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그래프꼭짓점 17화 |
5년 전 쯤이에요.
*
화창한 날씨. 조수석엔 순재가 타있고 뒷좌석엔 순재의 부모님과 성열이 타있다. 서울을 벗어나 시원한 숲길로 들어선 차는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달렸다. 순재와 교제를 하면서 순재 부모님은 처음 보는 자리였기때문에 우현은 바싹 긴장해있었고 그런 우현을 눈치챈 순재는 긴장하지말라는 듯이 우현의 어깨를 토닥토닥거려주었다. 순재 부모님은 애교많고 싹싹한 우현을 굉장히 흡족히 여겼다. 순재에겐 좋은 남편이, 성열에겐 좋은 형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빠르지않나?"
클러치에서 조금 발을 떼려던 순간, 반대쪽 커브에서 하얀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중앙선을 침범하며 달려왔다.
"우현아, 차!"
하는 순간 우현이 급하게 핸들을 홱 꺾었다. 승용차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핸들에서 에어백이 펑,하고 터져나왔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차가 마치 장난감 자동차처럼 뱅글뱅글 돌아 가드레일에 부딪혔다. 머리에서부터 뜨끈하고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는걸 느끼며 쓰라린 눈을 치켜떴다. 순재가 아침부터 준비한 도시락이 유리 조각들에 섞여 굴러다녔다.
"…으…."
차안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했고, 고개를 뒷좌석으로 돌리는 순간, 우현은 바로 정신을 잃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17.
"순재는 손가락이 으스러져서 세 번이나 재수술을 했어요."
아뇨. 우현이 딱 잘라대답한다.
"나 때문에 많은 걸 잃은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웃으면서 맞는 말이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튼 내 사연이 더 센 것 같죠?"
우현이 턱을 괴고 성규를 지그시 쳐다봤다.술도 마시지않고 꽤 시원한 밤바람에 정신도 말짱한데, 아무한테나 안 꺼내는 이 이야기를 왜 성규에게 했을까?
"인생 살면서 사연이 그것 말고는 없다면서요."
뭐야,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또 장난치나 싶어서 우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꽤 진지한 눈빛이다.
"무슨… 말이에요?"
케이크 상자를 열려던 성규가 낯간지러운 우현의 말에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 우현의 저 진지한 눈빛을 도저히 못 견뎌내겠다.
"그,그거야 물론 팀장님이 하도 날 못 살게 괴롭히고 유치하게 시비걸고 놀리니깐 그렇죠!"
별다른 의미없이 한 말인데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괜한 헛기침을 한 성규는 나무젓가락을 내려놓고 케이크 상자를 마저 열었다.
"딸기 케이크네요? 나 딸기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대."
싱싱한 딸기가 한가득 올려진 케이크를 꺼낸 성규가 초를 꺼내 갯수를 세어보더니 인상을 확 찌푸렸다. 우현, 딱 봐도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다.
"이게 뭐에요."
성규의 손에 들린 초를 빼앗은 우현, 묵묵히 그 긴 초를 케이크에 쿡 쿡 쿡 찔러넣는다.
"이봐요. 나 서른 아니라구요. 나이 앞에 이 붙는 거랑 삼 붙는 게 얼마나 큰 차이인 줄 알아요?"
못 들은 척하며 초에 불을 붙혔다. 성규, 언제 투정부렸냐는듯이 케이크 위의 촛불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있다.
"아, 맞다."
그러더니 갓길에 세워진 벤츠 뒷좌석 문을 열고 반짝이가 달린 고깔모자와 무알콜 샴페인을 들고 나온다.
"그 유치원 재롱잔치할때나 쓸법한 모자는 뭐에요?"
궁시렁거리면서도 고깔모자를 받아쓴다. 여전히 뭐가 불만인지 아랫입술이 댓발 나와있다. 에이씨. 성규가 초 하나를 잡아 쑤욱 밀어넣는다. 서른살에서 순식간에 스물한살이 된 성규.
"아, 고마워요. 나의 스물한번째 생일을 축하해줘서."
우현이 결국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노래 안 불러줘요? 서서히 녹는 초를 보며 성규가 생일축하노래를 요청했다.
"창피하게 뭘 불러요."
