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아홉의 나, 스물일곱의 너
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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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와의 어색하다면 어색한 식사를 이어갔다. 물론, 기분 나쁜 어색함은 아니였다. 그와는 간간히 이야기를 나눴다. 정호석은 내 직업인 '난민구호자'에 큰 흥미를 보이며, 계속해서 질문했다. 예를 들면, '어느 나라 가봤어?' '너가 도와준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불쌍했어?' '사람 죽는 거 많이 봤겠네. 그럼?' 같은 것들. 참 일차원적인 질문들이었다. 나는 그의 시답지 않은 질문들에 대꾸를 해주다가, 바지 위로 음료를 흘려버렸다. 그는 제 주변을 둘러 휴지를 찾았지만, 휴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휴지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책상 위의 휴지를 보더니, '아. 저깄네.' 하고는 말했다. 아니. 제 사무실인데, 휴지가 어딨는지도 몰라.
그의 책상은 통유리를 등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표: 정호석' 이라는 명패가 올려져 있었다. 오... 대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대표라니. 어느정도 인정은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휴지를 뽑아 대충 바지를 닦으며,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야겠다 - 다짐했는데. 순간, 살짝 열린 그의 책상 밑 서랍으로 익숙한 다이어리가 보였다. ...어? 이거?! 나는 서랍을 열어,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 함께 준 선물이었는데... 정호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소한 것에 의미 부여를 잘 하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다이어리를 펼쳤다. 아직도 일기를 쓰나, 싶어서.
[2009년 12월 25일.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기다리던 병원에서 오늘 메일이 왔는데, 예상은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니. 당장 뭘 해야 될 지 모르겠다. 밖에서는 눈이 내린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장 첫 페이지에는 2009년 크리스마스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게 그 메일 내용인가?
'1998년 7월 09일, 대한병원, 정현석-장미림 수술 기록없음. 일반병동에서 과다출혈로 방치된 채 사망.'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거였구나. 그래서 고아원에서 지냈고... 1998년이면 - 우리가 아홉 살 때네. ...힘들었겠다. 부모님이 수술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음 장을 넘겼다.
[기부금 전액 두드림 계좌로 입금 흔적 확인. (약 2억으로 추정) 당시 담당 PD연락 불가. 생사확인도 X]
"뭐하는 거야."
그는 언제 다가온건지, 내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거칠게 빼냈다. 나는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제 다이어리를 서랍 속에 다시 돌려 넣으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나는 파리하게 떨리는 손을 손으로 감쌌다. 내 손을 내가 힘을 주어 잡았다. 떨지 말라고. 무서운 티 내지 말자고. 하지만 손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르르 떨려왔다. 눈가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이유는 모른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가 불쌍해서인지, 수술을 받지도 못하고 죽은 그의 부모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그 다음 장에서 본, 아빠 회사의 이름 때문인지.
이유를 모른다.
모르고 싶었다.
*
어떻게 그 건물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옷가지를 챙겨 건물 밖으로 향했고, 급하게 잡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쳤다. '정호석.' 나오는 정보는 동명이인의 배구선수에 관한 것 뿐이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으며, '정호석 두드림' 을 검색했다. 이번에도 별 쓸모없는 정보가 나오길 바라면서.
[대한민국을 슬픔으로 몰았던, 아홉 살 정호석 군의 사연을 기억하십니까? 순간의 사고로 부모님과 유일한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정호석 군의 사연은 온 국민의 마음을 적셨는데요. 정호석 군의 사연은 역대 기부 프로그램 중 최대의 모금액을 기록했지만, 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정 군의 부모님은 오늘 오전 결국 수술 도중 쇼크사로 사망에 이르렀고, 남은 기부액은 두드림으로 귀속 되었습니다. 두드림은 남은 금액을 투명하고 바르게 정 군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혔고, 국민들의 과도한 관심이 어린 정군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게 해달라며 부탁의 말을 전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다이어리에서 본 글자가 기사 위로 겹쳐졌다.
[기부금 전액 두드림 계좌로 입금 흔적 확인. (약 2억으로 추정) 당시 담당 PD연락 불가. 생사확인도 X]
[1998년 7월 09일, 대한병원, 정현석-장미림 수술 기록없음. 일반병동에서 과다출혈로 방치된 채 사망.]
