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그래프꼭짓점 인물소개 |
|
인생그래프꼭짓점 18화 |
*
"기름값 장난아닐텐데…조금 있다가 드릴게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완도로 가는 연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후 3시였다. 성규가 조수석 창문을 열자 비릿한 바다내음이 한가득 들어왔다.
"완도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지내다가 서울로 이사왔을때 처음 전학 간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몰라요."
우현이 간간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성규의 얘기에 집중했다.
"마을이름이 해지개 마을이었어요."
우현의 차가 완도로 들어가는 연륙교인 완도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내음은 비릿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꽤 상쾌했다. 창틀에 턱을 괸 성규가 두 눈을 감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18.
성규 말대로 해지개 마을은 정말 후미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때아닌 벤츠의 출연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을 했다.
"아이고! 봉신 누님! 징허게 반갑소잉."
밀짚 모자를 쓰고 넉살좋게 생기신 이 아저씨는 봉수 아저씨. 아버지와 가장 친한 마을 동생이자 성규네 가족이 서울로 떠나며 비어버린 집에서 살고 있는 아저씨였다. 더불어, 따로 부탁하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버지 묘지를 관리해주신다. 덕분에 아버지 산소는 일년중에 한번이라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일이 절대 없었다.
"아따 근디 즈 뒤에 뽀얀 얼라는 누교?"
우현,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다.
"제가 다니는 회사 팀장님이세요."
광이 나는 벤츠의 위엄은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트렁크에서 박스를 꺼내든 명수가 먼저 앞장서 걸어갔다. 봉수아저씨는 봉신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그 뒤를 따랐고 맨 뒤를 우현과 성규가 따라걸었다.
"경치가 참 좋네요."
멀리 바다가 보이고 알록달록한 집 지붕 색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길가의 돌담 사이로 들꽃이 피어있었고 귀여운 강아지는 목줄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머리가 복잡할때면 혼자 오기도 했어요."
우현과 성규는 태생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달랐다. 우현은 유치원을 다닐때부터 전용 기사가 데리러 올 정도로 남다르게 자랐다.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었고 주위 사람들의 대우도 달랐다. 하지만 성규는 정말 자유롭게 자랐다. 여름에 더우면 명수와 손잡고 바다로 나가 팬티만 입은 채 물놀이를 하기도 했고 온 마을 집이 자신의 집인것처럼 심심하면 불쑥 들어가 어른들과 말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었다. 성규네가 머나먼 서울로 이사를 결정하고 짐을 옮기던 이삿날. 온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콕콕 찍으며 직접 잡은 굴비, 직접 기른 채소, 나무를 깎아만든 장식품 등을 건네며 눈물의 배웅을 할 정도로 유별난 사이였다.
"다 왔다."
산이라기보단 바다와 마을이 훤히 보이는 언덕 가까운 곳에 아버지의 산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박스를 내려놓은 명수가 돗자리를 꺼내 봉수 아저씨와 함께 반듯하게 펼쳤다. 성규는 봉신 씨를 도와서 전 날 밤에 미리 랩으로 포장해놓은 음식 접시와 과일이 올려진 접시를 내려놓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좋아하던 보리 막걸리를 꺼내어 올렸다. 제사 준비가 되자 우현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봉신 씨, 성규, 명수, 그리고 밀짚 모자를 벗어 내려놓은 봉수 아저씨. 잠시 자세를 고쳐잡고 곧 산소를 향해 두 번 절을 한다.
"엄만 어떻게 올 때마다 울어?"
눈물을 훌쩍이는 봉신 씨의 모습에 명수가 깐족깐족거렸다. 아버지가 떠난지 10년이 지났고 기일은 물론, 매년 명절마다 산소에 찾아온터라 성규와 명수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봉신 씨는 올때마다 이렇게 훌쩍훌쩍거렸다. 명수의 팔뚝을 찰싹 때리는 봉신 씨를 봉수 아저씨와 성규가 뒤에서 지켜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연례 행사에요."
성규의 말에 뒷짐지고 발에 채이는 꽃들을 툭툭 건드리며 걷던 우현이 '뭐가요?'하고 물었다.
"우리 엄마가 자존심은 진짜 세거든요. 우리 앞에선 눈물 잘 안 보이다가 아부지 보러 왔을때 저렇게 일년동안 울 거 다 빼놓고 가요."
우현, 고갤 돌려 무덤덤한 성규를 쳐다본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성규의 갈색톤 머리가 산들거렸다. 언덕같은 산에서 내려오니 벌써 오후 5시다. 지금 출발해도 밤 12시, 또는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하기때문에 서둘러야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성규네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어……왜 이러지."