우현이 마지못해 뻣뻣하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람같은 김성규씨. 생일축하합니다. 빠른 속도로 우현이 노래를 끝마치자 포장마차 손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쳐준다. 성규가 눈을 꼭 감고 무어라 중얼중얼거린뒤 후,하고 촛불을 껐다.
"며칠전에 공원에서 잔뜩 빌어놓고 소원이 또 있습니까?"
우현, 귀찮은 표정으로 성규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건다.
"이제 일어나요. 시간도 늦었는데."
성규는 케이크 상자와 샴페인을 양 손에 들고 옆구리에 인형까지 낀 채, 뒤뚱뒤뚱 우현의 차로 향했다. 고깔 모자를 쓴 채로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그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는 우현에게 빨리 타라며 되려 큰 소리다.
*
현관문이 열리고 약간 취한 성규가 우현에게 받은 선물을 양손에 가득 들고 들어선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그 머리위에 고깔은 뭐고."
그제서야 고깔모자를 머리위에서 잡아끌어내렸다. 깜빡한 거 알았으면 좀 말해주지. 암튼 치사한 인간.
"우와. 다 내가 좋아하는 거 잖아!"
봉신 씨가 엽기토끼인형의 귀를 잡아들며 물었다.
"선물받은거야."
성규가 받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자신이 사온 케이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은 명수가 치킨과 맥주, 그리고 스물여덟개의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아깐 스물한살이었는데. 순식간에 스물여덟이 되어버렸네. 정장 마이와 넥타이만 푸르고 얼른 식탁에 앉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명수와 봉신 씨가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성규의~ 생일축하합니다! 해맑게 웃은 성규가 두번째 소원을 빌며 촛불을 후,하고 불었다.
"형 기다리느라 나랑 엄만 밥도 못 먹었다."
포장마차에서 그렇게 많은 안주를 먹어놓곤 더 들어갈 배가 있는지, 젓가락을 든 성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잡채를 폭풍흡입했다.
"내일 다들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알지?"
아버지가 있는 곳은 전라도 완도였다. 차로 6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첫차인 아침 9시 버스를 놓치면 밤 10시 버스 밖에 없어서 7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무조건 첫차를 타야만 했다.
"형 핸드폰 후지고 낡았으니깐 내가 알람 맞춰놓을게."
방으로 들어가 충전하고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든 명수, 알람 메뉴로 들어가 알람 추가 버튼을 눌렀다.
"…가만…. AM PM? …아침이…PM이었으니깐…. PM… 7시. 됐다!"
명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식탁으로 가 앉았다.
*
"나 왔어."
우현이 피곤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자지않고있는 성열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직 안 잤네?"
피식 웃으며 성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우현이 물었다. 순재는?
"방에서 자."
11시. 좀 늦은 시간이긴 했다. 그래도 항상 문여는 소리를 듣고 우현을 맞아주던 순재였는데 오늘은 꽤 많이 피곤한가보다. TV 너무 늦게까지 보면 안돼,하고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난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방을 작은 협탁위에 내려놓고 정장을 벗은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찬 물줄기가 탄탄한 근육이 잡힌 몸을 차갑게 적셨다. 성규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더니 자기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성규에게서 순재와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던 사연을 말할 정도로. 오랜 친구인 호원과는 다른 의미의 편안함이었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순 없는 의미. 미운 정이 더 무섭다던데 그게 들어서 그런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자꾸 떠오르는 성규가 밉진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귀여웠다, 스물여덟의 성규는 스물여섯의 자신보다 더. 원래 우현은 무뚝뚝하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순재와 성열, 가족,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호원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부딪히며 만나온 사람이 아닌 이상, 쉽게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친해질 필요도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성규는?
"……."
성규는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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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그래프꼭짓점
"이 고졸 띨띨아! PM이랑 AM도 구별 못 해!?"
성규네는 아침부터 난리가 났다. 엽기토끼를 끌어안고자던 성규가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문득 쳐다본 시계는 아침 8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한 5초정도 멍하니 보고 있던 성규는 득음을 하듯이 소리를 꽥 지르며 온 집안의 불을 켜고 아버지에게 이쁘게 보여야한다며 팩을 한 채 자는 봉신 씨를 서둘러 흔들어 깨웠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는 봉신 씨에게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쉰 성규가 '지금 준비해도 늦었어. 우리 첫차 못 타'하고 말하자 봉신 씨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명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쩜 좋아. 기일인데 가지도 못 하고!"