기사와 그의 다이어리는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던 핸드폰 화면이, 벨소리를 울리며 '지민이' 라는 글자를 담았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한 번, 울컥. 쏟아졌다.
**
[과거 / 지민 시점]
지민은 불안했다. 그녀가 호석과 가까워 질 것만 같았다. 물론 저와의 시간이 훨씬 길지만, 시간이 관계의 전부가 되지 않으니까.
국회의원의 외아들인 지민은 늘 격에 맞춰 살아왔다. 부모님께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 칭얼거려 본 적도 없다. 아니, 칭얼거릴 수가 없었다. 부모가 집에 없었으니.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린 지민이 보기에도 온갖 더러운 짓으로 바빴다. 언젠가 집으로 온 택배 중, 복숭아 박스를 본 지민은 마음이 둥둥 떠올랐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복숭아는. 그리고 마침 그 날은 지민의 생일이었다. 어린 아이는 저를 위해 바쁜 부모가 보내준 선물인 줄 알았을 것이다. 장난감이나 케이크도 아닌, 그 투박한 복숭아 박스가 말이다. 아이는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려다, 작은 손으로 제가 직접 박스를 열었다. 하나만 꺼내서 먼저 먹고 있어야지 - 싶었기에. 하지만 박스 안에는 복숭아 대신, 현찰이 가득했다. 그 돈이 얼마의 금액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얼마가 됐든 엄청난 금액은 분명했다. 그날, 지민의 생일은 그렇게 끝났다. 저가 좋아하는 복숭아 하나 먹지 못한채로.
*
밤 늦게 호석에게 걸려온 전화는 지민의 마음 속 어딘가를 툭 - 하고, 밀쳤다.
"그... 내가 지금 너랑 맨날 같이 있는 그 여자애랑 있는데... 얘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빨리 와주라. 지민아."
전화를 받고 달려가자 보이는 건, 제 옷가지를 탄소에게 덮어주고는 그녀의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호석이었다. 지민은 그 둘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위로 덮인 호석의 옷을 들춰내고, 제 점퍼를 덮어주었다. 호석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줍고는,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지민은 하필 그 날 제 몸이 좋지 못했던 것을 탓했다. 제 몸만 성했다면, 자신이 탄소를 구했을텐데.
지민은 호석에게 대충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그녀를 업고는 자리를 떴다. 호석은 차마 전해주지 못한 선물을 제 손에 꽉 쥔 채로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전해줄까.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었다. 고아원에 생일인 아이는 자신 뿐이었다.
*
지민은 탄소를 침대 위로 눕히고 나서야,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그녀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주었다. 바늘 같은 것으로 저를 쿡쿡,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민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한 순간에 싸늘한 생각이 저를 스쳐갔다.
'지민은 하필 그 날 제 몸이 좋지 못했던 것을 탓했다. 제 몸만 성했다면, 자신이 탄소를 구했을텐데.'
제 생각의 순서가 틀렸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애초에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탄소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민은 저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호석이 이뤄낸 것이 싫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빼앗아 간 기분이었기에. 그랬기에. 자신이 구했어야 했었다고, 생각했다. 가끔식 지민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들과 다른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그들이 이상한 거였다. 저와 다른 삶을 살았기에. 지민은 다 갖춘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그런 아이일 뿐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깊숙히 느껴본 적 없는.
**
[현재 / 지민]
지민은 제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가 불안했다. 제 앞에서 서류를 읽는 그녀의 아버지, 두드림의 회장은 안절부절 못하는 지민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러냐.' 그러자 지민은 '탄소ㄱ, 아니. 아가씨가 연락이 안 돼서요.' 하고 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곧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거라. 알아서 잘 할 아이니.' 지민은 '알겠습니다.' 하고 짧게 답했다.
"그래서 이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건 뭐라고?"
"제품 제조 중지와 대중매체를 통한 공개사과. 그리고 치료비 전액 지원입니다."
"총 몇 명이라고 했지."