부르르르릉 하다가 시동이 탁 걸려야하는데 부르르르르르르까지만 들리고 정작 시동은 걸리지가 않는다. 차 키를 뽑고 다시 꽂아 돌리자 이번엔 좀 더 힘있는 부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본네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우현과 성규네가 얼른 차에서 내려 본네트 앞으로 향했다.
"이,이거 왜 이래요?"
인상을 쓴 우현이 뜨거운 본네트를 잡아 올리자 뭉쳐있던 연기가 한움큼 뿜어져나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한 우현이 입술을 깨물며 본네트 안을 두리번거렸다. 심상치않다.
"고장난갑소?"
봉수 아저씨가 슬쩍 본네트 안을 보며 말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우현이 핸드폰을 꺼내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외제차인지라 일반 카센타에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안내원 목소리가 들리고 가장 가까운 서비스 센터를 물었다. 다행히 5시간 거리에 서비스 센터가 있긴 했다. 다만 마을이 하도 구석진 곳에 있어서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오늘 서울로 돌아가긴 글렀단 점이다.
"서비스 센터에서 뭐래요?"
명수의 말에 우현이 '응'하고 짧게 대답한 뒤 본네트 뚜껑을 닫았다. 하필 왜 이 머나먼 완도까지와서 말썽을 피우는 건지. 벤츠 앞 바퀴를 우현이 발로 툭 걷어찼다.
"어찌아스까나….일단 해도 지고 허는디 집으로 갈란가?"
봉수 아저씨의 물음에 성규가 곤란한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어쩔 수 있나. 일단 하룻밤은 묵어야하는데.
"어머, 이 의자를 아직도 쓰고 있네!"
정말 모든게 그대로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봉수 아저씨 아내인 복희 아줌마가 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성규네를 맞이해준다. 전라도에서 자란 봉수 아저씨와는 달리 그래도 시내에서 자라 시집을 온 복희 아줌마는 표준어에 가까운 사투리를 썼다.
"봉신 언니! 오랜만이야! 성규랑 명수도 오랜만이네!"
어머, 되게 잘 생겼다. 복희 아줌마가 성규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의 벽지며 장판이 모두 금방 도배한 것처럼 깔끔했다.
"도배장판 새로 했어?"
봉신 씨와 명수가 같은 방을 쓰고 성규와 우현이 같은 방을 쓰기로 결정했다. 우현과 같은 방을 쓴다는게 좀 걸리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우현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방으로 들어온 성규가 넥타이를 풀어 옷걸이에 걸고 힐끗 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가요?"
우현의 말에 살풋 웃으며 정장 마이를 벗어 옷걸이에 마저 걸었다.
꽃들이 제법 활짝 핀 여리 꽃밭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성열이 성규네 초인종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집에 아무도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울타리 너머로 내다보았다. 그 여자가 서있었다. 전에 명수에게 찝적댔던 미희라는 여자.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이번엔 문을 철컹철컹 두드려댄다. 손에 선물상자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명수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없나…. 명수야! 나야, 미희! 성규오빠!"
대문을 열고 나온 성열이 쉴새없이 초인종을 눌러대는 미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명수 집에 없는데…."
미희가 신신당부를 한 뒤 아쉬운 표정으로 명수네 집을 한번 둘러보고는 오르막길 너머로 사라졌다. 미희가 사라진 걸 확인한 성열이 선물 상자를 손에 들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
하트모양 편지와 남성브랜드 스카프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명수야. 스카프 선물의 의미는 영원히 사랑해요,라는 의미래. 우리도 지구가 멸망하기전까지, 아니 지구가 멸망해도 영원히 사랑해보자. 사랑해♡'라는 별 거지깽깽이같은 내용이 쓰여있었다. 성열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이걸 명수에게 주면, 명수는 이 스카프를 과연 하고 다닐까? 대문앞에 서서 생각에 잠긴 성열의 앞에 동네 강아지가 쫄랑쫄랑거리며 나타났다. 성열, 강아지와 손수건을 번갈아 보다가 곧 강아지를 향해 손짓을 한다. 사람을 무서워하지않는 강아지인지 몇 번 손짓을 했을뿐인데 금세 다가와 성열의 신발코에 콧잔등을 부비적거린다.
"…날씨 추워지니깐…감기 조심해 멍멍아."
강아지 목에 스카프를 앙증맞게 묶어준 성열이 강아지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
"안녕하세요, 호원씨."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가 헤어밴드를 치켜올리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끝나고 시간있으세요?"
