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물빛의 꿈을 꾸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 같은 창문을 바라보던 우리는 꿈마저 같은 꿈을 꾸었다. 공통된 이야기를 했다. 물보라가 자신을 덮쳐왔다는 이야기도, 한마리의 유여한 금붕어가 되어 자유롭게 푸른 해원을 헤집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내가 웃으면, 민석도 따라 웃었다. 루한이 손을 잡아오면, 나는 가만히 손을 떨구었다.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어. 좁은 방 한켠에서 씁쓸하게 웃었다. 민석도, 루한도, 한낱 금붕어에 불과했다.
창 밖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앉아 있었다. 풀내음과 눈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적막한 시골 한켠에서 우리는 어디도 가지 않은 채 서로만을 의지했다. 갇혀있다기 보다는 스스로를 가둔 것 이리라. 루한은 미소를 지으며 느즈막이 얘기했다. 우리는 멀쩡한 사람이니까. 물고기가 되어 자유를 꿈꾸며 잠을 자는 사람은 아니니까. 새가 되기 보다는, 물고기가 되자. 그것이 루한의 지론이였고, 민석은 고개를 가만히 까닥였다. 창문이 억센 바람을 맞아 덜컹거렸다. 민석은 담요를 뒤집어 쓴다. 그러면 루한은, 코코아를 타와 민석에게 먹인다.
"우리 인생은 참 어항같아."
바람에 산들거리던 네 모습은 인공 해초가 물결에 쓸려 살랑이듯 굴었다. 우리는 어항에 있었다. 드넓은 바다가 아닌 좁은 공간의 어항에 있었다. 넓지 않은 굴곡진 어항이였다. 어디든지 시선을 향할때마다 몸을 부딪혀 가며 바깥 세상을 바라 보아야 했다. 민석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루한은 떨떠름히 대답했다.
"그냥, 각자 사는데 같이 어울리는 것 처럼 보이잖아."
어쩌면 우리가 아닌 세상이 굴곡지지는 않았겠지. 보랏빛 바람이 창문에 휘날려 덜컹거렸다. 무너질듯 무너지지 않을 듯 위태롭기만 한 통나무의 별장 안에서, 루한은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민석도 자신이 한 말이 웃긴지 피식 피식 웃어 버리다가도, 이내 다시 말을 조곤히 이어갔다.
"금붕어도. 해초도. 자갈들도. 다 끌어안은 유리벽도."
나는 그저 너와 함께 있는게 좋았다. 루한은 내려진 결론에 천장을 바라 보았다. 데면데면하게 나 있는 나무 틈 사이로 보랏빛이 새어 들어온다. 조금 춥네. 차라리 우리의 꿈처럼 물이 흘러 들어왔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너와 나는 따뜻한 해원에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민석은 루한의 따뜻한 손을 빼내며 한숨을 쉬었다. 필히 뭔가 있으리라.
"근데 현실은,"
너무나도 삭막했는데. 드문히 말을 하는 민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럼, 너는 나와의 해원을 바라지 않는거야? 루한이 물었다. 민석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우리는 어항의 일원으로 섞일 수 없어."
루한은 생각한다. 네 눈빛이 쓸쓸했다. 울컥이는 감정을 어거지로 눌러가며 루한과의 말을 이어가는 민석의 모습은 상어에게 잡아먹힐듯 한 금붕어의 위태로운 모습과 다름 없었다. 루한. 너와 나는. 점점 흐릿해져가는 민석의 눈빛에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듯 우물거렸다. 괜찮아. 루한은 위로했다. 민석을 위로하고, 이런 문제에 불안해 하는 자신도 위로했다. 뭐든 위로가 있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이니까. 창밖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항 안에서, 너랑 살고싶다."
민석은 허탈하게 웃었다. 루한도 웃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아닌, 이루어 지지 못할 몽상에 관한 댓가 이리라.
눈내음이 풍겨왔다. 아침에 일어나도 지울 수 없는 느낌이야 항상 그럴싸했다. 루한은 눈을 비비며 어거지로 몸을 일으켰다. 옆에 누워 새근거리는 숨을 내쉬는 민석은 아직 세상 모르고 푹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한은 담요를 걷어 올렸다. 울긋불긋한 생채기가 볼에 나 있었다. 어디서 난 상처인지도 모른다. 나무를 주워오다 다쳤거나, 넘어져서 생긴 상처 이리라. 눈앞에 물색의 빛이 형용하게 아른거리는 시선을 치우기 위해 몇번이고 눈을 비볐다. 생각이 나지 않아. 루한은 자신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루한은 민석을 따라, 민석은 루한을 따라 이곳 산장에 들어와 몇날 며칠을 살고 있었다. 참으로 인상적인 곳이였다. 곳곳에 고사리과 식물들과 오래 된 굵직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단절시키고 있었다. 여간해선 차로 들어오기 힘들었다. 국내인지 국외인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있는 현실이 중요해. 처음 이 산장의 열쇠를 받으며 민석이 중얼거렸었다. 세상에서 소외를 너무 많이 당해서, 우리는 도피해온거야. 스스로 체념한다. 민석은 나약하다고 했다.