"현재 정식으로 들어 온 접수는 약 800여명 가까이 됩니다."
지민은 제가 들고 있던 명단을 건네며 답했다. 800명 가까이 된다고. 사실, 그마저도 수치상에 불과한 숫자였다. 피해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 사람들에게만 각별했다. 제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다 괜찮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가혹했다.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
그녀의 아버지 회사 제품 중, 식기 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식기를 닦는만큼, 조금의 문제도 없어야 할 제품이었다. 하지만 그 제품은 온갖 불법 약품으로 제조 되었고,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필수적인 법 절차도 밟지 않았다. 대기업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대중들은 세제를 사들였고, 세제는 유명 연예인의 광고로 버젓이 판매 1위를 유지해 나갔다. 지난 4년동안 계속해서. 그런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톱니바퀴들 중 부품 하나가 삐걱대기 시작했다. 물론 삐걱대는 부품은 세제를 사용했던 사람들이었고.
사람들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히 검붉은 반점이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천적인 천식을 앓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심지어 면연력이 약한 노인과 어린아이들 중, 이 때문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열 개 남짓이었다. 사람들의 원성이 커져갔다. 그 동안은 기업의 힘으로 언론과 사람들의 입을 막아왔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최근 벌어진 미래건설 외아들, 그의 의문의 죽음도 이 일에 한 몫했다. 시멘트를 닦는 데에 사용되는 용액을 원가에 1/10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두드림에 납품해오던 그가 죽었다. 그것도 두드림 연회장의 옥상에서, 여전히 오리무중한 범인에게. 타살로.
언론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데에 분명 비리가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힘이라도 실어주는 듯, 실제로 그의 추잡한 비리들이 수중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생전 그가 운영했던 룸쌀롱과 성매매 업무에 관련된 문서가 압수 되었고, 마약거래처가 털려나갔다. 심지어 불법 장기매매 증거까지 포착되었다. 장기매매는 그의 최측근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검사측이 털었다. 죽었어도 여전히, 미래건설의 외아들인 사람을.
말이 안됐다. 분명 배후가 있을 것이었다. 지민과 그녀의 아버지 쪽 사람들은 그 배후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지나치게 깔끔했다. 먼지 하나 없는 대리석처럼, 지나치게. 덕분에 저들의 얼굴이 그 바닥 위로 비춰질 정도로. 그만큼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민은 어긋난 틈 하나 없는 그 계략 속에 놀아나지 않았다. 불현듯, 제 머리를 스쳐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기에.
끈질긴 악연이었다.
정호석은.
*
지민의 아버지는 지민을 비밀스레 불렀다. 오랜만에 제 아버지와 독대하게 된 지민은 잔뜩 긴장했다. 지민의 아버지는 지민이 자리에 앉으려는 그 순간에 말했다.
"앉을 필요없다."
"..."
"긴 말 안한다."
"..."
"두드림에서 나와라. 피해자들 정보 담긴 USB 가지고. 두드림한테 약점이 될만한 자료들은 싹 다 챙겨서 나와."
지민은 두서없는 제 아버지의 말에, 되물었다. '...갑자기 왜ㄱ.'
"이번 주 내로 언론에서 그 기사가 흐를거다. 나는 그 전에 먼저 터트릴거고. 청렴해 보이는 대기업을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밝힐거다, 그래야 다음 대선에서 내 입지가 탄탄해질테니."
기사가 터진다는 말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럼 그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녀였다. 제 부모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하는 그녀이고, 이 일에 관련된 모든 걸 모르고 있는 상태인데. 모든 상황이, 성급했다. 그녀는 이 모든 걸 버틸만큼 강하지 못하다. 지민은 그녀의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간신히 밀어내고, 답했다.
"...저 그래도 아버지께서 조금만 힘을 ㅆ"
"언젠가 터질 일이었어. 혹여나 머저리 같은 죄책감은 가지지도 말고, 나오거라."
"..."
" 네가 몸 담았던 그 곳에서, 네 모든 걸 챙겨서."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과거 이야기를 푸느라 마음이 급한 제가! 또 분량 조절에 실패...
2화에 나눠서 올릴게요! 과거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어요!
여러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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