진심어린 눈빛으로 얼굴을 뒤로 빼고 냄새가 난다는듯이 손부채질을 한 호원이 자신의 목에 걸린 하얀 타올로 땀을 닦아내며 샤워실로 향했다. 혼자 남은 그녀, 당황과 황당이 섞인 얼굴로 호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자신의 옷 냄새를 킁킁 맡는다.
*
저녁은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제철인 전어와 삼겹살, 그리고 호박고구마까지 정말 원없이 구워먹었다. 새 칫솔로 양치를 하고 세수까진 마친 성규가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닦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우현은 순재와 통화를 마치고 답답한 가디건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봉수 아저씨가 나무 보일러에 장작을 너무 많이 넣은 탓에 방안은 땀이 날 정도로 후끈후끈했다.
"다 씻었어요?"
하얀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푼 우현, 수건을 받아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고, 어쩐댜. 봉신 누님이랑 명수주고 나니껜 까는 이불이랑 베게가 하나 밖에 안 남았는디…."
봉수 아저씨에게 이불과 베게를 받아온 성규가 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베게 대신 덮는 이불을 접어 자신이 누울자리에 놓고 후끈한 방안 공기에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와이셔츠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반팔 차림이었지만 뜨거운건 여전했다. 양치와 세안을 마치고 온 우현이 바닥에 깔려진 조그마한 이불을 보며 물었다.
"이불이 하나 뿐이에요?"
수건을 의자에 걸쳐놓은 우현이 성규의 옆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내일 아침 10시에 서비스센터에서 직원이 온댔으니 적어도 8시에는 일어나야했다. 불을 끄자 밝은 달빛이 방안을 훤히 비췄다.
"…후우…."
우현이 인상을 팍 쓰며 상체를 일으킨다. 더워서 잠이 안 올 지경이다.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푼 우현이 와이셔츠를 홱 벗어버리려다가 성규를 보곤 물었다.
"더워서 그러는데 벗어도 되죠?"
성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현이 와이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하얀 런닝과 함께 우현의 구릿빛 팔뚝이 드러났다. 성규, 왠지 민망하다. 좁은 이불탓에 어깨가 살짝살짝 닿았다.
*
"…?…."
옆자리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던 검정 가디건이 보이질않았다. 화장실에 갔나? 화장실가면서 가디건을 가지고 가진 않았을텐데. 까치가 집을 지은 머리를 매만지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집안에는 봉수 아저씨 코고는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왔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살짝 열자 마당에 피워진 장작불앞에 앉아있는 우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추워요. 나오려면 옷 입고 나와요."
우현의 옆자리에 앉은 성규,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불을 멍하니 쳐다본다. 뽀얀 성규의 얼굴이 장작불 열기에 불그스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우현, 그런 성규를 빤히 보는데 순간적으로 이쁘단 생각이 들어온다. 얼른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별이 참 밝네요."
그러게요…. 정말 이렇게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있는 하늘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무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장작불을 쐬고 있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그때 타닥! 소리와 함께 장작불이 튀겼다.
"앗 따거!"
성규가 깜짝 놀라며 불똥이 튄 뺨을 감싸쥐었다. 덩달아 놀란 우현, 성규의 얼굴을 부여잡고 가까이 끌고와 살핀다.
"손 치워봐요. 많이 데었나보게."
우현이 모기 물린 것처럼 빨게진 성규의 뺨에 호호 바람을 불었다. 정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성규의 뺨을 살피는 우현도, 그리고 우현에게 얼굴이 붙잡힌 성규도 묘한 분위기를 느끼곤 잠시 멈칫했다.
"……."
정말 숨막히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우현의 눈은 깊고 또렷했다.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성규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가까이 다가온 우현을 밀쳐내야하는데 몸이 바싹 굳어선 꼼짝할 수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쪽팔리게 왜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자도 아닌 이 남우현이라는 남정네한테! 분위기 탓인가? 지금 마주한 우현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일 정도로 멋졌다. 짧디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며 복잡한 성규와는 달리, 우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릿속엔 그저 성규의 홍조 띈 뺨과 새초롬한 입술, 그리고 이리저리 뻗친 머리가 굉장히 사랑스러워보인다는 생각만 들었다. 촉촉한 성규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고 순간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우현은 성규의 입술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정말 느리게 다가가고 있었다. 스물스물 다가오는 우현의 입술, 성규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다. 그때, 우현의 정신이 확 돌아왔다.