아니라고, 루한은 아니라고 외친다. 전혀 우리가 잘못한게 아니니까. 우리가 도피를 해온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도피시킨거야. 여간한 세상에선 너희가 이런 배짱으로도 살 수 없으니까 제발 꺼져달라고. 그럼 신경도 쓰지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겠다고. 차가운 보라바람에 쓸린 열쇠가 차갑게 손 안에서 녹아내렸다. 괜찮아. 그날 민석은 끝내 루한의 품에서 울어버렸다. 다 괜찮을꺼야. 그때부터, 루한은 자기에 대한 위로도 스스럼 없이 실천했던 것 같다.
먹을거리야 산장의 원래 주인인 아저씨가 매주 트럭으로 실어다 주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건 없었다. 담요를 둘둘 뒤집어 쓰고 장갑과 양말을 신는다. 슬리퍼가 아닌 두툼한 신발을 신는다. 두꺼운 외투도 보라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물보다 코코아가 더 괜찮고, 차가운 음식보단 따뜻한 음식이 더 괜찮은 이곳은, 우리만의 고립된 공간이다. 아침을 준비하는 루한의 손길은 분주해졌다. 해가 뜬다. 곧 민석이 깨어날 시간이니까. 계란을 프라이팬에 터뜨리며 루한이 슬몃 웃었다.
"...루하안."
"일어 났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아침 차릴께."
끄덕끄덕. 담요에 몸을 묻은 민석은 상체를 일으켰다가 다시 잠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항상 있는 일이여서 루한은 다시 계란을 피는데 집중한다. 민석은 반숙을 좋아한다. 원래 완숙을 좋아하던 루한은, 민석의 입맛에 길들여져 더이상 따로 먹을거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뭐든 우리에게 집중하면 당사자인 우리가 편해진다. 햇빛 사이로 슬그머니 날려드는 눈발들을 하나 둘 세어가던 루한의 눈망울이 맑게 빛났다.
"루한."
"응?"
"나 또 꿈을 꿨어. 루한도 나와 같은 꿈을 꿨지? 항상 그렇잖아."
"민석이 꿈을 꿨다면, 나도 같겠지. 어떤 꿈인데?"
으음. 뜸을 들이는 사이에 루한은 프라이팬에서 반숙 계란을 유리 접시에 올렸다. 침대와 식탁 사이는 고작 한걸음 차이. 보폭이 작은 민석의 걸음을 대입한 결과였다. 루한에겐 너무나 가까운 거리. 졸리운 기운의 눈을 벅벅 부비며 민석이 웅얼대자, 눈이 상한다며 루한이 붉게 오른 손을 잡아 내렸다. 그렇게 비비지 않아도 되는걸. 으응. 무표정하게 흥얼거리던 루한의 눈매가 다시 말갛게 변한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 접시 위의 동그라미. 그리고 옆에 놓여진 네모난 식빵과 여러맛의 치즈들. 투닥투닥.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내가, 또 바다로 뛰어들었어. 그리고 한없이 춤을 추었어. 원을 그리면서 수면 위에 비친 햇빛을 따라 유영하면서. 아주 유유자적하게 말야."
"음. 나도 그런 꿈을 꿨어. 또 통했네."
"당연한데. 또 있어. 내 몸은 붉은색이였어. 금붕어. 뻐끔뻐끔 금붕어."
"민석이 금붕어인건 항상 귀여워."
"아니야! 아무튼, 맨날 바다에 뛰어들어. 그리고 달라지는건 없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면 죽을껄 아니까, 금붕어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못하잖아. 반복되는 레퍼토리야. 너무 껄끄러워서 답답해."
패티식으로 짜여진 담요를 마구 여민다. 오래된 마룻바닥이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아무렴 어떨까. 초연하게 잘 있으면 모든건 제대로 굴러가기 마련인데. 식빵에 치즈를 바른 루한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민석의 입에 물려주었다. 곧잘 조잘대던 입이 식빵에 의해 턱 막혀버린다. 으브브. 싫은 눈치를 주면서도, 잘만 넘어가 사라지는 빵의 흔적에 루한은 옳지를 연발하며 계속해서 빵에 치즈를 바른다. 루한. 밖에 바람이 불어. 민석의 말에 루한은 창밖을 주시한다. 하얀 몽상이 넘실거리다가 사라진다. 저 너머에 순록이라도 있으려나. 루한은 떨떠름했다.
산장은 무료했다. 아저씨가 주마다 가져다 주는 책도 이미 여러번 독파를 해 이젠 외워버릴 지경이였다. 현대 문명이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열쇠를 달그락 거리며 민석은 하릴없이 중얼거렸다. 뭘 하던, 이제는 그냥 어항에 콱 박힌 애완 물고기들. 흥얼거리며 멜로디를 지어내는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루한의 시선이 민석과 닿는다. 손가락이 꼬물거린다. 그 위로 눈송이가 두어개 떨어진다. 느슨한 천장의 틈 사이로 들어온 눈보라 이리라.
금붕어가 뻐끔. 하지만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없는 가련한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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