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찬열의 표정이 너무 묘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그저 왜 찬열이가 여기 있는걸까.조용히,가만히 머리를 굴리며 되뇌이고 곱씹었다.찬열이 왜 여기에.왜 우리 집 앞에 찬열이.그렇게 몇분 간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텅 빈 머리는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아 그저 찬열의 얼굴을 마주하며 살필 뿐이었다.
"..미안해"
찬열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뭐가..?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대답할 뻔 했다.나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아,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날…찾아온거구나.다시 찬열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은 더 오묘하게 변해갔다.다 봤니?굳이 말하지 않고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스윽 닦았다.
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거야,당사자는 난데.나는 처음 보는 찬열의 표정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
"....."
"..동정안해줘도 괜찮아"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멍하니 그와 얼굴을 마주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정말,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어린 시절부터 감춰왔던 나의 비밀을 누군가 알아버렸다.하지만 왜일까,지금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인가….그저 찬열의 얼굴이 정말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그래서 왠지..별로 불편하지 않았다.나는 차마 웃음지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 뜻이 담기지 않은 무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연지한텐 말하지 말아줘"
"..응 당연하지"
"너만 알고 있는거야,정말 너만.."
나는 말을 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벅찬 감정에 숨을 꾹 참았다.아,눈에서 반응이 오는 것 같았다.지금 울면..진짜 개쪽인데.쪽팔리게.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바닥에 시선을 내리꽂고 최대한 찬열에게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
"..울지마"
찬열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아,민망하다.눈치도 빠르지….왜 지금 청승맞게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다.찬열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인가,아니면 그냥 서러웠던 게 복받쳤나.어쩌면 둘 다인 것 같았다.우리 정말 뜬금없다.너도,나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날 폭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드니 역시 찬열이었다.당황스러워 움찔하자 더 꽉 껴안는 것이 꽤 포근하고 따뜻해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그렇게 날 꽉 껴안은 찬열이 내 등을 느리게 두드려주었다.으..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나,이렇게 위로도 받아보는구나 싶어서 어쩐지 가슴이 마구 벅차올랐다.아까 전 일들이 잠시나마 잊혀질 만큼 찬열은 부드럽게 날 위로해주고 있었다.
"미안,미안.."
찬열은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난,내가 찬열을 집 앞에서 마주했을 때 지금 이것이 화를 내야할 상황인가-하고 고민했었다.그의 표정이 단순히 날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을 들킨 것에 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나는 찬열에게 안긴 채 생각했다.진작,말할 걸 그랬나….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찬열의 위로가,생각과는 다르게 너무 좋았던 탓이다.
"백현아,"
찬열이 내 눈을 맞추며 낮게 말했다.잠시 따뜻했던 온기가 사라졌다.조금 추웠지만,나름 괜찮았다.나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힘들면..말해도 돼 나한텐"
찬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의 표정이 믿을 수 있을 만큼 확실해서이기도 했고,또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는 것이 놀라워서이기도 했다.그는 내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불안한 기색을 띄며 덧붙였다.
"..동정 아냐,알지?"
찬열의 얼굴에 걱정.이라고 써져있는 것 같았다.처음 느끼는 기분에 지금 상황이 무색하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아무도 없어 너무도 적막하고 외롭고 또 무서웠던 나의 공간에 누군가 문을 똑똑-두드리고 등불을 들고 찾아와준 느낌이었다.내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이 찬열이라 다행이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연지한테,절대 말 안할게.미안,네 말을 들었어야 하는건데."
찬열은 내 무응답을 부정의 의미로 생각한 건지 다시 한 번 사과를 표했다.그런게 아닌데.나는 차오르는 눈물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찬열의 숨이 내 볼께로 닿았다.찬열이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만 갈게"
그의 말에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돼…?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의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리고,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한 두 발자국 걷다 멈칫하더니,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 아쉬워졌다.슬쩍,여전히 불이 켜진 집을 올려다보았다.싫다,들어가기 싫어….나는 찬열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쪼그려앉아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금세 냉한 느낌이었다.
한 번만 더,안아줬으면 좋겠다….찬열이 주었던 따뜻한 온기와 걱정 어린 위로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워졌다.