"…괜찮네요. 별로 안 데었어요."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우현, 장작불로 고개를 홱 돌린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성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먼저 들어갈게요."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우현은 마른 세수를 했다. 성규에게 가슴이 떨렸었다.
"…하아."
현관문을 닫고 문에 기대선 성규, 휘모리 장단으로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을 손으로 누른다.
"얘가 왜 이러지…."
"…으…추워어…."
추위에 몸을 떤 성규가 따뜻한 우현의 팔을 베고 꼼지락거리며 우현의 품으로 파고든다. 런닝만 입고 자던 우현, 잠결에 따뜻하고 기분좋게 보들보들거리는 성규를 쿠션처럼 꼭 끌어안았다.
*
다음 날 아침.
"…아…."
성규가 나가자마자 눈을 뜬 우현, 저릿저릿한 팔을 주무른다. 곤히 잠든 성규가 깰까봐 차마 떨쳐내지못하고 계속 팔을 빌려준 탓이다.
렉카차는 10시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있었다. 든든한 아침밥을 챙겨준 봉수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렉카차와 연결된 우현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좀 기우뚱하긴했지만 나름 편안했다. 봉신 씨가 우현에게 '아휴, 팀장님 고생하셔서 어떡하면 좋아'하고 걱정스런 말투로 말하자 괜찮다며 웃어준 우현이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
우현과 성규. 서로가 신경쓰인다.
*
"…큼."
잠을 덜 잤나. 손에서 서류를 놓고 의자를 뱅그르르 돌린 우현이 두 눈을 살살 어루만졌다.
"피곤하면 좀 쉬었다하지."
순재가 과일 접시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아냐, 괜찮아. 향긋한 홍차향기가 서재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성열이는 뭐해?"
자연스러운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우현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피,피아노?
"그래, 피아노. 제대로 들었으면서."
우현의 조금 슬픈 눈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걸 느낀 순재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을 어루만졌다.
"나 괜찮아, 정말."
성공해야할텐데. 쟁반을 들고 일어선 순재가 웃으면서 서재의 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우윽."
오븐을 열려던 순재가 갑자기 밀려오는 역겨운 느낌에 서둘러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게 별로 없어 멀건 위산만 잔뜩 토해낸 순재가 변기 물을 내리고 맑 은 물로 입을 헹궈냈다.
"……."
요즘 들어 잠도 부쩍 많아지고 구토 증세도 많아졌다. 그저 신경성 위염이 도진 것이라고 생각한 순재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화장실에서 나와 오븐을 활짝 열었다.
*
봉신 씨와 명수는 집에 오자마자 바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지만 성규는 자지않고 마당으로 나와 평상에 베게를 베고 드러누워 맑은 하늘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왜 잠이 안 오지…."
그야 물론 어젯밤에 코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던 남우현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니깐. 왜 자꾸 가슴이 두근거리지. 휴우. 멍청아, 그건 바로 남우현이 자꾸 생각나기,
"…아아! 짜증나 짜증나!"
발꿈치로 평상을 마구 두드려댔다. 베게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짜증나죽겠다.
*
"그냥 버스말고 택시타자니깐요."
우현의 말에 먼저 앞서가던 성규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 우현을 쳐다봤다. 멈춰서있는 우현의 모습이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진 성규가 가방을 고쳐잡으며 다가와 말했다.
"그럼 그렇게 미리 말을 하던가…."
결국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한 결과로 10만원이라는 거금의 택시비를 지출했다.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씌운다며 택시기사와 한바탕해재끼려는 성규를 우현이 간신히 끌어내렸다.
"10만원이 말이 되요? 기름값도 10만원이 안 나올 거린데! 어어! 그냥 가잖아요! 에이씨!"
유유히 회사를 빠져나가는 택시를 보며 성규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 좀 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그냥 팁 준거라고 생각해요."
주차장에 들어서며 두 사람이 택시에서 내리는 걸 본 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가 고장나서. 짧게 대답한 우현이 먼저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주말에 잘 다녀왔어요?"
입에 귀에 걸린 호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성규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출근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우현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후우."
