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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찬열이 너는,그럼 여자친구 사귀어봤어?


아침 일찍이라 열어놓은 교실창문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한참 찬열이 중학교시절 자신의 인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을 때 내가 호기심에 뱉은 말이었다.내 말에 찬열은 잠시 말을 멈추고 굳는 듯 하더니 이내 씩 웃음짓는다.

 

"아,당연하지."
"그래?당연한거야?"

 


하긴 당연할수도 있겠다,나한텐 아니지만.그런데 난 한번도 고등학교 올라와서 찬열이가 여자친구 사귀는 건 못봤는데…?분반이라서 그런가.나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또 자세히 생각해보니 찬열은 저번 빼빼로데이에 손수 만든 빼빼로도 받았었다.난 찬열이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지만,찬열은 상당한 인기남(?)이긴 한 것 같았다.하긴 안그런 게 더 이상하겠다,잘생기고 키도 크고..무엇보다 성격도 좋네.

 


"아,저번에 빼빼로 준 애는?"
"..빼빼로 준 애 왜?"
"뭐라고 해줬어?"
"고맙다고 받고..나중에 묻길래 잘 먹었다고 해줬지-"
"너 나한테 줬잖아!"
"니가 한 입 줬잖아"
"아..끝이야?"
"뭐가 더 있어야 돼?"
"고백아니야 그거?"

 


찬열이 잠시 음..하고 고민하는 듯 하더니 몰라.하고 별 상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같으면 고마워서 하루종일 행복했을 거 같은데 찬열은 아닌가보다.새삼 부럽기도 해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찬열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자연스럽게 턱을 괴고 나와 눈을 맞춘다.

 

"넌?"
"..어?"
"너는 사귀어봤어?"

 


찬열의 말에 나는 자못 당황했다.역으로 되물을 줄이야.찬열의 표정이 네가 사귀어는 봤겠어?하고 있어보이는 건 분명한 내 착각이겠지..?왠지 이유 모를 열등감이 부풀어서,찬열의 그 오묘한 표정에 되려 당당해졌다.

 

"응."


찬열이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진짜?하고 되물어온다.사실,거짓말이지만..찬열이랑 너무 비교가 돼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찬열이 여자친구 사귀어봤냐는 말에 당연하지-라고 대답하는 바람에,이때까지 여자친구 한 번 못사귀어본 게 더 이상한건가 싶기도 해서 불쑥 나온 대답이었다.찬열이 정말 사귀어봤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아 괜히 얄궂었다.

 

 


"진짜야?"
"딱 한번이었어."

 


찬열이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영 못미더운 표정이다.왜 저렇게 못믿는 표정이지,내가 사귀어봤다는 게 어색한가….소심한 생각이 들어 입술을 삐죽거렸다.나는 아무 말없는 찬열에 그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뒷자리의 도경수와 눈이 딱 마주쳐 화들짝 놀랐다.아,뭐야….찬열만큼이나 커다란 눈이 날 빠안히도 보고 있었다.왜 날 뚫어져라 보지,괜히 아무것도 못 본척 다시 시선을 자연스레 돌렸다.

 


"아,나 잠시만 나갔다올게.혹시 쌤 오면 화장실 갔다고 해"
"어?어디 가는데?"
"화장실."

 


뭐야.내가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고 하자 찬열도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휘적휘적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럼 난 그때까지 뭘 하나 금세 책상 위에 축 널어져있는데 또 무언의 시선이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싶어 필통 안의 볼펜을 꺼내 할 일 없이 딸깍거리고 있는 차에,무언가 손가락같은 것이 내 등을 콕콕 찔러왔다.

 

 

 


"야."


도경수의 목소리였다.나는 순간 당황해서 가만히 있다가 어?!하고 조금 큰 소리를 내버렸다.도경수 특유의 웃음소리가 꼭 비웃음처럼 느껴졌다.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애써 왜?하고 그의 말에 물어주었다.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뭐가?"
"너랑 박찬열이 같이 다니는거 말야"

 


..시비야?나는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왜 도경수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거지.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도 궁금하긴 했다.찬열이 왜 나와 같이 다니고 친하게 지낼까.단순히 짝이여서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음,정말 왜일까.왜..나는 고민에 빠져있다 문득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건지 몰라 그냥 접어버렸다.

 

 


"그거 알아?"
"..?"