집 분위기는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봉신 씨는 울상을 지은채 거실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고 죄인 김명수는 말없이 구석에 짜져있었다.
"차도 없는데 어떡할꺼야."
성규가 발로 명수를 휙 밀었다.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다. 오후 10시를 타고 가면 다음날 새벽 5시에 도착을 할테고 다음날은 아버지 기일도 아니다. 한참 정적만 흐를때 성규가 '잠깐만 기다려봐'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어라?"
우현의 이름이 전화번호부에서 없어졌다.
"아, 명함! 명함이 있었는데 어디다가 놨더라." 책상 여기저기를 뒤적거려 우현이 예전에 줬었던 명함을 찾아낸 성규가 키패드를 꾹꾹 눌러 우현의 번호를 찍었다.
"…멋진 남팀장님?"
눈썹이 확 찌푸려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이름은 뭐래? 이 귀신같은 인간이 언제 바꿔놓은거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였기때문에 일단 '멋진 남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범한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곧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자다 일어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왜요.]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던 우현이 잠시 멈춰서서 어제 기억을 떠올렸다.
[한 말 많아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암튼 뭔데요.]
전화기를 잡은 성규가 손톱을 잡아뜯으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하아…선물 한 번 제대로 써먹네요. 알았어요. 준비 다 되면 전화해요.]
활짝 웃으며 폴더를 닫은 성규가 거실마루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얼른 준비해."
봉신씨가 물었다. 씨익 웃은 성규가 대답했다.
"벤~츠."
*
밝은 아이보리색 옷을 입으려던 우현이 옷걸이를 든 채로 잠시 생각하다가 하얀 셔츠에 검은색 가디건을 입고 방을 나왔다. 주방에서 나오던 순재가 종이가방을 내민다.
"뭐야?"
순재와 성열이 집을 나서는 우현을 뒤따라 마중을 나왔다. 성규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고 봉신 씨는 검은색 투피스, 명수는 깔끔한 검은셔츠에 검은바지를 입고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순재와 성열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성규씨."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순재와 그 옆에 서서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성열에게 성규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성규 옆에 서있던 명수는 성열에게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열도 쑥쓰럽게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네요 순재씨. 성열씨도요. 아,참. 저번에 그 쿠키는 정말 잘 먹었어요."
네? 성규의 물음에 순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예전보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우현이 순재를 돌아봤다. 항상 같이 지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깐 좀 살이 빠진 것도 같다.
"아닌가? 아무튼 순재씨는 다이어트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 워낙 키도 크시고 모델같으시니깐,"
우현이 성규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아휴, 정말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차 문을 열어주는 우현에게 봉신 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우현이 '괜찮습니다'하며 젠틀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리곤 명수가 들고 있던 박스를 건네받아 트렁크에 싣는다. 벤츠라는 차에 처음 타보는 봉신 씨는 넓직한 공간과 고급스러운 내부 모습에 감탄을 하며 가죽 재질 시트를 매만졌다. 세상에. 이게 차야, 집이야? 조수석에 탄 성규는 뒷좌석에 앉은 봉신 씨와 명수에게도 안전벨트를 매게 했다. 성열과 순재에게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한 우현이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밸트를 매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나 진짜 살 빠졌어, 성열아?"
성열의 두 볼이 발그스레했다. 블랙 셔츠를 입고 있는 명수의 모습은 참 멋졌다. 특히 웃으면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줄땐 꼭 백마탄 왕자님같아보였다. 혼자 얼굴이 붉어져선 살포시 웃는 성열을 순재가 잠시 진지한 얼굴로 바라봤다.
*
편안한 쿠션때문인지 봉신 씨와 명수는 차에 타자마자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에 빠졌다.
"많이 피곤하신가보네요."
그 말에 우현이 괜히 헛기침을 한다.
"유치하게 멋진 남팀장님이 뭐람."
성규가 하얀 손가락으로 네비게이션 화면을 콕콕 눌렀다. 길안내를 시작합니다,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고속도로 상황과 함께 7시간 30분이라는 소요시간이 떴다.
"7시간 30분? 굉장히 머네요."