모두 성규때문이었다. 서류를 넘기다가 힐끗,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또 한번 힐끗. 자기도 모르게 자꾸 성규를 쳐다보게 된다. 깊은 선산에서 명상중인 스님 저리가라할 정도로 평소 뛰어난 집중력으로 일을 하던 우현이 오늘은 굉장히 더딘 속도로 일처리를 하고 있다. 메신저 창을 띄운 우현, 성규에게 [고개 좀 숙이고 일하세요 얼굴 안 보이게]하고 쪽지를 보낸다. 우현의 쪽지를 확인한 건지 성규가 자신의 쪽을 홱 쳐다보는데 왜 이리 그 시선이 반가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시비에요 - 김성규 -]
마지막 답장을 보낸 성규가 상태를 '바쁨'으로 바꿔놓았다. 자기도 모르게 즐겁게 웃던 우현, 얼른 주위를 둘러보곤 정색을 하며 메신저 창을 닫았다. 이 이상징후는 뭘까. 진짜 큰일이다.
월요일은 장동牛 고깃집의 휴무날이다. 동우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가게 영업을 하며 쌓인 피로를 월요일에 몰아서 풀었다. 일요일 오후 11시에 잠들어 월요일 오후 9시에 일어난 적도 많았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편이다. 오후 6시에 일어났으니 말이다. 샤워를 하고 나와 노란 머리를 말리며 소파에 앉은 동우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온통 호원과 주고받은 카카오톡들뿐이다. 호원의 드립을 다시 올려 읽던 동우가 '우하하학'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참 착하고 재밌는 동생이다. 배터리 충전기에 스마트폰을 꽂아놓고 부엌으로 가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태양 빌라는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혼자 살기에 딱 알맞은 평수로, 싱글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빌라였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동우는 벽지며 가구들을 모두 알록달록하고 포근한 색깔로만 꾸며놓았다. 동우 집에 자주 놀러오는 성규는 올때마다 선반에 놓여진 많은 장난감과 피규어들을 보며 애기들다니는 유치원같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놀러올때마다 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아 그리 싫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회사 입구 계단을 내려가던 여직원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듯 허우적거리자 우현이 얼른 뒤에서 손목을 붙잡아당겨준다.
"가,감사합니다."
여직원과 우현을 번갈아 쳐다본 성규, 묘하게 질투가 나려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곤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두드린다. 자해하는 성규의 손을 우현이 홱 붙들었다.
"왜 자해를 하고 그래요?"
입술이 댓발 나온 성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현아, 너 차 어딨어? 호원이 묻자 아마 집앞에,하고 대답한 우현이 자연스럽게 호원의 차로 향했다.
"오늘만 태워줘라."
성규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잠시만요. 차에 타려던 성규가 액정에 뜬 동우의 이름을 확인하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장동우. 왜?"
동우라는 말에 호원의 귀가 쫑긋 거렸다.
[흐어어엉… 어떡하면 좋아, 성규야아…]
동우가 운다는 말에 운전석에 타있던 호원이 벌컥 문을 열고 나와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흐윽, 성규야아…흐아앙!]
동우의 마지막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해요! 빨리 안타고!"
행동은 호원이 빨랐다. 운전석에 앉아 재촉하는 호원때문에 더 다급해진 성규가 서둘러 조수석에 타 벨트를 맸고 얼떨떨한 우현도 얼른 뒷좌석에 올라탔다. 뒷좌석 문이 닫히자마자 호원이 무서운 속도로 동우의 고깃집을 향해 질주했다. 무슨 일인지 도통 감이 안오는 우현이 불안한듯이 손톱을 뜯고 있는 성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호원이 핸들을 왼쪽으로 거칠게 홱 꺾었다. 덕분에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있던 우현이 오른쪽으로 데구르르 굴러 창문에 머리를 퍽, 박았다.
"아! 어떡해…."
성규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맺혔다. 저기 연기…. 성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문 너머의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호원의 인상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소방차 세 대가 불을 진압하고 있었다. 옆 건물로 번져가는 불길은 가까스로 꺼졌지만 동우의 가게에선 여전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이 동우의 가게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는 것 같았다. 급히 차를 세우고 호원과 성규가 서둘러 동우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동우야!"
두 손을 물론, 얼굴에 온통 잿가루가 묻은 동우가 엉엉 울며 타들어가는 고깃집 바로 앞에 앉아있었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길래 이 쌀쌀한 날씨에 반팔 차림이다. 신발도 짝짝이고 짝짝이 신발의 한 짝마저 벗겨져선 엉뚱한 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성규를 끌어안은 동우가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흐어엉…어떡해, 성규야아…."
몇 초밖에 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열기에 끌어안고 있는 동우와 성규를 우현이 멀리 물러나게 했다. 신발을 줏어온 호원이 묵묵히 동우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정장 마이를 벗어 동우에게 덮어주었다.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동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는 성규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
사람들의 탄식 소리와 함께 고깃집 간판과 벽이 불속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들기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