 

 


박찬열,원래 그런 놈 아닌거.주위를 의식한 듯 내 귀에 대고 작게 말하는 도경수였다.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멍하니 있다가 그를 홱 쳐다봤다.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지금 나한테 찬열이 뒷담을 하는 건가.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그건 그렇다 치고 찬열이가 원래 그런 놈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나는 경수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음..더는 안알려줄랜다"
"자꾸 무슨 말이야?"
"아무리 반년 좀 넘었다지만 3년동안 중학교생활 같이 한 입장에서 신기해서 한 번 말할 수도 있지,뭐."
"무슨 소리냐고..?"
"박찬열한텐 내가 이런 말한 거 말하지 마,왠지 넌 안말할 것 같애"

 


자기 말만 하는 경수에 짜증이 점점 밀려오는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자 순간 내 표정을 본 그가 눈을 부릅 뜨더니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댄다.아,얘 눈 크게 뜨는 거 되게 무섭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대답않자 더욱 눈을 부릅 크게 뜨고 검지손가락을 꾸욱 누르는 그때문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음,도무지 경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나는 다시 볼펜을 딸깍이며 교과서여백에 의미없는 것들을 끄적거렸다.

 

 

-


"연지?오늘 조퇴했는데."

 


반 여자아이의 말이었다.연지가 조퇴를 했다고?나는 전혀 예상치못한 상황이라 당황했지만 이내 연지의 반 친구에게 알겠다는 말을 전했다.나한테 말도 안해주다니…조금 섭섭했지만,어제 일을 떠올려보니 어제부터 연지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긴 했다.서운한 감정이 돌았지만 별 수 없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오늘은 찬열이도 별 말이 없거나 밖엘 나가거나,또는 엎드려있어서 심심했었는데..난 문득 언제부터 나에게 심심하다란 감정이 들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참,많이도 변한 것 같다.고등학교에 올라오고서부터 말이다.예전엔 그저 쉬는 시간에 조용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만 하면 행복했었지.아 맞다,이런 생각 그만 하기로 했는데.나는 혼자 아차,하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중앙현관을 나서며 쌀쌀한 밤공기를 맞았다.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검은색에 민트색 라인 가방을 맨 이는 도경수같아보였다.그 동그란 뒷통수를 보고 있자니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뭐라고 했더라,잘 기억은 안나는데….뛰어가서 물어볼까-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만한 용기조차 없는 성격이라 금방 포기하기로 했다.한 걸음 두 걸음 터벅터벅 내딛는데 오랜만에 혼자 하는 하교라 그런지 교문까지도 멀게 느껴졌다.

 

 

"..연지한테 문자해볼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조퇴까지 한 것을 보아하니 몸상태가 어제 이후로도 좋아지지 않은 것 같다.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언제 이런 것까지 망설일 만한 사이였나 싶어서 과감하게 문자를 두 세 글자 써나가다가도 금세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하고 소심하게 고민하며 조금 느린 걸음으로 집방향으로 걸어갔다.연지야 오늘 조퇴했다며 밥은 먹었어?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오늘 조퇴했다고 하더라 몸은 괜찮아?당연히 안괜찮으니 조퇴를 했겠지!나는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나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연..지야 오늘..조퇴했다고 하더라 내일은..몸..괜찮아졌음..좋겠다 내일..봐"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그렇게 썼다.보낼까 말까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전송버튼을 꾹 눌렀다.오늘은 야자하는 애들이 별로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그러고 보니 언제 찬열이 왜 그렇게 야자를 매일 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뭐라고 둘러댔더라….다 사실은 집 들어가기 싫은 핑계였지만.찬열은 언젠가 그렇게 묻고는 얼마 안가 자신도 곧잘 야자를 하곤 했다.다니던 학원을 끊었대나 뭐래나….

 


그래서 그 이후론 일주일에 야자를 3번 빠지던 찬열이 하루를 제외하고는 야자를 몽땅 하는 바람에 왠지 야자시간에 공부를 하는 것보다 찬열과 대화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곧 시험기간인데,이제 야자시간에 공부도 제대로 해야지..찬열이도 공부 좀 하라고 해야겠다,저번에 성적 많이 떨어졌던데.내 걱정도 모자라 찬열걱정까지 하고 있던 와중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드니 문자 한 통이 온 것이었다.연지겠구나,싶어서 설레는 맘으로 새 메시지를 눌렀다.

 

'응'


...달랑 한 글자.나는 멍하니 있다가 곧 실망스러움에 축 쳐졌다.그래도 고민해서 보낸건데…이렇게 단답으로 보내다니.느리게 걷던 걸음도 멈추고 연지가 보낸 문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응.한 글자라니.뭐라 다시 보내볼까 하다가 문자 보낼 힘도 없는거겠지-하고 애써 자기합리화했다.그래,그런거겠지..하지만 연지가 보낸 그 문자 한 통에 어쩐지 기분이 우울해진 느낌이었다.

 

지잉-

다시 느리게 땅을 보며 걷다가 또 한 번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보니 또 메시지였다.뭐지 싶은 마음에 궁금해 얼른 눌러보았다.