성규의 말에 우현이 살짝 웃었다. 우현의 웃음에 성규도 살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락방을 청소하자는 순재의 말에 얼떨결에 앞치마를 멘 성열이 먼지털이로 다락방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성열아. 이리 와봐."
성열이 상자들을 정리하던 순재에게 다가갔다. 순재가 들고 있는 건 자신과 순재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피아노 콩쿠르 대회 현수막이 보이고 자랑스럽게 상장을 들고 서있는 자신과 순재, 그리고 부모님.
"이때 기억나?"
무스로 잔뜩 빗어넘긴 2대 8 가르마를 가리킨 순재가 깔깔 웃자 성열도 씨익 웃고있는 순재의 치아에 반짝거리는 교정기를 가리켰다.
"야, 교정기는 어쩔 수 없이 한거고 이 가르마는 엄마가 해주려는거 너가 울며불며 싫다고 하다가 결국에 한 거였잖아."
성열이 쪼그려앉으며 나머지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순재는 여전히 그 사진을 든 채 미소를 지으며 먼지가 낀 유리를 앞치마 자락으로 슥 닦아냈다.
"성열아."
성열은 말이 없었다. 예전에 우현과 얘기하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싫어?"
성열이 고갤 돌려 순재를 똑바로 마주했다.
"누나."
순재가 손을 들어 성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나, 난 지금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
"아, 쌀 것 같아."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베베 꼬는 명수의 모습에 우현이 속도를 조금 더 높혀 서둘러 몇 미터 앞에 있는 휴게소로 진입했다. 차가 주차장에 멈추기도전에 문을 연 명수는 순식간에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다지 화장실이 급하지 않은 봉신 씨는 여유롭게 주변 경치를 보며 화장실로 향했고 아침부터 먼거리를 운전한 우현은 허리를 돌려 스트레칭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리려던 성규가 뒷좌석에 놓여있던 종이 가방을 발견했다.
"이건 우리 짐 아닌데…. 이게 뭐에요?"
휴게소 벤치에 우현과 성규가 서로 마주보고 나란히 앉았다. 주스를 따 마시던 우현이 스낵 코너를 두리번거리며 성규에게 물었다.
"그거 맛있던데."
벤치에서 일어난 성규가 어디론가 향하더니 금세 델리만쥬를 사왔다. 우현, 종이 봉투에서 델리만쥬를 하나 꺼내어 입안에 쏙 넣는다. 화장실을 다녀온 봉신 씨와 명수를 데리고 점심 해결을 위해 휴게소 안 식당으로 들어갔다.
"엄마 뭐 먹을래?"
성규가 메모지를 들고 주문하는 곳으로 향했다. 우현, 냅킨을 뽑아 봉신 씨와 명수의 앞에 놓고 그 위에 수저를 가지런하게 올려놓는다. 그 모습에 봉신 씨가 입으로 손을 가리며 호호호 웃었다.
"호호호. 친절하시기도해라. 그나저나 성규는 회사에서 잘 하나요? 하도 애가 덤벙거리고 말썽이라…."
명수의 허벅지를 봉신 씨가 꼬집었다.
"호호호. 어머 얘는 참."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성규가 우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했어요?"
우현, 냅킨을 뽑아 성규의 앞에 놓고 수저를 놓아준다. 대기번호를 기다리는데 테이블이 달달달 흔들린다. 젓가락을 입에 문 명수가 다리를 떨고 있는 탓이다. 우현이 계속 신경쓰이는듯 명수의 다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자 그 시선을 따라 달달달 떨고있는 명수의 다리를 본 성규가 명수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아! 왜!"
그제서야 명수의 다리가 멈추고 우현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기름값 장난아닐텐데…조금 있다가 드릴게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완도로 가는 연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후 3시였다. 성규가 조수석 창문을 열자 비릿한 바다내음이 한가득 들어왔다.
"완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지내다가 서울로 이사왔을때 처음 전학 간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몰라요."
우현이 간간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성규의 얘기에 집중했다.
"마을이름이 해지개 마을이었어요."
우현의 차가 완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인 완도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내음은 비릿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꽤 상쾌했다. 창틀에 턱을 괸 성규가 두 눈을 감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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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과 성규의 첫 날 밤...이라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암튼 첫날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