-
백현은 아침부터 점심을 먹기 전까지 풀타임으로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잠을 청했다.어제 새벽까지 밖에서 쪼그려앉아있다 모두 잠든 후에야 집으로 들어가 얼마 못잔 탓이었다.아침에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필통을 꺼내고 자리에 착석한 백현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기절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찬열은 그런 백현을 몇 번이고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몇 번의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에 잘 손도 대지 않던 손톱을 잘근잘근 뜯어대는 것이 여간 불안했다.
"아.."
찬열은 어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고는 백현의 동그란 뒷통수를 턱을 괸 채 바라보고만 있는 찬열이다.백현이 큰 소리를 낸 후 연지를 찾아간 것이 화근이었다.백현의 집에 대해 묻던 찰나,나도 백현이 집은 안가봤는데?란 연지의 말에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오랜 친구였던 연지도 가본 적 없는 백현의 집이라,찬열의 입장에선 궁금해미쳐버릴 것 같았다.결국 연지에게 백현의 집 위치를 알아내어 하교시간에 맞춰 따라 가본 것이었는데 하필.찬열은 그때 백현의 우는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찬열은 백현이 연지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알아차렸다.그의 가족사를 숨긴 것은 그의 자존심이었다는 것을.백현의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터라 얼떨결에 토닥거려주긴 했지만 영 마음이 불편한 찬열이었다.게다가 힘들면 자신에게 말해도 된다고 했을 때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백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또 내버렸다는 생각에 내뱉은 말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어젯 밤 자신에게 짜증이 난 찬열은 교과서를 구깃구깃 접었다.
찬열의 교복 주머니 속 울리는 진동에 또 뭐야-하고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집어든 찬열은 발신자에 한 번 흠칫-했다.
'어제 백현이 집 따라가봤어?어때?'
연지였다.순간 확 열이 오른 찬열은 속으로 생각했다.다 너때문이잖아!애꿎은 연지에게 화가 난 찬열이었다.
'몰라'
자판을 세게도 꾹꾹 눌러대며 무심한 답장을 보내고 홀드키를 눌렀다.
"으음..."
백현의 잠꼬대에 찬열이 또 한 번 흠칫했다.지금,밥 먹어야 하는데 깨워 말아.찬열은 고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찬열은 문득 어젯 밤 백현의 집에서 생생하게 들리던 고함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떠올랐다.밖에서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집 안에서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누군가에게 쫓기듯 뛰쳐나온 백현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입술 사이로 떨어지는 피에 두 번 놀란 그였다.찬열은 바지주머니에서 연고 하나를 꺼냈다.문 닫기 직전인 약국에서 백현이 생각나 사온 것이었다.찬열은 잠시 고민하다가,백현의 옆에 연고를 조심스레 놓아두었다.
"....어,점심시간이야?"
백현의 뒷머리를 정리해주고 일어서려던 찰나에 백현의 부스스한 음성에 화들짝 놀란 찬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백현이 시계를 보더니 안깨워주고 뭐했냐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띄웠다.그러다가 제 책상에 놓은 연고를 보고 잠시 어,하고 말을 줄이더니 찬열의 눈 앞에 가져다대며 니가 산거야?하고 묻는다.
"..아,어제 입술 다친 것 같아서 샀어."
"아.."
찬열은 백현의 얼굴을 살피며 혹시 제가 또 괜한 오지랖을 발동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원래 이런 사소한 거 신경 쓰는 스타일 아닌데….백현때문에 어느새 성격도 변해버린 찬열이었다.백현은 찬열이 사온 연고를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찬열의 눈을 보았다가,연고를 보았다가 저 뒷편을 보았다가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했다.
"..고마워"
"..."
"너한테..진작 말할 걸 그랬어.어제도 고마웠어"
위로해줘서….백현의 말에 찬열은 벙쪄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백현이 이내 찬열을 향해 작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해보였다.당황하던 찬열의 얼굴은 금세 요란하게 변하더니 어느새 백현과 같은 미소를 띈 채 웃어보였다.걱정이 안도로 바뀐 찬열이었다.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백현의 말에 자신이 더 고마운 찬열이었다.반 안은 백현과 찬열을 제외하곤 모두 밥을 먹으러 급식실로 가서 텅 비어있었다.우리도 밥 먹으러 갈까?찬열의 말에 백현이 끄덕였다.아까전까지만해도 가득했던 불안감과 걱정이 무색하게 밝아진 얼굴로 백현에게 말을 건네는 찬열이었다.