 

 

 

'고마워'

 

 


연지의 문자였다.고마워..?나는 그 문자를 읽고 금세 표정이 풀어져 헤실거렸다.역시 연지가 그럴리가 없지….난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되읽었다.이런 문자 하나에도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역시 내가 연지를 좋아하긴 좋아하나보다.발걸음도 뭔가 산뜻해지는 기분이었다.그렇게 연지와의 문자를 몇 번이고 읽다가,또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아..집에 들어가기 싫은데.어제는 다행히도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물론,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엄마나 나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일차원적인 일이었다.더 이상 아버지에게 조금의 미련조차 없었기에 아무렴 상관은 없었지만,걱정되는 것은 엄마였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 또 금방 우울해져버리는 것 같아 생각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다,괜찮아질거야….한 번도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오늘은 왠지 다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교복 니트에 마이까지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이 싸했다.아,추운 날씨는 정말 너무 싫다.내일부턴 패딩을 입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

 


갑자기 한 길로 들어서자 조금 익숙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느낌이었다.아,그러고 보니 여기.저번에 빼빼로 사러 갔을 때..나는 어두컴컴한 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갈까-하고 망설였다.하지만 뭔가 담배냄새 비슷한 냄새도 나는데..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아,왜 그러는데 미친놈아.말을 해줘야 뭔 말이라도 더 해주지"
"맞아 씨발 오랜만에 좀 보자더니..하는 말이라곤 별"


조금 더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에 콕 박혀들어왔다.사람이 있었다.그것도 이 담배냄새의 주인공인 것 같은 이들이.놀라서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뒷걸음질쳤다.이 길은 앞으로 그냥 오지 말까..이 길이 제일 빠른데.하지만 저런 무리들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멀지만 돌아서 가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몰라 씨발..좆같아"


어?

더,더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나조차도 아직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내 심장은 뭘 아는건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쿵쾅쿵쾅 뛰어댔다.뭐야,뭐.뭐지?분명 내가 아는 낮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였다.그리고 막 이어서 들리는 저 목소리들은 분명 세훈과 타오같았다.그리고 또 점점 강하게 풍겨오는 이 냄새는 분명한 담배냄새였다.

 

 

 

 

 

 

 

"짜져살더니 결국 못참겠드냐?쯧쯧.."
"..지랄이야,"
"아,됐고 박찬열 나 라이터 좀"

 


박찬열.설마설마했지만 내 귀에 박힌 그 이름은 분명 찬열이었고 들리는 저 목소리도 분명한 찬열이었다.내 심장은 더 크게 요동쳤다.내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질 않았다.찬열이 왜 이런 곳에서,저런 애들과,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거지?나는 식은 땀이 흐를 것 같았다.

 

'그거 알아?'

'박찬열,원래 그런 놈 아닌거.'

'박찬열한텐 내가 이런 말한 거 말하지 마'

 


잘 기억도 나지 않던 도경수의 말이 갑자기 머릿속을 확 스쳤다.설마 찬열이가.설마 그럴리가.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무슨 용기인지 나도 모르게 두 발자국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얼굴을 내밀었다.그 사이 비치는 세 개의 인영 중 또렷히 보이는 벽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불량스럽게 손에 주머니를 넣은 이는,분명한 찬열같았다.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나도 모르게 손이 달달 떨렸다.그 익숙하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자 마자 나는 뒷걸음질치다 이내 급하게 뛰었다.찬열이가,찬열이가..

왜 찬열이가..?

 

 

 


한참을 누군가 뒤쫓아오듯 급하게 뛰다가 갑자기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그리고는 다시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아스팔트바닥을 직시하며 그렇게 걸었다.걷고,또 걷고….난 먼 길을 돌아가며 복잡한 실타래같은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하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한번도,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다.그리고 한번도,단 한번도 그런 적도 없었다.찬열이 욕설을 그렇게 자연스레 내뱉는 모습조차 전혀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걷던 발걸음조차 멈춰섰다.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배신감.아니면..그냥 단지 충격?방금전 찬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마치,그같았다.불량스러운 태도,아무렇지 않은 욕짓거리,그리고 그들….말도 안되게 겹쳐보이는 그 모습에 온 몸이 반응하는 것 같았다.

 

 

 

 

 

 

 

'힘들면..말해도 돼 나한텐'

'..동정 아냐,알지?'


그리고 그 때의 찬열의 모습도 함께 겹쳐졌다.

 

 

* *

이번 편은..뭔가 쓰면서 재밌었던 거 같은ㅋㅋㅋㅋ

답글은 안남겨드리지만..덧글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해요ㅠ ㅠ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대표 사진
독자1
어머..자녈이 너어 이런아이였어 백현이 쿠크깨짐ㅜㅜㅜ
12년 전
대표 사진
독자2
찬열이 너 그렇게 안봤는데..!! 근데 백현이한테 안 그러는건 다행이네요..ㅠㅜ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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