저씨에게 맞는 여자. 꼭 맞는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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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혼자가 아닐 날들을 위해
꼬맹이가 떠났다. 집을 구하겠다고 떠난 꼬맹이는 저번에 토깽이가 챙겨두었던 짐을 가지고 그대로 제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며칠을 꼬맹이랑 같이 잤는데. 그 며칠이 한 달도 되지 않는, 정말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나날이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허전할 수 있었던지. 결국 잠을 설쳤다. 저녁까지 돌아다니며 방을 구하느라 피곤했는지 카톡은 해주지도 않고. 결국 영화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크서클이 내려온 나를 보며 지민과 술떡이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킬 정도로, 심각하게 예민해졌다.
[꼬맹 어디야?] PM 5: 55
[아직 집! 이제 곧 방 하나만 더 보러 엄마랑 나갈 거야] PM 5: 59
[언제 집에 들어가는데] PM 6: 24
일곱시 쯤, 이라고 도착한 메시지를 내려다보다 소파에 누워버렸다. 아,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괜히 보냈나. 착잡해지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틀고, 눈을 감았다. 그제를 떠올렸다. 꼬맹이와 홈 데이트-보다 침대 데이트-를 했던 날. 꼬맹이의 심장 소리가 떠오르면서 무겁던 머리가 점차 가벼워졌다. 둥, 둥, 둥, 둥. 빠른 비피엠으로 일정하게 울리던 그 소리. 그리고, 꼬맹이가 잠든 틈에 몰래 들었던 늦은 간격의 심장 소리. 자연스럽게 멜로디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며칠을 고심해도 떠오르지 않던 멜로디 라인이었는데. 바로 일어나서, 음을 녹음했다. 다시, 작업해야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참, 처음부터 끝까지 꼬맹이다. …나, 참. 어이가 없네.
작업을 끝내고 일곱 시가 되어, 꼬맹이의 집을 방문했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꽤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꼬맹이가 영국에 가서는 잘 연락하지 못한 터라, 내가 방문함과 동시에 거의 술상이 차려졌다. 그래, 윤기 요즘 잘 나간다며? 아저씨의 질문들이 쏟아졌고, 나는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꼬맹이와 아줌마는 요리하기 바빴고. 오늘도 방을 보느라 피곤할 텐데, 괜히 왔나,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이라도 보지 않으면 정말 예민이 극에 달했을 거다.
"결혼은. 만나는 사람은 있고?"
골뱅이소면을 만들어 앞에 두곤 잠시 내 옆에 앉은 꼬맹이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잠시 정적. 숨길 생각은 없지만, 괜히 쭈뼛거리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친오빠 느낌이 강했던 터라. 뒷머리를 긁적이다, 있죠, 하고 대답했다.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나이대에는 있어야 한다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아저씨 딸래미예요… 라고 하면 이 집에서 쫓겨나려나. 유독 딸 사랑이 강한 아저씨라,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힘이 쭉 들어간 미소를 지어야 했다.
"…저, 아저씨."
"…그래, 그래. 여보, 여기 안주 다 먹었다."
"아니, 아줌마도 앉아보세요."
으응? 하고 잠시 과일을 내온 아줌마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저씨의 옆에 앉았다. 왜, 중대 발표라도 하게? 하고 장난스럽게 묻는 아저씨에게 예, 하고 진중하게 대답했다. 꼬맹이가 괜히 긴장해 내 허벅지를 툭툭 쳐댔다. 안절부절 못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저씨. 저 만나는 사람이요."
"으응."
"여주예요."
………한동안 정적이었다. 아빠…? 하고 조심스레 아저씨의 눈치를 보던 꼬맹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 하고 간절하게 불렀다. 언제 그렇게 됐냐? 하고 묻는 아저씨에게 '며칠 안 됐는데, 서로 많이 좋아했어요. 오랫동안.'이라고 대답했다. 당당한 말투에 헛웃음을 짓던 아저씨는 여보, 하고 아줌마의 손을 꼭 잡았다. 아줌마는 왠지 밝은 표정인 게, 찬성인 것 같았다. 제발 우리 편이어라. 하긴, 드라마를 많이 보는 아줌마라면 이런 로맨스를 좋아할 법도 했다.
"…으음."
일단 한 대만 맞자. 아저씨의 말에 기겁한 꼬맹이가 나를 끌어당겼다. 아빠아! 하고 크게 외치는 꼬맹이를 보던 아저씨가 하하, 하고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얘가 너만 보는데 솔직히 우리 여주 안 받아주면 내가 너랑 네 아빠 죽이려고 했다. 이 자식아. 아저씨의 말에 웃으며 죄송하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내 등을 툭툭 쳐주었다. 그래, 잘 만나봐라. 아저씨의 허락에 꼬맹이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내 품에 꼭 안겼다. 아저씨의 눈썹이 까딱 올라가기에 그대로 꼬맹이를 떨어뜨렸고.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
"어."
"꼬맹이, 제 집에서 살게 하면 안 될까요."
아저씨의 눈썹이 다시 까딱 올라갔다. 동거한다는 말이냐? 하고 묻기에 호기롭게 끄덕였다. ………그리고.
너, 이 자식! 이리 안 와? 어? 어린 것들이 무슨 결혼도 전에 동거를…!
아저씨는 나와 꼬맹이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고, 나와 꼬맹이는 도망치고, 아줌마는 말리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몇 번을 두들겨 맞고, 얻은 결과는 찬성이었다. 아줌마의 무조건적인 찬성과 꼬맹이의 반복된 설득으로 인한 결과였다. 멍이 든 등짝을 한 번 쭉 피고, 당당히 꼬맹이의 손을 잡고 집에 입성했다.
'아저씨.'
'왜?'
'왜 그랬어.'
'뭐가.'
'내가 그랬잖아, 홀로 서기하고 싶다고.'
'…….'
'물론 아빠가 아저씨를 죽일 듯이 막 그렇게 노려보고 그러니까 아저씨 편은 들었지만.'
차에서, 꼬맹이가 물었다. 왜 동거를 하려고 하는 거냐고. 대답은 하나다, 내가 꼬맹이 없이 혼자 있을 자신이 없어졌거든.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대며 짧게 보고 싶어서, 하고 대답해주었다. 취업 준비, 그거 내가 방해 안 되게 할 테니까 우리 집에서 그냥 살아. 거의 명령조의 말로 꼬맹이에게 일렀다. 물론 혼자 내린 결정이라 몰라아, 하고 꼬맹이는 몇 번 튕기는 눈치였지만. 내가 혼자 있는 건 못해먹겠는데 어떻게 해. 보고 싶을 땐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하고, 좋을 땐 좋다고 말해야 하고, 싫을 땐 싫다고 말해야 하는 직설적인 성격이므로 이번에도 당당히 싫다고 내 의견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집에 들어서서 기분 좋게 꼬맹이의 입에 입을 맞춘다. 홀로 서기를 준비하던 꼬맹이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홀로 서기 하지 마. 꼬맹이의 귓속에 작게 말했다. 나랑 같이 서. 꼬맹이를 자연스레 침대에 넘어뜨렸다. 아저씨, 하고 부끄럽게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에게 자신 있게 웃어보였다. 혼자가 아닌 같이의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