*
"잘 가-"
찬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찬열은 집 방향이 정반대라 항상 교문 앞에서 헤어졌었다.생각해보니 학교에서도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우리 집에서부터 정반대로 걸어갔을 찬열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찬열도 싱글벙글 웃으며 손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서 가는 것을 보니 어제 일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정말 다행이다.혹시라도 동정할 것이 두려웠던 나였다.
항상 웃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왔던 찬열이라 더 걱정되었었다.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것과는 정반대인 찬열이,혹시 이런 저를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생각이라도 할까 싶어 겁이 났는데 아니었다.나는 연고를 바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살풋 웃음지었다.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찬열같은 친구를 사귄 것이 제일 큰 복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뭐해-가자"
연지가 나를 툭툭 쳤다.아,응.나는 뒤돌아서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찬열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렇게 말했다.오랜만에 셋 다 야자를 해서 교문까지만이나마 같이 하교한 것이 꽤나 좋았다.나는 야자동안에 찬열이 노래를 추천해준다며 들려준 한 쪽 이어폰을 꼽고 들은 노래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연지야"
"어?"
"노래 추천해줄까?"
"무슨 노래?"
라나 델 레이의 without you.내 말에 연지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아,나 그 노래 알아."
"아..그래?찬열이가 추천해준건데."
"그 노래 좋지?난 라나 델 레이 좋아해서 왠만한 노랜 다 알아"
그래..?연지가 외국가수도 좋아했었구나.처음 안 사실이었다.나는 노랫말들을 되새기며 기분 좋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을 내딛었다.
I can be your china doll
난 네 인형이 되어줄 수 있어
If you want to see me fall
만약 내가 떨어지는 걸 네가 보고 싶다면
Boy you're so dope
넌 정말 멋진걸
your love is deadly
네 사랑은 치명적이야
Tell me life is beautiful
삶은 아름답다고 말해줘
They I'll think I have it all
그들은 내가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하는 걸
I've nothing without you
난 너없인 아무것도 아니었어
All my dreams and all the lights mean
내 모든 꿈들과 빛들이 말해
Nothing without you
너 없인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흔한 사랑노래일 뿐이지만 그 음색과 멜로디가 좋아 계속 생각이 났다.난 또 노래 하나가 생각이 나 연지에게 말했다.
"young and beautiful도 들어봤어?찬열이가 추천은 해줬는데 못들어봤거든."
"응,그것도 라나 델 레이 노래잖아.나중에 들어봐."
찬열이나 연지나 나는 처음 들어보는 가수이건만 노래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모르겠다.young and beautiful도 라나 델 레이 노래였구나.찬열이도 이 가수를 좋아하는건가.나는 걷다가 문득 연지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음,오늘은 기분이 별론가.통 밝지 않은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됐다.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빠른 걸음으로 걷기에 따라가느라 또 고생이었다.
"오늘 뭐 기분 안좋은 일 있었어?"
내가 너무 뒤늦게 눈치를 챈 것인가 싶어 걱정됐다.내 걱정 어린 말에 연지가 멈칫하더니 이내 오늘 몸이 좀 안좋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어색하게 웃는데 안색도 별로라 정말 그런 것 같았다.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많이 안좋은 건 아니라며 정정하는 모습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땅을 보며 걸음만 재촉하는 모습이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쉬고 싶나 보다-하는 생각에 이해가 가 별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잘 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다 보니 평소보다 일찍 갈라지는 것 같았다.조금 아쉽지만 인사를 건네고 웃으며 돌아섰다.분명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건만 오늘따라 기분이 붕 뜨는 것이 좋았다.나는 without you의 가사가 퍽 마음에 들어 계속해서 그 가사를 반복해 읊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Tell me life is beautiful
삶은 아름답다고 말해줘
They I'll think I have it all
그들은 내가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하는 걸
I've nothing without you
난 너없인 아무것도 아니었어
All my dreams and all the lights mean
내 모든 꿈들과 빛들이 말해
Nothing without you
너 없인 아무것도 아니라고..
-
별 의미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찬열이에게 마음을 풀어주는 계기를 만든 3화..겨우 다 썼네요ㅠ 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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